신흥우
| 신흥우 (申興雨) | |
| 출생 | 1883년 음력 2월 18일 조선 충청북도 청원 |
|---|---|
| 사망 | 1959년 3월 15일 |
| 국적 | |
| 직업 | 종교인, 정치인 |
| 종교 | 감리교 |
| 배우자 | 이재규 (李梓奎) |
신흥우(申興雨, 일본식 이름: 高霊興雨[1], 1883년 음력 2월 18일 ~ 1959년 3월 15일)는 한국의 개화 운동가이자 감리교 목회자이다. 아호는 금하(錦霞).
목차 |
[편집] 생애
[편집] 생애 초기
충청북도 청원군에서 태어나 한성부에서 자랐다. 관리인 아버지 신면휴에게서 한학을 배우다가 배재학당에 들어가 신학문을 익히면서 개화 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개신교에 입문하고 서재필, 윤치호 등의 개화 청년들이 조직한 협성회에 가담하여 계몽 운동을 벌였다. 신흥우는 소년기에 그의 형 신긍우를 통해 이승만을 소개받게 된다. 그러나 해방 직후 이승만은 그의 정적으로 돌변한다.
[편집] 계몽운동
1901년 관립한성덕어학교에 재학 중, 학생 토론회 개최가 빌미가 되어 정치범으로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이때 그가 이승만과 함께 감옥 안에서 다른 죄수들을 상대로 교육 계몽 운동을 펼치고 영어 공부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
영어 실력이 출중했던 신흥우는 1903년 선교사를 통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유학한 뒤 귀국하여 배재학당 교장을 지냈다.
[편집] 독립운동
귀국 이후 1920년대까지는 흥업구락부, 신간회, 조선기독교청년회전국연합회(YMCA) 등을 중심으로 이상재와 유사한 노선의 민족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그러나, 이 기간 중에도 1919년 거국적인 3·1 운동이 일어나고 기독교계가 적극 참가했을 때 평양에서 신병을 치료하며 가담하지 않은 일 때문에 구설수에 오른 바 있다. 감리교인들과 조선기독교청년회, 배재고등보통학교 학생과 졸업생 등 그의 주변 세력이 대거 이 운동에 참가하는 와중에도 매우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신흥우는 이때의 미심쩍은 행동으로 이듬해 배재고보 교사와 학생들에게 불신임을 받고 교장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친일파로의 변신은 예고되지 않았다. 신흥우는 여전히 해외에서 열리는 행사에 대표로 참여하여 3·1 운동에 대해 알리고 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하면서, 이승만의 외교 중심 항일 운동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1930년대 들어 감리교단 내의 적극신앙단 문제로 윤치호, 양주삼과 대립하는 사건이 있었다.
한편, 윤치호 일기에 1933년 10월 4일자 내용에 따르면 "안창호는 윤치호에게 ‘일본인들은 최근의 적이지만 기호파는 500년간의 적이기에 먼저 기호파를 박멸하고 독립해야 한다’고 했다.[2] 그러자 여운형,신흥우 등도 독립지사들과 함께 윤치호를 찾아가 서북파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기호파 비밀결사를 제안하였다고 한다.[2] 윤치호는 이를 자신의 일기에 기록으로 남겼고, 윤치호는 '안창호와 신흥우,여운형등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지역감정을 놓고, '지역감정 하나로만 봐도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비난했다.[2] 그러나, 안창호는 1932년 5월에 중국 상하이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고 징역 4년형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상태였기 때문에 안창호나 여운형,신흥우등이 윤치호에게 찾아가 그런 제안을 했다는것에 대해서는 앞뒤 정황이 맞지않다.
[편집] 변절과 부일 협력
중일전쟁이후 수양동우회 사건과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을 계기로 변절하여 적극적인 부일 활동을 시작했다.
1930년대 후반 이승만이 영향을 발휘하던 독립운동단체 흥업구락부에서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서대문경찰서에 감금된 윤치영의 진술로 1938년 5월 18일자 서대문경찰서장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흥업구락부의 동지회원의 한사람으로 보고되었다.[3]
태평양 전쟁 중에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친일 인물로서 학도병 지원을 부추기는 강연과 친일 논설 기고 활동을 했다. 황인종의 설움을 딛기 위해 신동아 건설에 매진해야 한다는 등의 강연 내용이 남아 있다. 전쟁협력 단체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과 조선언론보국회에도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가담이었다.
김활란이 미국에서 돌아온 후 1939년 12월 교수와 학부형 등 각 방면의 유지들이 모여 '이화전문학교후원회'를 결성하기로 하고 발기인 총회에서 선출된 창립총회 준비위원으로 유억겸, 신흥우, 송진우 등 3명이 선임되었다.[4] 1939년 12월 18일 정동의 이화여전 강당에서 8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12개조의 후원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4] 신흥우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4]
태평양 전쟁 이후 조선총독부로부터 창씨개명을 권유받자 그는 성명을 변경한다.
[편집] 광복 이후
광복 직후에는 우익 진영에서 활동하다가 1948년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제1공화국의 주일대표부 대사를 잠시 지냈고, 한국전쟁 와중인 195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기도 했다. 이후 반이승만 진영의 한사람으로 활동했다.
[편집] 사후
2002년 공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가 2005년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펴낸 자료집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살아라》에서 선정한 감리교 내 친일 부역자 명단 12명 중에도 평신도 3인 중 한 명으로 포함되었다.[5]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참고자료
-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감리교인물사전 - 신흥우 편
- 전택부 (1971년 12월 15일). 《인간 신흥우》. 서울: 기독교서회
[편집] 주석
- ↑ 백기완, 송건호, 임헌영 (2004년 5월 20일). 《해방전후사의 인식 (1)》. 서울: 한길사. ISBN 89-356-5542-2
- ↑ 가 나 다 <윤치호 일기>, 1933년 10월 4일
- ↑ 우남 이승만 연구 (정병준, 역사비평사, 2005) 365페이지
- ↑ 가 나 다 양현혜, 《빛과 소망의 숨결을 찾아》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7) 104페이지
- ↑ 이승규. “감리회, 교단 내 친일인사와 독립운동가 명단 발표 - 광복 60주년 기념 예배자료집 발간…친일인사 선정 근거 없고, 교단 차원 친일은 빠져”, 《뉴스앤조이》, 2005년 8월 6일 작성. 2008년 1월 4일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