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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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皇帝)는 제국(帝國)의 세습 군주존호이다. 작위 중 지존의 작위이다.

유래[편집]

동양에서 황제의 어원은 ‘삼황오제’ 혹은 ‘황황(煌煌)하다’와 최고 신인 ‘제(帝)’의 합성어에서 비롯된다.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였던 상나라에서는 하늘에 대한 제사조상 숭배가 합쳐져서 선왕에게 제(帝)를 붙이기도 하였다.[1] 이후 주나라의 왕은 천명사상 하에서 하늘의 아들이라는 천자(天子)라 불렸고 춘추 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王)이 난립하였다. 다시 중국을 통일영정(嬴政)은 이들을 초월하는 칭호를 원했고, 황제라는 직함을 새로 만들어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2] 황제의 아들은 왕이나 친왕으로 봉해졌다.

서양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칭호에서 비롯한다. 그의 칭호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에서 ‘임페라토르(Imperator)’는 원래 개선장군이란 뜻이었으나 점차 최고 지배자를 의미했고 영어 ‘엠퍼러(emperor)’의 어원이 되었다. ‘카이사르(Caesar)’는 카이사르 가문의 이름이었으나 점차 임페라토르를 가리키는 보통 명사가 되어 독일어카이저(Kaiser)’와 러시아어차르(царь)’로 변형되었다.[3]

호칭[편집]

동아시아에서 황제나 국왕(國王)의 2인칭 경칭은 폐하(陛下)이다. 이는 “높이 우러러 볼 사람이기에 뜰에서 층계 위로 우러러 뵌다.”라는 뜻이다. 제후(諸侯)의 2인칭 경칭은 전하(殿下)로 “계단 아래 뜰에서 우러러 뵌다.”라는 뜻이다. 즉 군주가 있는 곳이 다를 뿐이고 신하는 언제나 ‘뜰’(뜰층계의 아래)에 자리하게 된다.

중세 한국어에서도 ‘陛下ᄂᆞᆫ 버터ᇰ 아래니 皇帝ᄅᆞᆯ 바ᄅᆞ 몯 ᄉᆞᆯᄫᅡ 버터ᇰ 아래ᄅᆞᆯ ᄉᆞᆲᄂᆞ니라’라 하여[4] 폐하와 전하의 뜻이 버터ᇰ 아래로 같다. 다만 그 품격에서 폐하가 전하보다 높았다.

짐(朕)은 본디 전국 시대에는 일반 1인칭이었으나 시황제가 황제만이 쓸 수 있는 1인칭으로 바꾸었다.

태상황, 태황태후, 황태후 등은 황제를 폐하라 부르지 않는 대신 황상(皇上)이라 불러 황제의 본명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였다.

동아시아[편집]

황제는 여러 제후를 책봉하고 연호(年號)를 정했으며 제후국은 조공을 바치고 연호를 받아 썼다. 그래서 전통적으로는 이를 수직관계와 종속성으로 인식하려고 했다.[5] 그러나 실제 외국 간의 조공책봉은 어느 정도 국력의 차이를 반영하여 형식상 차등적 관계를 설정하기는 하지만, 내정간섭은 없는 상호 인정과 후왕박래(厚往薄來)[6]의 외교 행위로서 당시의 자주적 국제 질서였다.[7]

중국[편집]

중국의 신분
Emperor receiving the diplomatic corps.jpg
천자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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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황제가 황제의 칭호와 각종 용어를 정립한 이래 중국의 여러 왕조는 자국의 최고 군주(君主)를 황제라 하였다. 이는 중국인(한족)이 건국한 왕조뿐만 아니라 몽골만주에서 생활하던 여러 기마민족(騎馬民族)이 세운 요나라·금나라·원나라·청나라 등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기존에 (Khan) 등의 고유한 칭호를 사용하였지만, 중국을 넘볼 정도로 강력해지면 여지없이 칭제건원하여 중국식 황제의 칭호를 채용하였다. 그러다가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폐지하였다. 1934년 만주국에서 잠시 부활하기도 하였으나 1945년 만주국이 해산을 선언하면서 완전히 없어졌다. 당나라고종은 황제 칭호 대신에 ‘천황(天皇)’이라는 칭호를 쓰기도 하였다.[8]

한국[편집]

한국은 역사 이래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아 보통 (王)의 칭호를 썼다. 대한제국을 제외하고는 황제를 공식적으로 칭한 적은 없고 황제국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종종 차용하였다. 임의적으로 황제라 불리기도 하였다.

고구려신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한 때가 있고 김춘추에게 태종(太宗)이라는 묘호(廟號)를 올리기도 하였다. 발해는 각종 기록에서 독자 연호의 사용과 황상, 황후(皇后) 등의 용어가 나타나지만 묘호를 올리지 않고 왕이라 칭하였다.[9]

고려는 묘호를 올렸고, 태조광종 때 약 20년 동안 독자 연호를 사용한 적도 있다.[10] 수도 개경을 황도(皇都)라 부르고[11] 원구단에서 하늘에 제사 지냈으며[12] 황제라 불린 기록들도 있다.[13] 이렇듯 고려는 외부로는 중국에 칭신하고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체제를 지향했다.[14] 다만 공식 직함은 내부적으로도 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5] 황제보다는 왕[16], 왕태후, 왕후, 왕태자라는 말을 절대적으로 더 많이 썼고[17] 시호도 대왕(大王)으로 올렸다. 광종조차 독자연호를 쓴 시기는 약 7년 뿐으로 후주송나라의 연호를 받아들였으며[18] 스스로도 왕이라고 일컬었다.[19]

원나라부마국이 된 충렬왕 이후로는 관제와 왕실의 호칭을 모두 제후국의 규격에 맞추었고 조선 시대에도 이를 계승하였다. 그러면서도 조종(祖宗)의 묘호를 회복하고 국왕과 왕비의 사후 대왕과 (后)의 존호(尊號)를 올렸다. 1894년 청나라의 연호를 폐지하고, 임금을 대군주폐하(大君主陛下)로 격상해 불렀다.[20] 1897년 고종광무(光武)로 연호를 바꾸고 원구단에서 한국 최초의 황제에 올라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정작 내실이 부족하여 열강의 내정간섭은 심화됐고, 결국 1910년 일본 제국과의 한일 합병으로 황실은 이왕가로 격하되었다.

일본[편집]

일본야마토 시대부터 대왕(大王)의 칭호를 사용했고 대략 7세기천황(天皇, 덴노)으로 개칭하였다.[21] 무로마치 시대에는 쇼군일본 국왕으로 책봉받기도 하였다.[22] 메이지 유신 이후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면서 막부가 폐지되고 천황 중심의 근대적 내각제를 채택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후로도 천황제는 존속하였고, 21세기 현재 제호(帝號)를 유지하고 국제적으로 'Emperor'가 통용 표기되는 유일한 나라이다.

베트남[편집]

베트남은 대외적으로는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아 ‘’의 칭호를 썼지만 대내적으로는 ‘황제’를 칭하고 독자적인 묘호연호를 사용하였다. 최후의 왕조응우옌 왕조19세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편입되어 식민지가 되었어도 명목만은 유지하다가 1945년 완전히 막을 내렸다.

유럽[편집]

서구에서 황제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사용한 칭호에서 유래한 이래 기본적으로 로마 제국의 최고 지배자를 일컫는다. 아무리 강대한 나라라도 로마 제국의 전통을 물려받지 못하면 사용할 수 없었고, 아울러 교회의 승인도 필요했다.

고대 ~ 중세[편집]

로마 제국이 동서로 갈라지면서 황제도 2명이 되었다. 이 중 서로마 제국5세기 중후반에 멸망하면서 그 제위(帝位)가 비어 있다가, 프랑크 왕국샤를마뉴800년 12월에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관을 받았다. 이후 오토 1세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졌고 16세기부터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세습했다.

동쪽의 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헤라클리우스황제 때부터 라틴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대신 그리스어 '바실레우스(Βασιλεύς)'를 칭호로 사용하였다. 15세기 러시아통일이반 3세는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자 그 정통성의 계승과 동방 정교회의 수호를 주장하며 스스로 차르(Tsar)에 올랐다. 명분은 비잔티움 제국 마지막 황제의 조카딸과의 혼인모스크바로 동방 정교회의 중심지가 이동한 점이었다. 1721년 표트르 1세는 아예 러시아 제국을 선포하고 임페라토르(Imperator)를 칭하였다. 한편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오스만 제국술탄 메흐메트 2세는 자신이야말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보호자이자 제3의 로마의 황제라고 주장하였으나 교회의 인정을 받지는 못하였다.

이외에도 비잔티움 제국 및 교황의 인정을 받아 공식적으로 황제(차르)가 된 제 1차 불가리아 제국이 있다. 비잔티움 제국이 약화된 틈을 타서 황제로 인정되긴 하였으나 이후 약화되면서 100여 년 만에 멸망하였다.

근대 ~ 현대[편집]

1804년 프랑스나폴레옹은 샤를마뉴로부터 위그 카페, 그리고 자신으로 그 정통이 이어진다며 프랑스 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였다. 이는 유럽의 군주들에게 오만하다며 공분과 비난을 샀는데, 로마의 정통성은 커녕 그의 가문 역시 왕가가 아닌 하급귀족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출처 필요] 이전까지만 해도 스페인카스티야 왕국이나 발칸 반도세르비아 제국에서 황제를 자칭한 적은 있었으나 공인 받은 것은 아니었다. 1801년 영국조지 3세아일랜드 왕국을 합병했을 때 황제 칭호를 거절하였다. 반면에 나폴레옹에게 자극받은 오스트리아 대공국대공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프란츠 2세오스트리아 제국을 수립하여 전무후무한 두 개의 황제를 겸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은 1806년 나폴레옹에게 해산당했지만 각지에서 황제가 난립하면서 황제 즉위의 원칙은 깨지고 그 가치도 떨어졌다. 독일19세기 중후반 여러 대외전쟁에서 승리하여 통일된 후 호엔촐레른 왕가빌헬름 1세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후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제위에 올라 독일 제국을 선포하였다. 20세기 초 유럽에서 제호를 쓰는 나라는 러시아, 오스트리아, 독일, 터키의 4국이었는데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 모두 폐지되었다.

서남아시아[편집]

페르시아[편집]

기원전 550년 키루스 2세 이래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는 전통적으로 파디샤(Padishah) 혹은 샤한샤(Shahanshah)라 하였다. 이는 고대 페르시아어 흐샤야티야 흐샤아티야남, 즉 '왕 중의 왕'이 축약된 형태이다. 사파비 왕조카자르 왕조에서는 페르시아의 황제가 이슬람교 시아파의 우두머리를 겸했기 때문에, 질룰라(Zill'ul'lah)라는 호칭이 황제의 휘(諱) 앞에 붙기도 하였다. 황후는 샤흐바누(Shahbanu)라 불렀는데 사파비 왕조 이후에는 마흐돌리야라고 부르기도 했다. 친왕은 샤흐자드(Shahzade)라고 불리고 미르자(Mirza)라는 존칭이 붙었다. 내친왕은 샤흐자데(Shahzadeh)라고 불렸으며 베곰(Begom)이라는 존칭이 붙었다. 20세기 팔라비 왕조까지 이어졌으나 1979년 이란 혁명으로 폐지되었다.

터키[편집]

오스만 제국에서는 유럽식의 카이사르와 함께 파디샤, 술타네스 셀라틴(Sultanes Selatin, 술탄 중의 술탄) 등을 사용하였다. 술탄은 여타 군주의 칭호로 오스만 제국과 무굴 제국, 페르시아 제국 등지에서는 친왕(Grand Duke)으로 쓰였다.

인도[편집]

무굴 제국의 황제도 파디샤라고 하였다. 영국은 무굴 제국을 멸망시키고 1877년 인도 제국으로 계승시켜서 영국의 국왕이 그 황제를 겸하기도 하였다.

아프리카[편집]

솔로몬으로부터 이어지는 세계 최장수 왕조라 주장하는 에티오피아솔로몬 왕조3세기에 재위한 엘라 아메다 1세부터 네구사 네게스트(Negusa Nagast, 왕중의 왕)라는 황제 칭호를 사용하였다. 상징은 예수를 나타내는 왕관을 쓴 사자로 '유다의 사자' 라고 불린다. 1974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하일레 셀라시에 1세는 최후의 황제가 되었다.

아메리카[편집]

잉카 제국아즈텍 제국이 있었으나 모두 스페인콘키스타도르에게 정복당하였다.

멕시코는 매우 짧은 2번의 제정이 있었다. 제1제정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1822년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가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가 1823년 공화정으로 전환되었다. 1864년 프랑스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를 보호국으로 삼을 목적에서 막시밀리안 1세를 내세워 제2제정을 열었으나 1867년 베니토 후아레스에 의해 공화정이 부활하였다.

포르투갈식민지였던 브라질나폴레옹 전쟁으로 브라간사 왕가가 피난오면서 그 지위가 격상되었다. 결국 왕실이 본국으로 돌아간 후 1822년 독립하여 남아있던 페드루 1세를 황제에 올려 브라질 제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다가 1889년 공화정으로 전환되었다.

각주[편집]

  1. 貝塚茂樹·伊藤道治, 《中国の歴史》1권 〈原始から春秋戦国〉. 講談社, 1974
  2. 사기》6권 진시황본기 시황 26년
  3. Stephen Howe, 《Empire: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4. 월인석보》 2권 65장
  5. 이마니시 류(今西龍), 〈朝鮮半島の年號 附 事大主義一斑〉(1910), 《高麗及李朝史研究》, 国書刊行会, 1974에 재수록. 신채호,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조선사연구초》, 1929
  6. 가져오는 것[조공]은 가볍게 하고 보내는 것[회사]은 후하게 함. 제후국이 ‘(禮)’를 갖추면 황제국도 예를 갖추어 더한 을 베풀어야 함. 《예기》31편 〈중용
  7. 이용희 저 노재봉 편, 《한국민족주의》, 서문당, 1977. 권선홍, 〈유교문명권의 국제관계 : 책봉제도를 중심으로〉, 《한국정치외교사논총》vol.31 no.2, 한국정치외교사학회, 2010
  8. 上元元年 ~(중략)~ 八月壬辰,皇帝稱天皇,皇后稱天后。(상원 원년 팔월 임진일(역주:율리우스력 674년 9월 20일), 황제가 천황이라 칭하고 황후를 천후라 칭했다.) 《신당서》(新唐書) 〈본기 제3 고종
  9. 정혜공주묘지, 정효공주묘비. 송기호, 〈용해구역 고분 발굴에서 드러난 발해국의 성격〉, 《고구려발해연구》, 고구려발해학회, 2010
  10. 고려사》1권 세가 제1 태조 원년, 2권 세가 제2 광종 원년
  11. 《고려사》2권 세가 제2 광종 11년
  12. 《고려사》59권 지 제13 길례
  13.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975년). 〈태평2년명마애약사불좌상〉(977년)
  14. 김기덕, 〈고려의 제왕제와 황제국체제〉, 《국사관논총》vol.78, 국사편찬위원회, 1997
  15. 박재우, 〈고려 군주의 국제적 위상〉, 《한국사학보》vol.20, 고려사학회, 2005
  16. 〈고미현서원종〉(963년), 〈운문사원응국사비〉(1147년)
  17. 《고려사》
  18. 《고려사》2권 세가 제2 광종 2년, 광종 14년
  19. 〈대반야바라밀다경 사경 권수〉(952년), 이기백 편저, 《한국상대고문서자료집성》, 일지사, 1987
  20. 조선왕조실록》 고종 31년 12월 17일
  21. 本位田菊士, 〈‘大王’から‘天皇’へ--古代君主号の成立をめぐって〉, 《ヒストリア》89, 大阪歴史学会, 1980
  22. 《선린국보기》(善隣國寶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