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교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슬람교

Mosque02.svg

이슬람교의 역사

이슬람의 다섯 기둥
신앙증언 · 예배
종교부금 · 금식
성지순례
신과 주요 인물
알라 · 무함마드
마흐디
이슬람의 예언자
예언자의 동료
라쑬룰 라
경전과 율법
꾸란 · 하디스 · 순나
피끄흐 · 파트와 · 샤리아
이슬람교 교단
수니파 · 시아파 · 수피즘
성지 행사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
나자프
카르발라
하즈
이드 울-피뜨르
이드 울-아드하
아슈라
역법
종교 지도자
아야톨라 · 칼리파 · 이맘
물라 · 무프티 · 무에진

이슬람교(아랍어: الإسلام al-islām 듣기 )는 무함마드를 예언자로 하는 유일신 종교로, 그리스도교, 불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이슬람”이란 뜻은 “에 대한 순종”이란 뜻이다. 신자는 무슬림이라고 한다. 이슬람은 제정일치의 교리를 가졌기에 종교는 곧 정치이며 따라서 교리가 곧 법이다.

이슬람교의 경전은 꾸르안(코란)이며, 이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대천사 가브리엘(아랍어: 지브릴)로부터 받은 알라의 계시를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1] 이슬람의 대표적인 종파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대표하는 수니파이란이 대표하는 시아파가 있으나, 시아파를 따르는 무슬림은 전체 무슬림 인구의 약 10%를 차지하는 소수이며, 중앙아시아의 무슬림들은 수피 무슬림들이며, 나머지 무슬림은 정통 이슬람인 수니파이다. 이슬람 안에서 무슬림 모두는 형제이며, 종파간에도 서로를 무슬림이라고 인정한다.[2]

목차

[편집] 이슬람의 휴일

  • 이슬람 신도나 국가는 금요일이 휴일이다.

[편집] 용어의 정의

이슬람교는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있다.

  • 이슬람 : 흔히 “이슬람교”라고 불리는 종교의 이름이다. 한국에서는 이슬람을 회교(回敎)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중국에서 이슬람을 회회교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3]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만든 단어로 복종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히브리어의 평화를 의미하는 살렘과 비슷하여 이슬람의 뜻이 평화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알라에게 전적으로 복종할때 평화가 온다는 말이지 이슬람 단어 자체에는 평화란 뜻은 없다. 간혹 이슬람을 마호메트교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슬람은 마호메트(무함마드의 영어이름)를 믿는 종교가 아니라, 알라를 유일신으로 믿는 종교이므로 정확한 이름이 아니다.
  • 무슬림 : 이슬람에의 복종자, 곧 이슬람을 믿는 이슬람 신자를 가리킨다. 여자는 무슬리마이다.
사우디 아라비아 리야드의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꾸르안
  • 꾸르안 : 이슬람의 경전 이름이다. “읽다”(아랍어: 까라아)의 동명사로서 그 뜻은 “읽기”이다. 이는 무함마드가 받은 첫 계시가 “읽어라! 창조주이신 너의 주님의 이름으로.”라고 시작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꾸르안을 “코란”이나 “꾸란”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 특히 “꾸란”이라는 말에는 “읽다”라는 뜻이 없다.
  • 라쑬룰 라 : “성사(聖使)”라는 뜻으로 주로 무함마드(영어로는 마호메트)를 가리킨다. 성사는 “알라가 보낸 사람”을 뜻하며, 이는 예언자보다 격이 높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 모세, 예수 그리고 무함마드이다.
  • 이만 : 이슬람 교리에서 이르는 “여섯 믿음”을 가리킨다.
  • 이바다 : 이슬람 교리에서 이르는 “다섯 의무”을 가리킨다. 이것을 “아르칸”이라 하여 “다섯 기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편집] 역사

이 부분의 본문은 이슬람교의 역사입니다.

[편집] 무함마드 이야기

[편집] 무함마드의 유년시절

이슬람의 성지(聖地) 메카아라비아 반도 중부, 홍해 연안에서 약 80 km 지점의 불모지 골짜기에 위치하는 도시로, 인도양에서 지중해안에 이르는 대상로(隊商路)의 요지였다. 옛날부터 흩어진 유대인들이 살았으며 이비아니교, 마리아나이트, 네스토리안등 그리스도교 이단이 로마의 이단정죄를 피해 거주하였다. 메카는 카바 신전을 중심으로 아라비아 반도의 종교적 중심지였기에 매년 많은 대상과 순례자들이 찾아들었다. 메카의 지배계급은 5세기 말경, 부근 황야에서 온 쿠라이시족이었으며 무함마드는 그 중의 하심가(Hashim 家) 출신이다. 하심가에는 압둘 무탈립이란 사람이 살았는데 그에게는 열명의 아들이 있었고 막내의 이름이 압둘라였다. 압둘라는 아미나와 결혼을 했는데 그 사이에서 무함마드가 태어난다. 무함마드가 대상을 떠난 후 죽었고 무함마드는 유복자로 태어나나 어머니 아미나도 메디나를 방문하고 오는 중 병에 걸려 죽게 된다. 무함마드는 하녀의 손을 잡고 메카로 돌아와 할아버지 압둘 무탈립에 의해 자라다 할아버지가 죽자 삼촌 아부 탈립에 의해 키워지게 된다. 삼촌 아부탈립은 가난했는데다 딸린 식구들이 많아 무함마드는 어린 나이부터 삼촌 아부 탈립을 따라 샴지방으로 대상을 떠나게 된다.

12세에 무함마드는 삼촌을 따라 시리아로 간다. 그곳에서 네스토리안(경교) 수도사를 만나게 된다. 바히라라는 캬라반을 타고 가는 무함마드에게 선지자의 징표가 있다고 말하였다.

그후 무함마드는 목동일을 하며 자라나게 된다.

[편집] 하디자와의 결혼

당시 아라비아 각지에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교 이단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사바인들도 아라비아에 거주하였는데 이들은 서로에게 종교적인 영감을 주었다. 신성한달이라 불리던 9월에 금식을 행하던 것은 사바인의 종교적 영향이다. 유대인들과 그리스도교 이단들의 영향으로 유일신 사상이 아라비아 반도에 전해지긴 했으나 대부분은 여전히 다신교 신앙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카바 신전에는 360개의 우상들이 존재했는데 그중 가장 강한 신을 알라라고 불렀다. 이 알라라는 호칭은 후에 매우 중요하게 사용되어진다.

목동이었던 무함마드는 가난했던 삼촌 아부 탈립을 생각하며 수익성이 좋은 직업을 구했고 삼촌 아부 탈립의 소개로 부자였던 과부 카디자의 고용인으로 들어가 그녀를 대신해 시리아 지방으로 대상 무역을 떠나게 된다. 무함마드의 이 무역은 큰 성공을 거두고 샴지방의 특산품을 구해 메카로 돌아왔다. 카디자는 무함마드에게 깊은 감명을 받고 15살이나 어린 무함마드에게 청혼을 하였다. 무함마드 25세 카디자 40세에 둘은 결혼을 하였다. 부자였던 카디자와의 결혼은 무함마드에게 부와 명예를 주었고 무함마드는 삼촌의 재정적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알리를 입양하였다.

무함마드의 결혼생활은 행복했으나 무함마드에게 불행이 닥치기 시작했다. 네명의 딸은 잘 성장하였으나 그의 아들들이 유아때 계속 사망한 것이다. 당시 사회는 건장한 남자가 대상무역을 떠나 성공하는 것이 영웅시 되던 때였기에 건장한 사내아이를 선호하였다. 아들이 곧 인생의 전부인 상황에서 아들들의 죽음은 무함마드에게 큰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독자연구?]. 무함마드의 부와 명예로 인해 사람들은 그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들이 없다는 것은 그 당시 큰 수치였기에 무함마드의 고민은 점점 더 해졌다.

경제적인 부는 그에게 여유를 주었고 무함마드는 금식하며 사색하며 진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무함마드는 히라산 동굴에서 첫 계시가 임하게 된다. 무함마드는 겁에 질려 집으로 돌아와 죽은듯 했는데 부인이었던 카디자가 무함마드를 진정시키고 자신의 삼촌이자 이비아니교의 사제였던 이븐 나우팔 와라까에게 가 사정을 설명하였다. 이븐 나우팔 와라까는 무함마드가 만난것이 천사 가브리엘이었다며 무함마드가 선지자라고 말하였고 카디자는 집으로 돌아와 무함마드에게 모두 말한 후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최초의 무슬림이 된다.

첫 계시를 받은 후 점차 무함마드의 양자들과 노예 그리고 친한 친구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하였고 3년째 되던해 무함마드는 자신의 친구와 친족을 모아놓고 유일신 알라에 대해 선포하게 된다. 하지만 친구와 친족들은 그를 비난하고 모욕하여 무함마드를 무시했다. 그러자 무함마드는 메카로 오는 순례객들에게 유일신 사상을 전하기 시작했고 메카의 카바신전을 지키며 순례객들로 수입을 얻었던 부족원들이 무함마드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편집] 메디나로의 피신

무함마드는 AD619년에 큰 슬픔을 얻게 된다. 첫 무슬림 신자이자 자신의 큰 후원자였던 부인 카디자가 죽은것이다. 또한 자신의 방패가 되어주던 삼촌 아부 탈립도 그 해에 세상을 떠난다. 무함마드는 고통속에서도 줄어들지않는 박해와 핍박에 대항하기위해 무슬림 공동체를 더욱 강하게 만들기로 결정, 자신의 친구였던 아부 바크르의 딸 아이샤와 결혼을 추진한다. 이때 무함마드의 나이가 50이었고 아이샤의 나이가 9살이었다.

핍박은 더욱 심해졌고 이를 피하여 622년 메카 북방 약 400 km 떨어져 있는 메디나로 갔다. 신도들도 이때를 전후하여 메디나로 피난, 그곳 협력자들(안사르)의 집에 수용되었다. 이 메디나 행을 이슬람에서는 ‘헤지라[聖遷]’라고 하는데, 이 해를 이슬람력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메디나에 도착한 무함마드는 자신의 말이 멈춘 수하일의 과수원 땅을 사서 최초의 사원과 자신의 집을 지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해 하루에 다섯번씩 알라는 위대하다고 암송하며 절했다. 무함마드는 메디나에서 선지자의 권위를 확립하고 아라비아 부족의 통일을 꿈꾸기위해 종교적인 일과 세속적인 일을 구별하지 않는 형태의 이슬람교 조직 체계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즉 제정일치의 사회를 무함마드는 추구했다.

무함마드는 자신의 선지자됨을 증명하기 위해 유대인들에게 자신도 아브라함의 도를 믿는다고 하며 접근하였지만 그의 구약에 대한 오해와 무지로 인해 유대인들은 무함마드를 거짓 선지자로 부르며 그의 선지자쉽을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무함마드는 무슬림 공동체의 민생 문제와 자신의 권위를 위해 메카에서 다마스커스로 가는 대상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탈취한 노획물은 무슬림들의 식량이 되었고 군자금이 되었다. 무함마드는 경제 정책과 보상규정을 정해 그의 군대는 점점 강력해지고 증가하였다. 무함마드와 메디나에 거주하던 유대인 부족간에는 결국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고 유대인들은 모든 재산을 남겨놓은채 추방당하거나 목이 잘려 죽었다.

메디나를 정복한 무함마드는 종교적 중심지이며 자신의 고향이었던 메카를 점령할 계획을 세운다.

[편집] 메카정복

AD 628년 무함마드는 메카의 카바신전을 순례하러 가기로 결정한다. 그해 3월은 아랍에는 신성한 달로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지만 메카의 사람들은 무함마드가 전쟁을 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에게 2년에서 10년까지의 평화조약을 요구하고 무함마드는 요구에 응한다. 그리고 2년 후 AD630년 1만명의 무슬림이 메카를 습격했고 도시의 항복을 받았다. 메카로 입성하며 무함마드는 알라호 아크바르를 외쳤고 무슬림들이 따라 외쳤다.

무함마드는 카바신전의 우상들을 다 부숴버렸고 유일신 알라외에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공포를 했다. 그때 메카의 모든 집에 있던 우상들이 다 부숴졌다.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보름을 지내고 메디나로 돌아와 이듬해 아라비아 북서쪽 타북지방으로 원정을 떠났다. AD632년 무함마드는 메카의 카바신전을 참배하고 메디나로 돌아오던 중 심각한 열병에 걸려 죽게 된다.

[편집] 무함마드 사후

[편집] 정복전쟁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은 신도의 장로 중에서 교통(敎統)의 후계자인 칼리프를 선출하였다. 그 후 아라비아 반도 밖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633~664년 시리아 ·이라크 ·북부 메소포타미아 ·아르메니아 ·이란 ·이집트 등을 정복하고 여러 곳에 기지도시(基地都市)를 건설하였다. 그 후에도 정복사업은 계속되어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는 서쪽은 북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까지, 다시 711년부터는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하였고, 동쪽은 중앙아시아인도 북서부까지 그 지배력이 미쳤다.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스의 중추부까지 진출한 군은 732년 푸아티에 북방의 싸움에서 패퇴하였으나, 동방에서는 751년 여름 탈라스 강의 싸움에서 고구려 출신의 고선지가 이끈 당군(唐軍)을 대파하고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아바스 왕조 초기 100년간은 칼리프 정권의 전성기였는데, 그 후 이베리아는 우마이야가(家) 일파에 의하여 독립하고, 이어서 모로코 ·튀니스 ·중앙아시아 ·이란 동부 ·이집트 등에도 독립정권이 출현하여 칼리프의 직할지는 점차 축소되었다.

[편집] 투르크의 이슬람화

10세기에 들어서자 921년 이후 볼가강 중류의 불가르족(族)이, 이어서 960년 이래 톈산남북로의 투르크족이 다같이 대량으로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그때까지 아랍족, 이어서 이란인이 중심이었던 이슬람 세계는 이 무렵부터 투르크의 패권 밑으로 옮겨지는 경향이 생겨, 10세기 말부터는 투르크가즈니 왕조의 마호무드왕은 자주 인도에 침입하여 이 지방의 이슬람화가 확고한 기반에 놓였다. 한편 동아프리카에는 740년 무렵부터 이슬람교가 퍼지기 시작하여 1010년경에는 사하라 사막을 넘어 나이저 강변의 서 수단 지방에 있는 흑인 왕국에까지 이슬람의 세력이 미쳤다. 1071년 아르메니아의 만지케르트 싸움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은 비잔틴군을 격파하였다. 이 때부터 서아시아의 이슬람화 ·투르크화가 시작되었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11세기 말~13세기 말의 거의 2세기에 걸친 십자군 운동이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그리스도교도의 역정복이 진행되어 1493년에는 무어인의 최후 거점인 그라나다가 함락되고 마침내 이슬람은 북아프리카로 후퇴하였다.

[편집] 비잔틴 정복

이와는 달리 셀주크왕조와 교체된 오스만 왕조발칸 반도로 진출하여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공략,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켰다. 또 인도에 세력을 부식한 이슬람 교도는 이곳을 기지로 하여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방면에 선교를 하여 동남아시아의 이슬람화는 15~16세기에 광범한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⑵ 분포 현황:현재의 이슬람 교도수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세계 인구의 약 25 %인 12억 내외로 알려져 있다. 지역적으로는 북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와 이란에 이르는 이른바 중동지역과, 동부 러시아, 투르크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서부 ·중국 ·인도에 이르는 동남아시아 지역에 주로 분포되어 있으며, 기타 한국 ·일본 등 세계 곳곳으로 선교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예를 들면, 남 ·북미 지역과 유럽 지역에도 오랜 이슬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수백 만의 무슬림들이 있다. 특히 독일프랑스 지역에서의 이슬람 문화 ·역사 ·종교학에 관한 연구는 그 역사도 오래되었고 수준도 높다.

[편집] 아랍색

소말리아, 코모로, 지부티 같은 일부 이슬람국가를 빼고는 국기에 빨강, 초록, 검정, 흰색만 넣는데, 이는 이슬람에서 파랑을 아랍색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편집] 교리

이슬람은 알라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믿는 유일신 종교이다.

이슬람 교리는 매우 단순하게 여겨질 만큼 명료하게 정립되어 있다. 이슬람 교리는 이만(6가지 종교적 신앙)과 이바다(5가지 종교적 의무)를 기본으로 하며, 6신(信) 5행(行)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5행을 무슬림의 신앙생활을 받치는 다섯 기둥으로 보아 아르칸(기둥들)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우디 아라비아 제다 중심가 모스크에서의 쌀라 풍경

이만(6신)이란 알라와 천사, 경전, 예언자, 마지막 심판, 정령에 대한 여섯 믿음이다.

이 부분의 본문은 이슬람의 다섯 기둥입니다.

수니파 무슬림에게 다섯 기둥(Arkan-al-Islam)은 샤리아(이슬람법)에 근거하며 무슬림에게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시아에는 ‘종교의 뿌리’(Usul-ad-Deen)로 알려진 다섯 가지 믿음과 ‘종교의 가지’(Furoo-ad-Deen)로 알려진 열 가지 의례가 있는데, 이 열 가지는 수니이슬람의 기둥과 유사한 것이다.

복장을 갖추고 메카로 순례 여행을 떠나는 무슬림
  • 신앙고백 (샤하다) - 알라 이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예언자라는 선언
  • 기도 (쌀라) - 매일 5회의 기도
  • 단식 (사움) - 일출부터 일몰까지, 이슬람력 9월(라마단) 한달 동안 음식 및 음료의 섭취와 성행위를 금한다.
  • 자선 (자카) - 일반적으로 상공업에 종사하는 부자들의 재산의 2.5%나 농민들의 연 생산의 10-20%정도이며, 이 돈이나 생산물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진다.
  • 메카 순례(핫즈) - 이슬람력 12월(둘 힛자)에 이루어지며 경제적 신체적으로 능력이 있는 모든 무슬림이 일생에 한 번 행해야 한다.

수니파는 교리로 인정하지 않으나 시아파및 몇몇 종파는 지하드를 교리로 삼는다. 지하드는 고투, 노력이라는 뜻의 아랍어로 신체 건장한 무슬림이라면 누구나 수행해야 하는 의무이다. 지하드는 소지하드와 대지하드로 구분을 하는데 하나는 내적인 자기수행과 절제, 금욕을 다른 하나는 이슬람 공동체를 비이슬람 공동체로 부터 지키기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의미한다.

[편집] 분포

국가별 신자 분포

주로 중동터키, 중앙아시아, 중국 서부(신강위구르자치구), 북아프리카, 러시아(주로 남부지역), 카프카스, 인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에 이슬람교가 존재한다. 여기서 동남아시아의 무슬림은 과거 이슬람 상인들의 활발한 무역 활동으로 이슬람 신앙을 갖게 된 이들이다.

유럽에서는 알바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주로 코소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이슬람교가 존재한다. 일부는 독일, 이탈리아, 몰타, 그리스, 스웨덴에도 존재한다. 프랑스에스파냐에서는 이슬람교가 제2의 종교 세력으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유럽의 무슬림들은 이슬람에 대한 편견, 무슬림에 대한 차별(취업, 교육) 등의 어려운 숙제를 풀어야 한다.

아메리카에서는 미국, 브라질에 이슬람교가 극소수로 존재하며, 오세아니아에서는 파푸아뉴기니가 극소수로 존재한다. 실례로 유명한 흑인운동가인 말콤 X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후에 개종한 무슬림이다. 대한민국에는 약 10만 명의 이슬람교도가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한국전쟁당시 터키군의 선교 활동과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전통교회로 자리잡고 있는 필리핀공화국을 제외한 동남아시아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에 의한 것이다. 한국인 신도는 약 2만 명 정도이다.

[편집] 종파

이슬람에는 교리가 상반되는 200여개의 종파가 있다.그중 주류가 수니 무슬림이라고 부른다. 전 세계 무슬림의 83% 이상이 수니 무슬림이다. 그 외에는 16%의 시아 무슬림과 시아파와 수니파에 섞겨있는 수피파그리고 여러가지 종파들이 존재한다.


[편집] 수니파

무슬림 공동체 즉 움마의 순나(sunnah 관행)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순나란 꾸란, 하디스 및 예언자와 정통 칼리파의 선례에 바탕을 두고 있다. 4대 법학파(하나피, 말리키, 샤피이, 한발리)로 나뉘어진다.

[편집] 하와리즈 파

무함마드 사망 25년 뒤, 칼리파 우스만 이븐 아판이 살해를 당하자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그 뒤를 이었다. 우스만의 6촌인 다마스쿠스 총독 무아위야 1세는 알리가 우스만의 복수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다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내란 속에서 알리 지지자들은 주전파와 협상파로 갈라졌다. 그중 주전파는 절대신 알라만이 중재를 할 수 있고 인간은 현 상황에서 계속 싸워야 한다면서 알리 진영을 떠난다. 이들이 이슬람 역사상 최초의 종파 하와리즈(탈퇴자)이다.

하와리즈파는 전투적인 행동주의자여서, 지하드(jihad 주로 ‘성전’으로 번역한다)를 여섯번째 ‘신앙의 기둥’으로 삼았다. 661년 이들은 알리를 살해했다. 하와리즈파는 메카의 부족 꾸라이쉬의 자손만이 칼리파가 될 수 있다는 순니파의 전통적 견해를 비난하고, 독실한 무슬림이면 누구나 칼리파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민 평등주의적 입장과 아랍 귀족층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베드윈과 비아랍계 무슬림 추종자를 얻을 수 있었지만 내분으로 뒷날 저절로 약화됐다. 현재는 알제리튀니지베르베르 지역,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아라비아 반도의 오만에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의 청교도적인 정신은 18세기 사우디아라비아 건국의 기반이 된 와하브(Wahhab) 운동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편집] 시아파

빼앗긴 칼리파 자리를 살해당한 알리 가문에 되돌려주려는 운동으로써 시작된 것이 시아 이슬람이다. 시아는 '쉬아 알리(Shia Ali)' 즉 '알리를 따르는 사람들'에서 나온 명칭. 초기 칼리파들의 뒤를 이은 우마위야 왕조(661-750)와 압바스 왕조(750-1258)는 무함마드의 '혈통'을 중시한 쉬아를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다.

시아파는 우마위야 왕조 창시자 무아위야 1세가 알리와 파띠마의 장남인 하싼(Hasan)을 살해했다고 주장한다. 하싼의 동생 후세인(Husayn)은 680년 이라크의 카르발라(Karbala)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참혹하게 살해됐다. 카르발라와 인접한 나자프에는 이맘 알리, 이맘 후세인 사원이 지금도 남아 있어 시아파들의 최대 순례지가 되고 있다.

후세인의 제삿날인 이슬람력 정월(Muharram) 10일, '모하라 아슈람'은 시아파들의 최대 추모제 날이자 명절이기도 하다. 신자들은 이날 길거리에 나와 행렬을 지어 후세인의 고통을 체험한다. 시아파는 초기의 희생자들을 순교자로 떠받드는 것에서 시작했으나 훗날 유대 유일신교의 한 분파인 그노시즘(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순니의 이슬람 주류와 신학적으로도 갈라섰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큰 차이 중 하나는 '이맘'이라는 인도자의 존재. 순니가 말하는 이맘은, 꾸란을 독경하고 에배를 인도하는 정도의 사람을 가리킨다(전통적으로 이슬람은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 즉 '성직자'를 인정치 않으며 모든 신도가 직접 신앙의 힘으로 신과 소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쉬아의 이맘은 알리와 후세인의 후계자, 꾸란의 신비를 밝혀주어 신도들을 빛과 은총으로 이끄는 사람으로 격상됐다. 이란의 아야툴라 루흘라 호메이니와 그 뒤를 이은 최고종교지도자 알라 하메네이 같은 이들이 가장 최고위급의 이맘들이다.

희생과 순교를 중시하는 시아파들은, 이 지점에서 구세주 신앙과 만난다. 특히 알리 이후 열두 이맘의 시기가 지나고 마지막 12대 이맘이 873년 사라졌다고 믿는 '열두이맘파'에게서는 메시아사상의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사라진 12대 이맘이 오랜 은둔에서 벗어나 언젠가 지상에 구세주(마흐디)로서 나타날 것이라 믿고 있다. 훗날 많은 이들이 '마흐디'를 자처하면서 등장하기도 했다.


[편집] 열두 이맘파와 자이드파

시아파의 85%를 이루고 있는 열두 이맘파는 이란과 이라크 인구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아라비아 반도에는 드물게 분포하고 있고, 레바논과 파키스탄, 인도 등지에 소수파로 존재한다. 북아프리카 모로코의 경우 왕가는 알리의 자손임을 주장하고 있지만 국민들은 순니 말리키파다. 자이드파는 후세인의 손자 자이드(Zayd)에서 유래했다. 이들은 열두 이맘 중 후세인의 아들인 4대 이맘까지만 인정하는데, 여기에 자이드를 포함시켜 다섯 이맘파라 부르는 이들도 있다. 자이드파는 알리 이후 순니파 칼리프들을 인정치 않는다는 점을 빼면 교리상 순니와 같다. 예멘 지방에 많이 남아 있다.


[편집] 이스마일파암살단파

시아파 중 가장 논쟁의 여지가 많고 매력적인 것, 그런 이유로 옛 문헌이나 소설에 가장 자주 소재로 다뤄졌던 것이 이스마일파 즉 일곱 이맘파다. 그들은 열두 이맘파의 7대 이맘 무사 대신 6대 이맘 자아르 알 싸디끄(765년 사망)의 장남 이스마일을 추종하기 때문에 이스마일파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들은 빈민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압바스 왕조 칼리프에 맞서 인기를 모았다. 10세기 한때 메카를 점령하기도 했다.

이스마일파의 또 다른 분파는 북아프리카에서 아랍족과 베르베르족 사이의 긴장을 이용해 권력을 잡고 파티마 왕조(909-1171)를 세운 우바이둘라 알 마흐디(909-934) 세력이다. 이들은 969년 이집트를 정복하고 옛 수도 푸스타트 근처에 까히라(al-Qahirah 승리자; 오늘날의 카이로)라는 도시를 세웠다. 칼리프조는 까히라에 거대한 도서관을 짓고 이슬람 교리의 본산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라는 알 아즈하르(al-Azhar)성원(聖院)을 만들었다. 이 칼리파조는 11세기 초 국력을 키워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등지를 세력권에 넣었으며, 바그다드의 칼리프도 한때는 카이로의 세력에 맥을 못 췄다. 그러나 1171년 아이유브 왕조살라흐 앗 딘(1138-1193; 살라딘)에 멸망했으며 이집트와 시리아는 다시 수니파의 손으로 들어갔다.

암살단파는 '산상의 노인'이라 불렸던 이란계 지도자가 11세기 말 파티마조와 결별하고 이란과 시리아를 잇는 산악지대에 요새를 만들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마약의 일종인 해시시에 중독돼 암살을 저지른다는 점에서 아사신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이는 영어 assassination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중세 십자군 전쟁을 다룬 기록들이나 마르코 폴로의 '세계의 서술(동방견문록)' 등 옛 문헌들에는 '산상의 노인'에 대한 전설이 많이 나와 있다. 암살단파는 자객을 이용, 주로 순니파 칼리프들을 살해했다. 현대의 학자은 암살단파가 예루살렘을 놓고 전쟁을 벌였던 기독교 세력보다는 오히려 순니 기득권층에 더 큰 위협이 됐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에 살해된 최초의 희생자는 셀주크 투르크술탄 말리크 샤 1세(1072-1092)의 재상으로 유명한 니잠 알 물크(1091년 사망)였다.

암살단파는 순니 지도층을 살해, '숨은 이맘'의 통치체제를 전 이슬람권에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나 13세기 내분이 일어나면서 약화됐고, 이란을 점령한 몽고군에 의해 섬멸됐다. 시리아의 분파도 이집트, 시리아에서 득세한 맘루크조에 의해 제거됐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추종자는 소수에 불과하며, 암살이 아닌 사업에 종사해 현대사회에서는 오히려 무슬림 부유층을 형성하고 있다.


[편집] 알라위파(Alawis)와 드루즈파(Druzes)

이스마일파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종파들로, 오늘날 레바논과 시리아 등지에 분포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슬람 주요 교리에서 워낙 벗어나 있어, 쉬아 무슬림이라기보다는 순니-쉬아 이외의 제3의 종파로 분류되곤 하며 심지어 이슬람이 아닌 다른 종교로까지 분류되기도 한다.

알라위파(Alawi)는 시아파의 알리 숭배를 극단화시켜 신격화했는데, 창시자인 무함마드 이븐 누사이르(Muhammad ibn Nusayr)의 이름을 따 '누사이리파'라 불리기도 한다. 레바논, 시리아에 많은 성스런 나무숲을 숭배할 뿐 아니라 기독교 의례까지 받아들여 부활절까지 축하하곤 한다. 시리아에서도 인구의 1%만이 알라위파이지만 장기집권했던 하페즈 알 아사드 전대통령과 그 아들로 세습정권을 이어가고 있는 바샤르 알 아사드 현대통령이 이 종파인 덕에 권력층이 되어 있다.

드루즈파는 11세기 이스마일파에서 나온 다라지(Darazi)라는 인물이 숨은 이맘 '마흐디'를 자처하면서 창시했다. 비밀주의가 강하며, 레바논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신의 예언자 무함마드를 따르는 이슬람과 달리 하킴이라는 칼리파가 신의 현신이라 주장하며 일신론을 믿는다. 일부다처제는 금지돼 있고 여성들의 지위는 남성과 동등하며 영혼은 윤회한다고 믿는다. 이슬람의 하지(순례) 기간 축제를 열긴 하지만 순례 자체는 하지 않으며 라마단 금식도 하지 않는다.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하는 경우가 많으며 금욕적인 생활을 찬양한다. 교리와 관행으로 보아, 이슬람이라기보다는 별도의 종교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편집] 바비파(Babis)와 바하이

19세기 중반 이란에서 나타난 바비파는 아랍어로 '문'을 뜻하는 '밥'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이는 진리의 문을 뜻한다. 바비파는 구약성서와 조로아스터, 중국에서 전해져온 유교 사상과 불교 등의 예언자들을 모두 인정했다. 이들은 이란의 부패한 왕정에 반대하다가 잔혹한 탄압을 당했다. 대량학살에서 살아남은 추종자들은 바하울라라는 예언자를 추종하는 바하이파로 계승됐다. 바하이의 가장 큰 관용과 사회의식이다. 이들은 이맘 알리가 남긴 메시지는 사회를 개혁하고 살기 좋게 만드는 것이라 믿는다. 여기에는 여성 평등, 교육과 국제평화 등이 모두 포함된다. 바하이는 대부분 평화주의자로서 양심적 병역거부와 금주 금연, 채식 등을 선호한다. 이들도 이란 정부의 박해를 받았으며, 왕정이 끝나고 1979년 이슬람혁명 세력이 정권을 잡은 뒤에도 계속 탄압을 받고 있다.

[편집] 수피(Sufi) 사상

이슬람 쉬아에서 갈라져나온 신비주의 수피즘은 종교라기보다는 철학, 사상에 가깝다. 현대 서구문명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수피즘은 금욕적인 자기수양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편집] 주석

  1. 두산세계대백과
  2. 이희수, 《이슬람》, 2002년, 청아출판사.
  3. 《세계종교사입문》/서울대학교 종교학연구회/청년사

이병길 [이것이 이슬람이다] 이희수 [이슬람의 역사] 중동학회 [중동의 역사] 정수일 [이슬람문화 알아보기]

[편집] 같이 보기

[편집] 바깥 고리

Commons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 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다른 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