캅카스 이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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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ian States Colchis and Iberia (600-150BC)-en.svg

이베리아(조지아어: იბერია, 라틴어: Iberia, 그리스어: Ἰβηρία)는 고대 그리스로마인에 의하여 기원전 4세기부터 5세기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조지아(그루지야) 남쪽과 동쪽을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었던 카르틀리[1]의 고대 조지아(그루지야) 왕국에 붙여진 이름이다.[2][3]현재의 스페인포르투갈, 안도라가 위치해 있는 이베리아 반도와 구분하기 위해서 캅카스 이베리아 또는 동이베리아라고 부른다.

캅카스 이베리아인은 훗날 그루지야 지역에 독립국이 세워질 때 토대가 되었으며 콜키스(고대 서조지아(서그루지야) 왕국)인과 함께 오늘날 조지아인(그루지야인, 또는 카르트벨리아인)의 토대를 형성하였다.[4][5]

역사[편집]

어원[편집]

이베리아라는 이름의 어원의 한 가지 이론은 기오르기 멜리키슈빌리에 의해 제안되었는데 조지아인(그루지야인)의 조지아어(그루지야어) 명칭인 단어 "스베르"(또는 "스비르")과 연관되는 비르크(아르메니아어: Վիրք, 이비르크[Իվերք]와 이베르크 [Իվերք]) 동시대 조지아(그루지야)의 아르메니아어 명칭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6] 예를 들어 철자 "ㅅ"(s)는 단어의 어근으로 "베르" (또는 "비르")의 접두어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이바네 자바키슈빌리의 이론에 따르면, 민족의 칭호 "스베르"(Sber)는, 스베르(Sver)의 변형이며 단어 "흐베르"(또한 이베리아 처럼)와 아르메니아어의 변형, 베르과 비르에서 유래 되었다.[6]

초기 역사[편집]

조지아의 역사
საქართველოს ისტორი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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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시대
고대
중세
근세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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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은 고대 시대쿠라-아락세스 문화와 다양한 관련이 있는, 고대 작가들에 의해 총제적으로 이베리아인이라고 불리는, 부족들이 거주했다. 그 지방은 신화속 족장, 카르틀로스 이후에 그들의 나라인 카르틀리라고 불렸다. 모스치는 몇 사람의 일류 역사가들에 의해서 엄급되며, 그들의 후손인 듯한 (헤로도투스에 의해 언급된) 사스페르스는 그 지역에 거주한 부족을의 통합에 결정적일 열할을 한 것같다. 모스티는 그들의 북동부로 서서히 이동하며 그들의 여행에서 정착지를 형성했다. 그들의 거점은 므츠헤타이며, 향후에 에베리아 왕국의 수도가 됐다. 므츠헤타 부족은 나중에 (조지아(그루지야)에서 "가정의 어른") 마마사클리시라고 알려진 지역적으로 주요한 지역으로 관리되었다.

중세 조지아(그루지야) 자료 목체바이 카르들리사이("카르틀리의 전환")는 므츠헤타가 성립된 곳에 정착하려 했던 페르시아 제국의 함락 때까지 아케메네스조의 통치 하에 있었던 아조와 그의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기도 한다. 또 다른 조지아(그루지야) 연보 카르틀리스 츠코브레바("카르틀리의 역사")에서는 아조가 기원전 4세기 말에 파르나바즈에게 패배할 때까지 지방 통치 가문을 대학살하고 그 지역을 정복한 알렉산더의 장교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알렉산더의 카르틀리 침입 이야기는 전적으로 픽션이라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레니즘 시대에 조지아(그루지야) 군주국의 성립을 반영하며 후대 조지아(그루지야) 문학자들이 유명한 정복자와 그 사건을 연관지으려는 열정을 비춘다.[7]

파르나바즈 1세와 그의 후손들[편집]

파르나바즈는 권력 분쟁에서 승리를 거둠으로 첫 번째 이베리아 왕이 되었다(기원전 약 302~237년경). 침입 때로 되돌아 가보면, 그는 서조지아(서그루지야)의 (지리적으로 에그리시라고 알려진) 콜키스 왕국의 중요한 지역을 포함하는 인접 지역들을 복속시켰고, 시리아셀레우코스에게 새로 건국한 왕국으로 안정된 승인을 받으려고 한 듯하다. 그 다음에 파르나바즈는 성채와 신전, 아르마즈치케, 아르마지 신의 우상을 포함한 사회적 계획에 촛점을 맞췄다. 그는 조지아(그루지야) 문자를 개정하기도 했으며, 사에리스타보스라 불리는 여러 나라들로 세분한 새로운 관리 체계를 만들었다. 그의 계승자는 캅카스 산에서 가장 중요한 통로인 (이베리아 관문으로도 알려진) 다르얄과 더불어 캅카스 전역의 통로들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여 관리했다.

번영 시대 이후의 기간은 이베리아가 그 영토로의 무수히 많은 침략에 대항하여 방어를 해야했던 부단한 전투가 있었던 한 기간이다. 이베리아는 아르메니아에게 남부의 몇몇 지방들을 잃었고 콜키스의 땅들은 왕자국(스켑투초이)의 형태로 분할되어 떨어져 나갔다. 기원전 2세기 말에, 파르나바즈 왕조이베리아의 파르나좀은 그의 백성들에 의해 퇴위되었고 왕위는 아르샤크 왕조를 성립하고 기원전 93년에 이베리아의 왕좌에 오른 아르메니아 왕자 아르샤크에게 주었다.

로마 시대[편집]

아르메니아와의 밀접한 관계는 그 당시 폰토스미트리다테스 6세와 아르메니아와 함께 전쟁 중이었던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의 침입(기원전 65년)을 나라에 가져다 줬다. 그러나 로마는 그녀의 권력을 이베리아 전역에 수립하지 않았다. 19년이 지나고, 로마는 다시 이베리아로 행군(기원전 36년)했고, 알바니아에 대항하는 그들의 군사 작전에 파르나바즈 2세의 합동을 강요했다.

또 다른 조지아(그루지야)의 콜키스 왕국이 로마의 지방으로 관리됐는데 반해, 이베리아는 로마 제국의 보호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므츠헤타 에서 발견된 그 시대 석비문에는 1세기 통치자 미드라트 1세(58~106년)가 "카이사르의 친구"이며 "로마가 사랑하는 이베리아인"이라고 새겨져 있다.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은 75년에 이베리아의 왕을 위해 아르자미의 고대 므츠헤타 유적을 요새화했다.

다음 두 세기들은 그 지역 전역에 걸친 로마의 영향력이 지속됐지만, 이베리아의 왕 파르스만(116~132년)의 통치 기간에 이전 권력을 다소 되가져왔다.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이 파르스만 2세를 만족시키기 위해 갈구했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둘의 간의 관계는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그러나, 하트리아누스의 후계자 안토니누스 피우스 통치기에만 파르스만은 디오 카시우스가 그의 명예로운 조각상이 세워졌고 희생에 대한 권리가 주어졌다고 보고한 로마를 방문하기까지 할 정도로 관계가 향상되었다. 그 기간은 로마가 그들을 이전 속국의 위치 이상의 동맹으로 인정하고, 파르티아와 같이 제국에 적의가 있던 기간 동안 조차도, 정치적 입장이 동등하게 유지되는 이베리아의 정치적 위상에 대한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로마/비잔티움과 페르시아의 대립[편집]

로마 제국 시대의 이베리아

이베리아의 향후 역사에 결정적인 것은 224년에 사산 제국 제국의 설립이다. 쇠퇴한 파르티아의 왕권 영역이 강력한 중앙집권 왕국으로 교체될 때 쯤에, 이베리아는 로마에서 멀어져 정치적 진로를 바꿨다. 이베리아는 샤푸르 1세(241~272년)의 통치 기간 동안에 사산 왕국의 공납국이 되었다. 두 나라 간의 관계는 이베리아가 페르시아의 로마에 대항하는 군사 작전에 합류함으로 처음에는 우호적이었다. 이베리아의 왕 아마자습 3세(260~265년)는 사산 영역의 고위인사 목록에 있었고, 군사력에 의해 의해 정복된 속국이 아녔다. 그러나 사산의 침략적인 경향들은 아마도 260년대와 290년대 사이에 이베리아에서 확립된 그들의 조로아스터교 선전으로 명백해졌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속국으로의 캅카스 이베리아의 통제권을 다시 획득하고 모든 캅카스 지역들에 걸친 통치 기간으로 인정된 니스비스의 평화(298년) 때에, 미리안 3세는 초스로 왕조에서 첫 번째인 이베리아의 왕으로 승인되었다.

로마의 우세는 317년에 미리안 2세와 지휘급 귀족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부터 종교의 본질에 결정적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러함은 카파도키아 여성으로 303년부터 조지아(그루지야)의 이베리아 왕국(동조지아(동그루지야))에 기독교를 설교한 성녀 니노의 선교 활동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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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그루지야)의 국가의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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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조지아(그루지야)와 로마(나중에는 비잔티움 제국)와의 결속을 강하게 했으며 왕국의 문화와 사회에 대규모의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율리아누스 황제가 363년의 군사 작전에 실패하고 죽은 후에, 로마는 이베리아의 통제권을 페르시아에게 양도했고 바라즈-바쿠르 1세(아스파구르) 왕(363~365년)은 페르시아의 신하가 되었고, 그 결과는 387년 아킬리시네의 평화에 의해 비준되었다. 그러나 카르틀리의 다음 통치자 파르스만 4세(406~409년)는 그의 나라의 자치권을 보존했고 페르시아에게 공물의 진상을 중지했다. 페르시아는 널리퍼졌고, 사산 왕은 그들의 속국을 감시하기 위해 태수(피티악사에/비닥사에)를 임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특별히 그 직위를 하 카르틀리의 통치 가문에서 세습하게 했고, 그런 식으로 카르틀리 피티악사테를 취임시켰고, 그렇게 광범위한 영토를 통제했다. 그 영토는 카르틀리 왕국의 일부로 남아있었는데고 불구하고, 태수들은 그들의 영지를 페르시아 영항권의 중심지로 전환했다. 사산의 통치자들은 조지아(그루지야)의 기독교에 혹독한 시련을 주었다. 그들은 조로아스테르의 가르침을 촉진했고 5세기 중반에는 조로아스터교가 기독교와 나란히 동조지아(동그루지야)의 공식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공동의 조지아(그루지야) 사람들을 개종시키려는 노력은 대체로 실패했다.

이베리아의 왕인 고르가살리(447~502년)라는 별명이 붙은 바흐탕 1세의 통치 초기는 왕국의 상대적인 부흥으로 상징된다. 형식적으로 페르시아의 신하인, 그는 캅카스 산악 지방 사람들을 예속시시켜 북부의 국경을 보강했고, 근접한 서부와 남부의 조지아(그루지야) 땅들을 그의 통제권 아래로 가져왔다. 그는 므츠헤타자치 독립 교회 총대주교직을 확립했으며 트빌리시를 그의 수도로 만들었다. 482년에 그는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전체적인 봉기를 이끌었고 필사적으로 독립을 위한 전쟁을 시작했으며 전쟁은 20년동안 이어졌다. 그는 비잔틴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고 결국에는 302년 전사하여 패배했다.

왕국의 몰락[편집]

캅카스에서 우위를 놓고 비잔티움페르시아 간에 지속되는 경쟁과 이어서 구르겐의 지휘 하에 조지아(그루지야)는 반란(523년)에 실패해서 나라에 비극적인 결과가 있게 했다. 그 후, 이베리아의 왕은 명목상의 권력만 갖고 있었고, 반면에 나라는 사실상 페르시아에 의해 통치되었다. 580년에 호르미즈드 4세(578~590년)는 바크루 3세 왕이 죽고 그 당시의 군주를 폐위시켰으며 이베리아는 마르즈판(통치자)에 의해 통치되는 페르시아의 주가 되었다. 조지아(그루지야)의 귀족들은 582년에 비잔티움 황제 마우리키우스에게 이베리아 왕국의 재건을 요청했지만, 591년에 비잔티움과 페르시아는 이베리아를 트빌리시는 페르시아의 손에 그리고 므츠헤타는 비잔틴의 통제 하로 나누기로 서로 합의 했다.

7세기 시작되어 비잔티움과 페르시아의 간의 휴전은 붕괴되었다. 이베리아의 왕자 스테파노즈 1세(590년경~627년)는 이베리아의 영토들을 다시 통합하기 위해서 670년에 페르시아의 편에 들기로 결정했고, 그는 그 목표를 완성한 듯 싶었다. 그러나 627년과 628년에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공격들은 조지아(그루지야)와 페르시아보다 더 한 승리를 가져왔고 아랍이 캅카스를 칩입 할 때까지는 서부와 동부 조지아(그루지야)에 비잔티움 제국이 우세한 지배를 확실하게 했다.

아랍 시대[편집]

아랍은 약 645년에 이베리아에 다다랐고 스테파노즈 2세(637년~650년경) 에리스타비(왕자)에게 비잔티움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고 그의 종주권으로 칼리프를 승인할 것을 강요했다. 이베리아는 그렇게 공납국이 되었고 약 653년에 트빌리시에 임명된 토후의 나라가 되었다. 9세기가 시작되고, 새로운 바그라티오니 왕조의 에리스타비 아쇼트 1세(813~830년)는 서남 조지아(서남 그루지야)에 있는 그의 기지로부터 스스로의 이베리아의 세습 (비잔티움 칭호 쿠로팔라테스를 갖는) 왕자를 임명할 수 있어서 아랍 통치를 약화 시킬 수 있는 잇점이 있었다. 계승자 타오-클라르제티의 아다르나세 2세는 형식적으로 비잔티움의 신하였으며, 888년에 "조지아(그루지야) 왕"으로 등극했다. 그의 후손 바그라트 3세(975~1014)는 모든 공국들이 다함께 연합된 조지아 왕국을 이뤘다.

동이베리아와 서이베리아[편집]

이베리아 반도와 이름의 유사성으로 '서'이베리아인은 그들과 캅카스 이베리아의 사람들('동'이베리아인 이라고 불림) 사이의 민족유전학적 혈족 관계의 관념을 갖게 한다.

그들은 그들이 유래한 발단 장소에 대한 의문으로 접근하면 서로 다른데도 불구하고, 다양한 고대 그리고 중세 작가들에 의하여 그러한 혈족 관계가 옹호된다. 그 이론은 중세 조지아(그루지야)에서 인기 있었던 듯하다. 저명한 조지아(그루지야)의 종교 필자 기오르기 므타츠민델리(아토스의 게오르게)(1009~1065년)는 확실한 조지아(그루지야) 귀족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여행하기를 희망함에 대하여 기술하고 그들의 요청으로 지역의 "서방의 조지아인(그루지야인)"을 방문한다.[8]

같이 보기[편집]

참조[편집]

  1. Course of Ancient Geography, Henry Immanuel Smith, p. 279.
  2. The Roman Eastern Frontier and the Persian Wars, Geoffrey Greatrex, Samuel N. C. Lieu, p. 82
  3. The Emperor Domitian, Brian W. Jones, p. 156.
  4. Ronald Grigor Suny. The Making of the Georgian Nation. Indiana University Press, p. 13 ISBN 0-253-20915-3.
  5. William Coffman McDermott, Wallace Everett Caldwell. Readings in the History of the Ancient World. p. 404.
  6. Suren Yeremyan|Yeremyan, Suren T. «Իբերիա» (Iberia). Soviet Armenian Encyclopedia. vol. iv. Yerevan, Armenian SSR: Armenian Academy of Sciences, 1978, p. 306.
  7. Rapp, Stephen H. (2003), Studies In Medieval Georgian Historiography: Early Texts And Eurasian Contexts, pp. 141-142. Peeters Publishers, ISBN 90-429-1318-5.
  8. Georgians: Webster's Quotations, Facts and Phrases pg 25

더 보기[편집]

  • Thomson, Robert W. Rewriting Caucasian History (1996) ISBN 0-19-826373-2
  • Braund, David. Georgia in Antiquity: A History of Colchis and Transcaucasian Iberia, 550 BC-AD 562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4) ISBN 0-19-814473-3
  • Lang, David Marshall. The Georgians (London: Thames & Hudson, 1966)
  • Toumanoff, Cyril. Studies in Christian Caucasian History. Washington D.C.: Georgetown University Press, 19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