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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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슈토어 :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다리어 : 아프가네스탄 이슬람 공화국
파슈토어: د افغانستان اسلامي جمهوریت
다리어: جمهوری اسلامی افغانستان
Flag of Afghanistan.svg Emblem of Afghanistan.svg
국기 국장
표어 없음
국가 국가
Afghanistan on the globe (Afro-Eurasia centered).svg
수도 카불 북위 34° 31′ 59″ 동경 69° 09′ 58″ / 북위 34.533056° 동경 69.166111° / 34.533056; 69.166111
정치
공용어 파슈토어, 다리어[1]
정부 형태 단일 국가 대통령제 이슬람 공화국
대통령
부통령

대법원장
하미드 카르자이
무함마드 카심 파힘
카림 할릴리
압둘 살람 아지미
역사
독립 영국에서 독립
 • 독립 1919년 8월 19일
지리
면적 647,500km² (41 위)
내수면 비율 0%
시간대 (UTC+4:30)
DST UTC+4:30
인구
2009년 어림 28,150,000명[2]
1979년 조사 13,051,358명 (37위)
인구 밀도 43.5명/km² (150위)
경제
GDP(PPP) 2008년 어림값
 • 전체 $213억8800만[3] (96위)
 • 일인당 $760[3] (172위)
HDI 0.374 (175위, 2012년 조사)
통화 아프가니 (AFN)
기타
ISO 3166-1 004, AF, AFG
도메인 .af
국제 전화 +93
최초의 아프가니스탄 독립 국가는 두라니 왕조로 1747년 10월에 성립하였다. 이 나라는 1919년에서 1973년까지는 아프가니스탄 왕국이었다.
  1. Afghanistan, 2007-12-13, 월드 팩트북, CIA.
  2. World Population Prospects, Table A.1, 2008 revision, PDF 파일, United Nations, Department of Economic and Social Affairs Population Division, 2009.
  3. Afghanistan, International Monetary Fund.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아프가니스탄이슬람共和國, 파슈토어: د افغانستان اسلامي جمهوریت 다 아프가니스탄 이슬라미 좀호리야트, 다리어: جمهوری اسلامی افغانستان 좀후리예 에슬라미예 아프가네스탄), 줄여서 아프가니스탄(파슈토어: افغانستان 아프가니스탄, 다리어: افغانستان 아프가네스탄), 아프간 또는 아부한사단(亞富汗斯坦)은 남아시아중앙아시아에 걸쳐 있는 내륙국이다. 북쪽은 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 북동쪽은 중화인민공화국, 동쪽과 남쪽은 파키스탄, 서쪽은 이란과 맞닿아 있다. 수도는 카불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세계 최빈국으로 손꼽힌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으로 알려진 이 지역은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고대에 비단길이주의 중심지였다. 또 중앙아시아이란 사이에 있어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이 땅은 수많은 침략자들의 표적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이곳에서 이웃 지역을 침공하여 제국을 이루는 경우도 있었다. 1747년, 아흐마드 샤 두라니두라니 제국을 세웠는데, 이 때가 근대 아프가니스탄의 시발점으로 여겨진다.[1] 나중에 두라니 제국의 도읍은 칸다하르에서 카불로 옮겨졌으며, 제국 영토 대부분은 이웃 강국들에게 빼앗겼다. 19세기 말, 영국령 인도 제국러시아 제국이 "거대한 경쟁"(The Great Game)을 벌이는 가운데 아프가니스탄은 두 제국의 완충국으로 전락하였다.[2] 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1919년 8월 19일에 이 나라는 영국에게서 독립을 쟁취하였다.

1970년대 말부터 아프가니스탄은 내전 상태에 빠진 상황이며, 1979년에 소비에트 연방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2001년 미국 주도로 탈레반을 축출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외국의 점령을 겪게 된다. 2001년 말, 국제 연합 안전보장이사회북대서양 조약기구 군대로 구성된 국제 안보 지원군(ISAF) 창설을 승인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은 후발 개발도상국의 하나로, 농업과 목축에의 의존도가 높다. 현재 해외 원조로 재건되고 있으나 심각한 내부 분쟁을 겪고 있다.

지리[편집]

아프가니스탄의 지형도

아프가니스탄의 총 면적은 647,500 km²로, 세계에서 41번째로 넓은 나라이다. 북쪽 아무다리야 강을 사이에 둔 국경으로는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이 있으며, 서쪽에는 이란, 남쪽 힌두쿠시 산맥 너머로는 파키스탄, 동쪽에는 중화인민공화국과 맞닿아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내륙국으로 산악 지형이 국토 대부분을 차지하고, 평야는 북쪽과 남서쪽에 펼쳐져 있다. 가장 높은 산은 해발고도 7,485m의 노샤크 산이다. 기후는 지역마다 편차가 크며, 변화도 심하다. 국토 상당 부분은 건조하고 담수 공급이 부족하다. 내부 유역 분지시스탄 분지는 전 세계에서 건조한 지역으로 손꼽히는 곳이다.[3] 아프가니스탄은 대륙성 기후를 보이며, 중앙 고원은 겨울에 몹시 춥고, 빙하화된 북동부(누리스탄 주변)와 와한 회랑 지대는 1월 평균 기온이 영하 15도에 이르며, 남서부의 시스탄 분지와 동부의 잘랄라바드 분지 그리고 북부의 아무다리야 강을 따라 이어진 아프간 투르키스탄 평원의 저지대는 여름에 무척 덥고 6월 평균 기온이 35도를 넘는다. 이 나라는 소규모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데, 특히 힌두쿠시 산맥 지방의 북동부에서 주로 일어난다. 1988년 5월 31일에 일어난 지진으로 마을 125곳이 파괴되고, 4,000명이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의 천연 자원으로는 남동부의 , , 구리, 아연, 철광석, 북동부의 귀금속과 보석(청금석, 에메랄드, 사파이어 등), 잠재 매장량이 상당한 북부의 석유천연 가스가 있다. 그 밖에도 우라늄, 석탄, 크롬, 활석, 중정석, , , 소금이 있다.[4][5][6][7]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의 침공과 이후 내전으로 말미암아 아프가니스탄의 풍부한 광물 및 에너지 자원은 개발되지 않은 실정이다. 가까운 장래에 자원 채굴 계획이 준비 중에 있다.[8][9]

역사[편집]

수백년간 아프가니스탄 땅은 페르시아 제국의 동부 영토였으며, 지금까지도 이 나라는 이란 문화의 동쪽 접경을 이루고 있다.

근대적인 아프가니스탄 국가는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1747년에 세웠으나,[1] 이 땅은 유구한 역사를 지녔으며 다양한 문명들이 들어선 바 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루이스 뒤프레, 스미소니언 학회 등에서 발굴한 원시 시대 유적을 보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땅에 사람이 산 것은 적어도 50,000년 전의 일이며, 이 지역의 농경 집단은 세계적으로 초기에 속함을 알 수 있다.[10][11]

아프가니스탄은 수많은 인도-유럽 문명들이 상호작용하고 투쟁하던 독특한 연결점이며, 초기 역사에서 중요한 땅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이 땅은 온갖 민족의 터전이었는데, 그 가운데는 박트리아, 아리아, 아라코시아아리아인 계통의 인도-이란인도 있었다. 또 이 땅을 정복한 집단으로는 메디아 제국, 페르시아 제국,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 셀레우코스 제국, 인도-그리스 왕국, 튀르크인, 몽골인 등이 있었다. 현대에는 영국소비에트 연방이, 그리고 최근에는 미국과 동맹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한편 아프가니스탄 원주민 집단은 주변의 이란 고원, 중앙 아시아, 인도 아대륙을 침략하여 자신들의 제국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슬람 이전 시대[편집]

기원전 2000년에는 인도-유럽어족 아리아인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리아인들은 원래 아프가니스탄에서 기원을 두고 이 곳에서 남쪽의 인도나 서쪽의 페르시아로 간 것 같지는 않고,[12] 다만 카스피 해 북쪽을 통해 유럽으로 이주한 것 같다. 이들은 아이리아넴 바에자라는 민족을 이루게 된다. 아리아인의 원래 터전은 아나톨리아, 쿠르디스탄, 중앙 아시아, 이란 또는 아프가니스탄이라고 하는데, 이런 각 주장에 따라 역사상의 이주 방향이 달라진다.[13][14] 나중에 파르티아사산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 곳은 "아리아인들이 지배하는 땅"을 뜻하는 '이란사르'(틀:Lang-fa)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최대 판도. 기원전 180년경.

자라투스트라교(조로아스터교)가 발생한 곳은 기원전 1800년~800년 사이의 아프가니스탄 땅으로 여겨지는데, 창시자 자라투스트라발흐에서 살다가 죽었기 때문이다.[15][16] 자라투스트라교가 발흥하던 시기에 아베스탄어와 같은 고대 동부 이란 언어는 이 지역에서 쓰인 것으로 짐작된다. 기원전 6세기 중엽, 아케메네스 왕조페르시아 제국메디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아프가니스탄(그리스인들은 아라코시아라고 불렀다)을 병합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30년 이후에 아프가니스탄을 정복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 땅을 잠시 정복한 이후 후계국인 셀레우코스 제국이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다 기원전 305년에 동맹 조약의 일환으로 인도의 마우리아 제국에 이 지역 대부분을 넘겨 주게 된다. 마우리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힌두교불교가 아프가니스탄 땅의 주요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185년에 마우리아 제국이 숭가 제국에 무너지고, 기원전 180년경에는 헬레니즘 국가인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재정복하였다. 이내 아프가니스탄 상당 부분은 그리스-박트리아에서 떨어져나가 인도-그리스 왕국의 영토로 넘어간다. 인도-그리스 왕국은 인도-스키타이에 패배하고, 기원전 2세기 말에 이르면 아프가니스탄 땅 대부분을 잃게 된다.

1세기경, 파르티아 제국이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였으나, 인도-파르티아 봉신들에게 땅 빼앗겼다. 기원후 1세기 중엽에서 말엽에는 광대한 쿠샨 제국이 아프가니스탄 땅을 중심에 두고, 불교 문화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다. 3세기에 쿠샨 제국은 사산 왕조에 격퇴되었다. 스스로를 쿠샨샤스(보통 인도-사산으로 알려짐)라고 부른 수많은 통치자들이 이 땅의 일부를 계속 다스렸으나, 이들은 아마 사산 왕조에 종속되어 있었을 것이다.[17] 후기 쿠샨 이후로는 키다라 훈족[18]이 지배자가 되었다가, 강력한 에프탈이 5세기 초에 잠시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였다.[19] 서기 557년에 사산 왕조의 호스로 1세가 에프탈을 무찌르고, 페르시아에서 사산 왕조의 패권을 재확립하였다. 그러나 쿠샨과 에프탈의 후손들이 카불리스탄쿠샨-에프탈 또는 카불-샤한이라 불리는 작은 왕조를 세웠는데, 이들은 나중에 무슬림 아랍인에게 패배하고, 결국은 가즈나 왕조의 무슬림 튀르크 군대에 정복되었다.

이슬람과 몽골의 정복[편집]

아프가니스탄은 서기 750년에 이슬람 할리파 국가의 동쪽 접경 지대였다.

서기 9세기까지 이어지는 중세 시대에 아프가니스탄은 대 호라산 지방의 일부였다.[20][21][22] 그리하여 발흐, 헤라트, 가즈니, 카불 등 호라산의 여러 중심지가 아프가니스탄 땅에 있었다. 이 시기에 이슬람이 이 땅에 전파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지방은 여러 제국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샤히 왕조, 사만 왕조(875–999), 가즈나 왕조(977–1187), 셀주크 왕조 (1037–1194), 구르 왕조(1149–1212), 몽골 제국, 일 한국(1225–1335), 티무르 제국 (1370–1506)이 바로 그러하다. 이 가운데 가즈나 왕조[23]와 티무르 왕조[24] 시대는 아프가니스탄 역사에서 대단히 번영했던 시대로 여겨진다.

1219년, 이 지역은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인의 침략을 받아 황폐화되는데, 가령 헤라트발흐의 고대 도시에 있는 모든 사람을 절멸시키기도 하였다.[25] 몽골인의 파괴로 주요 도시들의 인구가 격감하고, 수많은 주민들이 농경 생활로 돌아가게 되었다.[26] 이들의 지배는 일 한국 때에도 지속되었으며 중앙 아시아 출신의 지배자 티무르의 침공 이후로 더욱 확대되었다. 1504년에 티무르와 칭기즈 칸의 후손인 바부르무굴 제국을 세우고 카불을 도읍으로 삼았다. 1700년대 초, 아프가니스탄은 여러 집단의 지배를 받았는데, 북쪽은 우즈베크인, 서쪽은 사파비 왕조가, 나머지 지역은 무굴 제국과 지역 부족들이 지배하였다.

호타크 왕조[편집]

1709년, 길자이 부족의 파슈툰족인 미르 와이스 호타크가 사파비 왕조의 칸다하르 태수인 구르긴 칸을 죽였다. 미르 와이스는 사파비 왕조의 토벌군을 무찌르고 칸다하르 지방을 장악하여 1705년에 죽을 때까지 지배하였다. 그의 아들 미르 마흐무드 호타키가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1722년, 미르 마흐무드가 아프가니스탄 군대를 이끌고 이란의 이스파한으로 진군하여 도시를 약탈하고 자신을 페르시아의 왕으로 선포하였으나, 대다수 사람들은 아프가니스탄 지배자를 찬탈자로 여겨 거부하였으며,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이스파한 시민 수 천명을 학살한 이후 (그 가운데는 3천 명이 넘는 신학자, 귀족, 사파비 왕족도 있었다.) 이들은 결국 페르시아의 새 지배자인 나디르 샤에게 격퇴되었다.[27][28]

두라니 제국[편집]

두라니 왕조의 병사들.

1738년, 나디르 샤와 그의 군대(그 가운데는 4천 명의 파슈툰족 압달리 씨족도 있었다.[29])는 칸다하르 지방을 정복하였으며, 같은 해에 가즈니, 카불, 라호르도 그의 손에 떨어졌다. 1747년 6월 19일, 나디르 샤는 암살당하였는데, 이 일은 조카 알리 콜리의 음모로 말미암은 것 같다. 나디르가 죽자 그의 부장이자 경호병이었던 압달리 씨족의 파슈툰족 아흐마드 샤 압달리로야 지르가('대회의')를 요청하였다. 칸다하르에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모여 아흐마드 샤를 새 통치자로 삼고, 1747년 10월에 대관식을 치렀다. 아흐마드 샤는 근대 아프가니스탄의 창건자로 여겨지기도 한다.[4][30][31] 임금이 된 아흐마드 샤는 자신의 칭호이자 씨족명을 '두라니'로 바꾸었는데, 이 말은 '진주'를 뜻하는 페르시아어 '두르'에서 나온 말이었다.[29]

1751년, 아흐마드 샤 두라니와 그의 아프가니스탄 군대는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이란의 호라산 주코히스탄 주를 비롯해 인도의 델리까지 정복하였다.[32] 1772년 10월, 아흐마드 샤는 퇴위하여 고향인 칸다하르의 마루프로 돌아가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 티무르 샤 두라니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수도를 칸다하르에서 카불로 옮겼다. 티무르 샤는 1793년에 죽었으며, 아들 자만 샤 두라니가 왕권을 승계하였다.

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손자들은 위대한 선조들이 이룬 유산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다. 이들은 서로 갈라져 "추방, 눈멀게 하기, 처형을 되풀이"하였으며,[33] 결국 벌리 떨어진 아토크나 카슈미르같은 영토의 지배권이 약화되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결과로는 압달리의 손자인 샤 슈자-울-물크가 형제의 분노를 피해 시크 교도에게로 피신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일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압달리가 펀자브 지방을 여러 차례 침략했던데다, 얼마 전에도 시크교의 가장 거룩한 성소인 암리차르하르만디르 샤히브를 파괴하고 소의 피로 사로와르를 더럽혔던 적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하라자 란지트 싱그 휘하의 시크 교도들은 결국 아프가니스탄의 카불 왕국(오늘날 신드를 제외한 파키스탄 전역)에서 상당한 영토를 빼앗았다.[34]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맡은 시크 제국의 군 사령관인 하리 싱그 날와는 힌두쿠시 산맥 산자락까지 진출해 국경선으로 삼았다.[35] 시크 교도들은 파슈툰족의 심장부에 잔학 행위를 일삼았다. 1837년, 카이바르 고개를 통해 아프가니스탄 군대 전체가 잠루드의 소규모 시크 군대를 공격하였다. 수적 열세와 용맹한 장군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하리 싱그 날와의 악명 때문에 카불 왕국의 전 군대는 일 주일이 넘도록 진군하지 못하였으며, 이때 라호르에서 시크의 지원군이 잠루드에 당도하였다.[36]

유럽의 침략과 아프가니스탄의 독립[편집]

19세기에 영국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에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고 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1839년 ~ 1842년), 제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1878년 ~ 1880년), 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1919년)을 거치며 바라크자이 왕조 성립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에게서 상당한 영토와 자치를 얻어냈다.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1919년 아마눌라가 왕위에 오르면서 아프가니스탄 왕국이 성립하여 아프가니스탄은 외세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영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간섭하던 당시 파슈툰족의 영토는 듀런드 라인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 선으로 말미암아 아프가니스탄과 영국령 인도(후대에 신생국 파키스탄)간의 긴장 관계가 생기는데, 나중에 이는 파슈투니스탄 논란으로 알려지게 된다.

아프가니스탄 왕국[편집]

베를린을 방문한 아마눌라 왕. 이 방문으로 오늘날까지 아프가니스탄과 독일의 견고한 동맹이 시작된다.

아마눌라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전통적인 고립 정책을 버렸다. 그는 대부분의 주요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1927년에 터키유럽을 순방한 이후 (이때 그는 아타튀르크의 근대화와 세속화에 관심을 가졌다), 아프가니스탄의 근대화를 위한 여러 개혁을 실시하였다.

아마눌라의 개혁 이면에는 아물라 칸의 장인이자 외교 장관이었던 마흐무드 벡 타르지가 있었는데, 그는 여성 교육을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헌법(로야 지르가를 통해 선포되었다) 중 초등 의무 교육을 규정한 68조를 위해 투쟁하였다.[37] 전통적인 무슬림 여성 베일을 폐지하고 수많은 남녀 공학 학교를 개설하는 등 개혁책 가운데 일부가 시행되자 이내 여러 부족과 종교 지도자들이 소외되었다. 아마눌라는 압도적인 군사적 반대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1929년 1월에 바차 이 사카오가 이끄는 군대가 카불을 함락하면서 강제로 퇴위당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에 아마눌라와 사촌간인 나디르 샤 왕자가 사카오를 처형하고, 파슈툰 부족의 상당한 지지를 얻어 나디르 샤 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는 권력을 공고히 다지고, 나라를 새로이 고쳤다. 그는 점진적인 근대화 방식을 선호했던 아물라 칸의 개혁 정책을 포기하는 등 복고적 정책을 펼치다가 1933년에 그는 카불의 어느 학생에게 보복 살해를 당하고 만다.

나디르 샤의 19살된 아들인 무함마드 자히르 샤가 1933년에 왕위에 올라 1973년까지 나라를 다스렸다. 무함마드 자히르 샤의 치세에 아프가니스탄은 가장 긴 안정기를 맞았다. 1946년까지 자히르 샤는 총리직을 맞아 나디르 샤의 정책을 계승한 숙부의 도움을 받아 통치하였다. 1946년에 자히르 샤의 다른 숙부인 사르다르 샤 마흐무드 칸이 총리가 되어 정치적 자유를 크게 확대하는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상황이 더욱 진전되자 당초의 정책을 뒤엎게 된다.

1973년, 그의 뒤를 이어 왕의 사촌이자 처남이었던 무함마드 다우드 칸이 총리가 되었다. 다우드는 소비에트 연방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파키스탄과는 거리를 두려 하였다. 이 시기에 아프가니스탄은 중립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지 않았으며, 냉전 이후에는 어느 진영과도 동맹을 맺지 않았다.

그러나 냉전기에는 소련과 미국이 호텔이나 하수도 등의 건설 사업을 통해 이 곳의 영향력을 얻고자 경쟁하면서 이득을 보았다. 이란으로 가는 2차선 도로도 건설되어 헤라트, 칸다하르, 카불을 거쳐 파키스탄 국경까지 이어졌다. 1960년대 말에는 수많은 여행자들이 이곳을 히피 여행 경로로 이용하였다.

아프가니스탄 공화국[편집]

1973년, 자히르 샤가 국외 순방 중일 때 무함마드 다우드가 무혈 정변을 일으켜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무함마드 다우드는 아프가니스탄의 라디오를 반파키스탄 방송으로 채웠으며, 소련과 미국에게서 개발 원조를 기대하였다.

1978년에 아프가니스탄 인민 민주당(PDPA)의 유력 당원인 미르 아크바르 카이바르가 정부에 의해 살해되었다. 인민 민주당 지도자들은 다우드가 자신들을 모조리 몰아낼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두려워하였으며, 과연 그 직후에 지도부 상당수가 정부에 체포되었다. 하피줄라 아민과 인민 민주당의 군부 인사들은 건재하여 반란을 도모하였다.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 바브락 카르말, 하피줄라 아민이 이끄는 인민 민주당은 무함마드 다우드 정권을 전복하였으며, 다우드는 가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 정변은 사우르 혁명, 즉 위대한 4월 혁명으로 알려졌다. 1978년 5월 1일, 타라키는 대통령, 총리, 인민 민주당 사무총장직을 겸임하였다. 그리하여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으로 개명하였으며, 인민 민주당 정권은 1991년까지 존속하였다.

1978년의 칼크 반란으로 두라니족(다우드 칸을 비롯하여 이전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왕조)과 대립하던 파슈툰족길자이 부족이 소생하게 되었다.[38]

소련 침공 이전에 카불에 있던 여왕 궁전. 아프가니스탄 인민 민주당의 당사로 쓰였다.

권력을 잡은 인민 민주당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야심찬 토지 개혁을 실시하여 전국의 농민 부채를 탕감하였다. 이들은 또 여성의 권리에 관한 여러 정책을 내놓고 여성을 정계로 끌어들였다. 저명한 여성 정치인으로 아나히타 라테브자드를 들 수 있는데, 그녀는 유력한 마르크스주의자 지도자이자 혁명 평의회의 의원이었다. 라테브자드는 1978년 5월 28일에 '뉴 카불 타임스' 지의 사설에서 '권리를 통해 여성은 평등한 교육, 직업, 안전, 의료 서비스, 국가의 미래를 위해 건강한 자녀를 기를 자유 시간을 누려야 하며 ... 여성을 교육하고 계몽하는 일은 이제 정부의 각별한 관심을 받는 일이다."라고 썼다.[39]

카불 등 도시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정책에 환영하기도 하고 양가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세속적 성격 때문에 농촌 지역에 사는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이에 반감을 가졌으며, 전통적인 이슬람 율법을 선호하였다.

당시 미국은 이런 상황이 소련을 약화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냉전 전략의 일환으로 1979년에 지미 카터의 미국 정부는 암암리에 親소련파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들에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이 일로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일깨웠다.[40] 무자히딘은 여러 상이한 세력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유사한 보수적인 이슬람 이념을 공유하고 있었다.

1979년 3월, 하피줄라 아민이 총리가 되었으며, 원수직을 보유하고 최고 국방 평의회의 부의장이 되었다. 타라키는 대통령직을 유지했으며, 군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9월 14일, 아민이 타라키를 배반하여, 타라키는 목숨을 잃는다. 그러나 아민의 총리 임기는 몇 달을 채 넘기지 못하였다.

소비에트 연방의 침공과 내전[편집]

아프가니스탄 인민 민주당의 파르참 파를 지원하기 위해 소비에트 연방은 1978년에 양국이 맺은 우호 협력 및 선린 조약을 명분으로 1979년 12월 24일에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하였다. 10여 만 병력이 넘는 소비에트 군대가 침공에 동원되었으며, 만여 명의 병력과 파르참 파의 구성원들도 가세하였다. 아민은 살해당하고 바브라크 카르말이 뒤를 이었다.

1988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는 소련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응하여 냉전 전략의 일환으로 미국은 무장하고 소련 점령군에 맞서 봉기한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히딘을 지원하였다. 미국의 지원은 카터 행정부 때 시작되었으나, 레이건 행정부에서 크게 늘어나, 당시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 앙골라, 니카라과 등의 반공 저항 운동을 지원하도록 규정한 이른바 레이건 독트린의 핵심 사항이 되었다. 무자히딘은 미국의 지원과 더불어 파키스탄, 사우디 아라비아 등의 지원도 받았다.

소련의 점령으로 6만~2백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이 살상되었다. 5백여만이 넘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조국을 등지고 파키스탄, 이란 등 해외로 떠났다. 국제 사회의 압력을 받은데다 사상자가 크게 늘면서 소련은 1989년에 철수하였다.

소련은 계속 무함마드 나지불라 대통령(전에는 아프가니스탄 비밀 경찰 KHAD의 수장이었다.)을 지원하다가 1992년에 새 러시아 정부가 나지불라 정권에 석유 제품 판매를 거부하였다.[41]

전쟁 때문에 수많은 엘리트와 지식인들이 해외로 피신하여,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지도층의 불균형 현상이 일어났다. 소련군을 물리친 무자히딘 내 각 분파들은 계속 서로 싸웠으며, 아프가니스탄은 군벌 내전 상태에 빠졌다. 이 시기에 가장 심각한 전투는 1994년에 있었는데, 카불 한 곳에서 10,0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 탈리반(탈레반)이 정치-종교 세력으로 성장하여 결국 1996년에 카불을 장악하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을 세웠다. 2000년 말에 탈리반은 국토의 95%를 장악하고 있었다.

탈리반이 7년간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면서, 주민 대다수는 자유가 억압당하고 인권이 유린당했다. 여성은 직업을 가지는 것이 엄금되었으며, 어린 여성이 학교나 대학에 가는 것도 엄금되었다.[42] 공산주의자들은 조직적으로 근절되었으며, 절도범은 손이나 발이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43] 2001년에 탈리반은 아편 생산을 거의 일소하였다.[44]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편집]

국제 연합에서 밝히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국내의 안보 위험과 아편 재배의 정도를 나타낸 지도.

2001년 8월, 미국 국무성 관리 크리스티나 로카(Christina Rocca)는 미국 에너지 대기업 우노칼(Unocal)이 계획하는 아프가니스탄을 통과하는 석유 및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 문제를 놓고 탈리반과 마지막 협상차 만났다. 여기서 로카는 "우리가 주는 선의의 융단을 수락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당신네들을 융단 폭격으로 파묻어 버리겠습니다."라고 발언하였다.[45][46][47][48][49]

2001년 9·11 테러 하루 전날인 9월 10일,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리반 정권이 알 카이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의 신병을 넘겨주지 않을 시 탈리반 정권을 전복시키기로 결정하였다.[50]

9·11 테러 당시 비행기를 납치한 19명의 테러범 가운데 아프가니스탄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며, 아무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살지도 않았으며(이들은 함부르크에서 살았다), 아무도 아프가니스탄에서 훈련받지도 않았으며(이들은 플로리다에서 훈련받았다), 아무도 아프가니스탄의 비행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이들은 미네소타에서 비행 연습을 했다)[51]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내 알 카이다 테러범 훈련소를 파괴하는 군사 작전인 항구적 자유 작전을 개시하였다. 미국 군대는 빈 라덴과 여러 알 카이다 조직원들을 인계하는데 거부한 탈리반 정부도 전복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미국은 이를 위해 옛 아프가니스탄 무자히딘과 공동의 목표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 가운데는 아직도 아프가니스탄 정부로 국제 연합에서 승인받은 민병대인 북부 동맹도 있었다.

2001년 말, 미국은 특별 작전 부대의 CIA 정보기관 첩보원과 미군 특수 부대를 아프가니스탄에 투입하여, 탈리반과 알 카이다에 대한 공중 타격을 지원받던 反탈리반 민병대를 지원하도록 하였는데, 그리하여 북부 동맹이 카불을 함락하고, 탈리반 정권이 무너졌으며, 탈리반과 동맹 관계였던 여러 지방 군벌들이 북부 동맹으로 돌아섰다.[52]

2001년 12월, 옛 무자히딘의 지도자과 난민들이 독일에서 만나 본 협정을 맺었는데, 여기서 아프가니스탄에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고, 칸다하르 시 남부 출신으로 파슈툰족 두라니 씨족(옛 왕가 출신) 사람인 하미드 카르자이아프가니스탄 과도 정부의 의장으로 세우기로 하였다.

2002년 전국적인 로야 지르가(원로 회의) 이후, 카르자이는 아프가니스탄 과도 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03년에 이 나라에서는 제헌 로야 지르가를 소집하여, 2004년 1월에 새로운 아프가니스탄 헌법을 비준하였다. 2004년 10월에 선거가 열려, 카르자이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의회 선거는 2005년 9월에 열렸다. 1973년 이래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처음으로 자유롭게 선출된 아프가니스탄 국민 의회가 2005년 12월에 개회하였으며, 여성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인정하여 주목을 끌었다.

아프가니스탄은 계속 재건 중인 상태이지만, 빈곤과 기반 시설 부족, 지뢰나 미폭발 화기의 지나친 집중, 불법적인 양귀비 재배와 아편 거래 등 문제가 산적해 있다. 또 아프가니스탄은 아직도 이따금 정치 폭력 사태가 벌어진다. 이 나라는 아직 탈리반 반군과 싸우고 있으며, 알 카이다 잔당의 공격 위험도 남아있다.

2007년부터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리반이 나타나는 빈도가 늘어난다는 보고로 말미암아 미국은 파병 기간 연장에다가 심지어 군대 증파까지 고려하게 되었다. 2007년 1월 16일, AP 통신의 로버트 번즈가 취재한 기사에 따르면, "미군 관리가 탈리반 운동과 오랜 관계를 맺어온 파키스탄 군부가 탈리반의 공격을 눈감아주고 있다는 새 증거를 언급하였다"고 한다.[53] 또 "2006년 9월이래 반군 공격 횟수가 300% 증가하였으며, 이때 파키스탄 정부는 아프가니스탄 동부 국경에 있는 북부 와지리스탄 지방의 부족 지도자들과 화의를 맺었다"라고 미국 첩보 장교가 기자에게 증언하였다.[53]

2008년 말, 탈리반은 알 카이다와 남은 관계를 끊었다.[54] 미군 고위 첩보 관리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에 남은 알 카이다 조직원은 100명 이하라고 한다.[55]

2009년 12월 1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6개월 이상 미군 30,000명 병력을 추가 파병하여 미군의 지원을 확대하겠다고 발표하였다.[56] 그는 또 파병 시점부터 18개월 이후부터 미군 철수를 시작하겠다고 제시하였다.[57][58] 다음날 아프가니스탄의 미군 지휘관 스탠리 A. 맥크리스털 장군은 파병 일정은 바뀔 수도 있다고 언급하며, "확실하지 않다"고 밝혔으며,[59] 로버트 게이츠 국방부 장관은 미국 상원 군사 상임 위원회 의원에게 2011년 7월에는 파병이 완료될 수 있을지 질의받자 "최고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은 항상 자신의 결정을 수정할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다."고 답하였다.[60] 12월 7일, 아프가니스탄의 카르자이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군대가 반군을 제압할 준비가 되려면 5년 정도 걸릴 것이라고 말하였다.[61] 하지만 미군이 철수하게 되면 아프가니스탄이 다시 탈레반과 알카에다에 의해 점령당할 것이라는 우려가 생기고 있다.[62]

정치[편집]

2004년 12월 7일, 하미드 카르자이의 대통령 취임식.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사는 권력 투쟁, 유혈 정변, 불안정한 권력 이동으로 점철되었다. 지난 20세기 동안 이 나라는 군사 독재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 정치 형태 - 왕정, 공화정, 신정, 공산 통치 - 를 겪었다. 2003년 로야 지르가에서 비준된 헌법으로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삼부로 이루어진 이슬람 공화국이 되었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하미드 카르자이로, 2004년 10월에 이어 2009년 8월 대선에서도 연임하고 있다. 현재 의회는 2005년에 선출되었다. 선출직 공무원 가운데는 옛 무자히딘, 탈리반, 공산주의자, 개혁주의자, 이슬람 근본주의자도 있다. 의원 가운데 28%가 여성으로, 헌법이 보장하는 여성 할당 의석 25% 비율보다 3% 높은 수치이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은 과거 탈리반의 여성 억압으로 악명 높았으나, 지금은 여성 의원 비율로만 보자면 세계 선두권에 있는 나라이다. 2005년 8월 29일에 새 의회 의사당 건설이 시작되었다.

2009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선거는 치안 부재, 낮은 투표 참여, 광범위한 투표지 채우기, 협박, 그 밖의 선거 부정으로 얼룩졌다.[63][64][65] 420 의석의 주 의회 선거를 비롯하여 당시 선거는 2009년 8월 20일에 치러졌으나, 득표수 계산과 선거 부정 조사로 오랜 시간을 끌었다.[66] 두 달 뒤에, 미국과 동맹국의 강력한 압박으로 현직 카르자이 대통령과 그의 주요 정적인 압둘라 간에 결선 투표를 11월 7일에 치르기로 발표가 났다. 그러나 11월 1일에 압둘라 후보가 더이상 결선 투표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는데, 그 이유로 자신이 선거 관리위원회의 변화를 요구한 바가 이행되지 않았으며, '투명한 선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하루 뒤인 11월 2일, 선거 관리위원회는 결선 투표를 취소하고, 하미드 카르자이를 차후 5년 임기의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으로 선포하였다.[64][65]

대선 직후 카불에 주재한 국제 연합 고위 관리인 피터 갤브레이스는 국제 연합이 1차 대선 투표에 앞서 선거 부정 준비가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밝혀야 한다고 촉구하다 해임되었는데, 그는 선거에 앞서 카르자이는 무능하고 부패한 자로 여겨졌는데 이제는 무능하고 부패한데다 적법하지도 않다고 썼다.[67] 한 달 뒤 카불 주재 미국 대사는 본국 정부에 두 편의 기밀 통신을 보내었는데, 여기서 카르자이 정부가 탈리반의 발흥을 조장하고 있는 부패와 실정을 시정할 의지가 있음을 보일 때까지 아프가니스탄에 미군을 더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깊은 우려를 표명하였다.[68] 2009년 11월, 아프가니스탄은 국제 투명성 기구의 연간 부패 지수에서 세 계단이 떨어져, 소말리아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부패가 심한 나라가 되었다.[69]

현재 아프가니스탄 대법원의 대법원장은 압둘 살람 아지미로, 전직 교수출신으로 과거에는 대통령의 법조 비서관을 지낸 바 있었다.[70] 과도 정권에서 임명했던 이전 법원은 파이살 아흐마드 신와리 등 근본주의자 종교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법원은 케이블 텔레비전 금지령을 내리고, 2004년 대선에 한 후보의 출마를 금지하려 했으며, 여성의 권리를 제약하는 등 여러 판결을 내놓았는데, 헌법상의 권한을 무시하고 법원에 맡겨지지도 않은 사안에 대해서도 판결을 내리기도 하였다. 현행 법원은 더욱 온건한 것으로 평가되며, 이전 법원보다는 기술 관료들이 더욱 주도권을 잡고 있다.

법 집행과 군사[편집]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은 70,000명 이상의 국가 경찰을 보유하고 있으며, 앞으로 총 경찰 병력에 80,000에 이를 수 있도록 모병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들은 아프가니스탄 경찰 계획에 따라 훈련받고 있다. 경찰은 공적으로 치안 유지를 담당하고 있지만, 때론 지방 군사 지휘관들이 배후지의 통제권을 계속 행사하기도 한다. 아프가니스탄 경찰은 감옥수를 부적절하게 가두고 학대하여 비판받고 있다. 2003년 국제 안보 지원군(ISAF)의 명령이 지금은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의 지휘 아래 카불 지역 바깥으로도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들 군대가 점령하지 못한 일부 지역에서는 지방 민병대들이 통제권을 잡고 있다. 여러 지역에서 범죄가 수사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 경찰이 불충분한데다 통신이 제대로 되지 않는 탓도 있다. 경찰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일부 지역에서는 아프가니스탄 국방군 부대가 파견되기도 하였다.[71]

아프가니스탄 국방군은 현재 병력이 90,000명이며, 이후 몇 년 안에 260,000명으로 증강할 계획이다. 아프가니스탄 군대는 국제적인 감시 덕분에 경찰처럼 부패하지 않다. 그러나 탈영은 심각한 문제이다. 미국 국방부 자료와 아프가니스탄 재건 감찰관의 자료에 따르면, 2009년 9월에 전투병 네 명 가운데 한 명꼴로 12개월만에 군대를 떠났다고 한다.[72]

치안과 범죄[편집]

아프가니스탄에서 헬만드 주는 가장 위험한 지역인데, 수도 카불에서 가장 먼 데다 마약 거래가 활발하기 때문이다. 다른 위험 지역으로는 칸다하르오루즈간 등을 들 수 있는데, 오루즈간의 경우 최근 네덜란드와 아프가니스탄의 반격으로 치안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 치안이 불안정한 주 대부분이 파키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국토 남부에 자리잡고 있어서, 파키스탄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반군이 유입되는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160개국 가운데 청렴도가 121위이므로, 부정부패가 심한 편이다.[73] 2009년에 카르자이 대통령은 미국, 유럽, 이란의 요구로 내무부에 반부패 기구 두 곳을 설치하였다.[74] 2009년 11월 16일, 아프가니스탄 내무부 장관 하니프 아트마르는 카불에서 기자들에게 미국(FBI), 영국(런던 경찰국), 유럽 연합(ELOPE)의 치안 관리들이 이 조직의 직원들을 훈련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외교 관계[편집]

아프가니스탄의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과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 파키스탄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대통령이 함께 있다.

1980년대 소련이 침공하기 이전에 아프가니스탄은 외교 관계에 있어서 중립 및 비동맹의 정책을 추구하였다. 제1차 및 제2차 세계 대전때에도 중립을 유지한 몇 안 되는 독립국이었다. 탈리반 정권이 붕괴된 이래로 새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미국과 여타 북대서양 조약기구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22개국 이상의 북대서양 조약기구 회원국들이 국제 안보 지원군(ISAF)의 일환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수 천명의 병력을 파견하고 있다. 군사 관계 외에도 아프가니스탄은 북대서양 조약기구나 여타 동맹국들과 강력한 경제 관계를 이루고 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최대 지원국이며, 그 밖에도 일본, 영국, 독일, 인도가 있다.[75]

행정 구역[편집]

지도

아프가니스탄은 행정구역상 34개의 (벨리야트)로 구성되어있으며, 각 주는 영내에 주도를 두고 있다. 각 주는 여러 군으로 구성되는데, 각 군은 보통 한 도시나 여러 마을로 되어 있다.

주지사는 내무부에서 임명하며, 군수는 주지사가 임명한다. 주지사는 아프가니스탄 중앙 정부의 대표자이며, 모든 행정 및 공무를 담당한다. 주의 경찰국장은 내무부에서 임명하며, 주지자와 협력하여 주내 모든 도시나 군의 법 집행을 담당한다.

수도 카불은 예외적으로 시장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임명하며, 카불 주에서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

경제[편집]

아프가니스탄의 경제는 2010년 기준으로 지난 몇 년간 발전에도 불구하고 대혼란에 빠져 있으며 해외지원, 농업, 이웃 국가와의 무역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76]

교통[편집]

카불-가르데즈 간 고속도로

토인비가 말한 것처럼 아프가니스탄은 역사상 동서문명의 십자로 역할을 했다.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교통로로 인도에 이르는 길목 구실도 했는데, 근년에는 인도양 항로의 발달 및 국제항공의 발달로 유라시아 대륙 중앙에 위치하는데서 오는 종래의 우위성은 없어졌다. 카불-칸다하르사이, 64년 구 소련의 원조로 개통된 카불에서 힌두쿠시 산맥을 관통하는 살랑터널 등의 간선도로는 좋으나, 그 외는 사막도로이다. [77]

사회[편집]

주민[편집]

주요 민족 (2003년 추계)

언어[편집]

2004년에 제정한 현행 헌법 1부 16조는 “파슈토어, 다리어, 우즈베크어, 투르크멘어, 발루치어, 파샤이어, 누리스탄어 및 국내에서 말하는 다른 언어들 중에서 파슈토어다리어는 국가의 공용어다. 국가는 아프가니스탄의 모든 언어의 강화 및 발전을 위하여 효과적인 계획을 채택하며 이행한다.

출판과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은 국내에서 말하는 모든 다른 언어들로 자유롭게 한다.”고 했다. 공용어인 파슈토어는 35%, 다리어는 50% 정도가 사용한다. 투르크멘어는 11%를 차지하며, 기타(러시아어, 우즈베크어, 키르기스어, 타지크어, 힌디어, 우르두어 등)도 사용된다.

교육[편집]

문해율은 남성 71%, 여성 57%이다. 탈레반 정권하에서는 여성의 교육 및 사회활동이 엄금되었으나, 탈레반 축출이후에 교육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 그러나 불안한 정세와 이로 인한 교육인프라 부재가 문제이다.

문화[편집]

종교[편집]

이 나라는 이슬람교가 다수를 차지하는 나라이다. 시아파가 다수인 이란과는 달리 수니파가 다수이다.

대외 관계[편집]

파키스탄[편집]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관계는 변동이 심하다. 인도가 분할되어 피카스탄이 신생국이 된 후, 아프가니스탄은 파키스탄과 1947년에 외교 관계를 시작하였다. 탈리반 정권 시절에 파키스탄은 대부분의 탈리반 지도자들과 인맥이 가까워 아프가니스탄에 강력한 영향력이 있었다.[78] 그러나 탈리반이 전복되면서 파키스탄의 영향력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파키스탄은 지금도 아프가니스탄과 안보 및 경제 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긴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 파키스탄의 대립국인 인도의 영향력이 커져 파키스탄의 우려를 낳고 있으며 양국이 듀런드 선을 놓고 국경 분쟁을 계속 벌이고 있어서 양국간의 대립이 남아있다.[79] 2007년부터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군대는 여러 차례 국경에서 교전을 벌이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관리가 파키스탄 첩보 기관이 아프가니스탄의 일부 테러 공격에 관여했다고 주장하면서 양국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80][81]

이란 및 중앙아시아[편집]

역사와 문화 면에서 아프가니스탄은 이웃 나라 이란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데, 두 나라 모두 대 페르시아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과거 두 나라의 관계는 급진적인 순니 이슬람주의자인 탈리반 정권이 집권하면서 악화되었지만, 하미드 카르자이 정부가 들어서면서 관계가 회복되었다.[82] 이란은 아프가니스탄 지원 사업에도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83] 또 아프가니스탄은 러시아와 이웃 중앙 아시아 국가들(특히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 타지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은 역사적으로 매우 관련이 깊으며,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공통점을 지닌다. 아프가니스탄에는 타지크족들이 많이 살고 있다. 오히려 타지키스탄에서 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타지크족들이 더 많이 산다. [84]

인도[편집]

인도는 아프가니스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로 손꼽힌다.[85] 인도는 주변 국가 가운데 아프가니스탄의 최대 지원국이며, 전력, 농업, 교육 사업 등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재건 사업에 광범위하게 참여하고 있다.[86][87] 2002년 이래로 인도는 아프가니스탄에 12억 달러 이상을 원조하였다.[88] 군사 관계도 긴밀한데, 아프가니스탄 보안군은 정기적으로 인도에서 반군 대처 훈련을 받으며[89] 인도는 아프가니스탄에 파병을 검토하고 있다.[90]

대한민국[편집]

2007년 2월 27일 폭탄 테러로 한국군 장병 1명이 사망했고, 같은 해인 2007년 7월 19일가즈니 주 카라바그 부근에서 독일인과 한국인 봉사단 23명이 탈레반에 의해 납치되어 한국인 2명 (목사 1명, 봉사자 1명)이 살해되었고, 결국 협상의 타결로 나머지 일행들은 석방되었다.(→2007년 탈레반 한국인 납치 사건)

대한민국과는 1973년 수교에 합의하였으나 1978년 공산주의 정권 수립과 동시에 단교되었다가 2002년 탈레반 정권 붕괴 이후 과도정부 수립과 함께 재수교하였다. 현재 대한민국은 아프가니스탄에 군사(오쉬노 부대)를 파병하고 있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은 여행 금지 국가이다. 서울 올림픽부산 아시안 게임에 선수단을 파견하였다.

1973년 12월 28일, 아프가니스탄과 북한은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91]

미국[편집]

1993년에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아프가니스탄 출신 선수가 진출하였다.

러시아[편집]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의 점령시절에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이란 소련의 괴뢰국이 세워지는 등 소련의 지배를 10년동안 받아서 안좋은 감정도 가지고 있지만, 러시아와는 대체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기타[편집]

부록[편집]

바깥 고리[편집]

정부[편집]

기타[편집]

사진 화랑[편집]

주석[편집]

  1. Ahmad Shah Durrani, Britannica Concise.
  2. The Decline of the Pashtuns in Afghanistan, Anwar-ul-Haq Ahady, Asian Survey, Vol. 35, No. 7. (Jul., 1995), pp. 621–634.
  3. History of Environmental Change in the Sistan Basin 1976–2005
  4. Afghanistan, CIA World Factbook.
  5. Gold and copper discovered in Afghanistan.
  6. Uranium Mining Issues: 2005 Review.
  7. 16 detained for smuggling chromites, Pajhwok Afghan News.
  8. Afghanistan’s Energy Future and its Potential Implications, Eurasianet.org.
  9. Govt plans to lease out Ainak copper mine, Pajhwok Afghan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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