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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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ública de chile
칠레의 국기 칠레의 국장
(국기) (국장)
표어: Por la Razón o la Fuerza
(포르 라 라손 오 라 푸에르사)
이성으로 혹은 힘으로
국가: 조국의 찬가
칠레의 위치
수도 산티아고
33°26′S, 70°40′W
공용어 에스파냐어
정부 형태 공화제
미첼 바첼레트
독립
 • 독립
에스파냐로부터 독립
1818년 2월 12일
면적
 • 전체
 • 내수면 비율
 
756,950km² (38위)
1.07%
인구
 • 2006년 어림
 • 2002년 조사
 • 인구 밀도
 
16,432,674명 (60위)
15,116,435명
21명/km² (184위)
GDP (PPP)
 • 전체
 • 일인당
2006년 어림값
$2,030억 (46위)
$12,600 (57위)
HDI
 • 2006년 조사

0.874 (40위)
통화 페소 (ISO 4217:VEB)
시간대
 • 여름 시간
(UTC-4)
UTC-3 
ISO 3166-1  152
ISO 3166-1 alpha-2  CL
ISO 3166-1 alpha-3  CHL
인터넷 도메인 .cl
국제 전화 +56

칠레(Chile) 또는 칠레 공화국(스페인어: República de Chile 레푸블리카 데 칠레[*])은 태평양과 안데스 산맥 사이에 길게 뻗은 나라이다. 북쪽에는 페루, 북동쪽에는 볼리비아, 동쪽에는 아르헨티나, 국토 최남단에는 드레이크 해협이 있다. 남아메리카에서 브라질과 국경이 닿지 않는 두 국가 중 한 곳이다. 이 나라의 서쪽 해안은 태평양이며, 그 길이는 6,435km에 이른다. 대륙 본토와 더불어 후안 페르난데스 제도살라스 이 고메스 섬, 데스벤투라다스 제도폴리네시아이스터 섬도 칠레 영토이다. 칠레는 1,250,000 평방 킬로미터에 이르는 남극 영토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칠레령 남극)

칠레는 길이 약 4,300 km, 폭 대략 175 km의 특이한 국토 형태로 말미암아 매우 다양한 기후를 보인다. 북쪽에는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아타카마 사막이 있고, 국토 중앙부에는 지중해성 기후를 보이며, 남쪽에는 눈이 많고 피요르드, 빙하, 호수가 있는 고산 기후를 보인다.

칠레 북부의 사막에는 광물 자원 특히 구리가 풍부하다. 상대적으로 작은 중앙부 지역은 인구와 농업 자원이 많아 이 나라를 주도하는 지역이다. 이곳은 19세기 말에 칠레가 남부와 북부 지역을 병합하며 팽창한 이래 이 나라의 문화적/정치적 중심지였다. 칠레 남부는 숲이 울창하고 초지가 많으며 화산과 호수가 띠를 이룬다. 남쪽 해안은 피요르드와 어귀, 운하, 복잡한 반도와 섬으로 미로를 이룬다. 안데스 산맥이 동쪽 국경으로 뻗어있다.

16세기 에스파냐인이 오기 전부터 칠레 북부는 잉카 제국이 지배했으며, 토착 마푸체인(아라우코)들이 칠레 중앙부와 남부에 살고 있었다. 1810년 칠레는 독립을 선언했으나 1818년에야 에스파냐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태평양 전쟁(1879~1883) 때 칠레는 페루와 볼리비아를 무찌르고 현재 북부 지역을 얻었다. 마푸체인들이 완전히 정복된 것은 1880년대 이후의 일이었다. 칠레는 다른 남아메리카 국가에 비해 쿠데타나 독재 정부가 적은 편이었으나, 20세기 이 대륙에서 매우 잔인했던 17년간 군사 독재(1973-1990)를 감내해야 했다. 독재 정치로 3,000여명이 죽거나 행방불명되었다.

오늘날 칠레는 남아메리카에서 상당히 안정적이고 번영하는 국가이다. 인간개발지수나 (물가와 구매력을 고려한) 1인당 국내총생산(GDP), 국가 경쟁력, 삶의 질, 정치적 안정, 세계화, 경제 자유, 낮은 수준의 부패, 극히 낮은 빈곤율면에서 라틴 아메리카에서 선도적인 위치에 있다. 현재 메르코수르(MERCOSUR)의 협력 회원국으로 미국과 2004년 자유 무역 협정을 맺고 유럽 연합과도 협의가 진행되는 등 경제 활동이 남미에서 가장 활발하다. 칠레는 이 지역에서 언론의 자유와 민주주의 발전이 잘 이루어져 있으나 지니 계수로는 높은 소득 불균등을 보인다.

목차

[편집] 지명 유래

칠레(Chile)의 어원을 두고 여러가지 설이 있다. 18세기 에스파냐 연대기 작가 디에고 데 로살레스가 제시한 가설에 따르자면, 페루의 잉카인들이 아콩카과 산을 "Chili"라고 불렀는데, 15세기 잉카의 정복기에 이 지역을 지배한 피쿤체 족 족장("cacique")의 이름 Tili가 와전된 것이라는 것이다. 다른 설로는 Chili라는 이름의 계곡과 마을이 있는 페루의 카스마 협곡과 아콩카과 협곡이 비슷하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또 토착 마푸체어로 "땅이 끝나는 곳", "지구에서 가장 깊은 지점", 혹은 "갈매기"를 뜻하는 낱말 chili에서 나왔다거나, 케추아어로 "추운"을 뜻하는 chin 혹은 아이마라어로 "눈"을 뜻하는 tchili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또 chili란 말은 마푸체어로 새 소리의 의성어인 cheele-cheele-를 뜻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에스파냐 정복자들은 잉카인에게서 이 이름을 들었으며, 1535~1536년에 페루에서 남쪽으로 간 디에고 데 알마그로의 첫 에스파냐 탐험대의 얼마 안되는 생존자들이 자신들을 스스로 "chili 사람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알마그로는 "칠레(Chile)"라는 국명이 일반화된 곳이라고 한다.


[편집] 역사

마푸체족은 칠레 중부와 남부의 원주민이었다.

[편집] 초기

10,000여년 전, 토착 아메리카인 이주자들이 오늘날 칠레의 해안 지역과 비옥한 계곡에 정착했다. 이곳에 초기 인간이 살았던 흔적은 쿠에바 델 밀로돈발리 아이케 분화구용암굴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때 잉카인들은 현재 칠레 북부까지 진출한 바 있으나, 그곳의 마푸체인들은 국가 조직이 없었으나 잉카 제국의 침략을 수차례 잘 막아냈다. 그들읜 사파 잉카 투팍 유판키와 그의 군대와 싸웠다. 3일간의 피비린내나는 이 전투를 마울레 전투라고 하는데, 이 전투의 결과로 잉카의 칠레 정복은 마울레 강에서 끝났다.

1520년, 세계 일주를 한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남아메리카 대륙 최남단에 그의 이름을 딴 마젤란 해협을 발견한다. 다음으로 칠레에 도착한 유럽인은 디에고 데 알마그로와 그의 에스파냐 정복자 무리로,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영토 분쟁을 일으킨 뒤 그는 1535년 금을 찾기 위해 페루에서 왔다. 그는 "칠레의 발견자"로 여겨지나 이 땅은 이미 임자가 있는 땅이었다. 에스파냐인들은 칠레 땅에서 다양한 문화를 가진 수십만의 토착민과 만나게 된다. 이들은 주로 화전 농업과 사냥으로 먹고 살았다. 본격적인 칠레 정복은 1540년에 시작되,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부관 페드로 데 발다비아가 이끌었다. 그는 산타 루시아 기슭에 산티아고 데 누에바 엑스트레마두라를 건설했다. 비록 에스파냐인들은 그들의 찾던 많은 금과 은을 찾진 못했으나 칠레 중부 계곡이 농사 짓기 좋은 곳임을 알게 되었으며 칠레는 페루 부왕령의 일부가 된다.

페드로 데 발다비아.

이 땅의 정복은 천천히 이루어졌다. 유럽인들은 번번이 토착민의 반란에 시달렸다. 1553년 대규모 마푸체인 반란으로 발다비아가 죽었으며, 식민지의 주요 정착지가 많이 파괴되었다. 이후의 큰 반란이 1598년과 1655년에도 일어났다. 마푸체와 다른 토착 집단이 봉기할때마다 식민지의 남부 국경은 북쪽으로 밀렸다. 1683년 노예제가 폐지되어 식민지와 마푸체 남쪽 땅 사이 국경에서 긴장이 완화되었으며, 둘 사이의 교역이 늘게 되었다.

북쪽은 사막으로, 남쪽은 마푸체인(아라우코)으로, 동쪽은 안데스 산맥으로, 서쪽은 태평양으로 가로막힌 지형 때문에 칠레는 매우 중앙집중화된 지역으로,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영토에서도 매우 동질적인 식민지였다. 국경 수비의 기능을 하던 이 식민지는 스스로 마푸체 그리고 영국, 네덜란드같은 에스파냐의 유럽 적국과 싸웠다. 마푸체뿐 아니라 해적과 영국의 모험가들도 식민지를 위협했다. 그 중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은 1578년 칠레의 주요 항구 발파라이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칠레는 페루와 더불어 아메리카 대륙 중에서도 매우 많은 상비군이 주둔해 에스파냐의 재산을 지키는 지역이었다.

[편집] 독립

1808년 나폴레옹이 에스파냐 국왕을 몰아내고 자신의 동생 조제프를 옹립하면서, 에스파냐에서 독립하려는 시도에 불이 붙었다. 1810년 9월 18일 쫓겨난 왕의 후계자인 페르디난도의 이름을 딴 첫 의회가 열렸다. 이 의회는 칠레를 에스파냐 왕국 내 자치 공화국으로 선언했다. 곧 완전 독립 운동이 폭넓은 지지를 얻게 된다. 에스파냐는 이 땅을 다시 찾고자 하여, 지리한 투쟁이 이어졌다.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간헐적인 전쟁이 계속되다가, 1817년 칠레의 애국자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아르헨티나 독립 전쟁의 영웅 호세 데 산 마르틴이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를 해방시켰다. 1818년 2월 12일 칠레는 오이긴스의 지도 아래 독립 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 반란은 사회에 큰 변화를 주지 못했으며, 19세기 칠레 사회는 여전히 식민지 시대의 사회 계층 구조가 지속되었고, 여기에는 가족 정치와 로마 카톨릭 교회가 큰 영향을 주었다. 강력한 대통령이 등장했으나, 부유층 지주는 여전히 권력을 누렸다.

태평양 전쟁 중 1879년 5월 21일에 일어난 이키케 전투.

19세기 말엽 산티아고 정부는 아라우카니아 병합 당시 마푸체인들을 무자비하게 억압하여 남쪽 지역도 장악했다.1881년 칠레는 아르헨티나와 조약을 맺어 마젤란 해협에 대한 칠레의 영유권을 확정했다. 태평양 전쟁(1879?83)으로 페루와 볼리비아와 싸워 칠레는 볼리비아를 내륙으로 밀어내고 거의 국토의 1/3 넓이의 새 북쪽 땅을 얻었다. 이 곳엔 초석(nitrate)가 풍부하여 칠레의 번영에 기여했다. 1891년 대통령과 의회의 권력 분배를 놓고 일어난 칠레 내전이 일어났고, 칠레는 의회 민주주의 체제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내전은 해외 투자자와 강한 연줄이 있던 에드워드 가문처럼 지역 산업 잘전과 막대한 칠레의 은행 이자의 혜택을 입은 자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그래서 칠레 경제는 과두정 정부의 기득권을 지키는 체제로 퇴보했다. 1920년대에 중산층과 노동계급이 성장하여 개혁주의자 대통령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팔마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보수적인 의회 때문에 좌절되었다. 알레산드리 팔마의 개혁 성향은 어느 정도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식 정부로 변질되었다. 1920년대 마르크스주의 집단이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발흥했다.

디에고 포르탈레스(1793-1837), 칠레 국가를 창건했으며 1833년 헌법을 만들었다.

1924년 루이스 알타미라노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르헨티나는 1932년까지 정치적 불안정을 겪는다. 이 시기 10개 정부중 가장 오래 지속된 정부는 1925년 잠시 권력을 잡았다가, 다시 1927년부터 1931년까지 사실상 독재정권을 수립한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 장군의 정부였다. 그러나 이는 라틴 아메리카 다른 국가에서 빈번했던 군사 독재의 잔인함과 부패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고, 수십년 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사독재정권에 비할 바도 못되었다. 이바녜즈 델 캄포는 비록 이념 성향이 모호하고 변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권력을 포기하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에게 권력을 양도하여 30년이 넘도록 대다수 국민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32년 헌정 질서가 복원되었고 강한 중산층 정당인 급진당이 부상했다. 이후 20년간 급진당은 연정의 주요 세력이었다. 1952년 유권자들은 이바녜즈 델 캄포를 다시 6년 임기의 대통령직에 선출했다. 1958년 호르헤 알레산드리가 이바녜즈 델 캄포를 승계하여 칠레 보수 정치를 다시 민주적으로 전환했다.

1964년 기독교 민주당 에두아르도 프레이 몬탈바가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선출되어 주요 개혁 정책을 폈다. "자유하의 혁명"을 슬로건으로 프레이 정부는 사회 경제 정책, 그 중 특히 교육, 주택, 그리고 농업 노동자의 조합화 등 농업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1967년 프레이는 좌우파 양측의 반대에 부딪혔다. 좌파에서는 그의 정책이 불충분하다고 보았고, 우파가 보기에는 너무 과도하다고 본 것이다. 프레이 정부 임기 말에 그는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뤘으나 기독교 민주당이 당초 바라본 목표를 완수하지는 못했다.

[편집] 사회주의 정권

1970년, 칠레 공산당 후보인 파블로 네루다와 단일화를 이룬 인민연합 후보 살바도르 아옌데는 30% 남짓의 지지도를 바탕으로 그해 총선거에 승리하였다. 아옌데 대통령은 곧바로 사회 제도 개혁에 착수하는데,이는 칠레의 부를 독점하는 소수의 자본가들과 칠레경제를 지배하는 미국계 기업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는 사회개혁내용을 볼 수 있는데, 아옌데 대통령은 자본가들이 독점한 부의 일부를 떼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함으로써 극심한 빈부의 격차문제를 해소하고자 하였다. 또한 미국 광산 회사 아나콘다가 소유한 추키카마타 구리 광산을 국유화하여 외국계 기업들에 의한 국부 유출을 막고자 하였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미 정부는 국제 구리 값을 폭락 시키고 칠레 경제는 공황을 겪게 된다. 또한 미국 CIA에서는 세계최초로 공산주의 정권이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들어선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껴 아옌데를 제거하기 위한 공작을 펴기 시작한다. 하지만 칠레 국민들은 사회개혁을 실천한 아옌데를 지지하여 더 높은 지지율로 재선시킨다. 그러자 칠레 자본가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해고와 가축도살을 통한 실업과 식량난을 조장하였으며, 친미파 장교들이 지배하던 군부에서는 쿠데타 음모를 꾸몄다. 그럼에도 아옌데 대통령은 국가전복음모를 꾸민 군부를 견제하기보다는, 국민투표로 국민의 심판을 받자는 제안을 하였다. 하지만 군부에서는 질 것이 뻔한 게임에 응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폭력으로 나라를 뒤집기에 이른다.

[편집] 극우 군사 독재

1973년 9월 11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칠레군공군 장성 출신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필두로 쿠데타를 일으킨다. 호크기를 동원해 라 모네다(칠레의 대통령궁)을 폭격하는 와중에 아옌데는 대(對)국민 선언을 라디오를 통해 전하고서는 권총으로 피노체트 군에 저항했으나 결국 자살했다. 정권을 탈취한 피노체트 및 장성들은 훈타라고 불리는 삼인 체제를 설립하고 곧 피노체트의 독재가 시작된다. 피노체트는 지금도 칠레 국민들이 살인마라고 부를 정도로 증오하는 대상인데, 그 이유는 16년간의 독재기간동안 정치적 반대자들을 학살, 고문, 심문 등으로 탄압했기 때문이다. 현재 칠레정부에 의해 밝혀진 피노체트군사정권당시 인권침해피해자는 피살자 3,197명(실종자 1,197명포함), 고문피해자 만여 명이며[1], 군사정권 치하에서 가혹행위를 당한 사람은 10만여 명이나 된다. 의회가 폐쇄되고, 그의 말 한마디가 없으면 나뭇잎 하나도 움직일 수 없다고 피노체트 자신이 말할 정도로 심각한 독재로 인해 칠레 국민들은 고통받았다. 또한 피노체트 자신은 경제발전을 약속했으나 오히려 물가가 상승하는등 경제난은 더 심각해졌다.

[편집] 민주화

1989년 선거 후 피노체트 군사정권은 국민들의 환호 속에서 물러났으며, 그 이전부터 군정권의 박해를 받아가면서 진행된 민주화 요구 시위가 있었다.

[편집] 지리

서쪽은 태평양, 동쪽은 안데스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북쪽에는 사막지대가, 중남부에는 피오르드 해안이, 남부에는 빙하 지대가 있다.

지리적 특성에 따라 이름이 있다.

  • 제1주와 제2주를 대북부 (Norte Grande)라고 부른다.
  • 제3주와 제4주를 소북부 (Norte Chico)라고 부른다.
  • 제5주, 산티아고 광역주, 제6주는 중심 지역 (Zona Central)
  • 제7주 부터 제10주까지는 남부 지역 (Zona Sur)
  • 제11주와 제12주는 파타고니아 (Patagonia - 파타고니아)

이들은 구분 할 때 네가지 지리적 특성을 구분한다.

  • 해안 평지 (Planicie Costera)
  • 해안 산맥 (Cordillera de la Costa)
  • 중부 계곡 (Depresión Intermedia)
  • 안데스 산맥 (Cordillera de los Andes)

대북부는 높은 (2,000mt) 해안 산맥이 존재하며 해안 평지가 존재하지 않고, 해안 산맥이 바다로 떨어지는 절벽, 해안 산맥에서 안데스 산맥으로 쭉 이어진다. 또한, 안데스 산맥이 존재한다.

중북부는 해안 산맥과 해안 평지가 뚜렷하게 구분되고, 안데스 산맥이 점점 낮아진다.

중부는 중부 계곡이 가로지르는 산줄기에 의해 끊기며, 이들 작은 산줄기들은 해안 산맥과 안데스 산맥을 연결한다. 산티아고가 삼면이 산으로 가로막히는 형세는 바로 이러한 이유에 있다. 안데스 산맥이 최고 높이를 차지한다. 아콩카과 남미 최고봉이 이 지역에 위치해 있다.

남부는 해안 산맥이 차차 없어지다가 비오-비오 지역 부근에서 약간의 높이를 회복했다가 다시 사라진다. 네개의 지리적 특성이 뚜렷하게 구분된다.

파타고니아의 해안 산맥은 바다 밑으로 가라 앉은 상태이며 그 연장 선상에는 많은 섬들이 나타난다. 칠로에 섬이 이 중 가장 뚜렷하다. 그러므로 해안 평지도, 중심 계곡도 없다. 오직 안데스 산맥만이 위태히 푼타 아레나스 Punta Arenas 북부 까지 내려갔다가, 남극에서 다시 나타난다.

[편집] 행정 구역

이 부분의 본문은 칠레의 행정 구역입니다.

칠레는 13개 행정 주(regiones / 레히오네스)로 나뉜다.

[편집] 칠레의 기후

  • 북부는 사막 기후이지만 훔볼트 해류의 영향으로 쾌적하다.
  • 중부는 지중해성 기후
  • 남부는 bosques lluviosos

[편집] 정치

이 부분의 본문은 칠레의 정당입니다.

선거구를 가진 당

  • 기독교 민주당 (Partido Demócrata Cristiano - PDC)
  • 사회당 (Partido Socialista - PS)
  • 공산당 (Partido Comunista de Chile - PCC)
  • 민주당 (Partido por la Democracia - PPD)
  • 국가재건당 (Partido Renovación Nacional - PRN)
  • 녹색인본주의연합 (Partido Alianza Humanista Verde)
  • 남부당 (Partido del Sur)
  • 급진 사회민주당 (Partido Radical Socialdemócrata - PRS)
  • 중도 진보당 (Partido Unión de Centro Centro Progresista)
  • 독립 민주 연합 (Partido Unión Demócrata Independiente - UDI)

1988년 민주화 요구시위에 마지못해서 허락한 신임 투표에서 피노체트민중들의 비폭력적인 반 피노체트 운동으로 패하여 물러나야 했다. 선거가 열렸을때 사회당, 기독교 민주당, 민주당과 국가재건당이 주력이 되어서 좌파우파를 포괄하는 중도 연합전선(La Concertación)을 만들었다. 2000년에 선거에서 승리한 Ricardo Lagos 대통령 또한 연합 전선 (칠레 사회당 소속) 후보이다. 50%에 가까운 지지율을 보이며 라고스 후보에게 패배한, Opus Dei 회원인 Lavin 후보는 UDI 소속이며 칠레 정치 내에서는 가벼운 극우에 속한다. 2006년초에는 중도 좌파성격의 여성 대통령인 미첼레 바첼레트 후보가 칠레 정치역사 최초로 당선되었다. 현재 그는 피노체트 군사정권의 인권탄압이라는 과거사를 청산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정치 형태는 대통령제이며 5년마다 대통령 선거가 있다.

  • 3권 분리 민주주의
  • 의회: 하원 (Cámara de Diputados) 상원 (Senado)

[편집] 경제

이 부분의 본문은 칠레의 경제입니다.

칠레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안정된 경제 구조를 가진다. 칠레의 거시 경제적 예측 가능성과 민주적 정부의 안정화는 칠레를 투자하기에 적합한 나라로 만들었다.

[편집] 산업

칠레는 천연 자원이 비교적 적다. 오직 북부 지역에만 구리, 등의 풍부한 광산 자원이 존재한다. 중부 지역은 포도 재배와 농경업에 의지하며 남부는 수산업 (특히 연어 양식)과 삼림업에 종사한다.

칠레는 80년대부터 1997년까지 연평균 7%의 성장을 지속해왔다. 97년은 아시아의 금융 위기를 맞이하여 성장이 느려지며 2004년에는 6.1%의 성장을 기록했으며 여러 조치를 통하여 2005년에는 6.25%의 성장률을 목표로 하고 있다.

칠레 경제는 상당히 경쟁적이며 피노체트 독재 시절부터 신 자유 주의 시장 정책 노선을 택하여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 광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50% (10년 전에는 80%)
  • 나머지는 빠른 서비스업의 성장 - 특히 통신업체
  • 작은 시장으로 인해 손쉬운 남미대륙 진입로(작은 위험)
  • 다양한 기후와 다양한 추수물

[편집] 관광업

[편집] 인구와 사회

수도 산티아고의 모습.
1820년부터 2050년 추정치까지 칠레 인구 변화 그래프.

칠레의 2002년 인구조사에서는 칠레 인구를 15,116,435명으로 보고했다. 칠레의 인구 성장세는 1990년대 들어 출산율 저하로 한풀 꺾이고 있다. 2050년에 칠레 인구는 대략 2,020만 정도로 예상되고 있다. 인구의 85%는 도시에 거주하며, 특히 40%는 산티아고 광역지역에 거주한다. 2002년 인구조사에서 가장 인구가 많이 밀집한 지역은 산티아고로 540만이 살고 있었으며, 발파라이소에는 804,000, 콘셉시온에는 666,000명이었다.

[편집] 인종과 민족 구성

칠레인의 종교 회합.

칠레인의 30%는 백인이다. 백인 혈통이 지배적인 메스티소(카스티소)는 약 65%이다.

최근의 다른 연구에 따르면 백인 인구는 880만으로 칠레 인구의 52.7%라고 보고했다. 여러 자료를 추합하여 CIA 세계 팩트북 자료와 같이 백인과 메스티소의 수는 칠레 인구의 95.4%로 분류된다.

백인 집단은 주로 에스파냐인 후손이며, 아일랜드,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포르투갈, 크로아티아 등이 있으며, 이들 사이의 혼혈도 있다. 메스티소 집단은 과거 에스파냐 식민 정착민(주로 안달루시아카스티야 출신)들과 토착 부족(피쿤체, 디아기타, 마푸체족 등)의 혼혈이다. 이런 점에서 칠레는 인종적으로 동질적인데, 인구 대다수는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을 "칠레인"으로 규정한다.(Chilenidad)

아프리카계 칠레인 인구는 거의 없으며, 식민 시대에 최대 25,000명까지 이르렀으나, 이들의 비율은 1%도 안된다. 인구 조사 결과에 따르면 현재 토착 아메리카인도 수가 적은데, 그나마도 혈통적으로 검증하자면 통계상 수는 더 줄어든다. 2002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칠레 인구의 4.6%가 토착 아메리카인인데, 상당수는 혼혈의 정도에서 차이를 보인다.

[편집] 토착 아메리카인

Those belonging to recognised indigenous communities (2002)
Alacaluf 2,622 0.02% Mapuche 604,349 4.00%
Atacameño 21,015 0.14% Quechua 6,175 0.04%
Aymara 48,501 0.32% Rapanui 4,647 0.03%
Colla 3,198 0.02% Yámana 1,685 0.01%

1907년 인구조사에서 아라우코 원주민의 수는 101,118명으로 총 인구의 3.1%에 불과했다. "인종적 순수성"에 상관없이 오직 이들만이 자신들의 토착 문화와 언어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1992년 인구조사에서 칠레 인구의 10.33%가 당시 자신들이 토착 문화를 지키고 토착어를 구사하는 여부에 상관업싱 자신을 원주민이라고 응답했다. 거의 백만명의 사람들(칠레 인구의 9.61%)이 자신들이 마푸체족으로 0.5%는 아이마라족으로 0.23%는 라파누이족이라고 응답했다.

2002년 인구조사에서는 현재 토착 문화를 지키고 토착어를 구사하는 토착 원주민의 수는 4.6%(692,192명)로 조사되었다. 그 중 87,3%는 (혼혈 정도에 차이가 있지만)자신을 마푸체족이라고 응답했다.


[편집] 이민

칠레 사회의 발전과 국가의 형성에서 이민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18세기에 칠레로 들어온 이민자들은 이 나라의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옛 카스티야 상류층 집단에 들어가 정치 지도층이 되어 아직도 칠레 사회를 주도하고 있다. 바스크족 출신의 칠레인은 대략 10%(1,600,000명) 혹은 27%(4,500,000명)으로 추산된다. 어떤 非에스파냐계 유럽 이민자들(영국, 독일, 아일랜드, 이탈리아, 프랑스, 크로아티아, 구 유고슬라비아 출신)은 19세기와 20세기에 주로 이 나라의 북부나 남쪽 끝으로 이주했다. 현대 칠레 정계의 면면을 보면 非히스패닉계 유럽인의 성씨가 흔한데, 이것은 그들의 적은 수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 큰 영향을 주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크로아티아계의 경우, 이 지역 출신(후손) 칠레인은 380,000명에 이른다. 또 팔레스타인 집단의 경우, 이들은 아랍 세계 바깥에서 가장 큰 팔레스타인인 집단을 이루고 있다. 같은 시기에 이웃나라에서 칠레로 온 이민자의 수도 이와 비슷한 수준이다.

발파라이소 언덕의 집들.

독립 이후 공화정 시대에 들어온 영국과 아일랜드인의 후손은 350,000에서 420,000명에 이른다. 이들과 더불어 이탈리아와 프랑스 상인들은 발전하던 칠레의 도시에 사업을 시작하여 이 나라의 정치적/경제적 상류층으로 올라선다. 1848년 상당한 수의 독일 이주민들이 흘러들어와 오늘날 독일계 칠레인 집단을 이루게 되었다. 이들은 남부 지역을 개발하려는 목적으로 칠레 정부가 장려한 덕분이었다. 이 독일인들(여기에는 독일어를 쓰는 스위스인, 슐롱스크인, 알자스인, 오스트리아인들도 있었다)은 남부 칠레의 문화적 구성에 큰 영향을 남겼다. 오스만 제국을 피해 자기 땅에서 쫓겨난 유럽계 유대인들, 시리아 그리스도교도, 팔레스타인인들도 칠레에 왔다. 오늘날 이들은 금융과 소규모 제조업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인들도 칠레에 왔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잘 지켰다. 그리스인 후손의 수는 90,000에서 120,000명에 이른다. 상당수 그리스인은 산티아고 지역이나 안토파가스타 지역에 산다. 칠레는 세계에서 그리스계 인구가 많은 5개국 중 한 곳이다.

오늘날에는 이웃 나라에서 칠레로 이민오는 경우가 가장 많다. 2002년 칠레 인구조사에서 국내 이민자 184,464명 중 26%는 아르헨티나, 21%는 페루, 6%는 볼리비아 출신이었다. 칠레 인의 국외 이주는 지난 십년간 줄어들고 있다. 해외에 거주하는 칠레인은 857,781명으로 추산되며, 이 중 50.1%는 아르헨티나, 13.3%는 미국, 8.8%는 브라질, 4.6%는 스웨덴, 2% 남짓은 오스트레일리아에, 나머지는 세계 전역에 흩어져있다.

칠레의 한인 사회는 수도 산티아고에 집중되어 있으며 대략 1,500 명 정도이다. 주로 소매 및 도매업에 일한다.

[편집] 종교

가장 최근(2002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14% 이상 인구의 70%는 로마 카톨릭이며, 15.1%는 신교(Evangelical)이다. 여기서 "신교"란 동방 정교(그리스, 페르시아, 세르비아, 우크라이나, 아르메니아), 모르몬,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여호와의 증인을 제외한 非카톨릭계 그리스도교를 총칭한다. 신교의 90%는 오순절 교회, 웨슬리교, 루터 교회, 개혁 교회, 장로교, 영국 국교, 성공회, 침례교, 감리교 등이다.

칠레 성공회(스페인어: Iglesia Anglicana del Cono Sur de America)는 칠레의 성공회 관구교회이며, 관구장은 그레고리 야메스 베나블레스 주교(The Most Revd Gregory James Venables)이다.

칠레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며, 다른 법과 정책을 통해 일반적으로 종교 의식의 자유에 기여하고 있다. 모든 수준의 법은 정부에 개인에 의한 종교 억압을 완전히 막고자 한다.

피노체트의 군사독재당시 칠레 로마가톨릭교회는 교우들이 국민들을 살인, 고문, 가혹행위등의 국가폭력으로 탄압하는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살해당하자, 1973년 10월 정의평화위원회를 구성,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정의평화위원회에는 로마가톨릭교회 외에도 유대교, 정교회, 성공회, 개신교 에서도 참여했다. 7명의 로마가톨릭 사제들이 살해당할 정도로 정의평화위원회는 군사독재정권의 큰 탄압을 받았으며, 지도자로 활동하던 추기경도 피노체트 군부독재정권으로부터 붉은 추기경(Red Cardinal)이라는 비난을 받을만큼 미움받았다.[2]

칠레는 정교 분리 국가이며, 1999년 종교 관련법에서 종교 금지를 금했으나, 카톨릭 교회의 경우 특별한 위치에 있으며, 가끔 우대를 받기도 한다. 정부 공무원은 카톨릭 행사 뿐 아니라 유대교나 성공회 행사에도 참여한다.

정부는 성탄절, 성 금요일, 가르멜 산의 성모, Feast of Saints Peter and Paul, 성모승천, All Saints' Day, Feast of the Immaculate Conception의 카톨릭 행사를 공휴일로 정하고 있다. 정부는 최근 10월 31일을 국내 성공회를 위한 공휴일로 정했다.

[편집] 언어

대부분의 남아메리카 국가와 마찬가지로 칠레에서도 에스파냐어를 쓰는데, 이웃나라와는 다른 독특한 억양을 보이고 있다. 칠레 에스파냐어는 마지막 음절의 's' 발음을 빼버리며, 어떤 자음은 부드럽게 발음하기 때문이다. 남부와 북부의 악센트 차이는 그리 크지 않으며, 그보다는 도시나 시골 혹은 사회 계급에 따라 악센트 차이가 약간 있다. 칠레라는 나라 자체가 원래 국가 중심부의 작은 영역에서 성장하여 이후에 남쪽과 북쪽으로는 이주민들이 와서 이루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이렇듯 발음 차이가 적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지금도 라디오나 특히 텔레비전을 통해 이런 현상이 계속 되고 있으며, 매체는 구어 표현을 확산시키고 통일하는 역할을 한다.

독일어크로아티아어도 남부 칠레에서 쓰인다.

학생, 학자, 전문직 사이에서 영어 교육이 널리 이루어지며, 어떤 영어 낱말은 일상 에스파냐어 회화에 흡수되어 쓰이기도 한다.

[편집] 토착 언어

칠레에는 몇몇 토착 언어가 존재한다. 마푸둔군어, 케추아어, 라파누이어 등이다. 대 북부에는 케추아어, 아타카메뇨, 아이마라어가 쓰이며 중부와 남부에는 마푸체어, 파타고니아에는 오나어가 분포한다. 칠레 제9주에는 가장 큰 인디오 민족 마푸체(Mapuche)가 거주한다. 그들의 언어는 마푸둔군(Mapudungun)이다. 마푸체는 "땅의 주민들"이라는 뜻이다(마푸: 땅, 체:사람). 마푸체는 다시 북쪽 땅의 사람들인 페우엘체와 남쪽 땅의 사람들인 우이지체로 구분된다. 에스파냐 침략 이후 에스파냐어가 링구아 프랑카로 기능하면서, 토착 언어들은 소수 언어로 전락했으며, 몇몇은 현재 사멸했으며 혹은 사멸 위기에 놓여있다.

[편집] 교육

이 나라의 HDI는 37위로 교육은 안전하다.

[편집] 2006년 고등학생 시위 (펭귄 혁명)

[편집] 외교관계

1969년 칠레는 콜롬비아, 볼리비아, 에콰도르, 페루와 함께 안데스 공동시장(Andean Community of Nations)을 설립하였다가 1976년에 탈퇴하였다. (베네수엘라는 1973년에 가입)

대한민국과의 관계

1962년 한국과 공식수교하였으며 2003년 사상최초로 한국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첫 국가가 되었다. 한국내에서 한국 농업인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으나 양국간의 자유무역협정은 무난히 체결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양국간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북한과의 관계

1972년 북한과도 수교하였는데 이듬해(1973년)에 단교, 20년 만인 1992년에 재수교하였다.

[편집] 주석

  1. 칠레의 또 다른 9·11을 기억하라 : 움직이는 세계 : 국제 : 한겨레21
  2. 《한겨레 21 》2006년12월21일 제640호 기사

[편집] 바깥 고리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 미디어 자료 분류가 있습니다.

[편집] 칠레 정부

[편집] 칠레의 매체

[편집] 칠레의 대학

[편집] 칠레의 포털 사이트

[편집] 대한민국

다른 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