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바도르 아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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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아옌데 고센스 (스페인어: Salvador Allende Gossens, 1908년 7월 26일 ~ 1973년 9월 11일)는 칠레의 의사 출신 정치가로 1970년, 세계에서 최초로 민주선거를 통해 집권한 사회주의 정당 인민연합의 대통령이었다. 1973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저항하다 소총으로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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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발파라이소에서 태어난 아옌데는 의대생 시절 민중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면서 사회주의에 입문하였다.
[편집] 선거
1970년 아옌데는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칠레 사회주의정당들의 연합 정당인 인민연합(스페인어: Unidad Popular, 칠레 사회민주당과 칠레 공산당의 연합 정당) 후보로 출마했다. 1970년 9월 4일 그는 34.9% 지지를 받은 호르헤 알레산드리 전 대통령을 누르고 36.2%를 득표하여 근소한 차로 승리했다. 3위로는 27.8%를 얻은 아옌데와 정강이 비슷했던 기독교 민주당의 라도미로 토믹이었다. 당시 칠레 헌법에 따르면 대선 후보가 과반수의 표를 얻지 못할 경우 의회가 상위 득표자 후보 둘 가운데 한 명을 당선자로 정할 수 있었다. 그래서 1958년 전 대통령 호르헤 알레산드리는 겨우 31.6%를 얻고도 아옌데에 승리한 바 있었다. 이때도 법에 따라 의회는 두 후표의 표차에 상관없이 결선 투표를 하는데, 아옌데가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
CIA는 쿠바가 아옌데의 선거 운동에 350,000$를 지원했다고 주장했다.
[편집] 군부의 반발
그해 10월 22일 칠레군 총사령관 르네 슈나이더 장군이 그를 납치하려던 로베르토 비오 장군 일당에게 저항하다 총에 맞는 일이 일어났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사흘 만에 부상으로 사망했다. 같은 시도가 19일과 20일에 두 번 있었다. 비오 장군의 납치 계획은 CIA의 지원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대통령 국가 안보 보좌관 헨리 키신저는 마지막 시도에서 자신이 이 계획을 연기하도록 명령했다고 주장한다. 슈나이더는 군대는 본분에 충실하게 국가 주권을 보위하는 것이지 정치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헌법주의 독트린의 옹호자였다.
그때 슈나이더 장군의 죽음 소식은 불신을 받았고, 10월 24일 의회가 최종 선택한 아옌데에 대해 군사적 반대, 10월 26일 에두아르도 프레이 대통령은 카를로스 프래츠를 르네 슈나이더를 이어 후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아옌데는 기독교 민주당이 자신들에 대한 의회 지원을 받는 대신에 제안한 헌법 보장 협약에 서명하여 1970년 11월 3일에 대통령직에 취임했다. 레지 드브레와 인터뷰하면서 아옌데는 헌법 보장 협약에 동의한 이유를 밝힌 바 있다. 몇몇 도시에서는 아옌데가 이에 서명한 것을 단지 전술적인 행동으로 치부하기도 했다.
[편집] 집권 이후
[편집] 사회주의 정책
권력을 잡자 아옌데는 사회주의를 향한 칠레의 길(La via chilena al socialismo)라는 사회주의 정책 실행에 착수했다. 이에 따르면 대규모 산업(특히 구리 광산과 은행)을 국유화하며, 정부의 의료 및 교육 복지 관리, 어린이에 대한 무료 우유 배급(이것은 '대통령의 친구들'-GAP-이라는 집단이 독단적으로 내세운 것이다) 등이 있었다. (그리고 토지개혁 확대와 재분배는 전임 대통령인 에두아르드 프레이 몬탈바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그는 사유 재산의 1/5에서 1/4을 몰수하여 국유화하는 토지개혁을 시행하였다.) 아옌데 정부의 토지개혁정책은 관개된 토지 80 헥타르 이상의 모든 재산은 압류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또한 아옌데 정부는 칠레 빈곤층의 사회경제적 후생을 증진하고자 하였으며, 새로 국유화한 기업이나 공공 근로 사업을 통해 일자리를 제공하여 민중들이 생계유지에 어려움이 없게 하는 것을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편집] 경제성장
칠레의 대통령은 임기가 6년까지였으므로, 아옌데 대통령은 경제개혁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경제 개조 계획(부스코빅 계획)을 계획할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가 자신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될 수 있어야 했다. 아옌데 임기의 첫 1년 동안 경제 장관 페드로 부스코빅의 재정 확대 정책의 성과로 단기적으로 호조를 보였다. 산업 성장은 12%, GDP는 8.6%으로 성장했으며, 인플레이션은 34.9%에서 22.1%로 크게 줄었고 실업률도 3.8%로 떨어졌다.
[편집] 경제정책 실패
그러나 1972년에 칠레 에스쿠도화의 인플레이션율은 140%에 이르렀다. 1971년과 1973년 사이에 평균 실질 GDP는 1년마다 -5.6%씩 수축되었고 정부 예산 적자는 치솟고 외환보유고는 떨어졌다. 물가는 상승하는데 정부는 가격 통제를 강제하면서 상점에서 생필품은 사라지고 쌀, 콩, 설탕, 밀가루의 지하 시장이 늘어났다. 아옌데 정부는 국제 채권자와 외국 정부에 채무 디폴트를 선언했다. 또 임금을 인상하는 동시에 모든 물가를 동결했다. 지주, 고용주, 사업가, 운송 연합, 그리고 일부 공무원과 전문 노조들이 이 정책에 강하게 반발했다. 우파에서는 국민당과 로마 가톨릭 교회(1973년 교육 정책으로 인해 불만을 샀다.)이 반대했으며 나중에는 기독교 민주당도 가담했다. 해외 다국적 기업, 미국 정부와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다. 1970년에서 1971년 동안 아옌데는 수차례 임금을 인상했으나 칠레 법정통화의 인플레이션 때문에 무용지물이었다. 프레이 대통령 시대에도 물가가 상승해왔지만(1967년부터 1970년까지 27% 상승) 1972년 8월 한 달에만 기본 소비재 가격이 190에스쿠도에서 421에스쿠도로 120%나 치솟았다. 1970년에서 1972년 사이 아옌데가 집권할 때 수출은 24%나 떨어지고 수입은 26%가 상승했으며 식량 수입은 149%에 달했다. 명목 임금은 오르고 있었지만 생활 수준은 나아지지 않았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정부가 민주선거로 등장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낀 미국이 구리가격을 크게 떨어지게 하면서 칠레 경제는 더 어려워졌다. 실제로 구리는 칠레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었는데(칠레 수출의 절반 이상이 이 자원 하나에서 나왔다), 국제 시장에서 구리 가격이 떨어지면서 수출 소득이 떨어졌다. 국제 구리 가격이 칠레에 불리하게 요동치면서 1971-72년 칠레 경제에 악영향을 끼쳤다. 1970년 톤당 66$에 이르던 구리 가격은 1971-72년에는 겨우 48-9$로 곤두박칠 쳤다.
[편집] 사이버신 계획
그런 가운데 아옌데 정부는 텔렉스(telex) 기계와 컴퓨터의 네트워크인 사이버신 계획을 추진했다. 이것은 영국의 사이버네틱스 전문가 스태포트 비어가 개발한 것이었다. 이 네트워크를 통해 공장에서 산티아고의 정부로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어서 실시간으로 경제 계획을 조정할 수 있었다.
[편집] 카스트로 방문
1971년 칠레는 쿠바와 외교 관계를 복원하여, 멕시코, 캐나다와 함께 아메리카 대륙에서 쿠바와 외교 관계를 맺지 말자는 미주 기구 협약을 묵살했다. 그 직후 쿠바 대통령 피델 카스트로는 한 달간 칠레에 순방했다. 방문 중 카스트로는 수많은 군중을 끌어모으며 아옌데에게 공개적인 충고를 주었는데, 이는 민중들에게 정치적 권리가 "사회주의를 향한 칠레의 길"(즉 칠레가 쿠바와 같은 길을 가려는 노력)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편집] 파업과 계급갈등
1972년 10월 처음으로 파업이 밀어닥쳤다. 처음에는 트럭 기사들이 주동했으나 나중에는 소사업가, 몇몇 (대개 전문직) 노조, 일부 학생 집단이 가세했다. 경제에 타격을 준 것은 물론이거니와 24시간 파업으로 인해 아옌데는 총사령관 카를로스 프래츠 장군을 내무부 장관에 임명하게 된다. 또 그는 국가가 정지하는 사태를 막고자 트럭 징발을 정부에 지시했다. 정부 지지자들은 트럭과 버스를 모으는 데 도왔으나 폭력 사태가 발생하면서 완전히 동원하지 못했으며, 경찰 보호를 받으며 파업을 분쇄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아옌데의 조치는 칠레 항소 법원에 의해 불법적으로 선포되기에 이르렀으며, 정부는 트럭 소유자들이 트럭을 되돌리도록 명령했다. 그의 임기 내내 (아옌데의 사회주의 노선의 개혁정치를 지지한) 토착민, 노예 출신의 빈민들과 백인 정착민 출신 상류층 사이에 긴장이 높아갔다.
[편집] 반대자들과의 갈등
임기 내내 아옌데는 기독교 민주당이 지배하는 의회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기독교 민주당(1970년 대선에서 사회주의 정강으로 나섰지만 아옌데가 대통령이 되자 자신들의 정치적 위치에서 표류하여 결국 국민당과 연합을 이루게 된다.)은 아옌데가 칠레를 쿠바식 독재로 몰아가고 있다고 비난을 멈추지 않았으며, 그의 여러 급진적인 정책들을 뒤집으려고 들었다. 아옌데와 의회 내 그의 반대 세력은 끊임없이 서로가 칠레 헌법을 훼손하고 비민주적으로 행동한다고 비방했다.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중에는 미국도 있었다. 아옌데가 쿠바와 밀접하게 접촉하며 점점 대담하게 사회주의 정책을 펼치자(부분적으로는 그의 연합 세력 중 더 급진적인 세력의 압박에 기인하기도 했다) 미국 정부는 두려움을 느꼈다. 보수주의 정권인 닉슨 행정부는 국제 기구를 통해 칠레에 경제 제재를 가했으며 칠레 의회의 反아옌데 세력을 지원했다. 아옌데가 당선되자마자 닉슨은 CIA와 미국 국무성에 지시하여 아옌데 정부를 "압박"하도록 했다.
[편집]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 등장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본가와 미국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아옌데 대통령이 1973년 3월 전보다 더 많은 표를 받아 다시 당선되어 개혁정치가 계속될 것이 분명해지자 군부에서는 1973년 9월 11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칠레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부의 공격으로 아옌데 대통령은 자살하였으며, 칠레국경과 공항은 모두 폐쇄되었다. 모든 정치활동이 금지되었고, 국회와 방송국등의 주요기관은 군이 점령했다. 좌파정당 가입자를 비롯한 반군부인사들은 모두 체포되어 총살되었다.[1][2]또한 좌파냐, 우파냐 하는 이념구분없이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이들은 고문을 당했는데, 이러한 군부독재정권의 만행과 칠레군부의 쿠데타를 지원한 미국 모두 거센 비판을 받았지만, 군부정권은 국가폭력외에도 군사평의회(훈타)를 결성, 측근들을 고위관료로 임명하는 측근정치를 하였고, 미국도 국가폭력으로 국민의 인권을 짓밞은 군부정권에 대해 경제원조를 실시하였다.[2] 한편 아옌데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에 대항하여 직접 권총을 들고 끝까지 투쟁하다 1973년 산티아고의 모네다 궁(칠레의 대통령궁)에서 피델 카스트로로부터 선물받았던 AK-47 소총으로 자살하였다.[3][4]
수십년간의 군부의 살해 의혹이 있었으나, 아옌데 대통령이 피노체트 쿠테다 세력과의 투쟁끝에 자살했다는 설명은 그의 가족과 그의 정당의 소속한 사람들에게도 널리 인정되고 있다. 이런 인정은 자살을 목격하고 진술하였던 Patricio Guijón과 몇년 뒤에 진술하였던 José Quiroga 등 대통령 궁 진료소의 두 의사의 증언에 기반하고 있다.[5]
그는 죽기 전 마지막 라디오 선언에서 다음과 같은 고별 인사를 하였다.
"이번이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곧 마가야네스 라디오도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던 나의 목소리도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계속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내가 이제 박해 받게 될 모든 사람들을 향해 말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내가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민중의 충실한 마음에 대해 내 생명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운명과 그 운명에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승리를 거둘 것이고, 곧 가로수 길들이 다시 개방되어 시민들이 걸어 다니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나의 희생을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력이나 범죄행위로는 사회변혁 행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중남미 역사 전문가들은 민중의 편에서 정치를 한 아옌데 전 칠레 대통령을 진정한 좌파로 평가하지만[7], 기득권을 침해당한 보수층들의 반발을 대비하지 못해 쿠데타가 일어난 것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도 있다. 즉 사회민주주의를 통해 사회주의 정책을 실시하고자 하였던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의 온건성이 군부의 보수반동적인 쿠데타를 막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편집] 아옌데의 죽음에 대한 의혹
당시와 이후 수년 동안, 아옌데의 지지자들은 거의 대부분 그가 쿠데타 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여겼다. 1973년 9월 28일, 피델 카스트로는 아바나의 혁명 광장에서의 연설에서 1백만명의 쿠바인들에게 아옌데가 대통령 궁에서 피델이 선물한 소총으로 군부에 저항하다가 죽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아옌데가 대통령궁 바깥 계단에서 총격전 와중에 죽었다는 설명도 있다. 아옌데의 사망 이후 대중 연설에서 피델 카스트로는 아옌데가 군부와의 총격전 와중에 죽었다고 이야기해왔으나 2002년에 아옌데가 자살하였다는 것은 인정하였다.[8]. 그러나 일부 지지자들은 아직도 그가 피노체트의 군부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믿고 있다.
최근에, 그가 자살했다는 사실은 더 널리 인정되고 있는데, 이는 뉴스와 다큐멘터리에서의 여러 자세한 증언들에 따른 것이다. [9] 또, 아옌데의 부인을 포함한 직계 가족들은 그가 자살했다는 사실에 대해 이견을 보인 바가 없다.
피노체트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자, 미국의 외무부 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미국은 쿠데타를 직접 실행한 것은 아니지만,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는 최고의 전제 조건들은 미국이 창출하였다"고 주장하였다. [10]
그의 발언은 미국이 피노체트 극우 군사독재정권 형성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증거로 CIA의 쿠데타 지원 공작사실이 문서공개등의 여러 경로로 밝혀져 있으며, 아직 불확실한 사실들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유대계 미국인 편집자 앙드레 쉬프랭도 그의 저서 《열정의 편집》에서 미국이 칠레 대사를 통해 칠레에서 군부 쿠데타 음모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고발했다. 아옌데 대통령이 칠레의 국부를 유출시키는 미국계 구리광산을 국유화하자, 미국에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구리값 폭락으로 칠레를 경제적으로 압박했으며, [11]칠레 유통업을 마비시키기 위해 트럭 노동자 파업을 지원했다.[12]
[편집] 참고 문헌
- ↑ 칠레의 또 다른 9•11을 기억하라,한겨레 21 2006년 9월 22일자
- ↑ 가 나 《만화현대사 20권, 자유와 개혁의 몸부림》, 계몽사
- ↑ Salvador Allende Gossens, Presidencia de la República de Chile
- ↑ James Whelan, Out of the Ashes: The Life, Death and Transfiguration of Democracy in Chile (Washington: Regnery Gateway, 1989), 511-512 and 519-520.[1]
- ↑ Eric Pape, Five Degrees of Exile, Los Angeles Times Magazine, 11 July 1999. Reproduced online as part of an archive of Pape's articles, accessed 22 September 2006.
- ↑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9770§ion=section1 독재자 박정희의 또 다른 분신, 피노체트-I
- ↑ 좌파 도미노에 좌파는 없다 한겨레 21 2006년 1월 20일자
- ↑ In "Fidel Castro: o: biografía a dos voces (a two-voiced biography), pub. Debate Publishing House ISBN 0307376532, the Cuban president told Ignacio Ramonet that he told Hugo Chávez: "Don't kill yourself, Hugo. Don't do (sic) like Allende, who was a man alone. You have most of the Army on your side. Don't quit, don't resign." [2]
- ↑ Camus, Ignacio Gonzalez , El dia en que murio Allende ("The day that Allende Died"). Instituto Chileno de Estudios Humanísticos (ICHEH) and Centro de Estudios Sociales (CESOC), 1988. p. 282 and following.
- ↑ 《만화세계사 20권, 자유와 개혁의 몸부림》, 이원복 글, 박흥용 그림, 계몽사
- ↑ »ì¹Ùµµ¸£ ¾Æ¿ºµ¥(Salvador Allende)
- ↑ http://news.joins.com/cnn/200612/11/2006121114053040331800081208121.html
[편집]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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