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찾기
System-users.svg 이 글은 생존 인물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개인에 대한 명예훼손이나 출처 불명의 내용에는 논쟁의 소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생존 인물의 경우, 비판적·논쟁적인 내용은 반드시 확인 가능출처에 의해 뒷받침되고, 중립적인 방식으로 서술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내용을 발견하셨다면 출처 틀을 사용하지 말고 즉시 내용을 제거한 뒤, 토론을 통해 작성자에게 출처를 요구해 주시기 바랍니다.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전두환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전두환
1985년 당시의 전두환
1985년 당시의 전두환
대한민국 대한민국제11·12대 대통령
임기 1980년 9월 1일 - 1988년 2월 24일
국무총리 남덕우 (1980 ~ 1982)
유창순 (1982)
김상협 (1982 ~ 1983)
진의종 (1983 ~ 1985)
노신영 (1985 ~ 1987)
김정렬 (1987 ~ 1988)
전임: 최규하(제10대)
후임: 노태우(제13대)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출생일 1931년 1월 18일(1931-01-18) (81세)
출생지 일제강점기 조선 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정당 무소속, 민주정의당
별명 호 일해(日海), 유신의 아들, 29만원
종교 천주교 (대통령 퇴임 이후 불교)
배우자 이순자
자녀 전재국, 전재용, 전재만, 전효선
부모 전상우 (부), 김점문 (모)
전두환
1931년 1월 18일 ~
별명 호: 일해(日海)
태어난 곳 대한민국 대한민국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복무 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 1955년 2월 ~ 1980년 8월 22일
최종 계급 대한민국 육군 대장
근무 대한민국 육군
지휘 공수특전단 단장, 보병 제1사단장, 보안사령관
주요 참전 베트남 전쟁
기타 이력 중앙정보부장 서리, 11·12대 대한민국 대통령,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전두환(全斗煥, 1931년 1월 18일 ~ , 경상남도 합천군 출생)은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아호는 일해(日海), 본관완산(完山)이다. 대한민국의 제 11·12대 대통령으로 1980년부터 1988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국군 보안사령부 사령관, 12.12 군사 반란 이후 중앙정보부장 서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육군 대장 예편 후 정계에 입문했다.

전두환은 1979년 12월 12일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한 뒤,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고 이에 항거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유혈진압을 주도했다. 1980년 9월 대한민국의 제 1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1] 1981년 1월 민주정의당 초대 총재가 됐다. 1981년 3월 대한민국의 제 1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독재정치를 하였다. 대통령직 퇴임 이후 민주정의당 명예총재,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 등을 지냈으며, 1995년에 구속 기소돼 1심에서 내란죄반란죄 수괴 혐의로 사형[2],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97년에 사면됐다.

전두환은 수 천억대 비자금 조성 의혹을 받고 있으며, 일부 비자금은 밝혀지기도 했으나 정확한 액수는 밝혀지지 않았다. 반체제인사·민주화 운동가·학생운동가 등의 정적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과 삼청교육대 사건에 대한 비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학살자와 12·12 군사 반란·5·17 쿠데타의 책임자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하나회를 비롯한 전두환 관련 인사들과 일부 반공주의 우익 세력에서는 그를 '구국의 영웅'으로 일컬으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출신이지만, 5세에 대구광역시로 이사했으므로 정치적 고향이 대구광역시로 간주되기도 한다. 천주교 영세를 받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훗날 백담사에 기거하던 중 불교에 귀의했다.

목차

[편집] 생애

[편집] 대통령이 되기 이전의 생애

[편집] 생애 초기

[편집] 출생과 가계

전두환은 1931년 1월 18일 경상남도 합천 율곡면 내천리에서 완산 전씨(完山 全氏) 전상우(全相禹)[3]광산 김씨(光山金氏) 김점문(金點文)[4]의 10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그의 위로 형 열환(1915년생), 형 규곤(1916년생), 누나 홍렬(1918년생), 명렬(1922년생), 누나 선학(1925년생), 형 기환(1929년생)이 있었다. 그가 태어난 뒤로도 여동생 점학(1935년생), 남동생 석환(1937년생), 경환(1942년생)이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몰락 양반 가계로 13대조인 전제임진 왜란 때 영산현감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고, 이후 무관이 몇명 배출됐으나 한동안 벼슬에 나가지 못하고 몰락한 상태였다.

아버지 전상우는 가난한 농부였으나 마을 구장을 지낼 만큼 상당한 한문 지식이 있었다.[5] 약간의 의학 지식도 갖추고 있던 그는 정식 진료소를 차릴 수준은 아니었으나 마을 주민들을 민간요법으로 치료하기도 했다.

아버지 전상우는 성격이 괄괄해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했는데, 전두환은 이런 아버지의 성격을 닮았다. 전상우는 의리가 강해 아들 전두환이 여덟 살이던 1939년에 동네 노름꾼 지인의 빚보증을 서주느라 문중의 종토(宗土)를 저당잡혔다. 이 종토를 돌려받는 과정에서 합천 읍내 주재소 순사부장의 소환을 받았으나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5]

어머니 김점문은 자녀들 중 전두환에 대한 기대가 강했다. 아들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강했는지, 지나가는 승려를 대접해준 뒤, 그 승려로부터 '어머니의 튀어나온 앞니가 아들의 운세를 가로막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김점문은 부엌으로 달려가 쇠 집게로 생니 3개를 뽑을 정도였다.[5] 한다.

[편집] 유년기

전두환이 태어날 때 그 위로 세 명의 형이 있었으나, 두 형 중 전열환은 고향 친구들과의 놀이 도중 사고로 사망했다. 둘째 형 전규곤은 추락사고로 사망했고, 전두환과 전경환 사이의 동생 전석환은 어렸을 때 병으로 사망하여 셋째형 전기환과 그, 동생 전경환과 누이들만 살아남았다.

유년기에 전두환은 근처 서당에 다니며 한학(漢學)을 수학했다. 그가 5세 되던 해에 그의 가정은 경상남도 합천 율곡면에서 대구로 이사했다. 이후 전두환은 8세 되던 해에 호란보통소학교에 입학했다.[4] 유년기의 전두환은 학업성적이 우수했지만, 4학년때 초등학교를 휴학해야 했다.

[편집] 소년기와 학창시절
대구북공업고등학교 재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 뒷줄 두번째가 전두환

그의 아버지 전상우는 횡포를 부리는 일본인 순사를 벼랑에서 밀어 떨어트린 뒤 만주 지린성으로 피신하였다가 2년 만에 귀국했다.[4] 일본 순사의 수배를 피해 그의 부모는 만주 지린성 반석현에 숨어 살다가 1년 3개월 만에 귀국했다. 전상우는 만주에서 배운 한의술로 한의원을 개업했으나, 정식으로 배운 한의학이 아니라서 손님들의 발길은 뜸했고,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이 일 때문에 전두환은 또래들보다 2~3년 늦게 호란보통소학교를 졸업했고 1947년 대구공업중학교에 입학해 50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통학했다.[4] 그 뒤 대구공업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우수한 성적이었고,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자발적으로 저녁마다 목총을 들고 중학교 교사를 돌며 순찰을 했다. 1951년 2월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전두환은 학창시절부터 생계에 뛰어들어야 했다. 학창시절 내내 전두환의 학업 성적은 우수했지만, 가정 형편이 곤궁하였던 전두환은 대학교 진학의 꿈을 접고‘학비가 들지 않는’ 육군종합학교 갑종 장교 모집에 응시하여 합격했지만, 형 전기환의 군 입대로 인한 부모의 반대로 입교하지 않았다. 이때 전방이 아닌 후방에서 국비로 공부할 수 있는 한국군 최초의 육군사관학교 정규 4년제 모집 과정에 응시하여 합격하여 1951년 입교하였다.

[편집] 청년기

[편집] 운동선수로서의 전두환
육사생도 시절의 전두환

체력이 강하고 운동을 즐기던 전두환은 운동선수이기도 했으며, 축구선수였고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중학교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으며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축구선수로서 계속 활약했다.[6] 이 전력이 있는 전두환은 대통령이 된 이후 스포츠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으며, 박종환 당시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불러다 축구국가대표팀의 작전과 선수기용을 직접 지시하기도 했다.[6] 전두환이 생도시절에 주최된 전국 대학 축구대회에서 육군사관학교는 당시 골키퍼였던 전두환의 맹활약으로 준결승에 진출했다.

[편집]
생도 시절의 전두환

‎ 대구공업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사관학교에서 동기인 노태우·정호용 등과 만나 친분을 쌓고 인맥관계를 형성했으며 훗날 이들과 12·12 군사 반란5.17 쿠데타를 모의하게 된다. 생도시절의 전두환은 존경하는 인물로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을 꼽았다.

1955년 9월 전두환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졸업과 동시에 육사 11기로 육군 소위에 임관했고, 육군부관학교(陸軍副官學校)에 입학해 1959년 1월 육군부관학교 군사영어반을 6기로 졸업했다. 육군사관학교 재학 중 우연히 육사 참모장인 육군 대령 이규동(李圭東)의 관사에 드나들다가 그의 딸 이순자를 만났다.

형제들 중 경제력이 나았던 그는 형 전기환을 대신해 노부모를 모셨다. 아버지 전상우는 1967년에, 어머니 김점문은 1978년에 사망했다.

[편집] 군인 복무

[편집] 장교 생활

1955년 소위로 임관하여 25사단 소대장에 보임되었다. 1959년 육군 공수특전단에 전입하면서 미국에서 선진 군사교육을 배우기 위해 1959년 2월 미국으로 유학, 미국 육군특수전학교에 입교했다. 특수전학교 재학 중 그는 심리전과목을 주로 이수했으며 야간과 휴일을 이용해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그해 6월 미국 육군특수전학교 심리전 교육 과정을 마친뒤 귀국했고, 이듬해 다시 미국으로 유학 가서 미국 포트베닝의 레인저스쿨에 입교하여 차지철, 최세창, 장기오와 함께 레인저 과정(Ranger Tranning Course)과 침투로 개척(Path Finder)과정을 이수하고 7월 비행기편으로 귀국했다.

그 후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에서 근무하던 중 1961년 4월에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장 직무대리에 발탁됐다가 곧 서울대 문리대의 ROTC 교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같은 해 5월 16일5·16 군사정변이 발생하자 그는 육군사관학교로 가서 육사 생도들의 5·16 군사 정변 지지 시위를 주도해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박정희의 신임을 얻었다. 5·16 군사 정변 과정에서 박정희의 부하 장교들은 육군사관학교를 장악하기 위해 3명의 장교들의 인솔 하에 무장병력들을 육군사관학교에 파견했는데 그 지휘관은 오치성대령(육사 8기), 박창암 대령(육사 8기) 그리고 훗날 박정희의 총애를 받게 될 차지철대위였다. 그런데 이들이 막상 육사생도들에게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기 위한 시가행진을 하라고 요구했으나 생도들은 거절했다. 이 과정에서 전두환은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장인 강영훈의 지시로 생도들이 쿠데타를 지지하는 퍼레이드를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뒤 상부에 밀고했다. 이후 김종필의 지원하에 전두환은 육사를 장악할 수 있었고 강영훈은 구금되었다.[7]

이 공로로 전두환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의 비서관에 임명됨으로써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했다. 그 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처리담당 비서관으로 선임됐다. 이후 그는 농담이나 사적인 잡담은 되도록 줄이고 자기 일에만 몰두하였다.

[편집] 5.16 군사 정변 이후

1961년 7월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실로 찾아와 자신에게 육만환 짜리 수표 두 장을 내놓고 간 노모씨를 경찰에 고발하여 노씨가 중부서에 수감되기도 했다. [8]

육군 소령 계급으로 있었던 1962년하나회를 조직하는데 가담해 군부 내에 인맥을 형성하였다.

1962년 12월말에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이후 인재등용의 일환으로 전두환과 차지철등의 부하 장교들을 정치권에 끌어들이려 시도했다. 차지철 대위는 이에 응해 국회의원이 된 반면 전두환 대위는 군대에 남겠다며 거부했다. 이에 박정희는 몇번이고 계속 권유했으나 전두환은 이 말로 일축했다.

"각하,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부하가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박정희는 전두환의 용도가 이미 정혀져 있음을 깨닫고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라는 권유를 중단하는 대신 전두환을 군 내부에서 특별히 총애하게 되었다.[9]

그 이후 전두환은 육군 중령으로 승진, 19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을 거쳐, 육군대학(陸軍大學)에 입교, 1965년 6월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1967년 서독 시찰 중 아버지 전상우의 부음을 접한다.[10] 그는 육사 동기들 중 육군 중령으로는 늦게 진급했지만[11] 1969년 육사 11기 동기들 중 최초로 육군 대령으로 진급했고, 육군 본부 육군참모총장실 수석부관을 지냈다.[12]

[편집] 월남 참전과 숙청 위기

1970년에는 육군 대령으로 연대장이 되어 베트남 전쟁의 지휘관에 파병·참전했고, 파병기간 중 한 차례의 패전도 없었으나 예하 군 장병들로부터 인망을 잃었다.(특히 식수가 부족한데도 혼자 진중에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거나 암거래 시장에서 무기를 사와 전리품으로 상부에 보고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귀국과 함께 훈장을 주려했으나, 월남전에서의 그의 직속상관들은 그의 훈장수여를 반대하였다.) 1971년 귀국 후 장군 보직인 제1공수특전단 단장에 파격적으로 임명되고, 1974년 김복동 손영길 최성택 등과 육사 11기 최초로 준장에 진급됐다. 1976년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1978년 제 1사단장을 지냈다. 제1사단장으로 재직할 때 부대 내 사기진작을 하기 위해 모범 병사 10명을 선정하여 표창과 포상을 수여했다. 또한 1사단장 재직 당시 제3땅굴을 발견하기도 했다.

전두환은 윤필용의 비호속에 손영길 등과 함께 하나회를 이끌어 갔지만, 육사 동기이자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 손영길 준장과 하나회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기도 했다. 하나회의 리더 중의 하나였던 그는 1973년 4월 윤필용이[13]윤필용 사건으로 당시 보안사령관 강창성에 의해 군부 내 사조직으로 적발돼 위기에 몰렸다.

[편집] 차지철과의 관계

1979년 3월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에 임명되어 중앙으로 복귀했다. 이 때 전두환은 차지철과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총애를 받던 실세였다. 때문에 전두환과 차지철은 서로의 입지에 방해가 되는 상대방을 좋아할 리 없었으며 그래서 그 둘의 사이는 겉으로는 좋아보였지만 실제로는 원수지간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차지철쪽은 직설적이고 괄괄한 데에 비해 전두환쪽은 냉정하고 침착하다는 점이 차이가 있었다. 훗날 박정희는 차지철이 김재규에 의해 살해당한 이후에 전두환이 나서서 사건을 수사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러한 뒷배경이 존재했기 때문이며 전두환은 이러한 뒷배경을 이용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편집] 군생활 이력
  • 1955년 - 육군 소위 임관(육사 11기)
  • 중령
    • 1963년 - 중앙정보부 인사과 과장
    • 1963년 -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 1965년 - 육군대학 졸업
    • 1966년 -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
    • 1967년 -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장
    • 1969년 - 육군참모총장실 수석부관
  • 대령
    • 1970년 - 제9사단 29연대장 (월남 백마부대)
  • 준장
    • 1971년 - 제1공수특전단 단장
    • 1976년 - 청와대 경호실 차장보
  • 소장
  • 중장
    • 1980년 - 제10대 중앙정보부 부장서리
    •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 대장
    • 1980년 8월 6일 - 육군 대장으로 진급 후 8월 26일 부로 전역

[편집] 10.26 사태 전후

이 부분의 본문은 10·26 사태입니다.

1979년 10월 26일에 대통령 박정희가 궁정동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저격당하는 10·26 사건이 발생했다. 국무총리 최규하대통령 권한대행직으로 일시 권력을 승계했다. 이 날 전두환은 부하들에게 막강한 권한을 가진 합동수사본부의 설치 기안을 명령했다.[14] 10월 27일 새벽 비상국무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 유고안이 내려졌고, 계엄사령부가 설치되자 전두환 소장은 곧 계엄사령부 예하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에 임명돼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의 수사 지시 명령을 받았다.

10월 27일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 윤일균, 국내담당차장 전재덕, 검찰청 총장 오탁근, 치안본부장 손달용 등을 보안사 2층 사령관 접견실로 불렀다.[14] 전두환은 이들을 입구에서 삼엄한 몸수색을 했으며, 상석에 앉아 박정희의 서거를 알린 뒤 범인은 중앙정보부라고 지목하고 박준광 육군 소령을 통해서 각 기관의 업무지침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14] 곧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에는 ‘앞으로 일체의 예산을 집행해서는 안 된다. 다만 합수본부의 허가를 받으면 집행할 수 있다’라며 행동에 제한을 두었다. 그 뒤 “앞으로 모든 정보 보고는 오후 5시, 오전 8시에 합수부에 제출하라”라고 지시했다. “정보부는 전재덕 차장이 당분간 장악하라” 라고 지시했다가 선임자가 해외담당차장임을 알고는 수정했다.[14]

1979년 10월 27일 권력 공백에 의한 혼란 중에 전두환은 정승화의 지시를 받아 합동수사본부 본부장 자격으로 김재규, 박선호 등을 박정희 대통령 저격범으로 체포했고, 언론에 발표했다.

11월 6일 합수부장으로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의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계엄군법회의에서 공개재판할 것을 언론사에 발표했다. 이날 그는 10.26 사건은 김재규 단독계획범행이고 정승화는 무혐의라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또한 내외부의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고 수사 기간 중 협조해준 국민과 관계기관에 감사를 표한다고 발표했다. [15]

1979년 11월 중순부터, 전두환은 하나회 동기와 후배들을 규합하여 군사 반란을 일으킬 모의를 했다. 같은해 12월 6일 최규하는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후 혼란한 정국을 틈타 노태우, 정호용, 유학성, 허삼수 등 육사 11기 출신 장교들이 주도하는 비밀 사조직 하나회를 주축으로 하여 신군부를 형성했고, 전두환은 신군부가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편집] 12.12 사태와 군부 장악

이 부분의 본문은 12·12 군사 반란입니다.

12월 6일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이 제안한 수사계획서에 따라 반란을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부장으로서 현장에 있던 김계원 및 계엄사령부 사령관 육군 대장 정승화 등을 내란방조죄로 체포하고, 이 과정에서 김오랑 육군소령과 병사 2명이 신군부 병사들이 쏜 총격에 사망하는 등 물리적 교전이 발생했다. 정승화 참모총장 연행을 반대하던 수경사령관 장태완, 특전사령관 정병주 등도 곧 체포됐다. 정승화 참모총장은 보충역 이등병으로 강등당한 뒤 강제 예편당했고, 이 과정에서 반발하던 육군 장군과 장교들은 인사 불이익을 받고 강제 퇴역, 예편당했다.

1980년 2월 보안사는 정보처 아래 언론반을 설치했다. 보안사 언론반은 전두환의 지시 아래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기 하려는 목적에서 언론을 장악하기 위한 공작인 K-공작계획을 실행했다. [16] 1980년 3월 군인사법 위반 논란 속에서 전두환은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고,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앉았다가 이어 4월 14일 헌법이 정한 정보기관의 일인 독점 금지를 위반하고 제10대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취임해 국내 모든 정보 기관을 장악했다.

[편집] 쿠데타에 의한 집권 과정

이 부분의 본문은 5·17 쿠데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입니다.

1980년 5월 초순경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에서는 국내 정세 불안을 해소한다며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등을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인‘시국수습방안’을 기획했다. [17] 보안사령부 대공처장 이학봉은 전두환의 지시를 받아, 이학봉은 김대중, 김종필 등 정치인을 연행할 계획을 세웠다. 전두환은 노태우, 황영시, 정호용, 유학성 등 신군부 핵심 세력과 논의를 하여 '시국수습방안' 실행 동의를 받았다. [18]

중앙정보부는 5월 10일 대북 특이동향을 경고하는 보고서, ‘북괴남침설’을 작성했고, 5월 12일 심야에 임시 국무회의에서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 5월 11일 육군본부 정보참모부는 북한의 남침 준비 완료라는 첩보의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5월 13일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과 미국 국무부 대변인는 ‘북괴남침설’은 근거가 없으며, 전두환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흘린 정보라고 평가했다.[19] 훗날 남침설을 제보했다고 알려진 당시 일본의 내각 조사실의 한반도 담당반장과 한국 담당관은 "그런 구체적인 내용을 말한 적도, 그런 정보도 없었다"고 밝혀, 신군부가 '시국수습방안'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명분이였던 '북괴남침설'이 조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

같은 해 5월 1일부터 5월 15일까지 서울역 광장에서 전국 대학생 10~20만 명이 운집해 데모를 했다.[21] 5월 12일에는 계엄 해제안이 국회에 상정이 됐고, 여야 총무는 5월 20일 10시 개헌안과 비상계엄 해제에 대해 논의를 하기 위해 임시국회를 개회하기로 합의했다. [22]

5월 17일 전두환은 노태우 , 정호용 등에게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시국수습방안'에 대한 찬성 의견을 주도하도록 했고, 전군주요지휘관회의의 의견을 내세워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 계엄확대, 비상기구 설치 등을 실시하도록 강요했다. 같은날 중앙청과 국회가 군으로 포위되고 외부와의 통신이 차단된 상태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실시됐다. 5월 18일 0시에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전두환은 사전연행계획에 따라 김대중, 김종필 등을 영장없이 불법적으로 체포해서 가택연금시키고, 김영삼 등 다른 야당 인사들도 연금, 국회를 폐쇄하고 기능을 일시 정지시켰다. 계엄 확대와 동시에 신군부는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표해 정치 활동 금지, 휴교령 금지, 언론 검열 등의 조치를 내렸다. [18]

5월 18일 광주에서 전남대 학생들은 신군부의 쿠데타적 조치에 항거하는 시위를 했다. 신군부는 계엄군과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강경 진압했고 이로 인해 사태가 확산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발생했다.

5월 19일 시위대가 5,000여명으로 불어나자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착검한 총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5월 20일 20만명의 시민이 군경 저지선을 뚫고 시청건물을 장악하였으며, 계엄군에 의해 모든 시외 전화가 두절되어 광주는 고립되었고, 밤 11시경 계엄군은 시민에게 발포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국회에 배치된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국회의원의 등원을 강제로 저지해, 오전 10시에 개회하기로 예정된 임시국회가 무산됐다.

5월 21일 계엄군의 발포로 수십여명이 사망했으며, 이에 시민들은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칭하며, 경찰서에서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을 시작했다.

5월 22일 시민들은 계엄군을 몰아내고 도청을 차지 '5.18사태 수습 대책 위원회'를 결성하고 사태 수습에 들어갔으나, 계엄군의 협상 거부로 협상이 결렬됐다. 5월 27일 신군부는 무력으로 상무충정작전을 실행해 유혈 진압했다.

일반적으로 그는 노태우, 정호용 등과 함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무력진압 지휘체계의 실질적인 주요 핵심 책임자 및 조력자로 여겨지고 있다. 1995년 검찰 수사 결과, 전두환이 정식지휘계통에 불법개입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강경진압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의 완강한 부인으로 인해 5월 21일 13시 전남도청 발포 명령자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서울의 봄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학생과 시민들은 실권자였던 전두환을 겨낭해 ‘전두환 퇴진’, ‘전두환 아가리를 찢어죽이자’ 등의 격한 구호를 외쳤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대량 사상자를 내고 유혈진압되면서 학생운동권의 반(反) 전두환 기운은 고조됐다. [23]

5월 27일 전두환은 내각을 통제하기 위한 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하고, 6월 초 국보위 위원에 피선됐으며, 국보위 상임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 선출됐다. 이어 7월 17일 중앙정보부장직을 사퇴하고 국보위만을 관할하다가 8월 5일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고, 8월 22일 예비역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다.

7월에는 충청북도 일대에 수해가 발생하자, 7월 23일 국보위 내무분과위원회 위원장 이광로(李光魯)를 대동하고 충청북도 청주시보은군, 경상북도 문경군점촌읍, 마성면 등 수해지역을 시찰, 김종호(金宗鎬) 충북도지사김무연(金武然) 경북도지사 등으로부터 수해상황을 보고받고 돌아왔다.

[편집] 11대 대통령

[편집] 제11대 대통령 취임

1980년 8월 6일에는 육군 대장(大將)으로 진급했다. 전두환은 곧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보안사에 의해 검열과 조종을 받았던 한국 언론은 미국로스앤젤레스 타임스지의 공식 보도를 통해 ‘전두환 장군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24] 하지만 이는 미국 인사들의 발언의 진의를 훼손한 오보였다. 8월 25일 필리핀이멜다 마르코스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전두환 장군을 지지해야 한다고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25] 8월 15일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하자, 그해 8월 27일 그는 대통령 후보자에 단독 출마했다. 8월 29일 육군 대장에서 예편했다. 8월 29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간접선거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 대통령에 선출됐고 1980년 9월에는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편집] 제5공화국 수립 과정

그 해 9월 국가보안법의 연좌제를 공식 폐지했고,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했다. 10월 17일 비리정치인 정치활동 금지법 발표와 함께 정당해산령을 내려 제3공화국제4공화국의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유신정우회, 민주당계 야당인 신민당, 혁신 정당인 통일사회당, 민주통일당 등을 강제 해산시켰다.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이 공포됐다.

박정희 정부에서 추진하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폐지 주장이 나왔으나, 그는 이를 일축하고,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용했다. 동시에 경제 관료들의 채용을 추진했다. 1980년 유신 체제 이후 시행됐던 통행금지령과 심야 영업 금지령을 해제했으나, 심야범죄가 증가하면서 통행금지령 폐지를 취소했다.

이듬해인 1981년 1월에 창당된 민주정의당에 입당했고, 민주정의당의 초대 총재에 추대됐다. 이어 전두환은 12대 대통령에도 출마할 의사를 밝히고 대통령 후보에 출마했다. 국민당김종철(金鍾哲)은 기호 1번, 기호 2번은 김의택(金義澤), 3번은 민한당의 유치송(柳致松)이었고 전두환은 기호 4번을 차지했다.

[편집] 미사일 포기각서 제출

미국으로부터 박정희 집권 당시 개발중이던 핵미사일을 폐기할 것을 요구받았다.

1980년 초 전두환은 악화된 대미관계를 풀기 위해 “사거리 180km, 탄두 무게 453kg 이상의 미사일은 절대 개발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썼고, 이에 레이건 대통령은 전두환 신군부를 승인했다.[26][27][28]

[편집] 경제 정책

전두환은 1980년 9월에 김재익을 등용했다. 김재익은 “제가 생각하는 경제 정책은 인기도 없고 기존의 세력들이 환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 일을 해내야 합니다. 그래도 저를 쓰시겠습니까”[29]고 말했다. 전두환은 김재익의 다짐을 받아들이고 김재익을 신뢰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어 전두환은 '경제에 관해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라면서, 김재익에게 경제정책 전반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했다.

김재익은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입각한 뒤, 전두환의 경제 가정교사 역할까지 했다.[29] 전두환은 자신이 경제학, 경영학 관련 지식이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김재익의 건의를 받아들여 경제학자들과 경영학자들을 청와대로 불러들여 새벽까지 강의를 들었다. 김재익은 하얀 종이에 경제 자율화와 안정화의 그림까지 그리면서 전두환을 가르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29] 전두환은 김재익의 경제, 경영학 강의를 통해서 나름대로의 경제관을 갖게 됐고, 사람들을 만나면 자신의 경제에 대한 소견을 밝히고[30] 토론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김재익에 대한 신뢰가 커져나가면서 전두환의 집권을 도운 군부 세력은 김재익을 견제했다.

김재익에 대한 전두환의 신임은 제5공화국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 청와대 정무수석 허화평과 사정수석 허삼수로부터 김재익이 괴로움을 당하자, 전두환은 격노하면서 허화평·허삼수 두 허씨를 청와대에서 내보냈다.[30] 김재익 등의 경제 관료들은 군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경제정책을 펴나갈 수 있었다.

[편집] 12대 대통령

이 부분의 본문은 제5공화국입니다.

[편집] 12대 대통령 취임

청남대(전두환의 대통령 재직 시절 별장, 충청북도 청원군 소재)

전두환은 제5공화국의 주요 정책 강령으로 정의사회구현, 복지사회건설을 구호로 내걸었[31] [32]으며, 재임기간 물가안정, 범죄 소탕, 경제 성장, 88 서울 올림픽 개최 준비 성공, 무역흑자 달성 등을 이룩했다. 다수의 국민과 민주화 운동가들에 의해 군부독재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전두환 정부는 12대 대통령 선거를 1개월 앞두고 일부 정치인에게 정치규제조치를 해지했다. 구 정치인 중 일부는 각자 정당을 만들어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1981년 2월 25일에는 개정된 새 헌법에 따라 장충체육관에서 선거가 치뤄졌다. 선거인단이 90.6%의 참석했고, 전두환은 2500표의 압도적인 표차로 2위 민한당유치송 후보를 누르고 제12대 대통령(7년 임기에 단임)에 당선됐다. 전두환은 노태우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임명해서 민정당의 당권을 대리하게 했다. 4월 13일 전임 대통령 최규하 등 전직 삼부요인과 각계 원로 25명을 국정자문위원으로 위촉, 국정자문회의를 발족시켰다. 국정자문회의 치사에서 "정의로운 민주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국민참여의 깃발이 높이 게양됐다. 국정자문회의는 이러한 국민 총 참여와 화합을 촉진하는 표상"이라 했다. 같은해 6월에는 아내 이순자를 대동하고 동남아시아 5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등을 순방하고 귀국하였다.

12대 대통령 취임 후에 그는 박정희 정권과 거리를 두었다. 박정희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그는 헌법에서 소위 “5·16 혁명정신”에 관련된 사항을 삭제했다.[33] 박정희 정권에서 시행한 통행금지령을 폐지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폐지함과 동시에 7년 단임제를 주장하기도 했다. 하나회 계열에 부정적인 민주공화당유신정우회 실세들을 권력형 부조리 혐의로 엮어서 제거하면서 박정희의 시대를 부정과 부패, 부조리의 시대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정의사회 구현을 추구한다고 선언했다.[33] 또한, 대통령 연임제를 철폐하고 임기 7년의 대통령 단임제를 시행했다.

[편집] 핵개발 포기

전두환은 취임 초 핵실험 및 개발을 포기했다. 1980년 12월 19일 전두환은 박정희가 핵개발을 주도했던 원자력연구소를 한국핵연료개발공단과 갑자기 통폐합시킨 뒤 명칭에서 ‘원자력’이라는 말을 빼버리고 ‘에너지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변경했다.[34] 전두환은 핵을 포기하였고[35][36] 1983년 11월 당시 재처리 작업을 통해 추출했던 플루토늄은 국제 원자력 기구(IAEA)에 제출됐다.[37]

1982년~1983년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 개발 계획을 극비리에 추진됐고, 이는 일본미국 측 언론에 입수되어 보도됐다. 일본 아사히 신문의 보도로는 레이건 정부는 그런 정보를 입수해 계획 중지를 요구했으며, 1983년 11월에 전두환은 한국을 공식 방문한 레이건 대통령에게 핵개발 계획 중지를 약속했다.[38][37][39][35][36] 2004년 9월 8일 미국의 AP통신도 미국 고위관리의 증언을 인용하여 비슷한 보도를 했다.[35][36] 1979년 12·12 군사 반란5·17 쿠데타로 집권했기에 정당성이 미비하고 집권기틀이 부족하였던 전두환은 미국의 지원과 정권의 정당성을 승인받기 위해 핵개발 포기를 선택했다.[40][41] 또한 전두환은 박정희 정권 말기에 악화하었던 미국과의 관계 회복를 꾀했고 카터 대통령의 미 행정부이 박정희 집권 시절의 핵개발 계획에 매우 부정적이었다는 점도 영향을 끼쳤다.[42]

[편집] 집권 초기

1981년 보호·감호법을 제정했다. 상습범은 형기 종료 후에도 즉각적인 사회 복귀를 막아야 한다는 논리로 보호감호제도를 시행, 시행하고 같은 해 강원도 춘천시 춘천교도소에 보호감호시설을 설치했다. 춘천교도소 보호감호소는 뒤에 1983년 2월 12일 경상북도 청송군으로 이전했다.[43] 1982년 10월 26일 강원도의 이승복기념관 준공식에 참석했다. 이날 전두환은“총칼 앞에서 어린 학생이 자기 심정을 이야기했다는 것은 얼마나 용기 있는 일이냐”고 이승복의 용기를 칭송하며, “이승복 기념관의 준공을 계기로 어린이들 뿐만이 아니라 전 국민에게까지 이승복 군의 반공정신이 파급되어 우리 2세들에게 국민정신교육과 반공교육의 일대 전기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44] 녹화사업을 추진하면서 운동권 성향의 대학생들의 사상개조를 위한 목적으로 활용했다.

1982년 12월 13일, 김대중으로부터 도미 치료차 미국 여행을 청원하는 탄원서를 받았다. 전두환은 곧 김대중의 미국 여행을 허락했다. 이듬해 1983년 3월 22일, 민정당 전국 시도 전당대회에 참석했다. 민정당의 행사에는 꾸준히 참여했지만 당권은 사실상 노태우에게 위임해 운영했다.

[편집] 집권 중반

1983년의 한미 팀스피리트 훈련자 위문
1983년의 한미 팀스피리트 훈련 참관

1983년 5월 18일 5·18 이후 가택연금 상태에 놓인 김영삼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를 맞이하여 전두환 정권의 야당인사 탄압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23일간 단식투쟁을 시도했다.[45] 1981년 3월 26일에는 민주정의당 소속 지역구 국회의원 당선자들에게 직접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1984년 민청학련에 연루됐던 윤보선으로부터 민청학련 관련자들의 사면복권을 요청받았다. 1984년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서 특별복권조치를 내렸다.[46] [46] 같은해 5월 로마 가톨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 당시 직접 김포공항으로 나가 교황을 영접했다. 전두환은 특별지시로 교황의 임시 경호원을 설정했으며, 교황과 회담 후 교황은 서울 시내를 순방한후 3일만에 바티칸으로 되돌아갔다.

1984년 가을 한국 경제가 모라토리움 선언 직전의 상태까지 가자 전두환은 일본을 방문, 60억 달러의 융자를 요청했다.[47] 일본은 논란 속에 60억 달러의 지원을 결정했고, 우리 정부는 일본의 차관을 받았다.[47] 1984년 11월에는 덴마크의 국무총리, 기니비사우 대통령과 코스타리카 대통령의 방한을 연이어 받았다.

1983년부터는 각 학교 두발, 복장자율화를 실시했지만, 보수단체와 교수들, 학부모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1985년에 두발·복장자율화를 폐지했다.

1985년의 한미 팀스피리트 훈련 참관 중

1985년 보안사에서 국회를 해산하려는 명분으로 친위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1985년 2월 10일 실시된 12대 의원 총선결과 의석수로는 민정당이 의석의 과반수를 약간 상회했으나 야당인 신민당과 민한당이 합한 득표수는 14% 정도 민정당보다 많은 현상이 발생했다. 당시 보안사 감찰실장이었던 한용원에게 전두환 대통령의 방미기간 중 친위쿠데타 계획을 수립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하지만 한용원은 친위쿠데타까지 할 필요성은 없다고 보고했다.[48]

1986년 11월에는 구주 4개국을 순방, 프랑스, 영국, 벨기에, 독일 등을 방문하고 귀국했다.

[편집]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사건
이 부분의 본문은 아웅산묘역 폭탄테러사건입니다.

1983년 10월 제5공화국 내각은 전두환 대통령을 대동하고 동남아 순방을 다녀왔다. 10월 9일, 동남아시아 국가 순방 기간에 순방국 하나인 버마(미얀마)에서 아웅산묘소 참배 도중 북한에서 보낸 공작들에 의한 폭탄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1진으로 도착하여 예행 연습 중이던 이범석, 서석준, 심상우, 함병춘 등 80명의 외교관과 취재진 및 현지 안내인이 피폭으로 즉사했다. 현지 한국인들을 방문하고 뒤늦게 2진으로 방문한 전두환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사건 직후 현장에 도착했다가 다시 발길을 돌려 랑군 시내로 빠져나갔다.

이때 북한이 파견한 특수요원 중 미얀마 경찰에 검거된 상위 신기철은 격투 중 현장에서 사살됐고 체포된 소좌 진모는 사형에 처해졌다. 상위 강민철은 범행사실을 자백하고 수사에 협조하여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가 2008년 5월 21일 사망했다.[49] 전두환은 동남아시아 국가 순방일정을 전면 취소하고 비행기편으로 비밀리에 귀국했다.

[편집] 교육·문화분야

국민의 민주화 염원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하면서 싸늘해진 민심을 달래고, 국민의 정치적 욕구를 돌리려고 이른바 3S(Sex, Screen, Sports) 정책을 실시했다. 3S는 공식적인 명칭 같은 것이 아니라 인구에서 회자되다가 굳어진 표현으로 보인다. 당시 언론 기사에도 이 단어가 인용됐다. * 1983년의 한 신문 칼럼에서 “흔히 스크린, 스포츠, 섹스의 두문자(頭文子)를 따라서 현대를 3S가 지배하는 시대라고 말한다.”는 말로 당시 세태를 표현했다.[50]

  • 1983년 11월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김정수 의원이 당시 프로 스포츠의 지나친 열기를 지적하며 “전형적인 3S 우민 정책이 아닌가”라며 이 표현을 사용했다.[51]
  • 1984년의 한 신문 사설은 “백성들에게 최면을 거는 수단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겠지만 현대국가에서는 이른바 3S정책이 이용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정부가 축제 분위기로 사람들의 혼을 빼놓고 있다는 우려를 표했다.[52]

1981년 일본 우익 거물 세지마 류조(이토추 상사 고문)의 제안을 받아들여 민심수습책의 일환으로 올림픽 유치에 전력을 다했다. 계속하여 급조된 프로야구-프로축구 출범, 칼라 TV 방송 전격실시, 영화 및 드라마 성적 표현 검열완화, 교복자율화 등이 이어졌다. 1981년 국풍(國風)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축제를 벌였으나 국민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기도 했다.[53]

[편집] 외교 관계

반공의 기치 아래 한·미·일 삼각동맹을 추진했다.[54]

[편집] 대미 관계

미국의 압력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개발한 핵을 폐기하였다는 견해가 있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레이건 정부는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계엄령 발동에 대해서 견제하는 태도를 유지해왔다.[54] 이후 외교적으로는 친미(親美) 일변도의 정책을 추진하였고, 이는 학생들의 반미주의 운동을 조장한 측면도 있다.

[편집] 대일 관계

그는 대통령 재임 중, 한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서 한국에도 국권피탈의 책임이 일부 있었다고 인정해 당시 일본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됐다.[55] 1981년 8월 15일에 있었던 제36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가진 연설에서 “우리는 나라를 잃은 민족의 치욕을 둘러싸고 일본의 제국주의를 꾸짖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당시의 정세, 국내적인 단결, 국력의 약함 등 자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다.

1982년 8월 15일의 광복절 기념식전에서도 그는 일본 정부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에 의해 일본인에 대한 택시 승차거부가 일어나는 등 반일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던 때 강경적인 자세를 보이면서도 “이민족 지배의 고통과 모욕을 다시 경험하지 않기 위한 확실한 보장은, 우리를 지배한 나라보다 살기 좋은 나라, 보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내는 길 밖에 없다”라고 하여 맹목적 ‘반일’(反日)이나 ‘배일’(背日) 보다는 실력을 형성하여 일본을 이기는 ‘극일’주의를 강조했다.

[편집] 대북 관계

전두환은 북한에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제시했다. 전두환은 집권 초기 정권 안정을 위해 1982년 북한과 ‘잠정협정’을 맺고 비정치적, 비군사적 교류부터 점진적으로 하자는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을 제의했다. 역대 정권으로선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기도 했다. [56]

1983년 10월9일 오전 10시23분, 버마의 수도 랑군 중심지의 아웅산 묘소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 함병춘 청와대 비서실장 등 장관급 5명이 목숨을 잃고 여기에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심상우 민정당 총재비서실장, 이중현 <동아일보> 기자 등 민·관의 희생자가 21명, 부상자가 46명에 달하는 대참사가 빚어졌다. 이후 군 내부에서 북한에 무력으로 보복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무력 보복 계획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10월 13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희생자 장례식을 치르고, 20일에는 대통령 특별담화에서 “이것이 우리의 평화 의지와 동족애가 인내할 수 있는 최후의 인내이며, 다시 도발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응징할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사실상 무력 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대내외에 밝힌 것이다. [57] [58]

1984년 9월초 남쪽에 발생한 홍수로 전국에서 190여명이 생명을 잃고 재산피해도 1천300억원이 넘는 수재가 발생하자 북한은 9월8일 조선적십자회 이름으로 통지문을 보내 쌀 5만석(7천200t), 천 50만m, 시멘트 10만t, 의약품 지원을 제안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1년전 미얀마에서 북한이 저지른 아웅산묘소 폭파 암살 시도에도 불구하고 북쪽의 제안을 전격 수용했다. 북측의 식량지원 이후 남북 양측은 적십자회담 본회담을 가진 데 이어 1985년에는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을 실현시켰고 남북간 최초의 경제회담도 시작했다. 인도주의로 포장된 북측의 전략적 제안이었던 식량지원을 남측이 수용함으로써 남북관계의 물꼬를 튼 것이다. [59]

1985년 전두환 대통령은 북한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했고, 북한 역시 같은해 9월 허담 비밀특사를 서울에 특파해 전두환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논의를 타진했다. [60] 전두환은 허담 밀사와 만난 자리에서 김일성의 말을 전해듣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

김일성 주석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경청해보니 내용 하나 하나가 내 생각과 거의 동일합니다. 김 주석께서는 공개적으로 말씀이 계셨지만 40년 전에는 민족해방 투쟁으로, 그리고 평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애써오신 충정이 넘치는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남북한 최고책임자들의 회담이 이와 같은 분위기라고 할 것 같으면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하는 것도 나의 의견입니다.[61]

[편집] 기타 대외 관계
1985년 한국을 방문한 한스디트리히 겐셔 서독 외무장관과 면담

아프리카 대륙 각국 순방, 아시아 6개국 순방 등을 다녔다. 1983년 아시아 6개국 순방 중 버마(미얀마)의 랭군에 위치한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사건을 당하여 순방 일정을 취소하고 되돌아오기도 했다.

[편집] 호헌과 6.10 항쟁

1985년 당시 수해상황을 보고받는 장면

1986년 4월 30일 개헌가능성을 열어두었던 전두환은 5.3 인천사태10.28 건국대 항쟁등을 보며 개헌 요구가 심해지자 11월 7일 계엄령 선포를 준비했으나 [62] 이틀 전인 11월 5일 김대중 신민당 상임고문이 조건부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자 계획을 거두게 된다.

1986년 11월에는 구주 4개국을 순방, 프랑스, 영국, 벨기에, 독일 등을 방문하고 귀국했다.

1987년 4월 13일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국민의 개헌과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고 당시 현행 헌법에 따라 13대 대선 때도 12대 대선 때와 같은 방식으로 대통령을 선출하고 1988년 2월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특별담화에서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이에 호헌철폐를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권인숙 성추문 사건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과 맞물려서 6월 10일에는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을 시발점으로 반정부적 성격의 6·10 항쟁이 일어났다.

전두환은 군대를 재동원하여 물리적으로 진압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63] 하지만 올림픽 개최, 미국으로부터의 민주화 수용에 대한 압력 등은 전두환이 군대를 동원하는 데 제약요인으로 작용했다.[63] 전두환의 측근들은 그에게 강경진압을 주문했으나 민정당 의원들은 민의가 터져나온 것이라며 진압불가 입장을 폈다. 내무부 장관 김용갑은 6.10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할 경우 유혈사태가 번질수 있음을 주문했다. 강경진압을 외치는 측근세력과 진압에 부정적이던 여당의원 양측의 대립 끝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전두환은 내무부 장관 김용갑의 건의를 받아들여 직선제를 수용한다.

이후 시국 수습을 위해 1987년 6월 29일 6·29 선언이 발표됐다. 민주정의당의 대선 후보였던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단안을 발표했고, 7월 9일 그는 이를 수용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했다.[64] 6.29 선언이 전두환의 기획과 지시에 의해 노태우가 연출했다는 주장도 있다.[63]

[편집] 민주정의당 총재직 사퇴

노태우, 그는 노태우를 후계자로 지목했으나 노태우는 그를 5공청산의 타겟으로 삼아 신군부 인사들을 정리, 용퇴시킨다.

7월 10일에는 민주정의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노태우에게 총재직을 넘겼다. 1987년 7월 10일, 민주정의당 명예총재가 됐다.

집권 초기에 전두환은 행정관과 외교관을 지낸 노신영을 후계자로 낙점하고 있었다. 제네바 대표부 대사로 있던 노신영을 1980년 외무부 장관으로 불러들였고, 1982년 안기부장, 1985년 국무총리에 임명했다.[65] 그 뒤 노신영에게 정치수업을 시켜서 후계자로 낙점하려고 했으나[65] 전두환의 주변 인사들, 특히 군 출신들이 ‘말도 안 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라며 반발하자 결국 전두환은 뜻을 거두고 말았다.[65]

1988년 1월에는 신년사를 발표했다. 2월 24일 20분간 공식 고별행사를 하였고 이는 방송으로 보도됐다. 유명 시인들의 예찬과 미화 중 전두환은 상석에서 흡연했다. 그의 퇴임 직후 발생한 첫 변화는 9시 뉴스 첫 기사에 전두환 내외의 일정이 보도되던 관례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편집] 퇴임 후

[편집] 퇴임 직후

1988년 2월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그는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그는 이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들었으나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되어 제5공화국의 청문회가 진행됐다. 여기서 광주 민주화 운동과 5공 비리 문제로 책임추궁을 당하다가 1988년 11월 19일 약 1만 명의 학생들은 서울시내에서 전두환 구속을 위한 2차 궐기대회를 열었다.[66] 대통령 노태우는 전두환 국회 증언은 회피했지만 전두환의 형제들을 구속시켰다.[66]

11월 23일, 전두환은 언론에 대국민 사과와 함께 재산 헌납을 발표하고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과 민주정의당 명예총재직을 사퇴하고 11월 29일에 민주정의당을 탈당했다. 12월 이순자를 대동하고 강원도에 있는 백담사에 내려가 불경을 외우며 은둔생활을 하다가 1989년 일시적으로 국회의 청문회 증언대에 섰다. 다시 백담사에 돌아간 뒤, 1990년 12월 30일 하산하였다. 하산 후 전두환은 자신의 불경강해실력이 웬만한 승려 보다도 뛰어남을 자랑하기도 했다.[67]

1990년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 명예총재직 제의가 들어왔으나 민자당 내 김영삼과 민주계 인사들의 반발이 있자 그는 명예총재직 제의를 사양했다.

[편집] 문민정부 이후

전·노 두 전직 대통령 법적심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전두환과 이순자(1981년 미국 방문 당시)

1992년 10월, 안중근의사 여순순국유적 성역화사업추진위원회 고문에 추대됐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수 만명의 국민이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을 반란죄 및 내란죄로 고발했다. 1994년 총무처 장관과 서석재와 국회의원 박계동 등이 대통령 4천억 비자금 수뢰설을 주장했으나, 전두환은 무대응으로 대응했다. 검찰은 1995년 8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전두환 등 신군부 인사들에 대해 반란죄 및 내란죄 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불구속 기소했다. 1995년 11월 16일, 후임 대통령인 노태우의 수감을 계기로 12·12 군사 반란 및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에 대한 국민적인 요구가 거세어졌으며,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도 공소시효 정지 규정 등을 둔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고,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선언했다. 1995년 12월 신군부 인사들의 새로운 혐의가 드러난데다 헌법재판소가 검찰의 불기소 처분이 부당하다고 판결해, 검찰이 11월 말 5.18 사건 재수사에 착수했다. 동시에 제5공화국의 비리에 대한 수사도 진행됐다.

1995년 12월 4일 전두환은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이때 그는 1989년 12월 15일 노태우와 김영삼·김종필·김대중의 영수회담에 동의하여 5공 청산의 정치적 종결을 위해 법정에 섰음을 강조하였고 자신을 5·18 특별법 등으로 구속한 김영삼 역시 군부세력과 연합하였으니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68] 이어 '좌파운동권은 이승만 대통령 이후 역대 정권을 부정했는데 김영삼 정부는 이승만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3~6공화국을 내란에 의한 범죄집단으로 규정한다'고 비판했고[68] ‘이후 발생하는 수사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것’과 ‘12·12 등 모든 사건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지며 제5공화국 인사들에 대한 정치 보복 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68]

검찰은 1996년 1월 24일 전두환과 관련자 16명을 내란 및 반란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12.12 5.18 재판과정 중 그는 5.18의 진압당위성을 주장하며 좌파세력의 공세를 주장했다. 그의 광주 좌파 발언이 알려지자 시인 공선옥 등은 그에게 인간이 되라며 항의하기도 했다.

공판은 1996년 3월부터 진행이 됐는데, 8월 26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사형을, 12월 16일 서울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을(96노1892) 각 선고받았으며, 1997년 4월 17일에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당시 대법원은 전두환 등이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뇌물)"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결했다.[69] 전두환, 노태우의 구속 이후 김영삼에 대한 보수주의 세력의 반발과 반감은 계속됐고, 사회적 갈등을 유발했다. 이후 친전두환 인사와 제5공화국 가신 세력에 의한 5공신당 창당이 시도됐으나 시민, 사회단체들의 반발과 정부의 압력으로 무산되기도 했다.

형 확정 이후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97년 12월 22일 지역감정 해소 및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한 대통령 특별사면에 의해 풀려났다. 그러나 추징금은 사면대상에 포함되지 않았고, 재산은닉, 비자금 조성혐의로 2,205억 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아 532억 원을 납부했다. 그 뒤 자신의 통장에는 29만 원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추징금을 납부하지 않고 있어 약 1,673억 원이 환수되지 않고 있다.[70] 전두환은 1995년에 제정된 5·18 특별법에 따라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한 공로로 받은 훈장(태극무공훈장) 등을 박탈당했다.

[편집] 정치, 사회적 활동

1994년 이후부터 전두환은 5공 신당 결성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12·12 사건과 5·18 관련 재판으로 신당 창당 추진 계획은 무산당했다.

1999년 6월 전두환은 백범 김구 기념사업회로부터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에 추대되었다.[71] 백범기념관 건립추진위원장인 이수성(李壽成) 전 국무총리 등 집행부가 전두환과 노태우를 고문으로 추대한 데서 논란이 발생했다.

회원중 일부는 “광주시민 학살 등으로 민족에 큰 죄를 지은 두 사람을 고문으로 추대하는 것은 백범선생을 모욕하는 것”이라며 단식농성까지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집행부측도 당초 계획을 철회하지 않았다.[72] 이후 전두환은 백범기념관 설립 때까지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직을 유지했다.

1999년 전국체육대회 때 하키 결승이 열린 성남운동장을 방문,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우승 팀에 저녁식사를 대접했다.[73]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남자하키 선수들을 서울 연희동 자택으로 초청, 다과를 베풀기도 하였다.[73]

[편집] 2000년대 이후

[편집] 국민의 정부 시절

2001년 11월 22일, 15대 대통령 김대중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 김대중 내외의 오찬에 참석했다. 김대중은 유럽 순방 결과를 설명한뒤 경제 경쟁력 강화, 민생 안정, 남북관계 개선 등 국정 과제 수행을 위해 매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전두환에게 협력을 요청했다.[74]

2002년 7월 1일 국군수도병원 종합체육관에서 열린 서해교전 희생자 합동영결식에 참석하였고, 유가족들을 찾아 조문하였다.[75]

2002년에는 제5공화국 당시 녹화사업에 청와대 고위간부 개입설과 전두환이 직접 지시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에 착수했다. 이 녹화사업은 전두환의 지시와 녹화사업은 당시 보안사, 치안본부, 검찰, 안기부, 문교부, 대학 등이 총동원돼 조직적으로 이루어 진것으로 추정됐다.

2002년 2월 19일, 대통령 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는 보안사령부(현 기무사) 대공처장(대령)이었던 최경조가 2001년 12월 “82년 청와대에서 보안사 간부들이 만찬을 할 때 전씨가 (입대한 운동권 학생들 때문에 군내에 불온낙서 등이 빈발하고 있다는 등의) 군내 상황을 듣고 있다가 ‘야, 최경조, 너 임마 뭐하는거야’라며 혼을 냈고, 그 말을 듣고 보안사가 정화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에서 교육계획(녹화사업)을 세웠다”고 진술했다고 밝혔다.[76] 최씨는 이어 “(대통령의) 대책을 수립하라는 이야기 속에 지시가 다 들어있는 것으로, 구상은 (내가) 직접 했다”면서 “입안 후 대통령에게 보고해 결재를 맡았다”고 말했다.[76]

2002년 2월 대한민국의 방송사와 신문사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고 정의했다.

(5.18) 광주는 어, 그거는 총기를 일어난 하나의 그 폭동이야. 근데 그러니까 계엄군이기 때문에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2002년 2월 대한민국 각 언론사들과의 인터뷰에서

같은해 7월 11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한상범은 전두환의 소환조사를 발표했고[77], 8월 10일 녹화사업 개입여부에 대한 소환조사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하였다.[78] 8월 28일 개그맨 이주일의 빈소를 방문했다. 오후 5시 20분께 장세동 전 경호실장과 앞서 도착한 박종환 전 축구국가대표 감독의 안내로 분향소에 도착, 간단한 묵념과 함께 헌화했다.[79] 이어 1호 접객실로 옮긴 자리에서 기자들에게 “이주일씨가 화장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나도 군대시절부터 화장하겠다는 생각을 해 왔다”며 “나도 죽으면 화장하겠다”고 즉석 화장 서약을 했다.[79]

9월 30일 강서하키장에서 열린 부산아시안게임 남자하키 A조 예선 한국-일본전에 아내 이순자, 측근 장세동 전 안기부장 등 20여명과 참관하여 한국 대표팀을 응원하고, 환호하는 관중들을 향해 인사했다.[73] 경기가 끝난 후 한-일전에서 첫승을 거둔 대한민국 남자하키팀 국가대표 선수들을 면담, 격려했다.[80]

10월 녹화사업 관련 전두환이 직접 지시를 내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가 발견됐고, 10월 11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한상범)는 기자회견을 갖고 "지난 82년 8월 육군참모총장이 국방부 장관에게 보낸 문서에 따르면 80년대 초 '녹화사업'이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드러내는 정황이 잘 나타나 있다"고 주장하며 관련문서를 처음 공개했다.[81][82] 80년대 초 운동권 대학생들을 강제징집해 프락치로 활용한 의혹을 받고 있는 소위 '녹화사업'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지시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지적됐다.[81]

[편집] 참여정부 시절

참여정부 무렵 그의 팬클럽이었던 ‘전사모’가 활성화 되면서 한때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6년 9월 26일 재산 상속에 대한 증여세가 80억원이 부과되자 그는 차남 전재용과 증여세 취소소송을 제기했다.[83] 2007년 8월 29일 한나라당·이명박 등의 방문 시에는 자신이 대신 인질로 가는 편이 낫겠다는 발언을 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인질 납치극과 관련 자신은 이제 많이 살았다. 난 특수훈련도 받아서 인질 대신 아프가니스탄에서 생활하기도 낫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84][85][86] 이에 일부 네티즌들의 비판이 있었고,[86] 권영길은 전두환 덕분에 웃었다는 비평을 발표하기도 했다.[87]

2006년 10월 22일, 10대 대통령 최규하가 사망하자 10월 23일 최규하의 빈소에 조문했다.

[편집] MB정부 시절

2008년 2월 17대 대통령 이명박의 취임식에 초대됐고, 4월 17일 언론 인터뷰에서 "카메라 기자들이 내 사진은 꼭 비뚤어지게, 인상 나쁘게 찍는다", "젊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아직 감정이 안 좋다.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고..." 등의 농담을 하여 구설수에 올랐다.[88] 2008년 2월 25일 제17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여 제17대 대통령 이명박에게 “이 대통령이 국민이 바라는 염원을 잘 파악해서 국정을 잘 이끌어갈 것을 기대하고 또 그렇게 해주리라 믿는다”며 독려했다.[89]

5월 10일 아나운서 윤현진의 결혼식에 참석하기도 했다.[90]

2008년 7월 22일 인사차 방문한 한나라당 대표 박희태 등 정치인들의 예방을 받고 회견했다. 회견 중 전 세계적으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곡물을 하루에 두 끼 먹기 운동을 제안하기도 했다.[70][91][92] 촛불 정국 등으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난 여론이 형성되자 이 대통령이 취임 후 6개월도 되지 않았음을 들어 군에서도 불문율로 연대장 이상이 되면 100일은 봐주는 고사를 들어 대통령은 상당히 오래 봐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이명박을 변호하기도 했다.[70][91][92] 정치권은 코미디 같은 제안이라 말했고,[70] 그날 오후 진보신당은 논평을 내고 전두환의 제안을 헛된 개그라고 비판했다.[93]

2009년 2월 18일에는 서울 명동성당에 마련된 김수환 추기경의 빈소를 찾았다가 구설수에 올랐다. 검은색 정장과 중절모 차림으로 경호원 10명을 대동하고, 김운회 주교의 안내를 받으며 시신이 안치된 유리관 쪽으로 갔고, 관 앞에서 합장하고 나서 그만 평소 자신의 습관대로 계속 뒷짐을 진 채 관을 주시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끝난 조문 시간은 채 2분이 걸리지 않았다. 조문을 마치고 대성당 밖으로 나오자 김 추기경과의 인연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전두환은 “인연이 깊다”라며 김 추기경과의 개인적인 친분에 대해 언급만 했을 뿐 신군부에 저항했던 김 추기경의 민주화 행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자들이 그에게 “30년 악연이라는데…….”, “서운한 감정은 없느냐?”, “김 추기경과 악연인 것 아니냐?”라고 질문하자 “개인적으로 찾아오라”라면서 일절 답을 하지 않았다.[94]

5월 23일 17대 대통령 노무현이 투신, 서거했을 때 전두환은 전립선 수술을 이유로 빈소에 불참했다. 전두환은 노무현의 투신자살에 대해 "'꿋꿋하게 버티지', 그렇게 가느냐. 조금만 더 버티지"라고 했다.[95]

2009년 8월 14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했다.[96] 이희호 여사를 만나자마자 "얼마나 고생이 많으신가"라며 "자꾸 상태가 나빠지는 것 같아 휴가 중에 올라왔다"고 말했다. 이어 자신도 "이 병원에서 완쾌한 바 있다"면서 "의료진들이 워낙 저명한 분들이니 잘 하실 것"이라며 "틀림없이 완쾌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모시고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김 전 대통령 집권 당시 전직 대통령들이 가장 행복했었다”면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우회적으로 아쉬움을 표현했다.[97][96] 이때 그는 "김 전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10번 정도 청와대에 초대 받아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듣고 도움도 많이 받았다"며 "외국 방문 후에는 꼭 전직 부부를 청와대에 초청해 방문 성과를 설명해주며 만찬 및 선물도 섭섭지 않게 해주셨다"고 말했다. 이어 "이명박 대통령이 그런 것을 잘 알아서 전직 대통령의 의견도 들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97] [96]

10월 19일 오전 11시경 부인 이순자 여사를 동반하고 전 안기부장 장세동, 전 감사원장 황영시, 전 국방장관 이기백 등 일행을 대동하고 함께 관광버스편으로 평화의 댐 관리사무소에 도착, 김명림 수자원공사 강원지부장과 정갑철 화천군수, 오정석 육군 제2군단장 등의 영접을 받고 환담을 하였다. 이후 평화의 종을 타종하는데 참석하고 댐 주위를 둘러보았다. 2010년 1월 18일 대통령 이명박으로부터 생일축하난을 받았다.[98] 그후 1672억 추징금 중 300만원을 납부하였다. 이번 미납액 일부 변제로 추징시효는 2013년 10월까지 연장됐다.

[편집] 평가

전두환에 대한 평가는 현재 극과 극이며 그의 평가는 대한민국의 극우주의와 진보주의 및 보수주의를 가르는 척도 중의 하나로 통용되기도 한다. 광주 학살자, 군부 독재자라는 혹평에서부터 구국의 영웅이라는 평가가 존재한다. 전두환에 대한 시각이 보수주의 내부에서도 전혀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한나라당 , 조선일보 , 동아일보를 비롯하여 대다수 보수 세력은 신군부의 집권 과정 중 일어난 12·12 군사 반란 , 5·17 쿠데타를 비롯한 불법적인 집권 과정 ,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진압과 전두환 대통령이 세운 제5공화국 정권이 민주주의, 인권 탄압 대해서 만큼은 매우 비판적이다.

[편집] 인물평

그는 타고난 유들유들함과 비위로 위관급 장교 시절부터 철저한 ‘정치군인’의 면모를 드러냈다는 평이 있다. 이후 청와대 경호실 근무 경험으로 ‘정치군인’으로서 갖춰야 할 모든 자질을 다 갖추게 됐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99]

정승화는 전두환이 정치적 야망을 갖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100] 전두환은 이후 대통령 박정희와의 잦은 교제를 통해 권모술수의 능력을 길러온 것으로 알려졌다.[101] 그의 붙임성에 대해서는 자신도 인정하고 있다.[102] 그런가 하면 이희호는 “전 대통령의 유명한 숫기와 입담을 나중에야 알았다. 사형을 시키려 했던 ‘수괴’의 안사람을 상대로 동네 복덕방 아저씨가 아주머니 대하듯 일상적으로 대했다”고 밝히기도 했다.[103]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는 전두환을 가리켜 '전두환역도 또한 미국이 오래전부터 손때묻혀 키운 친미분자'라고 평가했다.[104] 전두환 당시 야당인사이자 14대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그가 "뻔뻔하고 염치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국회의원을 지낸 박찬종은 전두환에게 국정파탄의 책임이 있다고 비판하고, 이순신 장군의 동상 앞에 석고대죄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105]

[편집] 긍정적 평가

  • 1962년 12월에 박정희는 전두환에게 정계를 진출하라 권유했지만 전두환은 정치에 입문할 생각을 하지 않고 군대에 남기를 고집했다. 그 이후 전두환은 월남전 참전, 제3땅굴 발견들의 군인으로서의 공을 세웠다.
  • 1979년 박정희 피살 후 경제회생 노력을 기울인 점과 1986년 아시안 게임(1981년 11월 26일), 1988년 하계 올림픽(1982년 9월 30일)을 성공적으로 유치한 점 등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106] 한편 은닉 재산이 29만원에 불과하다는 발언에 대해, 29만원 이외의 재산이 더 있다는 증거를 밝혀내고 나서 당당히 비난해야 옳다며 전두환을 비하한다고 일부시민들의 명예가 회복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반박이 제기되기도 했다.[107]
  • 2009년 9월 납북자가족모임과 라이트코리아 등 보수단체회원들은 서울 세종로 통일부 앞에서 시위를 하며 임진강 참사 사고 이후 전두환이 북한의 수공계획을 미리 간파하고 평화의 댐을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108]
  • 4.13 호헌조치로 집권당의 장기 집권 의도를 드러냈으나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였으며, 단임제에 의해 임기만료 후 장기집권을 하지 않고 퇴진하였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 전두환 지지모임인 전사모는 전두환을 구국의 영웅으로 보기도 한다.[109][110][111] 전사모는 "각하의 위대한 업적이나 사소한 국민들에게 100% 알리지 않고 소수에게 이득이 되는 사실만 100% 진실인양 떠들어대며 국민들을 우롱하고 대한민국 역사상에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위대한 영웅 전두환 전 대통령 각하를 음해하고 있다"며 그의 명예회복을 주장하고 있다.[112][113] 한편 전두환의 아호를 딴 일해공원의 건립을 놓고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114]
  • 전두환은 스포츠에도 관심이 많아 야구와 축구의 프로리그를 만들기도 했다. 이를 통해 한국 스포츠 발전에 다소 기여했다는 평가가 일부 존재한다. 1984년 미국 LA 하계 올림픽에서 한국이 금 6, 은 6, 동 9 등 19개 메달을 따고 세계 10위를 달성하였다. [115]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절부터 올림픽 유치 작업이 시작됐지만, 전두환 집권기인 1982년 9월30일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1988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이 확정됐다.[116]

[편집] 부정적 평가

  • 하나회라는 군내 사조직을 이용해, 1979년의 12.12 군사 반란과 1980년 5.17 쿠데타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 등으로 불법적으로 집권했기 때문에 정통성이 없다는 것이 대표적인 비판이다. 5.18 사건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르면 전두환은 계획적인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직무상 관련이 없는 보안사 참모들에게 지시해 입안케 한 다음 이러한 조치를 실행했다.[117] 전두환의 집권 과정 중에 행해진 조치들에는 인권 유린, 헌정 파괴라는 비판이 뒤따른다.
  • 신군부의 집권 과정과 제5공화국 시절에 언론의 자유가 크게 훼손됐다는 비판이 있다. 실제로 전두환은 언론인, 언론사를 회유하기 위해 보안사를 통해 K공작계획을 비롯한 수 차례 언론 공작을 했으며, 대통령 재임 시절 언론인 대량 해직, 언론 강제 통폐합 조치에 관여했다. [16] 전두환 정부의 문화공보부는 매일 보도 지침을 편집국에 보내서 여론을 조종했다. 제5공화국 정부는 외국 잡지나 신문을 한국에 들여오는 과정에서 군 관계자들이 배포 전 모든 자료를 검열했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사나 전두환을 비판하는 기사 등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가 있을 때는 배포 전 지면에서 빠졌다.[118]
  • 신군부가 1980년 5월 31일 설치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이를 제안할 수 있는 대통령이나 국방장관, 계엄사령관, 총무처장관이 추진한 것이 아니라 보안사 일부 참모들에 의해 계획돼 전두환에 의해 추진됐다. 위원회가 추진한 공직자 숙정, 삼청교육, 과외금지 등 대부분 조치들도 계엄업무와 무관한 것이었다.[117] 1997년 대법원은 국보위에 대해 "행정에 관한 대통령과 국무회의 의 권한행사를 강압에 의하여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으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119]
  • 전두환이 최규하 대통령 하야의 배후에 있다는 비판이 있다. 전두환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설치한 국가비상대책위원회 등에 국정 수행 한계를 느낀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했다는 것이다. 최 전 대통령은 당시 이희성 계엄사령관 등에게 "헌정질서가 뒤바뀌는 것은 5.16 정변 한번으로 족하다.모든 일은 법테두리안에서 이뤄져야 한다"며 신군부측의 `시국수습안'에 반대하는 입장을 명백히 했다. [120] 또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이 김정렬에게 부탁하여 김정렬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찾아가 하야를 종용했다는 의혹도 있다. 최규하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맡았던 신현확 전 총리는 1995년 12월 16일 검찰 조사에서 "81년 김정렬씨에게 최대통령에게 하야를 적극 권유한 사실이 있다고 분명히 들었다"고 진술했다. [121]
  • 천문학적인 뇌물등의 혐의로 유죄를 받고 법적인 환수조치를 당했으나 당당히 29만원 밖에 재산이 없다고 밝혀 국민적인 실소를 자아내기도 하했다. 1997년 검찰은 전두환에 대한 확정 판결 이후 추징금 납부시효를 세 번이나 연장해 가며 비자금을 추적해 왔으나 2,205억원 중 532억원(24%)을 징수하였으며 성과는 그리 크지 않은게 현실이다. 아직까지 환수조치는 계속되고 있다.[122][123][124] 한편 전두환의 차남인 전재용은 이태원에 위치한 100평 규모의 시가 30억 원대 초호화 빌라로 이사한 사실이 밝혀졌다.
  • 전두환 정권 동안 여러차례 권력형 비리 사건이 발생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처삼촌으로 당시 광업진흥공사 사장이었던 이규광의 처제였던 장영자와, 육사 2기 출신으로 중앙정보부 차장과 유정희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그의 남편인 이철희가 건설업체에 접근하여 현금을 제공하는 대신 그 몇 배에 달하는 어음을 받아 이를 사채시장에 할인함으로써 거액의 자금을 조성했던 장영자ㆍ이철희사건이 발생했다. 1983년에 발생한 명성그룹사건과 영동진흥개발사건도 대표적인 사례였다. [125]
  • 1988년 3월, 새마을본부 중앙회장이었던 동생 전경환은 공금 76억여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구속됐으며 골프장 허가를 미끼로 거액을 챙긴 사촌동생 전순환과 노량진 수산시장 영업권 불법인수와 관련된 친형 전기환, 그리고 공금을 횡령한 처남 이창석 등이 전두환의 재임기간 중 저질러진 친인척의 비리로 비판의 대상이 됐다.[126]
  • 전두환 일가가 약 1700만 달러 이상의 비자금을 조성,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와인 생산 농장(와이너리)을 운영하고 있다는 의혹이 재미동포 안치용(42)의 블로그 '시크릿 오브 코리아' 를 통해 이 같은 의혹을 제기했다. 안씨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삼남 재만씨가 장인인 이희상 운산그룹 회장과 함께 캘리포니아주 나파밸리에서 시가 1천억 원대의 와이너리(와인 생산 농장)을 운영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며 "이들이 와이너리와 포도밭을 구입할 당시 정체불명의 괴자금이 적어도 1700만 달러(한화 197억 원)이상이 투입된 것으로 보여 전두환 비자금이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다"고 주장했다.[127]
  • 연평균 지가상승률이 이승만 21.6%, 박정희 33.1%, 전두환 14.9%, 노태우 17.7%, 김영삼 -1.2%, 김대중 -0.6%, 노무현 4.5%에다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때는 생산소득에 대한 불로소득 비율이 거의 미미한데 비해 이승만 때에 43%, 전두환은 67.9%, 노태우는 거의 100%, 박정희는 무려 248.8%에 달했으며 부동산 시장의 불안정을 보이고 있다. 이는 경제의 기강이 무너졌다는 것과 동시에 제5공화국 시절의 경제 치적은 실제로 경제가 좋은 것이 아니라 부동산 거품경제로 인한 착시현상이라는 견해도 있다. [128]
  • 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삼청교육대의 실상에 대한 몇 가지 결과를 발표했다. 1980년에 신군부에 의해 설치된 삼청교육대는 정부에 의한 조직적인 폭력 및 인권유린 사례로 당시 강제 입소되어 숨진 사람 가운데 일부의 사인이 조작·은폐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조사됐다는 의혹도 있다. 강제 입소자 중에는 학생이 980명에 달했으며 이 중 17명은 중학생이었고, 질병사한 54명 중 최소 4명은 폭행 등으로 숨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129][126]
  • 국제그룹 해체에 대한 비판도 있다. 전두환 정권에 밉보여 '부실기업 정리'라는 미명 아래 희생됐다는 분석이 업계에서는 정설로 돼 있다.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이 정치자금 헌납을 거부하고 대통령이 주재하는 모임에 늦게 나타나거나 1985년 총선에 비협조적이었던 것이 '괘씸죄'에 걸렸고, 결국 그룹 해체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이후 양정모 회장은 정부를 상대로 국제그룹 해체가 부당하다며 위헌소송을 벌여 1993년 승소판결을 얻어내기도 했다. [130]
  • 김대중을 지하독감방에 가두어놓고 매일 15시간이상 2개월 동안 발가벗긴 채 고문을 하여 허위자백까지 받아냈다[104]는 비판도 있다.
  • 전두환 정권은 3S 정책을 실시했다. 섹스(sex),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의 머릿글자를 딴 것으로 독재정권이 국민의 정치적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즐겨 쓴다는 정책이다. 올림픽 유치를 지시 한 이유, GNP 2천 달러도 안 되는 개발도상국에서 프로 야구를 출범시킨 배경이 있다. 이에 대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치밀하게 기획됐다는 비판이 있다.[131]
  • 김수환 추기경은 1980년 설 새해 인사차 방문한 전두환 당시 육군 소장에게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 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라고 말했다. [132] 1987년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 "이 정권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고 묻고 싶다.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습니까? 총칼의 힘밖에 없는 것 같다."라고 비판했다. [133]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평가에 의하면 '1987년에 거족적인 6.10민중항쟁이 터져 전두환역도의 장기집권책동이 저지됐다[134]고 평가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또한 그가 반공주의자들 역시 탄압했다고 한다. 1986년 10월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여야 한다고 주장한 《신민당》출신 《국회의원》 유성환에 대한 탄압사건, 1987년 1월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에 대한 고문치사사건 등 전두환도당의 살인만행을 실례들자면 끝이 없다.‘전두환 일당이 대한민국의 <법>의 보호밑에 활개치고 5.16의 망령들까지 민중의 머리우에서 배회하고 있고 미군이 주인행세를 하며 여전히 판을 치고 있는 사실이 바로 민중이 가야 할 투쟁의 길이 험난한 길임을 증시해 주는 현실인 것’으로 평가된다고 한다.[134]
  • 1996년 전두환은 포괄적 뇌물죄로 추징금 2200억원을 선고받고, 600여억원을 납부하여 추징금이 1600여억원 가량 남아있던 중 2010년 10월 14일 300만원만 납부했다. 이에 대해 추징금 시효를 연장하기 위한 꼼수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전두환의 추징금 시효는 2010년 까지이며, 납부하지 않을 경우 재산이 가압류된다. 하지만 추징금중 일부를 납부할 경우 3년간 시효가 연장되어 재산 가압류를 당하지 않기 때문이다.[135] 전두환은 지인들과 무주리조트 등에서 골프를 치는 모습들이 목격되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으나, 전두환은 남은 돈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136]
  • 평화의 댐을 만든다는 목적으로 국민에게 모금운동을 벌여 돈을 모았으나 돈의 행방은 묘연해지고 평화의 댐도 흐지 부지 되었다.
  • 스포츠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주장에도 반론이 있다. 프로 스포츠의 발전을 도모한것은 3S(SEX, SPORTS,SCREEN)정책의 일환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편집]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책임

1988년 광주 특위에서 5.18 진상규명 작업에 나섰지만 전두환이 진술을 거부하며 변명으로 일관하는 바람에 전두환의 책임을 밝히지 못했다. 1996년 검찰은 12.12와 5.18 수사에서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식지휘계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 서리라는 직위를 이용하여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에 불법 개입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는 것을 밝혀냈다.[18]

5월 초순경부터 전두환의 주도로 신군부 세력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 5월 12일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에서는 '비상계엄 전국확대' , '국회 해산' , '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를 기획했다. 5월 17일 신군부는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시작으로 국회와 내각의 기능을 무력화하고 군부를 내세워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조치를 내렸고,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민은 신군부의 5.17 쿠데타(내란)에 항거했다. 신군부는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공수부대를 투입해서 반대 시위를 '과감한 방법으로 시위대를 타격'한다는 전제하에 시국수습방안을 실행했고, 정권 장악을 반대하는 광주 시민의 저항을 유혈진압했다는 데 책임이 있다. [119]

광주에서 시위 발생 초기에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병력을 증원하여 속히 시위를 진압하여 달라는 요청을 해,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의논을 하여 5월 18일 오후 15시 11공수부대가 광주로 수송기로 급히 증파됐다. 5.18 진압 과정 중에 계엄사에서 발표한 모든 담화문,경고문,포고문을 보안사에서 작성하여 계엄사령관에게 읽도록 하여 전두환 자신이 어느정도 주도할 수 있었다. 그 예 중 하나로 5월 21일 19시 보안사에서 작성된 자위권(방어적 발포 승인)발동을 경고하는 담화문을 계엄사령관에게 전달해 그대로 읽도록해서 자위권 발동 경고문 발표에 관여 했다. 19일 전두환은 광주지구 보안부대로부터 상황보고를 받으면서 그 보고 및 조치가 미흡하다고 판단하고, 보안사 장교 몇 명을 광주에 파견해 상황을 보고받거나 연행자 조사 등을 지원했다. 전두환은 이희성에게 강경 진압을 요구하면서, 신군부의 강경 진압 주문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인 현지의 전교사령관 윤흥정 중장 교체와 31사단 정웅 소장 지휘계통 제외를 요청해, 21일 윤흥정 전교사령관이 물러나고 소준열이 후임자로 임명됐다. 소준열 전교사령관은 임명되고나서 곧바로 23일 광주 재진입 작전 초안을 마련했다. [119]

전두환은 5월 23일 정호용 특전사령관을 통해 메모를 보내 소준열 전교사령관에게 피해가 있더라도 시위대를 조속하게 진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웅 11공수여단장에게 진압에 적극적으로 나서라며 직접 격려를 하기도 하였다. 5월 25일 12시 15분 국방부 내 육군회관에서 전두환, 황영시, 이희성, 주영복이 참석한 가운데 신군부는 26일 이후 광주에 재진입하는 작전을 실행하도록 결정했다. 전두환은 정호용에게 광주 재진입 작전에 필요한 가발과 수류탄을 제공하기도 했다. [119]

대법원은 1997년 4월 17일 5.18 판결문에서 전두환에게 5·17 쿠데타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문제 책임을 물으면서 "내란수괴죄", "내란목적살인죄", "반란수괴죄"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1995년과 1996년에 있었던 검찰의 5.18 수사를 통하여 전두환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에 상당 부분 관여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사실은 밝혀졌다. 하지만 5.18 사건 고소인들이 주장에 따르면, 전두환이 배후로 추정되는 전남도청 발포 명령자 문제와 지휘권 2원화 문제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었다. 2005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초기 조사 과정 중 전직 국정원 간부의 증언으로 문제의 실마리가 생길 것으로 보였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발포명령체계를 규명한 진상보고서 형태의 대외비 백서를 노태우 정권 출범 초기인 1988년에 국가안전기획부가 만들었으나, 한편으로는 그 문서가 파기됐을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다. [137]

2007년 7월 24일, 국방부의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서울특별시 태평로에 소재한 프레스센터에서 12ㆍ12 군사반란 및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사건에 대한 조사결과 보고서를 발표했다.[138] [139]. 과거사위에 따르면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이 군 수뇌부 회의에서 자위권 발동을 주장한 사실이 보안사(기무사의 전신)에 보존된 2군사령부 작성 ‘광주권 충정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에 들어 있다. 과거사위가 보안사(현 기무사)에서 찾아낸 2군사령부 작성 수기(手記)문서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주영복 국방장관, 이희성 육군참모총장, 진종채 2군사령관, 노태우 수도경비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차규헌 육사 교장 등이 참석한 군 수뇌부회의에서 자위권 발동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문서에는 '전(全) 각하(閣下:전두환):초병에 대해 난동시에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명기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자위권 발동을 주장했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정원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위대에 발포를 명령한 사람이 명기된 관련 문서가 존안되어 있지 않았고, 전두환 등 관련자들이 진술을 기피, 물증이 없다는 이유로 실체 규명에 실패했다고 밝혔다.[140] [141]

[편집] 의혹

이 문단의 내용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문단을 편집하여, 참고하신 문헌이나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주석 등으로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편집] 비자금 조성 의혹

1994년 당시 총무처 장관인 서석재에 의해 전직 대통령 비자금 의혹이 제기됐다. 서석재의 전직 대통령 비자금 발언 파문 초기에 전두환은 새벽에 약수터를 오르며 웃음과 무응답으로 서석재의 발언을 일축했다. 그러나 1995년 민자당 국회의원 박계동이 국회 청문회에서 전두환 4천억, 노태우 4천억 비자금 조성을 폭로하자 전두환은 강하게 부인했다.

서석재, 박계동의 공식 폭로에 의해 국회에는 진상조사단 구성에 여야가 합의해서 국회 진상 조사단 및 검찰·경찰 합동 수사팀이 구성됐다. 수사 결과 전두환과 노태우는 5천억 원 이상의 비자금을 수뢰한 것으로 확인됐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관련 문제와 12·12 군사 정변 주동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뒤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 12월 말 화합이라는 명목으로(당시 반DJ세력인 YS세력과 tk세력을 분열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대통령 김대중의 주선으로 사형 형집행은 면죄되고 곧 풀려났다. 풀려난 후 복권됐다.

이후 전두환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전 재산은 29만원이라고 하여 회자화되기도 했다. 2009년 현재 전두환의 미추징 비자금은 정확히 얼마인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최근 전두환은 탤런트 박상아를 둘째며느리로 맞이하였는데 전두환의 비자금 중 상당부분이 박상아의 명의로 되어 있다는 의혹도 있다.

[편집] 여성 편력 의혹

집권 당시 미모의 영화배우 모 씨와 관계하였다는 의혹이 확산되기도 했다. 의혹은 다양한 괴담을 유포하였으나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없다.

[편집]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의혹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느냐에 대한 논란이 있다. 1996년 검찰은 12.12와 5.18 수사 도중 전두환이 자위권 발동 문제, 공수부대 증파 문제, 전남도청 재진입 작전 결정 문제에 관여했으며 신군부의 강경 진압 주문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인 현지의 전교사령관 윤흥정 중장 교체와 31사단 정웅 소장 지휘계통 제외를 요청했고, 현지 지휘관에게 수 차례 직접 강력한 진압을 주문하는 등 정식 지휘 계통에 불법 개입해 강경진압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전두환은 보안사 , 중앙정보부를 장악했기 때문에 계엄사에 상황에 따라 정보를 제공해 배후 조종하기도 했다. 대법원은 1997년 4월 17일 5.18 판결문에서 전두환에게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문제 책임을 물으면서 "내란수괴죄", "내란목적살인죄"를 선고했다.

전두환이나 전두환이 이끌던 신군부 세력에 의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명령이 내려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는 전두환 광주 학살자설, 광주 학살의 배후로 지목되는 원인이 됐다. 1995년 검찰 수사 이전까지 그의 역할은 불분명했지만, 1980년대 학생운동권에서 그가 광주의 진압책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반미주의 성향을 띄는 민족 해방파(NL)가 의회주의인 제헌의회파(CA)나 민중 민주파(PD)보다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142] 일부 우익보수세력 및 전두환의 팬클럽인 전사모나 네티즌 역사학도, 지만원 등의 주장에 의하면 당시 그는 군 지휘체계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은 최규하 였고,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은 육군 대장 이희성이며 2군 사령관은 진종채 중장 , 전남북 계엄군 지휘관은 전교사령관 윤흥정 중장 과 소준열 소장 으로서 전두환이 진압의 지휘체계나 명령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극우주의자들의 주장은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집권 시나리오 '시국수습방안'에 따라 5·17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 장악을 하면서 일어난 수 많은 인권 침해 행위, 헌정 파괴 행위 행위를 부정하고 군부 내의 실세로서 5·17 쿠데타에 항거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강력한 진압을 주도했다는 역사적, 법적 책임을 희석 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편집] 지역감정 조장 의혹

대한민국의 지역 감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일부에서는 광주학살을 무마하기위해 전두환 정부가 조장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영남출신의 군인중심인 하나회가 조장했다는설도 있다. 민주진영에서는 민주정의당 집권세력의 농간이라는 주장도 제기한다. 1992년 초원복집 사건으로 여당이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은 “지역감정의 원인은 김대중이 제공했다”고 주장한다.[143]

전두환 정권 동안 영남 출신이 장관에 33.0%, 고위 관료에 41.2% 임명되는 등 영남 편중 인사가 있었다. 한편 집권 중 전남 출신의 최측근인 장세동을 비롯, 호남출신 인사인 김상협, 진의종, 심상우 등을 등용하였으므로 전두환이 지역감정을 조장했다는 주장은 사실과는 다르다는 반론도 있다.

[편집] 기타

닮은 연예인(박용식)에 대한 탄압도 간혹 회자되곤 한다. 또한 제5공화국 기간 중에는 대머리, 주걱턱 등은 영화계나 드라마 계에서 금칙어가 됐다.

2002년 2월 이주일의 빈소에서는 개인적인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주일 씨가 아들이 사망한 뒤 박종환 감독과 함께 우리 집에 찾아와 함께 술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79] 2008년 4월에는 팬클럽인 전사모에 의해 전두환 기념관이 설립되려다가[144] 무산되기도 했다.

[편집] 유행어

  • 1980년 이후 9시 뉴스의 첫 기사로 전두환 대통령의 일정이 보도되어 땡전 뉴스라는 유행어가 파생되기도 했다.
  • 1995년 재판정에서 ‘왜 나만 갖고 그래’라고 푸념한 것이 화제가 되어 한동안 유행했다.
  • 2003년 4월 28일 법정 회견에서 ‘29만 원 밖에 없다’고 하여 이 발언이 한동안 유행했다.[145][146][147] 한편 2004년 11월 서울 서부지검 형사5부는 29일 전두환 명의의 추가 부동산 존재사실이 새롭게 밝혀진 것과 관련, 전두환이 허위로 재산명시를 함으로써 민사집행법 위반여부를 검토했고[148], 일류국가시민운동본부 등 시민단체들은 2005년 7월, 전두환을 법정 허위 진술죄로 검찰에 고발하였다가[149] 허위사실 명시 무혐의 처리 됐다.[150][151]
  • 2008년 4월 방송 인터뷰에서 겪어보지도 않고 나를 미워한다 라고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같은해 5월의 국회의원 총선거 투표 후 인터뷰에서 그는 “우리나라도 대단히 좋은 나라가 됐다”며 “누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더라도 헌법을 개정해서 장기집권하겠다고 할 사람은(없을 것)… 그렇게 나오는 사람은 '간덩이'가 큰 사람”이라고 말했다.[152] 또한 "기자들이 내 사진은 꼭 삐뚜러지게 찍는단 말이야. 인상 나쁘게... 젊은 사람들은 나에게 감정이 안좋은가 봐. 나한테 당해 보지도 않고..."라고 한 발언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152][153][154]
  • 2009년 8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건의로 사면됐던 전두환은 한때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전직 대통령들이 제일 행복했다”는 발언을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155][156]
  • 전두환은 친인척이 추징금을 대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면 ‘겨우 먹고 살만한 정도’라 가족이 추징금을 대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157]
  • 전두환의 재판 때 전두환이 같이 재판을 받는 노태우에게 '자네 구치소에서 계란 후라이 주나?'라고 하자, 노태우는 '안 준다.'라고 하였고, 전두환은 '우리도 안 줘.'라고 대답한 것이 드러났다.

[편집] 김대중과 친인척 관계

그의 장인은 이규동이고 이규동의 동생, 처삼촌인 이규광을 통해 김대중과 사돈관계가 된다. 이규광의 처 장성희의 여동생이 장영자이며, 이규광의 장인과 김대중의 본처 차용애의 친정어머니가 남매간이므로 김대중은 인척관계를 형성한다.[54] 김대중의 본처 차용애의 자녀인 김소희, 김홍일, 김홍업과 전두환의 이순자 소생 3남 1녀인 전재국, 전재용, 전재만은 외척 관계가 된다.

[편집] 구국의 영웅설

일부 우익세력과 전사모는 그를 구국의 영웅이라 부른다. 그에 의하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시민군이 먼저 병기고를 탈취한 폭동이라는 견해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인민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침투했다는 견해가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출처불명의 유언비어들이 확산되어 시민들을 자극했다는 견해도 있다. 따라서 시민군의 선제공격, 혹은 북한의 조선인민군 특수부대의 침략을 막아낸 전두환은 '구국의 영웅'이라는 것이다.[158][159][160]

1995년의 검찰 수사 결과를 살펴보면 광주 시민이 무기고를 먼저 탈취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차이가 있다. 같은해 7월 검찰이 발표한 5.18 수사 결과 발표문에 따르면 시위대는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집단발포 이후에 무장을 했다. 또한 5월 19일 오후 5시 광주고 부근에서 공수부대가 발포하여 고등학생이 부상당했고, 20일 오후 23시에 3공수여단이 광주역에서 집단 발포를 하여 4명이 사망했다. [161] 일부 우익 집단은 5.18 당시 북조선 인민군 특수부대가 침투했다는 견해를 제기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증거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2006년 12월 22일 5.18 관련 단체들은 신군부가 조사를 했지만 광주 시민 중에 북한과 관련성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 한미연합사가 북한의 어떤 동향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반박했다. [162]

[편집] 기념물 건립 논란

이 부분의 본문은 일해공원입니다.

2008년 일해공원 건립을 놓고 5.18 관련 단체 및 부산, 경남시민단체들이 반발, 전사모, 보수단체 등과 충돌을 벌이기도 했다. 일해공원 반대투쟁위원회 등이 구성되어 활동했고, 일해공원 예정지 내에서 영화 '화려한 휴가' 등을 상영하는 등의 활동을 했으나 일해공원은 건립됐다.

2009년 5월, 전두환의 팬클럽인 전사모는 전두환 기념 시설 건립을 추진했으나 2009년 6월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5.18 단체들과 법정 공방을 벌이기도 했다. 전두환 기념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전사모측의 주장과 반대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는 중이다.

[편집] 일화

  • 민족문화 장려정책에 따라 국풍 21을 주도하고, 독립기념관의 건립을 추진한다. 독립기념관 건립 후에는 김구의 차남 김신을 관장으로 선임했다. 박정희 집권 말기인 1977년부터 문교부를 출입하던 이유립 등의 역사가들을 계속 문교부 등에 초빙하여 공무원들을 상대로 국사강연을 실시했다. 한편 전두환은 고조되는 반일감정에 대해 극일(克日)정신을 주장하며 실력으로 일본을 이길 것을 강조하였다.
  • 대통령 후보 시절 7년단임제를 주장하였는데, 재선 이후 1987년 7년 단임제를 이행하고 퇴진하였다. 재출마를 시도하려 했다는 주장과 재출마를 단념하고 노태우를 차기 주자로 결정하였다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한편 전두환은 후임자는 문민통치자여야 된다며 1984년 경 경제관료 출신 노재봉 등을 후계자로 낙점, 정치수업을 하려다가 신군부하나회 출신 군부 인사들의 반발로 취소하고 노태우를 선택하게 된 것이라 한다. 그가 후계자로 잠정 낙점했던 인물은 노재봉, 노태우, 정호용, 장세동 등이었다.
  • 한편 전두환은 2009년 8월 14일 김대중의 병문안 중 기자회견에서 ‘김대중 대통령 때 가장 행복했다’고 발언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163][164][165]
  • 전두환은 대령 시절 각 부대의 지휘관들이 한 자리에 모인 상황에서 다리를 쩍 벌리고 팔짱을 낀 채 매우 건방진 자세로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자리에는 3성장군을 비롯한 장성들이 많이 모인 자리였다. 이토록 전두환은 상급자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편집] 땡전뉴스

1980년 이후 각 방송사의 오후 9시 뉴스 시작 때 "...땡! 전두환 대통령은..." 이렇게 시작하는 것을 두고 '땡'과 전두환의 '전'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전두환 대통령 집권 당시 뉴스는 전두환 내외의 소식이나 전두환 내외 관련 행사를 가장 먼저 보도하였다. 그리하여 일부 지식인들은 이를 땡전 뉴스라 풍자하기도 했다. 9시 정각이 되면 전두환 내외의 소식이나 전두환 내외 관련 행사를 가장 먼저 보도한 것을 비꼬아 풍자한 것이다.

[편집] 취향

그는 술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2007년을 전후해 술을 줄였다. 2007년 1월 5일 인사차 방문한 당시 대통령 후보자 이명박과의 1시간 공개 면담에서 "주량이 3분의 1로 줄었다. 나이 드니까 도리 없어"라며 절주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다.[166] '운동은 뭘 하시느냐'고 묻는 이 시장에게 "나이 들면 골프가 가장 좋아, 그런데 주변에 한사람 두 사람 골프치는 사람이 없어져, 세상 떠나고 아프고"라면서 적적함을 표현하기도 했다.[166]

애연가이기도 했던 전두환은 1987년 자신의 퇴임석상 등 공식 석상에서도 흡연을 하기도 했다.

[편집] 종교

1988년 백담사에 들어갔다. 1989년 백담사 은둔 1주년을 맞아 부처님 진신사리 친견 및 봉헌법회에서 불경을 외우기도 했다. [167] 이때 전두환은 1988년 11월 23일 오후 3시 20분, 안현태 전 경호실장 등 수행원과 백담사에 도착. 그 후 25개월 동안 전두환은 백담사에 머무르며, 백담사 생활을 한 지 1년 후 전두환은 찾아온 신도들과 대화하면서 "몇 사람 손봐주고 싶었던 마음을 극복했다"고 불교신앙고백을 했다고 한다. 또 주지에게 "모든 일이 내게서 비롯됐다고 생각하니 남을 탓하거나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백담사에 와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으니 나는 복있는 사람이죠"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167]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 취임식을 했던 1980년 9월 10일 직후인 10월 27일에 10·27 법난[168]을 일으키며 집권 신군부 세력이 불교계를 탄압한 일이 있는데, 그 사건을 일으킨 동기는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신군부를 반대했던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가 전두환 지지 성명에 반대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현장을 방문하여 성금을 전달하는 등 신군부에 밉보인 것이 원인이라는 해석이 있다. [169]

[편집] 상훈

  • 1968년 4월 - 4등 근무공로훈장
  • 1981년 5·16 민족상
  • 대한민국 50년을 만든 50대 인물 9위/1998.7/조선일보
  • 무궁화 대훈장
  • 보국훈장삼일장
  • 화랑무공훈장
  • 충무무공훈장
  • 을지무공훈장
  • 1971년 11월 - 월남 엽성무공훈장
  • 보국훈장 천수장
  • 보국훈장 국선장
  • 태극무공훈장(서훈취소/06.03.21)[170][171][172]
  • 1976년 6월 - 대통령 표창, 공로 표창장
  • 수교훈장 광화대장 (서훈 취소)

[편집] 서훈 취소

2006년 국무회의에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등 3년이상 형을 선고받은 176명의 서훈을 취소하고, 훈장 등을 환수키로 의결했다.[173]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비롯해서 서훈 취소 대상자 절반 가까이가 훈장 반환 요구에 대해 반환 기한인 30일까지 반환은커녕 사유서조차 내지 않고 있다. 이에 행자부 관계자는 “서훈 취소자의 경우 훈장 기록부 명단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이 사실을 관보 등을 통해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훈장에 따른 영예가 모두 상실됐다고 볼 수 있다”며 “반환 의무 규정을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174] 그러나 전두환은 4년이 지난 현재도 취소된 훈장은 반납하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이에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민주당 이석현 의원은 국무회의에 의결을 통해 환수키로 의결했지만 적극적으로 환수노력을 하지 않는 행안부에 대한 비판했다.[175]

[편집] 가계 (家系)

부인 이순자

그의 재임시절 형 전기환노량진 수산시장을 인수하고, 동생 전경환새마을운동 중앙본부 회장을 지내며 이권을 챙기는 등 비리를 일으켜 퇴임 후 물의가 됐다. 사촌 전순환(全淳煥)은 기업인으로 골프장 허가를 미끼로 수뢰한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고, 사촌 전우환(全禹煥)은 고향에서 정미소 운영하다 일약 양곡가공협회장에 앉음. 새서울용역 감사. 각종 인허가 청탁 개입, 수뢰 혐의로 구속됐다.

부인 이순자의 사이에 재국, 재용, 재만 세 아들과 딸 효선을 두었다. 첫째 재국은 시공사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둘째 재용은 탤런트 박상아와 결혼했고, 세째 재만(연대졸)은 이윤혜 씨(이대졸)와 결혼했다. 이윤혜는 한국제분 사장이었던 운산그룹(동아원) 회장 이희상씨의 딸이다. 최근 미국 나파밸리의 포도밭에서 출시한 두종류의 동아원 와인이 G20정상회담의 만찬주로 사용되어서 화제가 됐다.

 
 
 
 
전상우
(全相禹)
 ?~1967
 
김점문
(金點文)
 ?~1974
 
 
 
 
 
 
 
 
 
 
 
 
 
 
 
 
 
 
 
 
 
 
 
 
 
 
 
 
 
 
 
 
 
 
 
 
 
 
 
 
 
 
 
 
 
 
 
 
 
 
 
 
 
 
 
 
 
 
전열환
 
전규곤
 
전기환
 
 
 
전두환
(全斗煥)
1931~
 
이순자
(李順子)
1939~
 
 
전경환
(全敬煥)
1942~
 
 
 
 
 
 
 
 
 
 
 
 
 
 
 
 
 
 
 
 
 
 
 
 
 
 
 
 
 
 
 
 
 
 
 
 
 
 
 
 
 
 
 
 
 
 
 
 
 
 
 
 
 
 
전재국
(全宰國)
1959~
 
 
전재용
(全在庸)
1964~
 
 
 
박상아

1972~
 
 
전재만
 
 
 
전효선
 
 
 


  • 조부 : 전영수(全永洙, 1867년 ~ 1936년)[176]
    • 숙부 : 전상기
      • 사촌 : 전순환(全淳煥, 대전수산주식회사 대표)
    • 숙부 : 전상희
      • 사촌 : 전우환(全禹煥, 정미소 경영)
  • 부 : 전상우(全相禹, ? ~ 1967년)
  • 모 : 김점문(金點文, ? ~ 1978년)[176]
    • 형 : 전열환, 어려서 사망
    • 형 : 전규곤, 어려서 사망[177]
    • 형 : 전기환(全基煥, 경찰 출신으로[178] 1988년 서울지방검찰청 특수부 검사 홍준표에 의해 비리 혐의로 구속됐다.[179])
    • 동생 : 전석환, 어려서 사망
    • 동생 : 전경환(全敬煥, 1942년 ~ , 기업인,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 역임)
    • 누나 : 전홍렬(全鴻烈, 1918 ~ ?)
    • 누나 : 전명렬(全命烈, 1922 ~ )
    • 누나 : 전선학(全善學, 1928 ~ )
    • 누나 : 전학렬
      • 외조카 : 김영도(金永道, 기업인, (주) 대립개발 회장)
    • 여동생 : 전점학(全點學, 1935년 ~ )

[편집] 문화에 나타난 전두환

[편집] 문학

  • 백무현, 《만화 전두환》, 전두환에 대한 비판적인 소설 겸 만화
  • 《황강(黃江)에서 북악(北岳)까지》, 전두환 전기

[편집] 전두환을 연기한 배우들

[편집] 드라마

[편집] 같이 읽기

[편집] 주석

  1. 2 Ex-Dictators Leave Korea Jails, Pardoned After 2 Years -- The New York Times, December 23, 1997
  2. 오늘 속으로 全盧재판 - 한국일보 2004년 8월 26일자
  3. 그의 부친이 독립운동가라는 견해가 있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4. http://news.joins.com/article/3359391.html?ctg=1000
  5. 대통령의 아버지, 누구인가?…가난한 농사꾼에서 거제도 갑부까지 ① 중앙일보 2008년 10월 30일자 기사
  6. http://news20.busan.com/news/newsController.jsp?subSectionId=1010090000&newsId=20090206000186
  7.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58416&CMPT_CD=P0000
  8. "민원 뇌물에 단 최고회의 전대위에 수표 내논 노씨 구속", 경향신문 1961년 07월 31일자 3면 사회
  9. "전 대위, 국회의원 출마 안 하겠나" 박정희의 전두환 총애, 이유 있었다
  10. 경향신문 1980년 08월 21일자, 정치 3면
  11. 전두환이 박정희로부터 국회의원이 되라는 권유를 받을 때 전두환은 대위였지만 그 동기인 손영길은 중령 진급심사를 앞둔 소령이였다.
  12. 그는 자신의 동기들 중 중령 진급은 늦었으나 대령 진급은 빠르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13. 박정희가 이후락을 대통령 후계자로 내정했다는 취중발언
  14.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48) - 조선닷컴 인물
  15. 김재규 단독계획 범행. 1979년 11월 6일, 동아일보 1면
  1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143&aid=0000076127 신군부, 언론통제 실상 드러나)
  17.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6012270124 조선일보 1996년 1월 22일 5.18사건 재수사 종결,내일 기소
  18. 공소장으로 본 5.18 전개과정
  19. [광주항쟁 30년](4) 광주가 우리에게 묻는 것 - 남은 자의 과제 :: 네이버 뉴스
  20. [http://www.imbc.com/broad/tv/culture/cantell/vod/index.html?kind=text&progCode=1000459100020100000&pagesize=15&pagenum=6&cornerFlag=0&ContentTypeID=1 일본 커넥션 - 쿠데타 정권과 친한파 ]
  21. 5월 15일, 전국 학생운동권 의장단과 간부진이 경찰과 특수부대 출동 정보 입수를 입수하자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해산하게 된다.
  22. 양당 국회 대책 개헌해제논의 등 활성화
  23.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에는 정부와 언론의 왜곡에 의해 김대중의 사주 의한 폭동으로 여겨졌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압은 정당하게 해석됐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관련자, 학생운동권 탄압 등의 문제가 제기된다. 정치군인 양성 등에 대한 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문제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북한 인민군 침투와 반체제 세력의 선동 등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반론이 일부 보수세력으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24. 동아일보, 1980.08.09일자 1면
  25. 동아일보, 1980.08.25일자, 1면
  26. 1990년대에 미국과 다시 협상을 벌인 결과 ‘미사일 각서’를 무효화하는 대신 2001년 MTCR(Missile Technology Control Regime)에 가입해 ‘사거리 300km, 탄두 무게 500kg 이하’의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게 됐다.
  27. 한경비즈니스[대한민국 우주시대 ‘카운트다운’우주강국 코리아 ‘카운트다운’ ]
  28. 북한의 로켓발사 정국과 북미 관계의 함수 분석
  29. 80년대 경제개혁과 김재익 수석 (남덕우 외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6) 189
  30. 80년대 경제개혁과 김재익 수석 (남덕우 외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6) 190
  31. [이슈&현장] '공정한 사회' 과제와 실천방안 :: 네이버 뉴스
  32. "지방선거 '양극화 세력' 대 '복지 세력'의 대회전" :: 네이버 뉴스
  33. 전재호,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책세상, 2000) 112~113쪽.
  34. 북데일리
  35. 국내서 82년 플루토늄 극미량 추출 세계일보
  36. "한국, 82-83년 극비리 핵개발 추진" YTN 2004-09-09일자
  37. "레이건이 전두환 핵무기개발 직접 저지" 프레시안 2004-09-10일자
  38. 80년대초 국내서 플루토늄 추출 한겨레 2004.09.09
  39. "83년 레이건이 핵개발 중지 요구" 경향신문
  40.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까 주간한국 2004-09-23일자
  41. ‘제5공화국’ 전두환, 핵무기개발 포기 방영후 네티즌 비난 해럴드경제
  42. <전직 대통령 북핵실험 진단 `3인3색'> 연합뉴스 2006년 10월 10일자
  43. 22년 만에 간판 내리는 청송감호소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44. 이승복기념관, 《이승복기념사업 25년사》 (이승복기념관, 1993) 91~123쪽
  45. 김영삼 - Daum 백과사전
  46. 대한민국 선거이야기(서중석 저, 역사비평사, 2008) 213페이지
  47. 박정희 시대 경제의 명과 암 브레이크뉴스
  48. 한용원 "안필준 보안사령관 친위쿠테타 지시"
  49. 맛있는 정보! 신선한 뉴스! - 서울신문
  50. 餘滴(여적)”, 《경향신문》, 1983년 5월 25일 작성. 2009년 6월 22일 확인.
  51. 의보일원화 공약 어떻게됐나”, 《동아일보》, 1983년 11월 2일 작성. 2009년 6월 22일 확인.
  52. 홍보의 불균형”, 《동아일보》, 1984년 5월 24일 작성. 2009년 6월 22일 확인.
  53.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교과서포럼 저, 도서출판 기파랑, 2008.3.24) 237p
  54. 대통령 따라 출렁거린 한·미 관계 30년
  55. 이는 일본에 의한 강제 침략을 공식석상에서 주장하던 이승만, 박정희와도 대조적이다.
  56. [뉴시스아이즈]이슈진단 '가열되는 통일비용 논란'-역대 정부 통일방안 살펴보니…정국따라 천차만별 :: 네이버 뉴스
  57. 아웅산 테러가 ‘성공’했다면 :: 네이버 뉴스
  58. 일부 보수 세력은 1983년아웅산 묘역 폭탄테러사건은 전두환의 대북관 및 전두환 정권의 대북정책을 부정적으로 보게 했고, 전두환 체제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주체사상파(NL) 역시 전두환 정권의 대북정책을 경직시키는 하나의 요인이 됐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언론을 통해 알려지지 않았지만, 제5공화국 정부와 전두환 대통령은 지속적으로 비밀리에 남북대화를 추진했다.
  59. <남북관계史와 '쌀'지원 함수> :: 네이버 뉴스
  60. [뉴스테이션/딥포커스] 북한의 ‘도발과 대화’ 이중전술의 비밀<2> :: 네이버 뉴스
  61. 통일뉴스
  62. 1986년 11월 29일 민주정의당 중앙집행의원 및 상임의원장들과의 만찬 석상에서
  63. 한흥수, 《한국정치동태론》 (오름, 1996) 312페이지
  64. 한편 직선제 요구와 6.10 항쟁 이전에 스스로 임기를 채우고 퇴진하려 했다는 견해와 직선제 요구와 6.10 항쟁이 없었으면 장기집권을 꿈꿨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65.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4/03/02/200403020500004/200403020500004_6.html (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④) 12·12 직후 만난 DJ, "군인들은 내게 충성할 것"] 신동아 2004년 03월(534호)
  66. 한국현대사(서중석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 337
  67. 전두환의 백담사 은둔 기간 중에도 시민사회단체는 전두환 구속, 전두환의 12.12, 5.18 관련 처벌을 꾸준히 요청했으나 노태우는 전두환 처벌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68. 전두환 대국민성명 전문, 한국일보 1995년 12월 04일자, 8면
  69. 대법원 199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뇌물)】
  70. http://ilyoseoul.co.k/index2.php?idx=85802&news_sec_name=인터뷰·인물 경제난에 ‘두 끼 먹자’ 일요서울 2008-07-31 기사
  71. (풍향계) 박정희기념관 건립과 도덕적 해이 교수신문 2001년 08월 13일
  72. http://news.donga.com/Column/Kija/3/040102/19990628/7450724/1
  73. <아시안게임> 전두환 전대통령의 하키 '애정' :: 네이버 뉴스
  74. 김대통령 전두환씨 오찬 :: 네이버 뉴스
  75.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76. ‘녹화사업’,82년 전두환씨 지시 - munhwa.com
  77. donga.com[뉴스]-´녹화사업´ 조사위해 전두환씨 소환
  78. 전두환 전 대통령 '녹화사업' 조사 불응 : 사회 : 인터넷한겨레 The Hankyoreh
  79. 이회창 후보, 전두환 前 대통령 조문 :: 네이버 뉴스
  80. 하키장 찾은 전두환 전 대통령 :: 네이버 뉴스
  81. "'녹화사업' 대통령지시 시사문건 확인"- 중앙일보 뉴스
  82. "전두환, 녹화사업 지시" 추정문서 발견 - 오마이뉴스
  83. 전두환씨 부자 “세금 80억 돌려달라” 증여세 취소 소송 : 사회일반 : 사회 : 뉴스 : 한겨레
  84. 전두환 "인질 석방 안 되면 내가 대신 인질 될까 고민" 조선일보 2007년 8월 29일자 기사
  85. 전두환, 이명박에 입심 과시 중앙일보 조선일보 2007년 8월 30일자 기사
  86. [인터넷 스타] ‘전두환 인질’ 발언 : 맛있는 뉴스 : 특집 : 한겨레21
  87. [권영길 후보 논평, 전두환 덕분에 웃겼다] 연합뉴스 2007년 08월 29일자
  88. 전 前대통령의 ‘으스스한’ 농담, 구설 올라 서울신문 2008-04-17
  89. YS "잘할 것으로 믿어" DJ "서민 살피길" 한국경제 2008-02-25 기사
  90. 스포츠한국 : 전두환 전 대통령, 윤현진 아나 결혼식 참석
  91. 전두환 “하루에 두 끼만 먹기 운동하자” 이색 제안 경향신문 2008년 07월 22일 기사
  92. “경제 어려운데 하루 두 끼 먹기 운동 어떤가” 문화일보 2008-07-22 기사
  93. [논평] 전두환 전 대통령의 헛개그를 고찰함 :: 네이버 뉴스
  94. [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71814 전두환, 고 김수환 추기경 '뒷짐 조문' 결례] 오마이뉴스 2009-02-18 기사
  95. 노무현, 전태일, 예수 뉴스앤조이 2009년 06월 01일
  96. [쿠키뉴스] 갓 구워낸 바삭바삭한 뉴스
  97. 전두환 전 대통령도 DJ 문병 "틀림없이 완쾌될 것"
  98. 노컷뉴스
  99. 강준만 (2003년 5월 12일). 〈제1장 왜 광주는 피를 흘려야했나?/ 1980년 - K공작〉,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1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서울: 인물과사상사, 50쪽. ISBN 89-88410-75-0
  100. 정승화(이경식 정리·대필)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휴먼앤북스, 2002) 404쪽. "목에 힘을 주고 패거리 우두머리 같은 기질을 보이며 행세하는 전두환 소장은 정신 자세부터가 정치적이었고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101. 강준만 (2003년 5월 12일). 〈제1장 왜 광주는 피를 흘려야했나?/ 1980년 - K공작〉,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1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서울: 인물과사상사, 49쪽. ISBN 89-88410-75-0
  102. 김성익, 《전두환 육성증언》(조선일보사, 1992) 346쪽. 박정희와의 관계에 대해 전두환은 1987년 4월 12일 청와대 본관식당에서 수석 비서관들과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어디 가 있어도 골치아픈 일이 있으면 나를 불렀어요. 군대 얘기도 물어보고 그랬어. 나는 항상 그 양반한테 희망적인 얘기를 많이 했어요. 1년에 한두 번씩은 부르셨어요. 이 식당, 여기에서 육여사와 함께, 분식 권장할 때인데 분식으로 식사도 했어. 육여사가 만든 거라고 했는데 별로 맛은 없지만 나는 식성이 좋으니 두 그릇 정도 먹었어요"
  103. 남편의 사형선고 소식때 나는 외롭게 감금당해 있었다” 경향신문 2008년 11월 11일 기사
  104. http://www.naenara.rep.kp/ko/news/news_view.php?0+1667
  105. 박찬종 “전두환, 現국정파탄 책임 이순신 동상앞 석고대죄…” 동아일보 2006-11-28일자
  106. '제5공화국', `전두환=29만원?' 홈피에 논란 재연 :: 네이버 뉴스
  107.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29.EB.A7.8C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108. "전두환 대통령은 북한 수공계략 간파했다" - 오마이뉴스 2009년 09월 9일자
  109. "전두환 '씨'가 뭐냐, 前 대통령에게" - 오마이뉴스
  110. 전사모 "연천 GOP사태는 현정권 이후 군기강 해이 탓" 파문
  111. "한국사회에서 보수란 무엇인가?" 프레시안 2008년 09월 09일자
  112. "전두환, 역사상 두 번 다시 없는 위대한 영웅" - 오마이뉴스
  113. '전사모' 일해공원서 한달간 집회 신고 뉴시스 2007년 8월 19일
  114. "광주땐 폭동... 내가 전두환이라도" 전두환 생가 지키는 합천 주민들 - 오마이뉴스 07.02.11일자
  115. 전두환 독재 가려준 ‘스포츠 통치’ :: 네이버 뉴스
  116. 30년만에 밝혀지는 ‘88서울올림픽 유치’ 성공 비화… ‘왕회장’의 꽃다발, 日 물량공세 꺾었다
  117. 12.12및 5.18 사건관련 全斗煥씨 범죄사실
  118. 서울 첫 상주특파원 눈에 비친 5.18 광주
  119. 5.18 사건 1심 , 항소심 , 상고심 판결문
  120. 신군부,시국수습안 대통령 반대불구 강행
  121.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910&page=10 신현확 검찰 진술서
  122. 시민단체, 재산 위증혐의 전두환씨 고발
  123. '숨은 전두환씨 재산 찾기' 숨바꼭질
  124. 이순자씨, "땅투자 재산 10배 불려"
  125.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01021102501&section=01 '정의사회' 내세웠던 전직 대통령의 파렴치 ]
  126. 6공 시절 5공 청산 과정
  127. '전두환 비자금' 미국에 있었다?
  128. 한국경제 제 3의 길이 가능한가?
  129. 국방부 과거사위 발표 “삼청교육대 사인 일부 조작”
  130.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 별세 한국경제 2009-03-29
  131. MBC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을 말한다"
  132. <김수환 추기경 어록>(종합) :: 네이버 뉴스
  133. 전두환 "김수환 추기경과 관계가 깊다(?)" :: 네이버 뉴스
  134. http://www.kcna.co.jp/item2/2000/200005/news05/18.htm
  13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5&aid=0000431119 전두환 추징금 300만원 납부 왜?… 여론 피하고 시효연장 ‘꼼수’) 국민일보 2010년 10월 14일
  13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1973406 '1672억 추징금 미납' 전두환, 300만원만 납부) 오마이뉴스 2010년 10월 14일
  137.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65125&PAGE_CD= "5·18 발포 요청자·명령자 이미 규명돼 있다" <주간조선> 전 안기부 간부 증언 보도... 88년 제작한 '광주백서'에 포함
  138. 전두환씨 5·18때 '자위권 발동' 주장 서울경제 2007년07월24일자
  139. 과거사위, 5·18때 전두환씨 '자위권 발동 주장' 확인 경향신문 2007-07-24 일자
  140. 5.18 때 전두환씨 '자위권 발동' 주장
  141.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는 국제사회에 제출한 고발장인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고발장'에서 그가 매국노였기에 전두환역도는 남조선청년학생들과 인민들의 반미투쟁에 대하여 상전보다 더 신경을 쓰면서 야수적으로 탄압하였다.'고 비난했다.
  142. 이는 1984년의 NL-CA논쟁과 1985년의 NLPDR 논쟁에서 민족해방파가 우세하게 됐다.
  143. [대담 김영삼 전 대통령: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 - 시대정신
  144. '전사모' 사무실 문 열어... "전두환 기념관 세우겠다" - 오마이뉴스
  145. 사이버공간은 전두환 패러디 글로 '들썩' :: 네이버 뉴스
  146. 전씨는 구호대상자 아닌가 :: 네이버 뉴스
  147. 全씨 재임중 9,500여억 거둬 :: 네이버 뉴스
  148. "전두환씨 민사집행법 위반여부 검토중"<검찰>(종합) :: 네이버 뉴스
  149. YTN 검색
  150. 전두환씨 '재산 허위명시' 무혐의 :: 네이버 뉴스
  151. 전두환씨 `재산 허위명시` 무혐의 :: 네이버 뉴스
  152. [서울신문] 전 前대통령의 ‘으스스한’ 농담, 구설 올라
  153. 전두환은 죽어도 그 이름은 남을 것이다 - 오마이뉴스
  154. http://www.magazinet.co.kr/Articles/article_view.php?mm=004006000&article_id=48066
  155. 전두환 “DJ 때 전직 대통령 제일 행복” 중앙일보 2009.08.15
  156. 전두환 "DJ 재임시절에 전직 대통령들 제일 행복" - 오마이뉴스 2009.08.14일자
  157. G20 만찬주, 전두환 아들이 만든 포도주 사용
  158. '전사모'가 생겼다니… :: 네이버 뉴스
  159. "한국사회에서 보수란 무엇인가?" - 프레시안
  160. 전사모, 시스템클럽 등 참조
  161. 95년 7월 18일 검찰의 수사 발표문
  162. 노컷뉴스
  163. 문병간 전두환씨 “DJ 대통령때 전직 가장 행복”- 한겨레
  164. 문병 온 전두환 “DJ 집권때 제일 행복” - 세계일보
  165. 헤럴드경제-뉴스
  166. 전두환 "이제 음식도 술도 안 먹혀" 오마이뉴스 2007년 1월 5일자
  167. 전두환 백담사 은둔(1988.11.23) 역사학연구소
  168. 전두환의 불교탄압
  169. 정천기. “월주스님 "10ㆍ27법난 때 죄수복입고 조사받아"”, 《한국일보 (연합뉴스 인용)》, 2007년 10월 25일 작성. 2008년 9월 8일 확인.
  170.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등 176명 서훈취소 , 《연합뉴스》인용
  171. 전두환·노태우씨 훈장반환 ‘버티기’, 《한겨레인용
  172. 이경희 기자 전두환·노태우, 4년째 훈장 반납 안하고 버티기 2006년 서훈 취소 후 全 9개, 盧 11개 등 모두 20개 미반납 프레시안 2010년 10월 22일 작성
  173.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등 176명 서훈취소 , 《연합뉴스》인용
  174. 전두환·노태우씨 훈장반환 ‘버티기’, 《한겨레인용
  175. 이경희 기자 전두환·노태우, 4년째 훈장 반납 안하고 버티기 2006년 서훈 취소 후 全 9개, 盧 11개 등 모두 20개 미반납 프레시안 2010년 10월 22일 작성
  176. 지종학풍수지리연구소
  177.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178. ‘조영래 눈물의 변론’ 끝내 외면…“사법부 몰락을 봤다” : 사회일반 : 사회 : 뉴스 : 한겨레
  179. 정권마다 반복된 ‘가족 옥살이’ 언제까지… - munhwa.com
  180. 전두환씨 외동딸 이혼 : 사회일반 : 사회 : 뉴스 : 한겨레

[편집] 참고 자료

  • 천금성, 《황강(黃江)에서 북악(北岳)까지》- 전두환 일대기
  • 이장규,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전두환시대 경제비사) (올림, 2008)
  • 서상원, 정부패러다임적 정책결정과정 분석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부의 비교) (한국학술정보, 2007)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80년대편 1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80년대편 2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80년대편 3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90년대편 1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90년대편 2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6)
  • 80년대 경제개혁과 김재익 수석 (남덕우 외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6)
  • 박상하, 그때 그 사람들 (전두환의 제5공화국) (박상하, 학영사, 2005)
  • 역사의 언덕에서 4 (미완성의 민주화) (강원용, 한길사, 2003)
  • 한상범, 전두환체제의 나팔수들 (이철호 역, 패스앤패스, 2004)
  • 방경일, 전두환 리더십 노태우 처세술 (방경일, 너와나미디어, 2002)
  • 노신영 회고록 (노신영 저 , 고려서적 , 2000)
  • 김성환, 전두환 육성증언-김성환 (조선일보사, 1992)
  • 박종렬, 노태우 전두환 (도서출판 인본, 1992)
  • 윤치영,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윤치영, 삼성출판사, 1991)
  • 서진모, 전두환.이순자 부부에게 보낸편지 (서진모, 대웅출판사, 1988)
  • 박경우, 전두환 이순자 구속처벌투쟁 평가 (박경우, 세계출판사, 1989)
  • 고항민, 전두환왕국 (고항민, 청사출판사, 1988)
  • 이사달, 전두환 참회록 (이사달, 청음사, 1988)
  • 암파편집부, 전두환시대 1~6:제5공화국정치비사제2부(중원강좌 17) (암파편집부 저, 황인 역, 중원문화사, 1988)
  • 조갑제, 군부:전두환,총구에서 나온 권력의 심층해부 (조선일보사, 1988)
  • 정음사, 언제나 국민과 함께:내외 얼론에 비친 전두환대통령의 1500일 (정음사 편집부, 1985)
  • 황성모 외, 민족사의 새지평-전두환대통령의 통치이념 (경향신문사, 1983)

[편집] 바깥 고리

2000년대 이전에 전사모라는 팬클럽이 등장하였다.

Flag of South Korea.svg 제11·12대 대한민국 대통령 Presidential Standard of the Republic of Korea.svg
전 임
박충훈
(권한 대행)
1980년 9월 1일 - 1988년 2월 24일 후 임
노태우
이승만 · 윤보선 · 박정희 · 최규하 ·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 · 김대중 · 노무현 · 이명박
전 임
이희성
윤일균 (직무대행)
제10대 중앙정보부장 서리
1980년 4월 14일 - 1980년 7월 17일
후 임
유학성
('국가안전기획부'로 변경)
전 임
(초대)
제1대 민주정의당 총재
1981년 1월 - 1987년 7월 10일
후 임
노태우
전 임
(초대)
제1대 민주정의당 명예총재
1987년 7월 10일 - 1989년 11월 23일
후 임
노태우
(민주자유당)
전 임
최규하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
1988년 2월 - 1988년 11월 23일
후 임
최규하
개인 도구
이름공간
변수
행위
둘러보기
인쇄/내보내기
도구모음
다른 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