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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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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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12년 4월 15일(1912-04-15)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평양부
(現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만경대)
사망 1994년 7월 8일 (82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향산군 묘향산
국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당 조선공산당, 북조선로동당 조선로동당
자녀 슬하 4남 4녀
부모 아버지 김형직, 어머니 강반석
서명
Kim Il Sung Signature.svg
김일성
1912년 4월 15일 ~ 1994년 7월 8일
태어난 곳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평양 만경대
죽은 곳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묘향산
복무 소련 소련
복무 기간 1940년 ~ 1945년 10월 14일
최종 계급 CCCP army Rank kapitan infobox.svg소비에트 연방 붉은 군대 육군 대위
근무 소비에트 연방 붉은 군대
지휘 소비에트 연방 붉은 군대 극동군 제88국제여단
주요 참전 만주 항일 투쟁
기타 이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수상(1948~1972), 국가 주석(1972~)
김일성 (본명 김성주)
1912년 4월 15일 ~ 1994년 7월 8일
태어난 곳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평양 만경대
죽은 곳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묘향산
복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복무 기간 1948년 ~ 1994년 7월 8일
최종 계급 Generalissimo rank insignia (North Korea).svg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원수
근무 조선인민군
지휘 한국 전쟁
주요 참전 한국 전쟁
기타 이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수상(1948~1972), 국가 주석(1972~)

김일성(金日成, 1912년 4월 15일 ~ 1994년 7월 8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치인이다. 1948년 9월부터 1972년 12월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각 수상을 지냈고 1972년 12월 15일부터 1994년 7월 8일까지 국가주석직을 지냈다.

일제 강점기 때 만주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조선혁명군, 반일인민유격대(그 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됨) 등을 조직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북조선로동당소비에트 연방 대리자로 활동하였고, 남북로동당 통합 이후 조선로동당의 위원장이 되었다. 1948년 2월 조선인민군을 직접 창건한 뒤 그해 4월 제1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김구, 김규식 등의 한국 민족주의자들을 기망했고, 그해 6월 제2차 회의를 해주에서 개최하였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고, 그해 9월 내각 총리가 되었다.

1952년에는 허가이를 숙청, 1953년 박헌영, 리승엽 등의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했고, 1956년에는 8월 종파 사건으로 연안파 최창익, 윤공흠을, 1958년에는 중국김원봉 계열을, 1961년에는 김두봉 일파를 숙청했으며, 1972년에는 국가주석직을 신설하여 공식 국가원수가 되었다.

1950년 소련스탈린을 설득해 그의 승인으로 한국 전쟁을 일으켰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인민군을 지휘했으나 패배했다. 전후 노동력 총동원(천리마 운동)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를 복구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1960년 이후 김일성은 주체이념을 기조로 한 주체사상을 발표했다.[1] 1972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고, 1993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직은 아들 김정일이 세습했다. 1994년 그가 사망하고, 1998년에 개정된 사회주의헌법에서 정한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영국 인명사전에서 세계 10대 독재자로 선정 되었다. 본관은 전주이다.

원래 이름은 김성주(金成柱[2][3] 또는 金聖柱[4])였으나, 항일 무장 투쟁을 하면서[4][5] 김일성으로 개명[4][6] 하였다.[7] 한편 한국 전쟁 전쟁 범죄, 한국 전쟁 장본인[8] 의혹, 반정부 인사 및 정적 숙청, 인권 탄압 등에 대한 비판을 받고 있다. 개신교 가계 출신인 그는 원래 개신교 신자였으나 공산주의자가 되면서 무신론자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목차

국가주석이 되기 이전의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아버지 김형직
김일성의 생가
김일성의 생가2
어머니 강반석

김일성(본명 김성주)은 1912년 4월 15일에 평안남도 평양부 고순화면(古順和面) 남동 칠곡(외가가 있었던 곳으로, 오늘날 평양 만경대)[6] 에서 아버지 김형직(金亨稷, 1894년 7월 10일~1926년)과 어머니 강반석(康盤石[9], 1892년~1932년)의 삼형제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김일성의 전주 김씨 12대조 김계상이 전라북도 전주에서 평양으로 이주하였으며,[6][10] 이후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증조부 김응우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지휘관이었다. 김형직은 할아버지 이래로 지주 리평택(李平澤) 집안의 묘지기였으며,[11]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그의 아버지 김형직이 독립운동가였다고 하나 일설에는 만주에서 장사꾼으로 있었다는 설도 있고 일설에 의하면 아편을 피우다가 감옥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외가쪽으로는 기독교계열의 목사집안이었는데 김형직은 기독교인인 처가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도 한다. 아버지 김형직에게는 동생 김형록과 동생 김형권이 있는데 김형권은 만주의 항일 빨치산 게릴라였다 한다.

어머니 강반석기독교 장로교 신도였고, 외할아버지 강돈욱[11] 은 교육자이자 칠골교회의 장로[12] 였다.[13] 김일성의 외가는 큰 외삼촌 강진석(康晋錫)을 비롯하여 일찍부터 항일 민족운동과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강돈욱은 평생을 교육사업에 헌신한 기독교인이었다.[11] 그의 외가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그의 어머니 이름 반석은 베드로의 고사에서 딴 이름이라 한다. 외할아버지 강돈욱, 외삼촌 강진석, 외종조부 강량욱이 모두 기독교 목사였다. 아버지 김형직 또는 할아버지 김보현이 기둥이 되라는 뜻에서 그의 이름을 성주(成柱, 또는 聖柱)라 지었다고 한다. 그의 생가는 만경대라는 이름으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어린 시절과 소학교[편집]

소년 시절
외할아버지 강돈욱 목사

‎ 어려서 부모를 따라 만주 지린성(吉林省) 푸쑹현(撫松縣)으로 이사했다. 1919년 일곱 살이었던 김일성은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 김형직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창바이현 바다오거우에서 팔도구 소학교를 다녔다. 1919년 7세 때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해 온 그는 어린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 뒤 자식의 장래를 생각한 김형직의 결심에 따라 혼자 평양으로 돌아와[14] 생활하였다.

1923년 초부터 1925년 초까지 그는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용산면) 하리(下里) 칠골에 있는 외가에서 머물면서 창덕소학교에 다녔다.[11] 창덕학교는 1907년 하리 장로교회가 중심이 되어 세운 5년제 학교인데, 김일성의 외할아버지인 강돈욱도 설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한때 창덕학교교감교장을 맡기도 했다. 아버지 김형직의 "혁명을 하자면 자기 나라를 알아야 한다"라는 권고로부터 1923년 3월 중국 바다오거우로부터 만경대까지 배움의 천리길을 걸어 통학하며 외가집이 있는 칠골 창덕학교에서 공부하였다는 것이다.[15] 칠골 창덕학교는 기독교 계통의 학교로 외할아버지 강돈욱, 외삼촌 강진석, 외재종조부 강량욱 등도 교사로 있었다. 이 중 외종조부 강량욱은 그의 담임 선생이었다고도 한다.

또한 아버지 김형직의 권고로 중국인소학교에서 중국어공부를 하여 중국어의 자유로운 구사가 가능했다.[15] 그러나 아버지 김형직이 1926년 그의 나이 14세 때에 사망하게 되면서 그는 조부모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청년기와 항일운동 시기[편집]

중학교 재학 중[편집]

길림 육문중학교 1학년 때

김일성은 열세 살 때(1925년) 아버지의 병세 때문에 다시 만주로 건너가 푸쑹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지린 성 지린으로 가서 중국인 학교인 지린성 유원 중학교(육문중학교)에 다니다가 중퇴하였고,[16] 화성의숙에 입학하였다.[15] 1926년 10월 17일 ㅌ.ㄷ(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했고 그 뒤 그 책임자로 선거되었다.[5][15] 중학교 재학 중 그는 성적이 우수하였다. 그러나 1927년 단체 조직 의심을 받다가 유원중학교에 재학하던 중인 1929년 반일활동으로 중국 군벌 당국에 체포되어 수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6]

공산주의 단체 조직 활동[편집]

길림 육문중학교 재학 시절

유원 중학교 재학 중 김일성은 1927년 8월 28일 만주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조직했다.[15] 1929년 가을 반일(反日)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중국 군벌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수개월간 감옥살이를 했고 수감중 그는 유원중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14] 1929년 지린 제5 중학교 학생으로서 처음으로 조선혁명군 사건으로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지린 감옥에서 복역하고 1930년 5월 초에 출옥했다.[4][17][18] 당시 그는 이종락의 부하로 활약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이를 부인한다.[4][19]

감옥에서 나와 국민부 산하의 청년 조직에 가입, 국민부에서 일할 무렵(1929년에서 1931년 사이) 이름을 김일성으로 개명한다.[6] 이어 조선공산청년회에도 가담하는데, 조선총독부 관헌이 작성한 1929년 조선공산청년회라는 조직의 주요 인물로 기록되었다.[14] 그 뒤 화성의숙에 편입학한다. 화성의숙은 반일민족주의단체가 중국 화뎬에 세운 2년제 군사정치학교라 한다.[15] 1930년 화성의숙을 졸업하고 만주의 항일 무장 투쟁에 참여한다.

항일 무장 투쟁[편집]

1930년 6월 30일 지린 성 창춘에서 카룬 회의를 개최하였다. 김일성은 1930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진행된 카룬 회의에 참석하였고[15] 7월 3일 창춘현 카룬에서 첫 당조직인 《건설동지사》를 조직하였고 7월 6일에는 이퉁현 구위수로 가 항일무장투쟁준비를 위한 정치 및 반군사조직인 조선혁명군을 결성하였다.[15]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인과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과 만주의 각지에서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서 개별적 혹은 연합으로 항일유격대를 조직하[14] 자 그도 1932년 4월 25일 상비적인 혁명무력인 반일인민유격대(그 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를 창건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조직지도하였다.[15] 그가 속해 있던 동만(東滿:당시 간도지방)의 항일유격대가 확대·발전하여 1934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단(조선인민혁명군)으로 재편성되자 1934년 가을에 김일성은 동북인민혁명군 제3단으로 배속되어 동북인민혁명군 제3단 정치위원에 선임되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단이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으로 이름이 바뀌자 그는 계속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으로 배속되어 활동했다.

동북항일연군 지휘관[편집]

만주 항일 유격대 시절
(아내 김정숙과 함께)
만주 항일 유격대 시절
(아내 김정숙과 함께)
보천보 전투 보도 기사

1936년 3월 항일독립운동 단체들의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일환으로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통합, 재조직되면서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6년 7월 다시 동북항일연군이 편제가 개편되자 그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으로 배속, 제1로군 6사 사장이 되었다. 1936년 5월 항일 독립운동단체들의 통일전선을 위해 조국광복회를 결성하자 그도 광복회 결성에 가담하였다.

1937년 6월 4일에 있었던 보천보 전투에서 일본인 7명 사망, 7명 중상의 피해를 입혔다는 설이 존재한다. 이 전투는 일제강점기 36년 이래 유일하게 독립군의 손으로 잠시나마 영토를 탈환했던 사건으로, 무장독립세력이 거의 사라졌다고 민중들이 생각할 때 일어난 사건이었다. 보통 약 100명 정도를 거느리고 무장투쟁을 했다고 전해져, 그런 유격전으로 김일성의 이름이 퍼지게 되었고, 그의 항일투쟁은 조선의 신문에 자주 소개되었다. 당시 동북항일연군의 정치위원장이었던 위증민의 현상금이 3천 엔이었던 데 비해 김일성의 현상금은 1만 으로 오르게 되었다.[20]

1938년 12월 일제의 가혹한 토벌이 계속되는 가운데 부대편제의 개편에 따라 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단 군단장에 임명됐다. 그러나 1939년말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항일빨치산에 대한 대토벌전으로 항일연군은 계속 패퇴하면서 그의 조직도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군 토벌대가 항일연군 중 김일성부대를 주요 목표로 정하고 집요하게 추격해오자, 그는 무리를 이끌고 북만주를 거쳐 국경을 넘어 1940년 초 소비에트 연방으로 피신했다.

태평양 전쟁 이후[편집]

일제의 토벌이 계속되는 중에도 김일성은 1940년 3월 25일 훙치허 전투를 지휘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인 백여 명을 사살하고, 30여 명을 생포했으며, 탄약과 양곡을 노획했다. 또한 김일성은 조선공산당의 붕괴를 초래한 원인으로 교조주의를 혹독히 비판하고 하나의 통일된 운동으로 조직적인 투쟁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

1940년 소비에트 연방 하바로프스크로 떠나 소련군에 입대하여 소련군 특무공작요원으로 훈련을 받고 소련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그 후 소련군 대위소비에트 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 배속되어 5년 동안 복무하며 군사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1945년 8월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일본 제국의 패망이 임박하자 동북항일연군교도려 내에 있던 조선인들은 '조선공작단'(단장 : 최용건)을 결성하고 조국의 해방과 새로운 국가건설에 대비하였다. 이때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교도려단 조선공작단 정치군사 책임자였다.[4] 뒤에 소련군 소좌로 승진했다. 조선공작단 대원 가운데 일부는 1945년 8월 8일 소련군과 함께 '국내진공작전'에 참석했으며, 나머지 조선인들은 9월 18일 원산항을 통해 조국에 돌아왔다.[4] 8월 26일부터 김일성은 비밀리에 정치활동을 시작,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하였다.

광복 이후[편집]

광복과 귀국 (1945 ~ 1946)[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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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가을 '붉은 군대 환영 평양시민대회'에 참석해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

1945년 9월 19일, 김일성 등 조선인 항일유격대원들이 원산항을 통해 귀국, 사흘 뒤인 22일 평양에 도착했다. 이때 김일성은 소련군 육군대위의 자격으로 귀국했다. 이후 평양에서 김영환(金英煥)이라는 가명으로 정치공작을 벌였으며 곧 소련군 육군 소령으로 진급했다. 당시 소련 군정에 의해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7만여 명의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조선해방축하집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김일성이 스티코프 사령관과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 지부장 조만식의 소개로 '김일성 장군'으로 평양 시민들에게 소개되면서 정치활동이 시작되었다.

보천보 전투가 신화화되고 김일성의 활동을 신화나 전설로 전해들은 시민들은 고령의 노 장군을 생각하고 모였지만, 젊디 젊은 청년이 김일성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자, 군중들은 하늘이 떠나갈 듯 환호하였다.

부인 김정숙. 아들 김정일, 딸 김경희 등과 함께 강원도 화진포에서 (1948년 8월 7일)
맨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김정숙, 가운뎃 줄 첫 번째가 아들 김정일, 세 번째가 딸 김경희

1945년 10월 8일과 10월 9일에 김일성은 38도선 개성에서 박헌영과 회담하여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를 협의하였다. 그러나 38도선 이북에도 당본부를 설치한다는 그의 주장에 박헌영은 당의 중앙은 한 곳이어야 된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박헌영은 그의 주장을 끝내 동의해주지 않았고 분국 형식으로 당을 조직하게 됐다. 1945년 10월 10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중앙조직위원회를 조직하고 당창건 목적을 발표하였다. 10월 13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초대 책임비서에는 김용범이 선출되었었다. 그러나 그는 곧 소련의 홍보 지원 등에 힘입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내에서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1945년 11월 5일 서울에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조직되자 축사를 보냈고, 11월 6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명예위원장에 추대되었다. 12월 17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3차 확대집행위에서 김일성은 책임비서에 선출되었다. 12월 18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제2대 책임비서에 취임했다.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시절 (1946 ~ 1948)[편집]

1946년 당시의 김일성
김일성 가족

김일성은 해방 후의 군정기 조선에서 정치 기반이 전혀 없었으나 소련 군정의 도움을 받아 1946년 2월 8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어[15] 공산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소련 점령군 사령부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켜 북한에서 사실상의 단독 정부로 기능케 했다.[21] 위원장에는 김일성, 부위원장에는 김두봉, 서기장에는 강양욱이 각각 선출되었다. 2월 8일 김일성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가 되었다. 이로서 김일성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로 당을 장악한 동시에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행정부를 장악하게 된다.[21]

공산당내의 주도권을 장악한 김일성은 민족주의 진영과 공산주의사회주의 진영으로 반씩 구성하여 출범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에 가담하였다. 이후 처음에는 민족주의 진영의 인사와 공산주의사회주의 진영의 인사가 동등한 합작전략을 사용하였으나, 그러나 후에 점차 공산주의사회주의 진영 인사들의 가입으로 공산주의사회주의 수를 늘려 결국 그는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를 장악하고 이후 38선 이북 조선 다른 지역의 인민정치위원회들 역시 장악하였다.

초기에는 3·1 만세 운동부르주아들만의 투쟁으로 보았으나 3·1 만세 운동을 인민봉기로 재평가하기도 했다. 1946년 3월 1일 평양에서는 김일성 주관하에 《3. 1 인민봉기 27돐 경축대회》가 진행되었다. 이날 행사를 파탄시키려는 테러리스트들에 의하여 주석단 가까이에서 수류탄이 터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22] 그러나 김일성은 재빨리 단상에서 피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김정숙은 행사가 끝난 후 경위대자동총소대원들에게 경호의 허술함을 지적하였다.[22]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1946년 3월부터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되었다.[23][24] 1946년 3월 김일성은 북조선로동당 당수에 취임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서울조선공산당에 보고를 해야 하는 처지였으나 이때부터 남조선로동당과 당대 당의 관계로 대하게 되었다.

46년 6월 14일 김일성은 민주주의민족전선 북조선 지부 산하 정당, 사회단체 열성자대회를 소집하고 조선민주주의 임시 정부 수입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38선 이북에 대한 소련의 수탈과 김일성의 협조[편집]

1945년 일본의 항복 뒤 소련군은 38선 이북에 진주하였는데, 소련의 정책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던 김일성은 소련군의 비행에 대해 방관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실제로, 소련군은 북한여성에 대한 유린, 상인들에 대한 수탈을 수차례 자행했으며, 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양호단과 같은 자위 단체를 구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소련군은 일본과 치른 전쟁에 대한 배상의 일환으로, 수력 발전소 시설, 공장시설, 쌀 농사의 1/4 를 공출하는 등 심각한 경제 수탈을 저질렀으며, 이에 대한 결과로 38선 이북에서 수만명의 실향민이 월남하기도 하였다. 김일성이 소련군의 불합리한 처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남북협상 주도[편집]

1948년 4월 방북 직전 38선에서의 김구와 일행
박헌영과 이야기하고 있는 김일성

1948년 1월 김구, 김규식과 남북협상을 제의하였고, 김일성은 이를 수락했다. 1948년 2월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을 정규군인 조선인민군으로 발전시켰다.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창설과 동시에 그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하였고 '김일성 장군'으로 불렸다.

1948년 2월 국기를 태극기에서 인공기로 교체하는 교체식에 참석하였다.

4월 김구, 김규식은 수행원들을 동반하고 38선을 넘어 평양에 방문하였다. 최고지도자연석회의를 주관하고 김두봉과 함께 김구, 김규식과 4김회담을 하였다. 5월 김구김규식은 38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갔다. 1949년에 김구, 김규식 등을 만나, 평양직할시 쑥섬(강나도)에서 남북연석회의를 열었고 4김회담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서로의 주장이 상이하여 결국 회의는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

김일성이 김구, 김규식에게 남한에서 먼저 정부를 수립하더라도 정부 수립은 하지 않겠음을 다짐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48년 2월 이미 인민군을 창건하여 사실상 정부수립 의사를 굳힌 뒤였다. 이후 1948년 9월 황해남도 해주에서 김구, 김규식에게 2차 남북협상과 최고지도자회의를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후 박헌영, 홍명희 등과 별도로 2차 최고지도자회의를 개최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편집]

인민공화국 내각 총리 시절[편집]

공화국 정부 수립[편집]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김일성 (맨 앞줄 가운데), 좌우로 최용건, 박헌영홍명희가 서 있고, 뒷줄 오른쪽 두 번째에는 김원봉이 서 있다.

김일성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내각 수상에 선출되었고, 부수상 박헌영 등으로 내각을 구성하였다.[25][26] 국가강령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강령'을 발표한다. 이 강령의 내용은 남녀평등과 선거권 실시, 무상교육제도 실시와 무상의료제도 실시, 친일파·지주 청산과 토지개혁 실시, 자원의 공동 생산과 공동 소유를 주장하고 있다.

1949년 3월 박헌영소련을 방문, 소련 최고인민회의를 참관하고 돌아왔다. 3월 5일, 스탈린과 회담하여, 김일성은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침공과 무력통일에 관해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였다. 스탈린은 조선인민군이 대한민국 군사력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답변하고 대한민국에 미군이 아직 주둔하고 있음(소련군은 1948년 12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철수)과 미-소간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를 상기시켰다. 또한 스탈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한민국에 대한 공세적 군사활동은 대한민국의 북진 침략을 물리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27] 1949년 남북 조선로동당을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을 결성하여 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49년 6월 30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들의 합동전원회의를 소집하고, 회의에서 조선로동당 위원장으로 선거되었다. 8월 12일, 스티코프 북조선 주재 소련대사를 면담한 김일성과 박헌영은 대한민국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평화적 통일안을 거부하고 있으므로 북조선은 대남공격을 준비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대규모 민중봉기가 분명히 뒤따를 것이라고 언급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만약 대남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인민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많은 친북 ‘민족인사’들을 투옥시켰지만 북조선은 아직도 대한민국에서의 봉기를 조직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28]

공화국 정부 수립시 친일파 등용 논란[편집]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친일파를 강력하게 숙청하였음을 공언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상당수의 친일파를 요직에 등용했다. 즉, 해방 직후 대한민국에서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친일파 청산이 훨씬 더 잘 이루어졌다는 것은 잘못된 사실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에서 기용한 친일인사로는 그의 동생 김영주관동군에서 통역으로 복무하였고, 장헌근 사법부장은 일제 중추원 참의, 강량욱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은 일제하 도의원, 남로당 2인자 리승엽은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정국은 문화선전성 부부상은 일제의 밀정, 김정제 민족보위성 부상은 일제 시대 관료, 조일명 문화선전성 부상의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경력 등을 친일인사[29] 로 지적하였다.

6.25사변 직전[편집]
한국 전쟁 무렵

1949년 대한민국에서 미군이 철수하자 김일성은 고심 끝에 무력통일 계획을 세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이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지시문이 김일성에게 전달되었다.(1949년 9월 24일)[30]

1950년 1월 17일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 대화에서 김일성은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다음에는 대한민국(남조선)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기강이 세워진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년 3월의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31][32][33] 1월 30일, 스탈린이 서명한 전보를 평양으로 타전했다. 전문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큰일'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접견해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34] 3월 20일, 김일성은 스티코프와의 면담에서 4월 초에 자신과 박헌영이 스탈린과 만나고자 한다는 것을 전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김일성은 이번 방문을 46년의 방문처럼 비공식(비밀)으로 할 것을 제의하였다. 김일성은 남북한 통일의 방법, 북한 경제개발의 전망, 기타 공산당내 문제에 관해 스탈린과 협의하기를 원하였다.[35] 4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다만,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국과 북조선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국쪽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36]

5월 12일, 스티코프가 김일성 및 박헌영과 면담한 자리에서 김일성은 마오쩌둥과의 면담계획을 밝혔다. “소련에서 돌아온 후 이두연 주베이징대사로부터 마오쩌둥과의 면담 결과를 보고받았다. 마오는 ‘조선통일은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미국이 남한 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차대전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마오와 면담하기 위해 5월 13일 베이징으로 출발할 것이다. 마오는 내가 대남 군사행동을 곧 시작할 생각이라면 비공식으로 만나겠다고 한다. 마오에게 북한으로 이양되는 중국군 소속의 조선인 사단을 위해 중국이 노획한 일본 및 미국무기를 제공해줄 것을 요청할 계획이다. 50년 6월께로 예정하고 있는 남침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하라는 지시를 북한군 총참모장에게 시달했다. 작전이 6월에 개시될 것이나 그때까지 준비가 완료될지 자신이 없다.”[37] 5월 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이 베이징에 도착하여 마오쩌둥과 면담하고 스탈린이 모스크바 회담 때 ‘현 국제환경은 과거와는 다르므로 북한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으나 최종결정은 마오쩌둥과의 협의를 통해 이뤄야한다’고 했음을 설명했다. 5월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38] 5월 15일, 모스크바의 메시지를 받은 뒤 마오는 김일성 · 박헌영과 구체적으로 의견을 교환하였다. 김일성은 북조선이 ‘군사력 증강-평화통일 대남제의-대한민국쪽의 평화통일 제의 거부 뒤 전투행위 개시’의 3단계 계획을 세웠다고 언급했다. 마오가 이 계획에 찬성을 표명하고 일본군의 개입 가능성을 물은 데 대해 김일성은 일본군이 참전할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나 미국이 2만~3만명의 일본군을 파견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참전이 상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오는 만일 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해 북한을 돕겠다고 했다. 소련은 미국쪽과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가 있기 때문에 전투행위에 참가하기가 불편하지만 중국은 이런 의무가 없으므로 북한을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북한이 현 시점에서 작전 개시를 결정함으로써 이 작전이 양국간 공동의 과제가 되었으므로 이에 동의하고 필요한 협력을 제공하겠다고 했다.[39] 5월 29일, 김일성은 스티코프에게 4월 모스크바 회담시 합의된 무기와 기술이 이미 대부분 북조선에 도착했음을 통보하였다. 이 통보에서, 또한, 김일성은 새로 창설된 사단들이 6월말까지 준비 완료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군 참모장이 바실리예프 장군과 함께 마련한 남침공격 계획을 북한지도부가 승인하였고, 군조직 문제는 6월 1일까지 끝내기로 했다. 북조선 군은 6월까지 완전한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게 된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6월말 이후는 북한군의 전투준비에 관한 정보가 남쪽에 입수될 수 있으며 7월에는 장마가 시작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6월 8~10일께 집결지역으로의 병력이동을 시작할 것이이라고 보고되었으며, 김일성과 면담 뒤 스티코프는 바실리예프 장군 및 포스트니코프 장군과 의견을 교환했다. 그들은 7월에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시의적절하나 일기관계로 6월로 변경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40] 이와 같이, 김일성은 스탈린을 상대로 끈질기게 남침을 허락해달라고 48회나 요구했고 스탈린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는 이유로 계속 거절했다. 스탈린은 48번씩이나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요구하는 김일성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결국 남침을 허락하고 만다. 이 때 스탈린은 김일성을 북한의 통제관으로 옹립한 것을 후회했다.

1950년 3월에는 박헌영 당시 조선공산당 총비서와 허가이 조선노동당 책임비서와 함께 소련으로 물자 원조와 무기 공급을 요청하기 위해 방문했으며, 스탈린의 지원을 받아 남침을 감행했다. 6.25사변 발발에서 김일성의 주동적인 책임은 고르바초프의 방한을 계기로 공개된 구 소련의 외교문서를 통해 증명되었으며, 국제학계의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41]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3년 동안의 한국전쟁 시기 교전 일방인 조선인민군의 최고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이끌었다.

6.25사변[편집]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38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대한민국을 공격하면서 한국전쟁(6.25)이 발발했다. 한국 전쟁 3일만에 조선인민군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점령했다. 6월말에 김일성은 서울에 입성했고 시민들은 그를 맞이하였다.[42] 김일성은 박헌영의 최측근이자 남로당원인 리승엽서울시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가 곧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서울시장직을 겸하게 했다.

조선인민군은 전쟁 1개월 만에 대한민국의 경기도, 강원도충청북도를 점령한 뒤, 대구근처 낙동강 인근까지 점령했다. 그러나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며 인민군은 패주를 지속하게 된다.

1950년 9월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의 장례식장에서 (왼쪽 뒷편이 김일성, 오른쪽 앞은 최용건)

1950년 9월, 조선 인민군이 패주하자 김일성과 박헌영은 각각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조선인민군총정치국장의 명의로 인민군에게 현지사수를 명령하였으나, 인민군의 패주는 계속되었다.[43] 인민군의 사기가 저하되면서 인민군의 패주와 탈영은 계속되었다. 1950년 11월 강건전쟁 중 전사하자 김일성은 박헌영 등과 직접 강건의 장례식을 주관하고 시신을 운구하였다.

6.25사변 중에도 전쟁에서 후퇴할 때 전쟁의 운용을 놓고 박헌영과 갈등하였다.[44] 10월 8일 전쟁에서 후퇴할 때 '산으로 들어가 유격작전을 하자.'는 김일성의 주장에 박헌영은 철수론을 주장하며 반대하며 다투는 모습이 중국 대사가 모란봉의 지하 집무실에 방문했을 때에도 목격되었다고 한다.[44]

6.25사변시 김일성의 결단과 소련의 지원[편집]
한국 전쟁 기념화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공개된 문서와, 흐루쇼프 전 소련 서기장의 증언에 따르면, 소련은 직접적인 대규모의 군사 지원은 보류하기로 하였고, 그 대신 공군 조종사와 교관 등 비교적 간접적인 지원을 하게 되었다.(스탈린은 48회에 이르는 김일성의 요구를 꺾을 수 없어 허락한 것으로 보임) 결정적인 군사 지원은 마오쩌둥이 하게 되었고, 이 약조는 한국전쟁 당시 중국 인민해방군의 공세로 나타나게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 중화인민공화국의 간,직접적 지원을 약속받은 김일성은 빠른 시간 내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거라 판단, 6월 25일 새벽 대한민국을 공격했지만, 미군과 UN군의 참전으로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1950년 10월 12일에 평양에서 철수하면서 덕천을 거쳐, 임시수도인 강계까지 가는 일이 생겼으나, 12월 6일에 평양을 탈환했다. [1]

전전 정적 숙청 작업[편집]

이정 박헌영 (부총리 겸 외무성상인 그는 김일성의 최대의 경쟁자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한국 전쟁의 실패로 김일성은 궁지에 몰렸으며, 전쟁에 실패한 책임을 부총리인 박헌영에게 전가시켰다.[45] 이후 김일성은 한국전쟁의 패전책임을 정적들에게 돌림으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자신의 확고한 권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 이전인 1945년부터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북한 체제 협력을 거부하던 민족주의자 조만식평양시 고려호텔에 감금한 뒤 1950년 10월 처형하였고[46] 1952년 연안파인 무정, 1953년 같은 소련파의 라이벌이던 허가이를 제거하였다. 1951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의장인 허헌이 대동강에서 익사했는데, 그의 사망도 김일성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전후 복구 시기와 전후 정적 숙청 작업[편집]

약산 김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부위원장이자 노동상, 검열상인 그 역시 김일성의 최대의 경쟁자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1953년 2월 8일 인민군 창건 5주년에 김일성은 공화국 최초의 조선인민군 원수가 되어 칭호는 '김일성 장군'에서 '김일성 원수'로 불리게 되었고, 1953년 7월 28일 공화국 영웅 칭호와 국기훈장 제일급을 수여받았다.[47] 그때부터 박헌영남로당파, 김두봉연안파, 허가이소련파를 제거하여 정권을 안정시켰다. 1958년 3월에 열린 전국청년공산주의건설자대회에 참관, 청년들은 자기 손으로 밝은 새 시대, 새로운 공산주의시대를 개척해야 한다고 하며 모든 청년들이 자기의 열정과 지혜와 능력을 공산주의건설에 바칠것을 주장하였다.[48]

1958년 11월 약산 김원봉을 차례로 숙청, 살해하였다. 1953년부터는 박헌영의 구 남조선로동당 계열에게 한국 전쟁 패전 누명과 미국 간첩들과 교신했다는 누명을 씌워 임화·이강국 등을 살해하고 남로당계를 체포, 심문, 고문하였으며 1955년 3월 박헌영을 체포, 반당종파행위 등의 누명을 씌워 외무상과 부총리 등 공직에서 해임시킨 뒤 수감, 1955년에서 1956년사이에 처형하였다.

박헌영과 남로당 계열의 숙청의 발판을 마련한 조선로동당제5차 전원회의을 계기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모든 정치세력이 공식적으로 김일성을 수령으로 부르게 되었다.[49] 이종석은 '결국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비상상황 속에서 1인권력집중이 가속화되면서 당내에서 김일성에 대한 수령 호칭이 일반화된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49] 그러나 김일성의 권력기반이 강화된 것은 아니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중화인민공화국은 김일성을 견제, 감시했다. 마오쩌둥의 지원을 받는 친중파와 그외 친소파 그룹, 스탈린 사후 스탈린에 비판적이었던 소련의 김일성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거나 소극적으로 하면서 김일성과 다른 정파 사이에 긴장감과 견제가 지속되었다.

1956년 북한을 방문한 동독 외교관들과의 만찬석상에서

한편 전후 김일성을 향한 '경애하는 수령'이라는 호칭은 더욱 일반화되어 조선인민군이나 조선로동당을 넘어서 다른 정당, 종교단체에 이르기까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내 전사회적으로 통용되었다.[49] 이와 함께 김일성의 혁명활동에 대한 강연회가 개최되는 등 그에 대한 개인숭배 현상도 계속되었다.[49]

주체사상 확립[편집]

1953년 한국 전쟁 휴전 이후 연안파는 전쟁 책임론을 주장하며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김일성은 남로당계열을 숙청한 뒤 연안파에 대한 숙청을 감행, 1955년 이후 연안파에 대한 숙청은 서서히 진행되어 1956년 주영하, 내무성 부상 이필규, 문화선전부 부상 정률 등이 처형되었다. 한편 중국계였던 최창익은 김일성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는데, 이를 8월 종파사건이라 한다. 김일성이 소련을 방문할 무렵인 8월 30일에 열린 노동당 중앙위 8월 전원회의에서 연안파 최창익과 소련파 박창옥 등이 김일성의 독재화를 주장하며 김일성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귀국후 김일성은 1957년 최창익을 반당종파행위로 숙청하였고 김일성의 권력집중화와 일당독재를 비판하던 연안파의 거두 김두봉은 1964년 숙청당했다.

1958년 당시 중국을 방문, 송경령과 오찬중인 김일성

1958년 1월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송경령 등과 면담하였다.

1960년대 초반부터 주체사상을 국가이념으로 정착시키며 중국·소련에 대한 자주노선을 선언하였다. 한국전쟁으로 대규모의 산업 시설과 교통 시설, 그리고 복지 시설이 모두 파괴되자 산업 시설들을 복원하기 위해 전후복구사업인 천리마운동을 1957년에 처음으로 실시했으며, 항운교통의 중심인 남포항을 현대적인 시설들을 갖추고, 통제경제를 받아들였다. 그는 제2세계 간 외교에서 크게 벗어나서 제1세계와 제3세계 국가 간의 폭넓은 외교활동을 실시하였으며, 국민들의 계몽을 통한 문맹퇴치운동을 실시, 평양직할시를 공식적인 수도로 지정할 것(실제 지정은 1972년이다. →평양직할시 연혁)을 결정하였다.

1966년 10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제4기 14차전원회의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로 선출되었다.

천리마 운동[편집]

1960년 이후 연안파 일부와 국내파 일부를 제외한 정적을 최종적으로 정리한 김일성은 휴전 이후의 황폐화된 기간산업과 경제 성장을 고심했다. 자본주의(資本主義)의 모순을 지적, 비판하며 자본주의체제는 비인간성과 자체모순에 의해 자멸하고 결국 사회주의(社會主義)로 전환된다는 신념 하에, 인류 역사는 물질과 계급에 의해 진행된다는 이념을 자신의 신념을 확립, 공산주의 체재를 구축하였다. 또한 전후복구 뒤 경제살리기의 목적으로 천리마 운동을 실시하였다. 본래 1956년의 김일성의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시작된 것으로[50] 김일성의 권력강화에 반대하는 소련파, 연안파 등의 반발과 비판으로 1957년부터 시작될 예정인 경제5개년계획을 앞두고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반대파를 숙청한 뒤 자본·물자·기술 등이 부족한 정국에서 내부 역량과 인민의 자발적 역량을 총동원해야 했다고 판단, 이를 위한 집단적 증산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

1960년 12월 전원회의 직후 김일성은 강선제강소를 방문하여 생산력 증대를 위해 인민에게 직접 자력갱생의지를 호소하면서, '천리마를 탄 기세로 달리자'는 구호를 선포하여 주민들의 생산 증대의욕을 촉구하면서 확산되었다.[50]

4·19 전후대응과 통일론[편집]

1960년 북한의 지도부는 4월 19일 '피의 화요일'에 분명히 이승만의 사퇴를 예견하였다.[51] 4월 21일 김일성은 이승만의 후계자를 언급하며 반공연맹 의장 장택상을 그 후계자로 예상하였다.[51] 그러나 장택상에 대한 미국의 신뢰를 의심했다.[51] 이어 김일성은 이승만의 후계자들에 대해 전망하면서 미국이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연령상 도저히 안되는 상태인 바, 특히 최근들어 권위를 엄청나게 훼손당하였다고 말했다.[51]

그를 교체해야 한다. 그러나 충분한 권위와 특색을 지닌 인물이 없다. 또 다시 부통령이자 민주당 최고위원인 가톨릭신자 장면도 적합하지 않다. 그나마 권위를 누리고 있었던 조봉암 진보당 당수은 평화적 조국통일이라는 당 강령을 성급하게 공표하는 바람에 이승만의 명령으로 체포돼 지난해 처형되고 말았다. 부르조아 민주당 최고위원인 조병옥1960년 3월 15일 대선후보였으나 선거를 며칠 앞두고 급사했다. 현재로서는 남조선 정치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반공연맹 의장 장택상이다. 그러나 그는 친일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미국은 그를 신뢰할 수 있는지 망설이고 있다.[51]

한편 그는 국제부장 박용국을 시켜 주한미군만 철수되면 평화통일이 가능할 것이라며 설득을 하게 하기도 했다.

1960년 여름 연방제통일론을 발표하였으나 장면 내각에 의해 거부당하고 장면내각은 외무부를 통해 반박하였다. 5.16 군사 쿠테타 이후 1963년 비밀리에 대한민국대통령 박정희에게 밀사 황태성을 보냈으나 황태성은 중앙정보부에 의해 살해되었고, 68년 두 번째 밀사로 부총리 박성철을 내려보냈다.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는 두 번째 밀사에 대한 응답으로 1971년부터 이산가족 명부확인과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되었으며, 박정희이후락을 평양에 파견하여 남북협상을 시도하였다. 한편, 중화인민공화국마오쩌둥은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당대표 및 북조선의 최용건이 참석한 가운데 "아시아 지역 혁명에 대해 논의"에서 대한민국에서 무장 게릴라 봉기를 일으키라고 강요했다.(1965년 3월) 이에 대해서, 김일성은 "남조선에는 해안이 많고, 산이 벌거벗었으며, 교통이 비교적 발달해 있는 데다 미군까지 주둔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대신 "시간을 들여서 대중 속에 '비공연(非公然) 조직'을 만들어 대중운동을 전개해야한다. 이러한 투쟁이 아니고서는 소모일뿐, 승리는 어렵다"는 의견이었다.[52]

1971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한 루마니아 국가주석 차우셰스쿠를 영접하는 김일성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무장공작원을 대한민국으로 파견했다. 1·21 사태 당시 조선인민군 일부는 휴전선 근방에서 검거되었지만 일부는 서울까지 잠입하는데 성공하였다. 긴장한 박정희대한민국 국군의 의무복무 기간을 6개월 연장시켰고, 향토 예비군을 강화하였다. 1968년 여름의 수해 당시 김일성은 수해구호물자를 대한민국으로 내려보냈다.

남조선에서 미국 놈들을 몰아내야 하겠는데, 그놈들은 절대로 그냥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언젠가는 미국놈들과 다시 한 번 꼭 벌여야 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전쟁 준비를 다그쳐야 합니다. 동무들은 하루빨리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을 자체 생산할 수 있도록 적극 개발해야 합니다.[53]

그러나 김일성은 한국 전쟁을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68년 11월 과학원 개발팀과의 담화 통일 실패 요인을 미국군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또한, 1968년 자신의 생일인 4월 15일을 북한의 최대 명절로 지정하는 등, 우상화 작업에도 본격적으로 착수를 하였다.[54]

국가주석 추대 이후[편집]

헌법개정과 주석 취임 (1970 ~ 1972)[편집]

주석 취임 초기[편집]

김일성의 초상화.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통해 자주,자립 노선을 택하게 되었다. 1970년 에 진행된 조선로동당 제5차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에 재선출되었다. 1971년 8월 6일 캄보디아의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를 환영하는 평양 대규모 집회에서 "우리는 언제든지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남조선의 전(全) 정당, 사회단체, 개별인사들과 만날 용의가 있다."라고 천명하였다.

1972년 5월에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을 발표하였다.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 성명을 통해 남북 문제를 논의하였으며, 1972년 헌법 개정으로 국가 권력 구조를 국가주석 중심 체제로 바꾼 다음 12월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했다.

박정희 정권 붕괴 이후에도 껄끄러운 관계 가운데 대한민국에서 수해가 발생하자 김일성은 구호물자와 쌀을 지원하기도 했다. 1984년 수해 당시에는 쌀 5만 석(약 7800t), 옷감 50만m, 시멘트 10만t의 대규모 수해 구호물자를 대한민국에 지원하였고, 전두환은 이를 수용하였다.

대한민국과의 통일 교섭[편집]

닉슨독트린이후 찾아온 미·소 간의 데탕트는 한반도에도 영향을 끼쳤다. 1972년 5월 이후락은 평양의 김일성 집무실에서 한 시간 남짓 비밀회담을 갖는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1968년 김신조 일당의 1·21 사건과 관련,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단히 미안한 사건이다. 그때 나도 몰랐다. 우리 내부의 좌경 맹동분자들이 한 짓이다. 보위부 참모장, 정찰국장 다 철직(撤織)시켰다[55] 고 주장했다. 또 6·25 얘기가 나오자 “과거는 과거고…. 다시는 남침 않겠다”는 취지로 말하기도 했다.[55]

국가주석 취임 직후 평화통일론을 다시 선언하고, 박정희에게 박성철 등을 파견하였다. 그의 평화통일 제안을 전면 거부하던 이승만, 장면, 윤보선 등과는 달리 박정희가 협상 제안을 일부 수용함에 따라 매년 판문점에서 남북고위급 회담 및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하였다.

7.4 남북공동성명의 발표에 일부 지식인들은 환영하였으며, 이후 대한민국 측에서 제의한 주기적인 이산가족 상봉을 승인하기도 했다. 1972년 여름 부산강원도 영월에서 수해가 발생하자 김일성은 특별히 구호물자로 쌀 3만석과 약간의 옷감을 보내왔고, 박정희 정권은 이를 받았다. 그러나 박정희대한민국 내부의 민주화 요구, 미국의 인권 문제 제기와 미군철수론, 영국과 프랑스의 유신체제에 대한 반감, 박정희의 핵개발에 대한 외교적 마찰 등의 문제에 시달리면서 남북교섭은 별 진전을 못보고 흐지부지 되었다.

권력기반 강화 (1972 ~ 1980)[편집]

1960년대 말부터 추진하던 박정희의 핵개발 추진에 자극을 받은 김일성은 군비를 증강, 본격 핵미사일 개발 사업을 추진한다. 72년 12월 15일에 채택된 새로운 사회주의헌법에 따라 그는 국가수반인 공화국 국가주석국방위원회 위원장(겸임)에 취임하였다. 그와 동시에 매년 남북대화를 진행하였다.

김일성은 국가주석 취임 직후 평화통일론을 주창하고 대한민국의 대통령 박정희에게 박성철 등을 사절로 파송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군비를 증강하고 핵미사일 개발 사업을 추진하였다. 박정희 정권 역시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하려던 카터 정부가 등장하자 군비를 증강하고 자체적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죽자 김일성은 조문단 파견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대한민국에서의 권력이양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고 12.12 사태전두환신군부가 집권하자 김일성은 남조선에서 쿠데타를 일어났으니 인민무력부는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출동할 수 있도록 24시간 가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한민국의 신군부는 이를 남침책동으로 규정했다. 당시 미국은 12.12 사태 직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 가능성을 50% 정도로 판단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도 했다. 1980년 10월에 있은 당 제6차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재선되었다.

1980년 ~ 1988년[편집]

1984년 동독을 방문한 김일성
1984년 6월 1일 동독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와 공개 기자회견중인 김일성
1984년 6월 1일 동독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와 공개 기자회견중인 김일성

1980년 5월 동유럽 순방을 떠났으며, 유고 대통령 티토의 장례식에 참석한 뒤 루마니아를 방문하여 5월10일 차우셰스쿠와 회담을 가졌다..

1980년 이후 남북평화통일에 대한 방안 모색을 내각과 인민위원회에 지시했고, 1980년 10월 공식 성명을 통해 대한민국에 남북통일 방안으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을 제안했다. 대한민국전두환 대통령은 집권 초기 정권 안정을 위해 1982년 북한과 ‘잠정협정’을 맺고 비정치적, 비군사적 교류부터 점진적으로 하자는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을 제의했다.[56]

1984년 9월초 남쪽에 발생한 홍수로 전국에서 190여명이 생명을 잃고 재산피해도 1천300억원이 넘는 수재가 발생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9월8일 조선적십자회 이름으로 통지문을 보내 쌀 5만석(7천200t), 천 50만m, 시멘트 10만t, 의약품을 지원했다. 식량지원 이후 남북 양측은 적십자회담 본회담을 가진 데 이어 1985년에는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을 실현시켰고 남북간 최초의 경제회담도 시작했다.[57] 1985년 전두환 대통령은 김일성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고, 김일성 역시 같은해 허담 비밀특사를 서울에 특파해 전두환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논의를 타진했다.[58]

1987년 6월 6월 항쟁이 발생하자 그는 '온 민족이 남조선인민들의 통일애국투쟁을 적극 지지성원'하도록 지시하였다.[59] 6월 항쟁으로 대한민국에서 군사정권이 붕괴되고 1988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서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올림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참석 여부 논란이 있었다.

남측 인사들과의 교섭 (1988 ~ 1990)[편집]

1988년 8월 대한민국평민당 소속 국회의원 서경원이 비밀리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 2박 3일간 국가주석 김일성 및 부총리 허담 등과 회담하고 남하하였다.[60] 홀로 방북해 김일성을 면담한 서경원은 대한민국 안기부로부터 간첩으로 몰리기도 했다.[61] 대한민국에서는 박철언을 비밀리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파견하였다. 박철언은 그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서 1988년 11월 방북 당시 김일성을 면담하지 못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는 책에서 '사전에 남북 핫라인을 통해 비밀스러운 방북 사실을 북측에 알렸는데, 미국의 도청 가능성을 우려해 ‘대북 밀사’란 직접적인 말을 쓰지 못해 미스커뮤니케이션이 있었다.[55]' 김일성 주석은 지방출장을 갔었고, 면담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989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남북정치협상을 제의하며 남쪽의 각 정당 당수와 사회단체 대표, 추기경 김수환, 민중·노동운동백기완, 목사 문익환평양으로 초청했다.[62] 3월 25일 목사 문익환이 방북, 그와 두 차례 회담을 하고 4월 10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62] 6월 21일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임수경일본 도쿄를 거쳐서 방북, 그와 면담하였다. 그러나 문익환과 임수경은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방북한 것이었기에,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노태우는 방북하였거나 협상에 참가한 문익환, 임수경 등을 체포, 구속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말기[편집]

국가주석 5선 (1990 ~ 1994)[편집]

김일성은 1990년 5월 24일 최고인민회의로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석에 재선출되었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에도 재추대되었다. 동시에 최고인민회의로부터 의회의장격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수위(首位)에 추대되었다. 1992년 4월 13일 인민군 대원수 칭호를 받았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및 소련, 중국의 정치인들로부터 회고록 집필 제의가 들어왔다. 김일성은 처음에 사양했으나 그 후 마음을 바꿔 회고록 발간을 추진한다. 회고록 편집과 외교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하여, 1992년에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출판되어 나온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김일성은 공산주의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고, 자신이 죽기 전에 대한민국과의 통일이 이루어지도록 협상 추진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부에서는 공산권 국가 붕괴의 파급효과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위기를 타개하려 했다.

개혁 개방 정책[편집]

1990년대 초부터 김일성은 무역시장을 활성화하려 하였다. 김일성은 중국과의 교역을 대폭 확대시켜켰으며, 미국, 일본, 프랑스, 영국 등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통상, 교역을 시도하였다. 1992년무렵부터는 미국일본의 영화와 음악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소개되기도 했다.

1992년 개방 의사를 공식 표명하고 미국, 유럽 등과 적극적인 외교협상을 추진한다. 나진,선봉에 무역지구를 열어 일본, 미국과의 무역을 허용하였고, 신의주를 통해 중화인민공화국몽골, 중앙아시아와의 무역을 공식 허용하였다. 1993년에는 사회주의 헌법의 국가주석의 국방위원장 겸임조항 삭제를 지시하고, 국방위원장직을 김정일에게 이양하였다. 1993년 4월에 평화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의 10대강령을 제시하였다. 이후 김일성은 대한민국김영삼과 회동을 약속하였다. 한편 1990년대 초반 그는 노벨 평화상의 예비 후보로도 언급되기도 했다.

말년[편집]

1994년 초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기도 했고, 심근경색 및 목뒤의 물혹이 심해져서 입원하기도 했다. 김영삼과의 회담은 1994년 초로 예정하였으나 김일성의 병세로 무기한 연기되었다. 1994년 6월 평양에서 전 미국 대통령 카터의 방문을 받고, 핵문제와 관련한 조미협상을 진행하였다.

1994년 7월묘향산으로 휴양을 다녀왔다.

미국의 전 대통령 카터를 면담할 때 남북정상회담을 제안, 회담 준비가 진행되던 가운데 7월 8일 새벽 2시에 평양 집무실에서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63] 사망하기 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부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이 '유언'은 유훈 통치라는 이름으로 지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체제 및 대한민국의 대북정책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의 공식 사망 장소는 평양 주석집무실이지만, 묘향산 향산초대소에서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이 설이 제기된 배경에는 김일성이 요양을 하려 향산초대소에 머물다가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에 그 이후로 그의 아들 김정일이 향산초대소를 가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남북정상회담 성사 직전의 상황과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하여 김정일에 의한 암살 내지는 사망 방관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아직도 그의 죽음은 여러 가지 이야기와 함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대남정책문제로 아들인 김정일과 갈등이 빚어서 그 스트레스로 사망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64] 그는 오전 6시부터 저녁 10시까지 16시간 이상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타고난 체력과 정신력으로 장시간 정무를 강행하였으나, 70대 이후 부터는 체력의 한계를 불러와 감기와 당뇨와 목 뒤의 물혹, 피부병 등의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고, 만년에는 간혹 졸도하기도 했다.

조선중앙방송평양방송 등 주요언론들은 9일 정오 특별방송을 통해 김 주석이 “심장혈관과 동 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오던 중 겹쌓이는 정신적 과로로 94년 7월 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 했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었으며 모든 치료를 다했으나 심장쇼크가 악화돼 7월 8일 새벽 2시에 사망했다”고 보도했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아나운서들은 김일성의 사망 당시 울먹이는 목소리로 "김일성 동지께서 뜻하지 않게 서거하신 것은 우리 당과 혁명의 최대의 손실이며 온민족의 가장 큰 슬픔"이라 표현하였다.[65]

사후[편집]

김일성 광장
평양 김일성 종합 경기장
평양 김일성 종합 경기장

1994년 7월 8일부터 7월 17일까지 애도기간이 있었고, 7월 19일 국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66] 김일성 사망 다음날인 9일 방송을 통해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이 김일성동상에 호상(護喪)을 선다는 소식이 보도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각 도, 시, 군들에서 간부들과 대학생들, 보위부와 안전부까지 동원되어 김일성동상 호상사업을 조직하기 시작했다.[67]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당국은 처음에 ‘10일장’을 결정했으나, 3일을 연장해 결국 7월 20일에야 장례가 치러졌다. 각급 조직별로, 가족별로 생화를 준비해 김일성 동상을 찾아 애도를 표했으며, 동상이 없는 시골 에서는 김일성연구실에 있는 초상 앞에서라도 애도를 표시했다.[67]

1994년 7월 20일 김정일은 금수산의사당에 안치된 김일성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가 평양 시내를 한바퀴 돌고 다시 의사당에 안치하도록 조치했다. 이날 아침 평양시민들은 김일성의 영구차를 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모여들었다. 영구차가 지날 때마다 길가에 늘어선 군중들은 꿇어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수령님, 수령님’하면서 통곡했다. 지방 주민들도 조직적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TV시청을 통한 장례식에 참여하였다.[67]

추모 행사[편집]

만수산기념궁전

김일성이 사망한 뒤 평양에서는 대규모 추모 행사가 벌어진다. 이 추모 행사는 5년과 10년을 번갈아가며 진행되며,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김일성의 사망을 애도하기 위해 1997년평양 모란봉구역에 대형 추모탑을 세워놓고, 지방 도시에 1개씩 세웠다. 그리고 김일성이 태어난 날을 '태양절'이라고 부르도록 했으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강령을 통하여 "김일성 주석이 탄생한 1912년 4월 15일부터 '주체연호'를 사용한다."라고 했다.

김일성 동상

김일성이 생전에 말하기를 "만약 내가 죽는다면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묻히기를 간절히 바란다."라고 하였으나, 그의 유언과는 반대로 돌아갔다. 김일성의 주검은 방부 처리가 되어 금수산기념궁전에 있는 유리관에 안치되어 있다.

성격[편집]

김일성은 시와 노래를 좋아해서, 그가 지은 노래와 시가 몇 십 편에 이른다. 가장 유명한 노래는 "조선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일제 강점기동북인민혁명군이 부르던 것을 1993년보천보전자악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수 전혜영이 다시 복원했다. 그가 좋아하는 노래는 "사향가"와 "자장가"이다. 사향가는 내용이 고향에 대해 묘사한 것으로서, 그의 외조모인 이보익의 애창가였다. 김정일도 어린 시절에 그녀가 부르는 사향가를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또 자연을 노래한 시는 《묘향산 가을날에》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의 내용은 평안북도 묘향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 이 시의 내용은 국제친선전람관에 내부에 전시했다. 그리고 김정일의 50돌의 생일을 맞이하여 "백두광명성찬가"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이 시는 한문으로 지어졌고, 량강도 삼지연군화강암 비석에 새겨져 있다.

또한 그는 서예 활동에 대해서 적극 참여하였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공건물에는 김일성의 친필이 있는 간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김일성의 친필비는 황해북도 개성시에 있으며, 주민들이 살고 있는 주택에도 현판을 제작해서 나누어 주기도 했다. 김일성의 친필이 걸려 있는 건물로는 "대동강려관"과 "김형직사범대학", 그리고 조선의 종합대학중의 하나인 "김책공업종합대학" 등이 있다.

특히 김일성은 평소 집무실에서 틈틈이 책을 읽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는 대한민국에서 발간된 책까지도 읽었다고 한다. 1989년 대한민국의 소설가 황석영문익환 목사 일행과 방북했을 때, 김일성은 황석영이 쓴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면서 한동안 그와 책 내용을 두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었다. 김일성 주석이 좋아했던 책은 역사책과 문학책이다.[68]

주석 재임기간 중[편집]

외교 관계[편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루마니아와 짐바브웨 등의 일부 유럽과 아프리카 국가들과 돈독한 우호관계를 형성했다. 특히 김일성은 루마니아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짐바브웨로버트 무가베등과 의형제를 맺었으며 이렇게 맺어진 의형제들 중에 큰형이 되었다. 미국과의 관계는 한국전쟁 이후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는 미국의 지도자들과도 회담을 하였고, 1992년부터는 개방정책을 추진하였다.

상훈[편집]

  • 1953년 7월 2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화국 영웅' 칭호 수여
  • 1953년 7월 2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훈장 제1급
  • '공화국 영웅' 칭호 3번 수상, '공화국 3중 영웅'

주요 저서[편집]

로작 김일성 선집 홍보 포스터

저서, 로작, 주요 로작이라고도 부른다.

  • 《김일성선집》 (1953년) - 상·하권
  • 《김일성저작집》 (1962년) - 전 3권
  • 《진보적민주주의에 대하여》
  • 《김일성저작선집》(1971년)
  • 《세기와 더불어》(1994년) - 전8권
  • 《김일성전집》(2012년) - 전 100권

논란과 의혹[편집]

김일성 진위 논쟁[편집]

그의 이력에 대해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다른 나라의 역사관이 첨예하게 대립되는데, 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으로서는 그의 이력에 대한 신화화가 주체사상의 수령론의 중요한 근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독립운동가들 중에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사람이 여럿이며, 결코 김성주가 최초가 아니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미 군정은 김일성의 본명이 김성주이며,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으로 명성을 얻은 `김일성' 행세를 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 자료에 따르면 김성주가 1929∼1930년 만주와 조선 국경에서 활동하던 실제 김일성의 유격부대에 합류했으며, 실제 김일성이 55∼60세에 숨지자 명령 때문인지 자발적이었는지는 몰라도 자신을 `유명한 전사(戰士.김일성)'로 가장했다고 기술되어 있다.[69]

또 다른 주장은 오영진(吳泳鎭)의 《하나의 증언》, 이명영(李明英)의 《진위 김일성 열전》, 허동찬의 《김일성 평전》, 임은의 《북조선왕조성립비사》 등에 나타나 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해방직후 집회현장에 나타난 김성주가 너무 젊어서 평양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하며, 김일성 가짜설의 주요 근거로 내세운다. 또한 숙청당한 박금철의 증언과 남로당출신 탈북자들의 증언을 인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북의 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을 유포한 사람들은 친일파나 일제의 고등계 형사 출신, 또는 한민당과 같은 우익단체의 간부들이다. 이들은 분단상황에서 이북의 김일성이 식민지 시기의 말기에 민족적 항일영웅으로 존경을 받은 김일성이라면 지극히 곤란한 위치에 처할 만한 사람들이었다.[70] 한홍구에 의하면 특히 가짜 김일성 설의 고전적 문헌인 이북의 <김일성 위조사>나 오영진의 <하나의 증언>이 한국전쟁 시기에 제작, 배포되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70]

한홍구는 '가짜 김일성 설'의 유포에 기여한 사람이 박정희라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가짜 김일성 설'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950년대에 이미 널리 퍼졌지만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좀더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전파되었다. 이승만의 경우 반민특위를 물리적으로 와해시키고 수많은 친일파를 등용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으로 삼았지만, 어느 누구도 이승만 본인을 친일파로 보지는 않았다.[70] 는 것이다. 이어 한홍구는 "그러나 5·16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3등으로 졸업하고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라는 일본이름을 갖고 관동군 중위로 복무하다가 해방을 맞은 박정희로서는 분단상황에서 이북과의 정통성 경쟁이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70]"는 것이다.

성공회대 한홍구 대학교수는 '이젠 '가짜 김일성 설'의 망령을 떨쳐버리고, 어떻게 김일성이 실제보다 부풀려져 영웅으로 부상했으며,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치는 무엇인지 자리매김해야 할 때'라고 평하였다.[70] ‘가짜 김일성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책에 《만주국군》이란 것이 있다. 이 책에는 1937년 11월 김일성의 목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책을 조금 더 넘겨보면 죽은 줄 알았던 김일성이 다시 나타나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니 전에 목을 벤 사람은 김씨 성을 가진 유격대 지도자일 뿐, 김일성은 건재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런 식으로 김일성이 가짜라는 주장은 너무나 허점이 많기 때문에 여기서 일일이 반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70] 한홍구에 의하면 문제는 학문적인 관점에서 볼 때 황당하기 짝이 없는 가짜설[70] 이라는 것이다.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은 1945년 10월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에 나타난 김일성이 34살로 너무나 젊었다는 데서 비롯되었고, 당시 평양공설운동장에 모인 군중이 김일성이 백발을 휘날리는 노장군이라고 생각했을 수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미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겨울의 만주에서 전개된 항일유격전쟁은 백마를 탄 노장군이 나오는 세계는 아니었다.[70]'라고 반박하였다.

반면 김성주가 항일운동을 한 김일성이 맞다고 주장하는 서대숙(徐大肅) 등의 말에 따르면,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 직후 현상금이 1만 엔으로 오른 일(항일 단체의 위원장급의 현상금이 3천 엔이었다.), 그밖에 항일 활동으로 소련으로부터 적기(赤旗) 훈장을 받은 일 등을 근거로 부정한다. 그만한 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처우를 받았다고 근거로 보며, 소련 정부가 아직 새파란 나이의 젊은 김성주에게 훈장을 줄 정도면 그것은 소련도 인정할 만큼 그의 활동이 대단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3차 조선공산당 대표였던 김철수(金綴洙)는 김일성이 가짜였다면 독촉(獨促) 회의 당시 내각 구성을 숙의하는 과정에서 그토록 어린 김일성을 군사위원장으로 천거할 수 있었겠느냐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반문했다.

미화 논란[편집]

문인들은 김일성 찬양에 앞장섰다. 김일성은 46년 위대한 우리나라의 태양으로 예찬되었으며, 김일성을 우리 민족의 양심이고 의지이며 우리 민족의 신념이며 희망으로서, 우리 민족의 샛별로 묘사한 조기천의 약3천여 행의 장편 서사시 백두산은 47년 북조선 예술축전에서 1등상을 받고 각 학교의 교과교재로 채택, 사용되었다.[71][72]

신형기는 김일성의 과거의 영웅적 풍모를 알리는 일화와 기사, 그리고 문학작품들은 특별한 기획이나 지도의 결과가 아닐 수도 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71][73]

김일성 항일운동 미화 논란[편집]

김일성의 항일운동 경력은 허구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식 기록에는 김일성은 비교적 혁혁한 성과를 올린 항일 운동가로 기록되어 있으나,

지도자의 능력이나 생애를 과대 평가하는 북한 공산주의 체제의 특성상 김일성의 항일 운동이 조작되고, 과장되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가짜 김일성설이다. 하지만 가짜 김일성설을 지지하지 않는 측에서도,
김일성의 항일 운동이 과장되고 조작되었다는 의혹을 제기되며,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항일을 한 것이 아니라~
소련과 일본의 전쟁을 소련군에 참여하여 활동한 것이므로 항일운동이라고 볼 수 없다.
  • 보천보 전투 또한 마찬가지로 실제로 죽은 사람은 등에 업혀가던 순사의 딸 한명 뿐이며,
파출소를 습격해 무기를 노획한 정도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특히 대한민국의 우익 성향의 문서나 관변문헌과, 북한 문헌들의 김일성 활동 서술은 대조적으로~
이는? 북한의 문헌들이 그의 활동을 사실 이상으로 미화시키려 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14]

경제정책 실패[편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1960년대까지 대한민국의 두 배 이상 경제력을 유지해왔으나, 이는 소련의 무상 지원 13억 루블 등,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 및 중화인민공화국의 막대한 지원 덕분이었다.[74] 1970년대 이후로는 소련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이 어려워졌다.

국제환경의 변화도 경제건설의 집중도를 떨어뜨리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김일성은 1950년대 중반의 중,소 분쟁 이후 1960년대 들어 대한민국에서 한일국교가 수립되자 '미국 제국주의, 소련 수정주의, 중국 교조주의, 일본 군국주의에 포위되었다.'고 인식하면서 '자립경제노선'을 더욱 강조했다. 여기에 줄곧 국민총생산 20~30%에 이르는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며 '4대 군사노선'을 강조했다.

1970년대,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명기한 《사회주의헌법》을 발표한다. 주체사상이 사상변화를 추동할 여지를 극도로 좁히게 만들어 민주화운동과 시민의식을 크게 저하시키는 역할을 했고, 이어 생산력 저하 문제를 극도로 심화시켰다. 이 시기 김일성은 '사상사업'을 강조해 국유화 중심으로 운영하였고, 시장,개인영농이나 상공업의 자율성을 전면 부정했다.[75][76]

이러한 정책들은 김일성이 사망할 무렵 최악에 이르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외국의 무상 식량지원 없이는 버틸 수 없게 만든 '외세 의존적 지도자'로 비판받았다.[77]

기타[편집]

배움의 천리길[편집]

김일성의 생가, 만경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그의 '배움의 천리길'을 기념하는데, 이는 그가 1921년 만주 바다오거우에서 칠골로 유학한 일이라는 설과[11] 1925년 칠골에서 만주로 건너간 일이라는 설이 있다.[6] 생전에 70여개 국가와 국제기구들로부터 180여개의 최고훈장과 메달, 30여개도시의 명예시민칭호, 20여개의 이름있는 다른 나라 대학으로부터 명예교수, 명예박사칭호, 169개 나라 당 및 국가, 정부수반들과 진보인사들로부터 16만 5,920 여점의 선물을 받았다.[15]

종교[편집]

김일성은 초기에 부모와 목사 집안이었던 외가의 영향으로 개신교 장로교 예배당에 다녔다. 그의 양친이 장로교 신자였고 외조부 강돈욱과 외삼촌 강진석, 외삼종조부 강량욱은 모두 장로교 목사였다. 유년기에 장로교 신자 생활을 했다는 의견이 있으나 청년기에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하면서 무신론자가 되었다. 이후 김일성이 신앙활동을 했다거나 신앙적이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신체적 특징[편집]

김일성의 목 뒤에는 야구공과 동일한 크기의 혹이 나 있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과의사들은 김일성의 혹을 제거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김일성이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78]

김일성의 이름으로 수여되는 상훈[편집]

  • 김일성상[79]
  • 김일성훈장
  • 김일성청년영예상
  • 김일성소년영예상
  • 조국통일상

평가와 비판[편집]

긍정적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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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항일 독립 운동에도 참가했고 알려지는데, 1937년보천보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비롯해서, 일제 강점기 동안 동북인민혁명군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한홍구는 '이젠 '가짜 김일성 설'의 망령을 떨쳐버리고, 어떻게 김일성이 실제보다 부풀려져 영웅으로 부상했으며,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치는 무엇인지 자리매김해야 할 때'라고 주장하였다.[70]

경제 성장과 산업시설 육성[편집]

김일성은 북한의 경제발전을 위해 산업화와 공업화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된 정책들을 입안했다. 1956년남포시에 있는 제철공장 방문한 뒤 천리마운동을 실시하였다. 천리마운동 기간에는 공업 현대화가 진행되고 남포항과 평양역 같은 산업교통시설이 복원되었다. 그리고 지방 여러 곳에 발전소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1990년대에 들어서자, 중화인민공화국과는 달리, 발전된 공업국가에서 생활수준이 낙후된 농업 국가가 되었다.

항일 독립 운동 공적[편집]

그는 또한 항일운동을 했다. 1937년보천보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비롯해서, 일제 시대 동안 동북인민혁명군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그에 대한 비판이 존재하는 가운데, 그가 일으킨 보천보 전투에 대한 평가를 다시 내리고 있다.[출처 필요]

대한민국반공 체제 하에서는 보통 김일성은 독립운동가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1985년, 1986년경 이후 대한민국의 일부 역사학계 및 학생운동권 계열 등에서는 김일성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독재를 한 것과, 한국 전쟁의 주요 가담자라는 것과는 별개로 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은 인정해야 된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출처 필요]

부정적 평가[편집]

그는 박헌영과 더불어 한국 전쟁의 최고 주범이다.[80] 또한 김일성은 인권을 말살하는 스탈린주의를 엄격하게 고수했고, 황장엽의 인간중심 철학에 기초해 제시된 주체사상을 통치이데올로기화 하면서 독재이데올로기로 변질시켰다. .[81] 여기에 더해, 정적 탄압과 독재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한국 전쟁 이후 권력 강화 및 집권을 위해 연안파, 조선 국내파, 중국파를 비롯한 다수의 공산주의, 사회주의자들을 대량숙청하는 등 정치탄압을 가하였다.

정적 탄압 및 일당독재화[편집]

김일성은 최초에는 명망높은 공산주의자인 최용건을 앞세워서 독재를 실시했으며 이 과정에서 한국 전쟁에 대한 패전의 책임을 물어 연안파, 조선 국내파, 중국파를 비롯한 다수의 공산주의, 사회주의자들을 대량숙청했다. 또한 정치지도원을 적극 활용하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감시했으며 자신의 아들인 김정일을 후계자로 삼아 공산주의와는 동떨어진 세습체제를 구축한 것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경제 파탄[편집]

김일성은 경제적으로 공업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농산물의 값이 폭등하고, 계단식 논밭을 무리하게 개간하여 산림을 파괴시켜 그로 인해 식량생산의 자급률이 떨어지는 등 농업의 쇠퇴를 야기했다. 게다가 경제개발에는 점점 신경을 쓰지 않게 되고 오직 자신의 우상화에만 전력투구했기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는 197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였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거의 국가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1980년대에는 국채를 대량 발행하고 외국에 엄청난 빚을 졌는데 이 때문에 북한의 경제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게다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 부채를 갚을 티끌만큼의 노력도 하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통일이 되면 대한민국이 이 부채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다음은 북한이 각국에 진 부채이다.

국가 액수(단위:달러)
중국 69억 8천만
러시아 11억
일본 4억
스웨덴 3억 3천만
이란 3억
독일 3억
프랑스 2억 8천만
태국 2억 6천만
오스트리아 2억 1천만
시리아 1억 4천만
스위스 1억
대만 8천 6백만

친일파 중용[편집]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성립하면서 친일파들을 일부 등용했다.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는 독립운동가를 색출하던 일제의 헌병 보조원 출신이였으며 조일명 문화선전성 부상은 친일 사상교양단체였던 '대화숙' 출신으로 학도병 지원 유세를 주도했으며 군사분야를 담당한 김정제 보위성 부상은 양주군수를 지내는 동안 일제에 협력했다. 군부도 마찬가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공군사령관 이활과 인민군 9사단장 허민국, 인민군 기술부사단장 강치우 등은 나고야 항공학교 출신이다. 나고야 항공학교는 가미가제 폭격요원을 양성하는 학교였다.[82]

연보[편집]

가족 관계[편집]

일화[편집]

김일성 장례에 당시 전체 인민들이 총동원해 매일 생화를 들고 동상을 찾으려니 북한에 꽃이란 꽃은 전부 절판되는 진풍경을 보이기도 했다.[67] 김일성 사망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김일성, 김정일 생일날 김일성 동상이나 초상화 앞에 꽃다발을 갖다 놓는 관례가 있었다. 이 시기를 이용해 한시적으로 꽃장사에 나서는 주민들이 있었는데, 김일성 장례기간 동안 이 사람들이 엄청나게 돈을 벌었다는 것이다.[67]

평소 북한 돈 5원밖에 하지 않던 생화 한송이는 김일성 장례기간 동안 50원까지 뛰어 올랐다. 그것도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그러자 일시적으로 종이로 만든 조화가 김일성 동상앞에 놓여지기도 했다.[67]

김일성이 등장하는 작품[편집]

1990년 KBS 여명의 그날에서 매카시즘으로 인해 금기시되어왔던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이 조명되었다.[90]

드라마[편집]

영화[편집]

  • 1982년 - 강덕, 《조선의 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화
  • 2003년 - 강덕, 《밀림이 설레인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화

참고자료[편집]

  •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의 기관지 《조선신보》.
  • 《조선일보》와 자매지 《월간조선》(2005년 7월).
  • 고등학교 심화선택과정《한국 근·현대사》.
  •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항일혁명편
  • 이종석,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 (역사비평사, 2000), pp. 395–439.
  •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48회 2002년 2월 3일)
  • 김찬정, "빨치산만가, 김일성과 88독립여단," 『신동아』, 1992년 7월, pp. 360–387
  • 바신, 레오니드. "[해방후 평양 첫 진주한 전소련군 장교의 폭로] '날조된 영웅' 김일성," 『신동아』, 1992년 11월호, pp. 486–501
  • 이종석, "현준혁은 김일성이 죽였나?", 《역사비평 1992년 여름호》 (역사비평사, 1992)
  • 한국일보 편, 『증언 김일성을 말한다 - 유성철·이상조가 밝힌 북한정권의 실체 -』, (한국일보사, 1991)
  • 홍순관, "前 김일성 비서실장 충격고백 / 김일성, 전쟁과 여성편력," 《신동아 1994년 10월》 (동아일보사, 1994) pp. 188–207.
  • Dae Sook Suh,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Kim Il Sung: The North Korean Leader)》, (서주석 역, 청계연구소, 1989)

관련 서적[편집]

  • 조선로동당출판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활동 략력》, (조선로동당출판사, 1981)
  • 이기봉, 《인간 김일성 그의 전부》, (길한문화사, 1989)
  • 전문섭·백학림 외, 《회상기 (중)》, (대동, 1990)
  • 김찬정, 《비극의 항일빨치산》 (동아일보사, 1992)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조선로동당출판사, 1998)
  • 조선로동당출판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혁명활동략력》 (조선로동당출판사, 2000)
  • 서대숙, 《현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과 김정일》, (을유문화사, 2000)
  • 한홍구, 《대한민국사 3: 야스쿠니의 악몽에서 간첩의 추억까지》 (한겨레신문사, 2005)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 (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 역사문제연구소, 《한국현대사의 라이벌》 (역사문제연구소 편, 역사비평사, 2006)
  • 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7》 (역사비평사, 1997)
  • 박명림,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도서출판 나남, 2002)
  •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2 (도서출판 나남, 1996)
  • 김일성, 《김일성저작선집 1~44》 (조선로동당출판사, )
  • 송종환, 북한 협상행태의 이해 (오름, 2002)
  • 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김자동 번역, 일월서각, 1986)
  • 신용하 외 편, 《한국현대사회사상》 (지식산업사, 1984)

함께 보기[편집]

주석[편집]

  1. 1980년한국의 일부 운동권에서는 그의 주체사상 노선을 받아들인 그룹도 있었다.
  2. 한국브리태니커회사 (2008). "김일성"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HTML). 2008년 5월 21일에 확인.
  3. 북한연구소 (2008). "김일성(金日成)" (HTML). 2008년 5월 21일에 확인.
  4. 신주백 (1993). 〈김일성은 '가짜'가 아니다〉, 역사문제연구소 편: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역사 37장면 2》. 역사비평사, 215~222쪽쪽
  5. 《같은 책》, 217~218쪽쪽 “조선혁명당 군사령부 참모를 역임했던 김학규(金學奎)의 자서전을 직접 인용하여 보면, "지금 북한의 괴수 김일성은 …… 그는 육문중학에서 공부하면서 길림에 있는 소년들을 몰아가지고 소년대를 조직하고 그가 대장으로 있으면서 나를 찾아다니던 것이 기억되며, ……."”
  6. 김창희 (2001년 4월 2일). 〈김일성, 북한의 영원한 지도자〉, 《한국 역사 인물 뒤집어 읽기》, 초판 2쇄, 서울: 인물과사상사, 312~344쪽쪽
  7. 신복룡 (2001년 12월 20일). 《한국사 새로 보기》, 초판 2쇄, 서울: 도서출판 풀빛, 238쪽. ISBN 89-7474-870-3
  8. 6.25「金日成(김일성)의 전쟁」확인 1994년 7월 21일 작성 경향신문
  9. 주진오 (1993). 〈기독교, 김일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 역사문제연구소 편: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역사 37장면 2》. 역사비평사, 217~218쪽쪽 12사도의 대표 격인 베드로(헬라어 페트로스를 음역한 말. 마태 복음서에 따르면, 그리스도교회의 '반석'이라는 뜻으로 예수가 붙여준 이름이라고 한다.)의 이름을 따 '강반석'이라고 지어줄 정도였다.
  10. 전주 김씨의 후예라는 설과 선산(善山) 김씨의 후예라는 설도 있으나, 김정일이 전주 김씨의 시조의 묘소가 있다는 말에 "남쪽에 가서 그곳에 갈 수 있으면 시조 묘를 참배하겠다."라고 답하였다. 《한국 역사 인물 뒤집어 읽기》 참조.
  11. 주진오 (1993). 〈기독교, 김일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 역사문제연구소 편: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역사 37장면 2》. 역사비평사, 217~218쪽쪽
  12. 일설에는 목사였다 한다.
  13. 신복룡 (2001년 12월 20일). 《한국사 새로 보기》, 초판 2쇄, 서울: 도서출판 풀빛, 238쪽. ISBN 89-7474-870-3
  14. 김일성 - Daum 백과사전
  15. http://www.kcckp.net/ko/great/biography.php?1
  16. 화성의숙에 입학하여 다녔다는 설도 있다. 《한국 역사 인물 뒤집어 읽기》 참조.
  17. "朝鮮○○軍 男女三名被捉", 《동아일보》, 1931년 3월 26일 작성, 3면.
  18. 신복룡 (2001년 12월 20일). 《한국사 새로 보기》, 초판 2쇄, 서울: 도서출판 풀빛, 238쪽. ISBN 89-7474-870-3
  19. 신복룡 (2001년 12월 20일). 《한국사 새로 보기》, 초판 2쇄, 서울: 도서출판 풀빛, 238쪽. ISBN 89-7474-870-3
  20. 신복룡 (2001년 12월 20일). 《한국사 새로 보기》, 초판 2쇄, 서울: 도서출판 풀빛, 240~1쪽. ISBN 89-7474-870-3
  21.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6) 229
  22. http://www.ournation-school.com/OurNation/login_count.php?tb_name=tbllecture&Rel_key=792&fname=../Radio_lecture/h3-20/h3-20.htm
  23.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6) 230
  24. 북한 50년사:떠안아야 할 반쪽의 우리 역사(김학준, 동아출판사, 1995) 110
  25. "북한인민공화국 수상에 김일성 씨", 《동아일보》, 1948년 9월 10일 작성, 1면.그러나 1948년 9월 2일부터 10일간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통과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에 따르면 국가원수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겸하었고, 당시 김두봉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겸 국가수반에 선출되었다. 김일성은 국가 원수가 아닌 내각의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26. "김일성내각 組閣을 완료", 《경향신문》, 1948년 9월 11일 작성, 1면.
  27.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1>",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1일 작성, 5면.
  28.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1>",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1일 작성, 5면.
  29. 기자 趙 甲 濟 의 세 계 : Cho Gab-Je The Investigative Reporter's World
  30. 김영호,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6) 138쪽.
  31. 김영호,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6) 138쪽.
  32. Kbs News
  33.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2일 작성, 5면.
  34.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2일 작성, 5면.
  35.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2일 작성, 5면.
  36.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2일 작성, 5면.
  37.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2일 작성, 5면.
  38.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3일 작성, 5면.
  39.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3일 작성, 5면.
  40.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3일 작성, 5면.
  41. 박명림 (1996년 6월 25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초판, 서울: 나남. ISBN(13) : 9788930034777
  42. 김일성은 1994년 사망하기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식 수도를 서울특별시로 명시했다.
  43. 조선로동당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7)(이종석 지음 | 역사비평사 | 2006.05.29) 240
  44. 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7)》(역사비평사, 2006) 250페이지
  45. 최신 북한이해(박승규 지음, 학문사, 2000) 21페이지
  46. 조만식의 죽음에 대해서는 1950년 10월 피난가다가 평양 만포진에서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다.
  47. 서동만, 〈한국전쟁과 김일성〉《역사비평》제51호(2000년 여름) 41쪽.
  48. http://www.chongryon.com/k/mc/kim/ryakureki/r-03-1.htm
  49. 조선로동당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7) (이종석 지음, 역사비평사, 1997) 148페이지
  50. 천리마운동 - Daum 백과사전
  51. 한국역사연구회 4월항쟁연구반, 《4.19와 남북관계》 (한국역사연구회 4월항쟁연구반 지음, 민연, 2008) 213
  52. ""60년대 마오쩌둥이 남한 무장봉기 강요"", 《한국일보사》, 2008년 7월 4일 작성.
  53. 6.25 휴화산, '빨치산은 살아 있다' : Save Internet 뉴데일리
  54. [시론 북, 이 난리에 호화 생일잔치냐
  55. <주말 포커스-대북 밀사의 세계> 秘史 남기고 권력과 함께 사라져 문화일보 2007년 8월 11일자
  56. [뉴시스아이즈]이슈진단 '가열되는 통일비용 논란'-역대 정부 통일방안 살펴보니…정국따라 천차만별 :: 네이버 뉴스
  57. <남북관계史와 '쌀'지원 함수> :: 네이버 뉴스
  58. [뉴스테이션/딥포커스] 북한의 ‘도발과 대화’ 이중전술의 비밀<2> :: 네이버 뉴스
  59. http://ndfsk.dyndns.org/100519/5.htm
  60. 서경원이 그린 김일성 손금 사진:경향신문 기자 촬영본
  61. 내가 본 김일성 주석은 반공교육과 달랐다, 서경원 민중의 소리 2007년 12월 24일자
  62. 김형수, 《문익환 평전:역사인물찾기 15》 (실천문학사, 2004) 829페이지
  63. "사망 김일성 사망/8일 새벽2시 심근경색으로… 17일 장례식", 《경향신문》, 1994년 7월 10일 작성, 1면면. 2008년 7월 7일 확인.
  64. "호기 있다…김정일 '서울 불바다' 발언 좋아해",《조선일보》, 2009.04.21
  65. 한겨레그림판
  66. 북 고위급 장례식 어떻게 치르나 - 조선닷컴
  67. 김 전 대통령 國葬과 김일성 장례식의 차이 - 데일리NK
  68. 황석영 “방북, 솔직히 후회 조금은 한다”,《뉴스엔》, 2008.11.06
  69. "美, 군정 당시 이미 김일성 가짜로 판단" 연합뉴스 2009-08-13
  70. ‘김일성 가짜설’ 누가 퍼뜨렸나 한겨레 21, 2001년 11월 01일 제381호
  71.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272쪽
  72. 신형기 《이야기된 역사:남북한 민족 이야기가 그려낸 역사상 비판》(신형기, 삼인, 2005) 222~225쪽
  73. 신형기, 앞의 책 223쪽
  74. 백준기, 《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접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편, 2001년, p707~714
  75. 정태헌 저.《문답으로 읽는 20세기 한국경제사》,역사비평사 p263~p265
  76. 북한은 1946년 소련 군정기 당시 초기에는 '개인 상공업은 생산력 향상과 국영부문의 보완을 위해 보호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사익추구가 곧 경제교란행위로 간주되어 통제대상'으로 여겨 자본주의에 대해 어느정도 일정한 범위내에 허용했었다. 정태헌 저.《문답으로 읽는 20세기 한국경제사》, 역사비평사. p256~p259
  77. 《박헌영 평전》,안재성 저. 실천문학사. p 615
  78. 네이버 디지털 뉴스 아카이브
  79. 예술가가 수여받았을 경우 김일성상 계관인이라 부른다.
  8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스탈린, 마오쩌둥에게 한국 전쟁 승인을 요청한 글에는 항상 두 사람의 서명이 들어가 있었다.
  81. http://news.donga.com/3/all/20101118/32678104/1
  82. 北 김일성 초대내각 '친일파' 중용…건국 주역으로, MBC뉴스 2013-08-15
  83. "【逸話】恣意的親日人名辞典", 2009년 11월 6일 작성. 2010년 2월 24일 확인.
  84. 김정일 장남 김정남 "천안함? 나는 모른다" 한국일보 2010년 06월 06일자
  85.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86. donga.com[뉴스]-“北김정일 이복동생 김현 8년전 처형돼” 소식통
  87. 그의 칠골 창덕학교 5학년때 담임선생이기도 했다.
  88. http://www.chongryon.com/k/mc/kim/ryakureki/r-02-1.htm
  89. 2010년 김정일에 의해 처형당하였다.
  90. 인터뷰 K-TV「여명의 그날」작가 김교식씨"이젠 「이념갈등」극복해야죠 1990.12.22 경향신문

바깥 고리[편집]

Flag of North Korea.svg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 Emblem of North Korea.svg
전 임
(초대)
1948년 9월 9일 ~ 1994년 7월 8일 후 임
김정일
김일성 · 김정일 · 김정은
전 임
주석제 신설
(최용건)
제1·2·3·4·5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주석
1972년 12월 28일 - 1994년 7월 8일
후 임
주석제 폐지
(김영남)
전 임
스티코프
(사실상)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1946년 2월 8일 - 1948년 9월
후 임
김두봉
전 임
-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내각 수상
1948년 9월 9일 - 1972년 12월
후 임
김일
전 임
최용건
(인민군 총사령)
제2대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1950년 7월 - 1991년 12월 24일
후 임
김정일
전 임
김일성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국방위원장
1972년 12월 15일 - 1993년 4월 9일
후 임
김정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