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공화당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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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당
약칭 공화당 (비공식)
DRP (영문)
초대 당대표 박정희
창당 1963년 2월 26일
해산 1980년 10월 27일
중앙 당사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념/정치노선 파시즘[1][2][3]
보수주의
정치적 스펙트럼 우익 ~ 극우
상징색 갈색, 파랑
대한민국의 시계열적 정당 지도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 약칭 공화당)은 1963년 2월 26일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한 군부 세력이 구 자유당 세력과 대한국민당 세력, 기타 정구영 등 학계와 시민사회단체 일부를 흡수하여 창당한 정당이다.

초대 총재에는 정구영, 당 의장에는 김정렬이 선출되었다. 1963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1980년 10월 27일 해산될 때까지 17년 동안 대한민국의 집권여당이었으나, 신군부에 의해 해체되었다.

개요[편집]

1963년 1월 김종필은 민주공화당의 사전 조직인 재건당을 창당 조직하였다. 이후 변호사 정구영 등의 학자와, 구 자유당 계열 인사 일부 및 대한국민당 계열인 윤치영, 임영신 등을 포섭하여 2월 26일 공화당을 창당 조직하였다.

초대 총재에는 정구영, 당 의장에는 김정렬이 선출되었으나, 8월 박정희가 철원비행장에서 예편하자 박정희를 총재 겸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 10월 27일의 5대 대선에서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여당으로 군림하였다.

이후 6대 대통령 선거와 7대 대통령 선거에 박정희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워 당선되어 제3공화국 기간의 여당으로 활약하였다. 72년 10월 유신 선포 이후에는 박정희에 의해 친위조직이자 제2여당격인 유신정우회가 조직되어 별도로 활동하기도 했다.

1979년 10월 26일 총재였던 대통령 박정희가 피살되자, 11월 26일 김종필을 임시 당수로 선출했다가 80년 윤치영을 임시 당수로 선출했으나 정치활동금지법에 의해 1980년 10월 27일 해산되었다. 공화당의 당 재산은 신군부가 몰수하여 민주정의당의 창당에 활용하였다.

구 민주공화당 인사 중 정치금지법에 묶이지 않거나 1981년에 풀린 일부는 1981년 1월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공화당계 정당은 1990년까지 존속했는데, 한국국민당은 이후 신민주공화당을 거쳐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에 소멸되어 사라졌다.

뒤에 국민당과 신민주공화당계열 인사 중심으로 1995년에 창당된 자유민주연합과 그 후신 정당들도 공화당계열 정당의 연장선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4 · 8항명[편집]

  • 1969년 4월 7일 : 국회 본회의에서 신민당은 1. 문교행정의 실패 2. 사학 특감 및 68회 임시국회에서의 폭언을 이유로 권고병 문교부장관에 대한 해임권고건의안을 제출하였다.
  • 1969년 4월 8일 : 재석 152명(공화당/100명, 신민당/41명, 정무회/11명) 찬성 89명, 반대 53명, 기권 3명으로 통과되었다.[4][5][6] 이에 당시 공화당 총재였던 박정희는 "1주일안에 이번 사건을 주동한 반당분자를 철저히 규명하여 그 숫자가 몇 십명이 되더라도 가차없이 처단하라."는 지시를 내린다.[7]
  • 1969년 4월 15일 : 박총재의 지시사항에 따라 의원총회에서 양순직, 예춘호, 박종태, 정태성, 김달수의원을 제명하였다.[8]
  • 1969년 7월 12일 : 당명불복한 중앙위원 11명, 지구당부위원장 4명을 포함한 93명을 제명하였다.[9]

4 · 8항명이 발생된 근본적 이유는 개헌논의에 대한 반대의사로서 당 제명조치 역시 그에 따른 숙당(肅黨)[10] 조치였다.

3선 개헌[편집]

이념 논쟁[편집]

10월 9일 신민당 대통령 후보 윤보선은 안동 유세를 다녀왔다. 윤보선은 이 날 8천 청중 앞에서 "민주공화당은 공산당의 돈을 가지고 공산당 간첩이 와서 공산당 식으로 조직한 공산주의 정당'이라고 단언했다.[11] 그는 "북괴의 무역성 부상 황태성이가 20만 달러를 가지고 왔는데, 김종필씨가 조선호텔에 모셔다가 황태성이 안에 따라 서울에 밀봉교육처를 다섯 군데나 만들어놓고 공산당 식으로 점조직을 한 공화당이 어떻게 민주주의 정당이냐"하고 반문하면서, "공화당은 보수정당도 아니고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정당도 아니다."라고 주장했다.[12] 윤보선의 안동 발언은 막바지에 이른 선거 정국을 바짝 긴장시켰다.[12]

역대 대선 결과[편집]

실시년도 대수 후보자 득 표 득표율 결과 당락
1963년 제5대 박정희 4,702,640표
46.6%
1위 The Presidential Standard of South Korea.svg
1967년 제6대 박정희 5,688,666표
51.4%
1위 The Presidential Standard of South Korea.svg
1971년 제7대 박정희 6,342,828표
53.2%
1위 The Presidential Standard of South Korea.svg
1972년 제8대 박정희 2,357표
99.9%
1위 The Presidential Standard of South Korea.svg
1978년 제9대 박정희 2,577표
99.9%
1위 The Presidential Standard of South Korea.svg
  • 제5대~제7대 대통령선거는 직접 선거로 이루어졌고, 제8대~제9대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 선거로 이루어졌다.

역대 총선 결과[편집]

실시년도 선거 지역구 당선자 현황 비례대표 당선자 현황 국회 정원
당선자 수 당선비율 당선자 수 득표율 당선자 수 당선비율
1963년 제6대 88/131
67.18%
22/44
33.5%
110/175
62.86%
1967년 제7대 102/131
77.86%
27/44
33.5%
129/175
73.71%
1971년 제8대 86/153
56.21%
27/51
37.48%
113/204
55.39%
1973년 제9대 73/146
50%
73/73
38.7%
146/219
66.67%
1978년 제10대 68/154
44.16%
77/77
31.7%
145/231
62.77%

같이 읽기[편집]

주석[편집]

  1. 《박근혜 바로보기》 p73 ~ p89 참조
  2. Kwak, Ki-Sung (2012), Media and Democratic Transition in South Korea, Routledge, p. 31
  3. Kohli, A. (2004). State-Directed Development: Political Power and Industrialization in the Global Peripher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 92.
  4. 헌법 제59조
    ①국회는 국무총리 또는 국무위원의 해임을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다.
    ②전항의 건의는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③제1항과 제2항에 의한 건의가 있을 때에는 대통령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에 응하여야 한다]
  5. 야당이 제안한 장관해임안이 여당의 반란표로 가결된 것은 3대국회때 임철호 농림장관불신임안 가결된 이래 두 번째의 기록이다
  6. "권문교해임안 가결", 《경향신문》, 1969년 4월 8일 작성, 1면. 2011년 8월 2일 확인.
  7. 박정희 지시사항 1969년 4월 11일《경향신문》
  8. "공화, 항명 5의원 제명", 《동아일보》, 1969년 4월 15일 작성, 1면. 2011년 8월 2일 확인.
  9. "당원 93명을 제명", 《동아일보》, 1969년 7월 12일 작성, 1면. 2011년 8월 2일 확인.
  10. 정당이 내부의 잘못을 바로잡고 기강을 바로 세우는 일
  11. 이상우, 《비록 박정희 시대 (1)》 (중원문화사, 1984) 146
  12. 이상우, 《비록 박정희 시대 (1)》 (중원문화사, 1984) 147페이지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