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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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직 대통령 김영삼에 관한 것입니다. 희극인/치과의사 김영삼에 대해서는 김영삼 (1975년) 글을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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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김영삼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제14대 대통령
임기 1993년 2월 25일~1998년 2월 25일
전임: 노태우(제13대)
후임: 김대중(제15대)

출생일 1927년 12월 20일(1927-12-20) (81)
출생지 한국 경상남도 거제군 장목면
정당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종교 개신교(장로교)
배우자 손명순
자녀 아들 김은철, 아들 김현철, 딸 김혜영, 딸 김혜경, 딸 김혜숙

김영삼 (金泳三, 약칭 YS, 1927년 12월 20일~, 경상남도 거제시 출생)은 대한민국정치가이자 제14대 대통령이다. 1954년 26세에 3대 국회 민의원에 당선된 이래 9선 국회의원을 지내며 제3·제4공화국 시절 동안 야당 정치지도자로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고, 민주당, 신민당 원내총무·당수 등을 지냈다. 특히 김영삼이 1954년에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으로 김영삼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연소 국회의원이라는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1979년 10월 YH무역여공 사건 등으로 부마항쟁을 촉발하였으며 1980년 이후 민주화추진협의회, 통일민주당 총재 등을 지냈다. 1993년 대한민국문민정부 제14대 대통령(1993년 2월 ~ 1998년 2월)에 취임하여 32년만의 민간인 정권을 수립하였으며 금융실명제, 12.12와 5.18 민중항쟁 진압 등으로 군사정권 관계자들을 사법처리하였다.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후손 목사 김홍조의 아들, 창씨명은 가네무라 코유(일본어: 金村康右). 본관은 금녕(金寧)이다. 아호는 거산(巨山). 경상남도 거제군 장목면 출신.

목차

[편집] 생애

[편집] 출생과 가계

1927년 음력 12월 4일 경상남도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 1371번지 큰달섬(大鷄島)에서 김홍조(金洪祚)와 박부련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호적상에는 1927년 12월 20일생으로 되어 있다.[1] 김영삼의 가계는 백촌 김문기의 후손이었다. 김문기의 후손들 중 김영삼의 직계선조가 임진왜란 때 계림에서 거제도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거제도에는 큰달섬과 작은달섬이라는 이름의 부속도서가 딸려 있는데, 그의 선조들은 임진왜란 때 병화를 피해 계림(경주)에서 내려와 거제도에 딸린 섬을 각각 나눠 차지하여 살았다하여 거제도에는 큰달섬(大鷄島)과 작은달 섬(小鷄島)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이 있다 한다.[1] 큰달섬에 이주한 김영삼의 직계선조에게는 후손이 귀하여 번창하지 못했고, 그에게는 손아래에 여동생이 5명 있는 독자였다. 그의 가계는 거제도에서 멸치어장을 소유하던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2], 가세는 크고 어선 10여 척 이상 보유하였으며 멸치 어장을 꾸려가는 인근 마을에서는 꽤 알려진 알부자 집안이었다.[1]

[편집] 소년기

그는 유년시절 조부 김동옥(金東玉)의 영향을 받았다 한다.[1] 손이 귀한 집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조부 김동옥을 따라 망망대해를 누비며 포부를 키웠다 한다. 조부는 그에게 사나이다운 배포와 우직하리만큼 강직한 성품을 심어주었다 한다.[1] 늘 험한 바다와 싸우는 갯가에는 해신에게 무사를 기원하는 기도를 했지만 그의 조부는 일찍부터 기독교에 심취, 사랑방을 기도실로 꾸며 외지에서 전도사나 목사 등을 자주 초청하여 예배를 보았고 숱한 동네사람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집 앞의 뽕밭을 기부하여 교회를 짓기도 하였다.[3]교회는 이주하였지만 조부 김동옥의 노력으로 섬마을 사람들 거의가 기독교를 믿게 되었으며, 아버지 김홍조, 어머니 박부련과 김영삼도 세례교인이 되었다.[3] 8세에 면사무소 소재지에 있는 장목보통소학교에 입학했는데, 학급에서 그는 가장 어린 소년이었다 한다. 학급번호는 키순서로 32번이었고, 편도 20리의 고된 통학을 염려하여 그의 부모는 근처에 하숙을 마련해 주어 하숙생활을 하였다.[3] 가네무라 코유(일본어: 金村康右)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였다.[4]

[편집] 학창 시절

통영중학교, 경남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통영중학교 1학년 때엔 툭하면 시비를 거는 급장과 일본인 학생들과 마찰을 빚어 1,2주간 정학을 받기도 했다.[3] 통영중학교의 가고시마(北島) 교장은 그를 혹독하게 대하였다. 김영삼이 중학교 2학년 무렵 가고시마 교장은 진해중학교로 전근갔는데, 이날 2학년생 전원이 선창가 배에까지 이삿짐을 나르는데 동원되었다. 당시 귀하던 설탕이 10여 부대나 쏟아져 나오자 그는 설탕을 나르면서 이빨로 부대종이를 뜯어 일부러 설탕을 흘리며 날랐다. 다음날 진해로부터 당장 범인을 조사해서 알려달라는 불호령이 통영중학교로 날아들었다. 일본인 교사 가운데서도 한국인 학생의 처지를 끔찍이 이해해주던 와타나베(渡邊) 교감은 누구의 소행인 줄 알며서도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 점잖은 훈시만으로 감싸주어 설탕 사건의 위기는 모면했다 한다.[5] 이런 인연으로 그는 와타나베 선생과는 건국 후에도 서신왕래 등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 왔고, 83년에는 통영중학교 동창들이 와타나베 교감을 한국에 초청, 재회하기도 하였다. 중학교 3학년때, 3학년생 전원이 사천의 비행장 공사장으로 끌려가 노동보국이라는 이름의 강제노동에 끌려갔으나 사소한 시비로 일본인 학생들과 싸움이 붙어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5]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그는 대통령에 대한 장래희망을 품고 책상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란 글귀를 책상 앞에 붙여놨다고 한다.[6][2] 그뒤 김영삼은 경남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경남고등학교에서 경성제대 철학과를 나와 윤리과목을 들고 직접 강단에 섰던 교장 안용백 선생의 감화를 받은 김영삼은 철학 전공을 결심하게 되었다. 모든 학문은 철학에서 시작된다는 안용백 교장의 훈시에 자극을 받아 1948년 9월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로 진학했다.[7]

[편집] 대학 생활과 6.25 전쟁중

1학년 때 전공 외에 헌법, 정치학 개론, 국제 공법, 현대 정부 형태론, 서양정치사상사, 구주외교사, 국제 관계론, 구주 정치사 등 정치관련 분야 8개 과목을 수강했고, 2,3학년 때에도 국가론, 비교 정부론, 정치학 강독, 의회제도론 등의 과목을 수강했다. 성적은 B, C, D 였고 유식철학과 노장철학 2개 과목만은 A였다 한다.[7] 대학교 2학년에 재학중 김영삼은 서울특별시 명동 시공관에서 있은 정부수립기념 웅변대회에 참가하여 2등을 차지, 외무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당시 외무부 장관은 장택상이었다. 김영삼에게는 장택상이 처음 직접 대하는 거물 정치인이었고 장택상은 곱상하고 총명한 청년을 마음에 두게 되었다. 2대 민의원 선거때에 장택상과 가까워지게 되었다.[8] 제2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할 결심을 한 장택상은 서울대 문리대 교정으로 지프차를 보내 김영삼 학생에게 선거 도움을 요청해 왔다. 김영삼은 서울대 동료 20여 명과 함께 경북 칠곡으로 내려가 이때부터 40여 일간을 장택상과 침식을 함께 하며 찬조연설을 하는 등 장택상의 당선을 위해 노력하였다.[8] 김영삼이 서울대학교 졸업 학력에 대해선 이견이 존재했다. 정식 입학생이 아니라 청강생이었다는 루머가 돌았지만 서울대학교에선 정식으로 김영삼의 입학과 졸업을 인정했다. 김영삼의 생가에는 김영삼이 1948년 9월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해 1951년 9월 졸업했음을 보여주는 성적 증명서가 전시되어 있다. 6.25 이후 피난을 가지 못해 고생했던 그는 1.4후퇴 때 서둘러 남하, 1951년 2월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동문인 손도심 등과 함께 학도의용군에 입대했다. 군번은 E134였다. 의용군 안에서도 당장 전선에 달려가자는 주장과 후방에서 일손을 돕자는 의견이 분분했으나 그는 웅변대회 때의 인연으로 문리대 사학과 주임교수에서 국방부 정훈국장으로 있던 이선근 박사의 추천으로 국방부 정훈국 대북방송 담당원으로 배치됐다.[9] 매일저녁 5~6시까지 1시간 동안 중앙방송을 통해 직접 원고를 쳐서 중간중간에 군가를 섞어서 생방송으로 진행하였다. 8개월간 방송에 몰두하고 있을 때 국회 부의장 장택상으로부터 국회에서 일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군에서 대북방송의 중책을 맡고 있음을 들어 거절하였다. 그러나 장택상은 이선근 국장에게 전화로 부탁하였다.[10] 국방부측에서는 장택상에게 당초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김영삼에게 "어느곳에서 일하든 나라를 위한 일에는 장소가 문제될 것이 없다"면서 장택상 부의장의 일을 도우라고 하였다.[10]

[편집] 정치 이력

[편집] 정치 입문

대학 3학년이던 1950년 창랑 장택상의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하였고[11] 1952년 국회의원 장택상의 비서관이 되었다.[12][13] 그해 5월 장택상이 국무총리에 취임하자 김영삼은 국무총리인사담당 비서관이 되었다.[10] 조부의 위독 소식에 고향에 내려갔으나 조부는 정정하였고, 부친 김홍조의 친구이자 마산에서 한산의원을 하던 이 장로의 소개로 세명의 처녀와 맞선을 하게 되었다. 이 중 세 번째 처녀이자 경향 고무, 고무신을 경영하던 손상호의 딸 손명순을 선택하였다. 1953년 3월 부산 중앙교회에서 손명순과 결혼식을 올렸다. 손명순에게서 딸 혜영, 혜경, 아들 은철, 현철, 막내딸 혜숙 등 2남 3녀가 태어났다.[14]

1954년 5월 대한민국 제3대 총선에 출마를 결심, 서울 청진동 자유당 본부에서 이기붕을 만났다. 이기붕은 예상대로 자유당에 입당해달라는 호소를 하였고, 지방 지구당의 선거참모들로부터 입당 권유를 받았다. 당시 유력 정당은 자유당과 민국당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유당을 선택하였다.[15] 1954년 5월 20일 대한민국 제3대 총선에서 국회의원 자유당 후보로 경상남도 거제군 지역구에서 출마하였고 고무신 공장을 운영하던 장인은 사위의 선거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하였고, 결과는 20800여 표로 경쟁자인 민국당의 서순영을 14110표로 누르고 3대 국회의원에 당선, 26세에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다.

[편집] 야당의원 생활

자유당이승만의 3선을 확정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일 때 이기붕의 안내로 김철안, 김상도 등 4명과 함께 경무대를 방문, 이때 그는 3선개헌은 안되며 이번으로 끝나야 한다는 의견을 즉석에서 건의하였으나 묵살되었다.[16] 그는 이때부터 현석호, 한동석 등과 만나 개헌저지를 위한 동지 규합에 나섰다. 비밀 유지를 위해 장소를 수시로 옮겼고 한동석 의원이 입원중일 때는 문병을 가장하여 밤늦게까지 회의를 하여 20여 명을 규합하는데 성공하였다. 1954년 11월 27일 초대 대통령 연임제한 철폐를 골자로 한 개헌안이 숱한 저지 여론에도 불구하고 무기명투표로 붙여졌다. 이때 그는 자유당 소속의 다른 의원인 현석호, 민관식, 이태용, 황남팔, 김두한, 김흥식 등과 함께 부표를 던졌다.[16] 이후 여당의 독재에 반발하여 그해 12월 3선개헌에 반기를 들고 탈당한다.[17][2] 자유당을 탈당한 뒤 1955년 4월 민주당 창당발기준비위원회 33인의 한사람으로 참여, 민주당이 결성되자 민주당에 입당했고, 민주당 중앙당 청년부장 겸 경남도당 부위원장에 임명됐다.[18]

1958년 5월의 대한민국 제4대 총선에서는 민주당 중앙당의 권유로 고향인 거제군을 떠나 선거구를 옮겨 부산 서구에서 출마해 낙선하였다. 자유당은 당시 경남도지사, 내무부차관을 지낸 이상용을 후보로 내세웠다. 23개 투표함 중 16개 함에서는 김영삼이 7:3의 비율로 우세하였으나 나머지 한 표에서는 그의 표가 많은 것이 7표만 나오고 자유당표 일색이라 막판에서 선거에 패하게 되었다. 낙선한 뒤에도 원내에서 정치활동을 하며 1959년 조병옥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기 위해 당내의 인사들로서 '유석 청년 동지회'란 모임을 조직, 조병옥의 후보 추대운동을 벌여 성공하기도 했다.[19] 4.19 혁명 이후에 치러진 대한민국 제5대 총선에서 재기한다. 이후 민주당 구파 정치인으로 활동한다.[20]

[편집] 국회의원 활동

[편집] 제2공화국과 군정기간 중

1961년 12월 윤보선민주당 내 구파가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민당을 창당하였다. 김영삼은 신민당의 원내부총무가 됐다.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 소식을 거제에서 접하였다. 그는 집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당시 그는 신민당의 원내부총무였고 다른 정치인들은 국회가 해산되고 탱크가 밀려왔다는 소식에 오히려 은신처를 찾았지만 그는 서울로 향했다. 혁명세력이 민주공화당을 창당할 무렵 야당은 분열되어 김병로, 윤보선을 중심으로 한 민정당, 박순천, 장면민주당, 김준연자민당이 난립하였고, 그는 민정당을 선택, 민정당 초대 대변인으로 선임되어 야당의 입으로 활약했다.[19]

1961년 5.16 직후 정치정화법으로 묶여있던 중 국가재건최고회의 내무위원장 조시형(趙始衡)이 그를 찾아와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해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5.16은 장면 정권이 수립된 지 불과 18일만에 기도됐다는 것과 군은 약속대로 원대복귀하라며 군의 정치참여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 참여할수 없다고 거부하였다.[21] 그뒤 민주공화당에서 부산시지구당 위원장직을 제안하자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거절하였고, 정치를 하지 않겠다면 서울신문사 사장직을 제의하였지만 역시 거절하였다.[22]

[편집] 제3공화국, 유신 기간중 야당지도자

5대 국회에서는 민주당 구파에 속하였고, 1964년 한일굴욕외교 반대 때 민정당,민주당 양당이 민중당으로 통합된 뒤 그는 김상돈과의 경합에서 이기고 민중당 원내총무에 피선되었다.[23] 1967년 7월 20일 미국 하와이에서 사망한 이승만의 시신이 김포공항으로 운구되자 애도 성명서를 발표하였다.[24]

제3공화국 기간 동안 제1야당 신민당의 원내총무와 대변인을 거쳤다. 유진산 당수가 갑자기 쓰러져 야당이 야당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당을 상징할 인물이 없자 1969년 11월 그는 '40대 기수론'을 내세웠다. 당원로들은 구상유취론으로 맞섰지만 이어 김대중, 이철승 등이 '40대 기수론'에 동참하여 경쟁에 뛰어들었다. 당 원로들의 젖비린내난다는 혹평을 무릅쓰고 그는 '40대 기수론'을 고수하여, 1971년 대통령선거에 출마를 공식선언하여 주목받게 되었다.[2]

1970년 9월 신민당 대통령후보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에서 최고 득표를 얻었으나 과반수 미달로 경선 2차 득표에 들어갔다. 2차 득표에서 김대중에게 역전패 당했다.[25]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이철승 등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당수인 유진산을 제치고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으나, 결선 투표에서 김대중에게 패하였다. 72년 1월 전국학생 신앙 운동 동계 수양대회에 참가하여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 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26] 1975년 5월 21일 청와대를 찾아 대통령 박정희와 청와대 회동을 하기도 했다.[27]

그뒤 이철승, 유진산 등과 번갈아가며 신민당 당수를 역임하던 중 미국 하버드대학 동아시아연구소의 초청으로 방미 도중 유신선포 소식을 듣고 부인의 만류와 미국인 라이샤워, 코헨 교수 등의 만류도 뿌리치고 귀국했다.[25] 김포공항에는 대기하던 청년들이 있었고 한동안 연금상태에 있었다. 하루 6갑 정도 피우던 담배와 밤새 마시던 술을 이 무렵 끊었다. 연금이 풀리고 난 뒤에도 한동안 마스크를 착용하였다. 왜 마스크를 하느냐는 주변의 질문에 정치는 갔다. 이런 판에 어떻게 국민들 앞에 얼굴을 들고 다니냐며 대여투쟁을 하였다.[28] 1972년 10월 유신 선포이후 박정희 정권에 맞서 선명 야당의 기치를 내걸었다. 1974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당총재에 당선되었고 1975년 3월 미국 뉴욕타임즈 지는 그를 금주의 인물로 선정 보도했다. 이어 개헌 주장으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입건되기도 했다.[28] 1976년 당총재 경선에서 이철승에게 패하여 고배를 마셨다.[29] 1979년 5월 신민당 총재 경선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당총재직에 복귀했다.[30]

[편집] 의원제명 파동

1979년 8월 9일 가발 수출회사인 YH무역의 여성 노동자 172명이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민당 당사에 찾아와 농성에 돌입했으며 이들을 만났다.[31] 20대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 당사에 진입하자 신민당 총재인 김영삼은 이들을 위로하며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우리 민주당사를 찾아 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한다'며 '우리가 여러분을 지켜주겠으니 걱정말라'며 노동자들을 안심시켰다.[31]

8월 9일부터 8월 10일까지 김영삼과 신민당 의원들은 신민당 당사 주변을 순찰하며 경찰청 정보과, 보안과에서 나온 형사들을 발견하면 멱살을 잡고 발길질을 하고 따귀를 치며 경고를 하였다.[31] 8월 11일 새벽 경찰신민당에 최후통첩을 내렸다. 이순구 서울시 경무국장이 당사에 전화를 걸어 총재를 바꾸라고 당직자에게 요구했지만 김영삼은 건방지다며 전화를 받지 않았다.[31] 오히려 작전지휘에 나선 마포경찰서장을 만나자 '너희들이 저 여공을 다 죽이려 하냐'며 뺨을 올려붙였다.[31] 곧이어 2000여 명의 경찰이 신민당사에 투입되고 신민당 의원, 당직자 등과 몸싸움을 벌였지만 역부족이었고 23분 만에 진압작전은 완료돼 YH무역 노동자들은 모두 강제연행되었다.[31] 경찰의 연행과정에서 건물옥상에 올라간 노동자들 중 김경숙이 추락하여 사망하고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경찰에 의해 상도동 집으로 강제로 끌려나갔다.[31] 김대중을 가택연금했던 박정희 정권은 1978년부터 김영삼을 처리하려 했고 YH무역 사건을 기회로 김영삼 마저 처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31] 1979년 9월 8일 법원은 김영삼에 대한 신민당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을 내렸다.[31]

1979년 10월 신민당 총재직에 있었으나 미국에 대하여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다가 1979년 10월 4일 국회는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주도로 '국회의원으로서 본분을 일탈하여 반국가적인 언동을 함으로써 국회의 위신과 국회의원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며 김영삼의 국회의원직을 제명을 요구했고[31] 이어 신민당 총재직과 국회의원직에서 강제로 제명되고 가택 연금되는 탄압을 받았다. 김영삼이 의원직에서 제명되고 9일 뒤인 10월 13일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에 반발한 신민당 의원 66명과 민주통일당 의원들은 집단사퇴를 제출하기도 했다.[31] 이어 10월 15일 부산광역시 부산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민주선언문이 배포되고, 10월 16일 다른 대학교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가담하여 대규모 독재타도, 반정부시위가 시작됐다. 10월 16일10월 17일 부산에서는 김영삼에 대한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쳤고 10월 18일10월 19일에는 경남 마산시창원시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31] 김영삼의 제명은 부마 항쟁을 촉발했고, 이는 유신 정권 종식의 계기가 되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암살당하고 그의 빈소가 마련되자 측근들의 반대에도 박정희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였다.[32] 12월 12일 12·12 사태가 발생하자 강원용의 연락을 받고 12월 13일 아침 남산에 있는 식당에서 면담하였다.[33] 김대중, 김종필과 힘을 합쳐 계엄부터 해제시키고, 그때는 김종필김종필대로 가게 하고, 김대중과 손을 잡도록 권고하였다. 또한 강원용은 조건을 제시, 김대중과 손을 잡는 조건으로 대통령은 김영삼이 먼저 하고 그 대신 당 총재는 김대중에게 주며, 4년 후에 가서 경선을 하자고 권유하였다.[33] 그러나 김영삼은 우리는 민주주의 신봉자니까 대통령후보든 당 총재든 전당대회에서 민주적으로 결정해야지, 우리끼리 약속을 하고 말고 하는 게 아니라며 강원용의 타협안을 거절하였다. 강원용은 당에서는 절대 다수가 김영삼 세력이었으니까 조건을 못 받아들이겠다는 것이 아니냐며 비난하였다.[33]

[편집] 유신붕괴 직후

1980년 9월 출범한 전두환제5공화국 정권에서도 계속된 가택 연금과 정치적 탄압에 항의하며 장기간의 단식 투쟁을 단행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1981년 5월 연금에서 해제된 김영삼은 이민우(李敏雨)·김동영(金東英)·최형우(崔炯佑)·김덕룡(金德龍) 등 정치활동 규제에 묶여있는 재야 인사들과 함께 등산모임을 조직하고 민주산악회를 출범시켰다.[34] 민주산악회의 참가자가 증가하면서 김영삼은 1981년 6월 9일 공식기구로서 출범하는데 동참하였다. 공식 기구로 출범한 민주산악회이민우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김영삼을 고문으로 추대하였다.[34] 그뒤 민주산악회는 주요 정치적 사건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지방조직을 확대하는 등의 사실상의 정치적 활동을 하였으며 한편 김대중(金大中) 계열 정치인들도 민주산악회의 활동에 가담하여 적극 협력하며 야권통합과 범국민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34] 이에 따라 김영삼 계열 정치인들은 김대중 계열까지 흡수하여 재야정치인들의 통합조직을 준비, 민주산악회를 모체로 하는 통합협의체의 구성에 합의하였다. 1983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를 맞이하여 전두환 정권의 야당인사 탄압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23일간 단식투쟁을 시도하기도 하였다.[35] 1984년 5월 18일 5.18 민주화 운동 4주년에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시켰다.[34]

[편집] 제5공화국 기간 중 야당 지도자

1983년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조직하였고, 1983년 5월 18일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단식투쟁을 하였다. 1984년 신한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이때 비밀리에 빵을 먹다가 문익환에게 들켰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1984년 실시된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신한민주당이 제1 야당으로 올라서자, 이를 바탕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였으며, 김대중 등 재야인사 150여명과 함께 고문저지 보고대회후 민추협 사무실에서 철야농성에 가담하였다.[36]

1987년 다시 김대중과 함께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이어 신민당을 탈당한 66명의 국회의원이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다.[37] 5월 27일 서울특별시 향린교회에서 열린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결성에 참여하고 고문에 선출되었다.[38]

1987년 6월 항쟁 이후 직선제로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 경선에 출마, 유세를 다니며 6 · 10항쟁과 6 · 29선언, 그리고 대통령선거에서 '군정종식'과 '문민통치' 확립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다.[2] 그러나 김대중과의 대선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결과 1987년 11월 김대중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이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정의당노태우에게 패배하였다. 그리고 김대중이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자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부산, 경남 지역에서만 압승을 거뒀을 뿐 수도권 지역에서는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에 패배하면서 제2야당의 당수로 밀려났다.1989년 4월 27일 이경현 살인폭력사태 국민대책위 결성에 참여하여 폭력사태 진상규명, 평화시위 보장과 공권력에 의한 폭력중지, 공안합수부와 백골단해체 요구에 동참하였다.[39] 87년 대통령선거 직전 김대중의 탈당에 대해 김영삼은 이를 '천추의 한'이라고 하기도 하였다.[2]

이후 여소야대 정국에서 위기감을 느끼던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제2야당의 지위에 불만족을 느끼던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그리고 내각제 개헌을 노리고 있던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물밑 협상 끝에 1990년 1월 전격적으로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하였고, 김영삼은 민자당의 대표로 취임하였다. 한편 3당합당으로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면서 그는 구국적 결단이라고 주장하였다.[2] 그뒤 노태우, 김종필 등과의 3당 합당 과정에는 내각제 이면합의가 있었으나 김영삼은 노태우를 압박하여 이를 백지화하였고, 김윤환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쳤으며 일부 민정계 의원들의 반발을 누르고 민주자유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으며, 1992년 5월 18일 민자당 대표 최고위원에 취임하였고[40] 결국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김대중을 누르고 당선된다.

[편집] 대통령 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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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취임 초기

삼당합당의 결과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초기 개혁과 부패 일신 정책을 펼쳤다. 1993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부터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없애 쿠데타의 가능성을 없앴고, 제5공화국의 전직 대통령들이 구속 수감시켰다. 1993년 직후 북한이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하여 갑자기 1차 북핵위기를 맞았고, 이후 대북정책이 '냉.온탕'을 왔다갔다했다는 비판을 받았다.[41]

3월 13일 언론에 종군위안부문제에 대해 물질적 보상을 일본측에 요구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밝히고 그에 대한 보상은 내년부터 정부예산으로 추진하라고 지시했다.[42] 이어 종군위안부문제에 대해 그는 일본측에서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며 물질적 보상문제는 필요하지 않다면서 그런점에서 도덕적 우위를 가지고 새로운 한·일 관계 정립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으며[42], 최근 국민들이 변화와 개혁에 대해 큰 관심과 기대를 갖고 있어 그때그때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만 너무 혁명적인 인상은 주지 않도록 속도를 조정하도록 하라고 부처에 지시하였다.[42] 6월 3일 전국연합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 전국 36개 단체가 모여 부당한 공권력 반대와 노동인권 보장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을 열었으며 시민, 학생등 1만여명,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김영삼 대통령 망언 규탄 및 노동인권 보장 촉구 국민대회]를 갖고 노동탄압을 즉각 중지할 것을 정부에 촉구하기도 하였다.[43]

1993년 8월 12일에는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통해, 모든 금융거래를 실명을 통해 해야 한다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하였다. 1994년에는 김문수, 이재오, 김덕룡 등 시민사회운동가와 노동운동가들을 영입하여 민주자유당에 입당시켰다. 1994년 여름, 미국 빌 클린턴 행정부가 북조선의 영변 원자로 시설에 대한 정밀폭격을 검토하자 그는 이에 대한 강경한 반대입장을 펴서[41] 저지하였다. 1994년지방자치제에 관한 법률에 서명하여, 1995년 6월 27일 전국 동시 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편집] 5공·6공 및 과거사 청산

1995년 8월 2일 총무처 장관 서석재가 전임 대통령 중 1인이 4천억 이상의 비자금과 가명계좌를 보유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고 전두환·노태우는 해명을 요구하여 화제가 되었다. 10월 19일 통일민주당의 박계동 의원의 폭로에 의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비리사건을 폭로하자 수사를 명하여 1996년 노태우, 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을 전격적으로 구속 수감하고, 12.12 쿠데타 및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특별법을 제정해 책임을 물어 법정에 세웠다. 이 때 김영삼은 노태우와의 관계를 끊고자 1995년 12월 5일 민주자유당의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꿨으며,‘5·18특별법’을 통해 국립묘지승격의 기회를 마련하였다.

한편 1995년 8월 11일 교육부를 통해 국민학교의 명칭을 초등학교로 변경하게 하였다. 구 조선총독부 철거작업을 실시하여 1995년 8월 15일부터 조선총독부 철거작업에 들어갔으며[44][45] 총독부는 1996년 최종적으로 철거되었다.[45]

[편집] 취임 4년차

1996년 12월 프랑스 파리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 OECD 본부에서 대한민국은 아시아 국가로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OECD 회원국이 되었다. 1996년 10월 북한 무장 간첩단이 잠수함을 타고 강원도 강릉시에 침투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간첩단의 일원이었던 이광수가 현장에서 생포되었으며 나머지 조직원들은 자살하였다. 그러나 차남 김현철의 뇌물수수 의혹이 있어오다가 1997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이 뇌물수수 및 권력남용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김영삼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하였다. 1997년 1월부터 한보 철강, 기아자동차 주식회사 등의 도미노식 부도 사태가 발생했으며, 결국 12월 정부는 국제 통화 기금(IMF)에 금융 지원을 신청하였다. 1997년 12월,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는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 겸 대통령 후보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 정치 공작을 자행하였는데, 1998년 3월 국가 안전 기획부와 검찰의 공동 조사에 따르면 이 사건을 당시 국가 안전 기획부 부장이었던 권영해가 주도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출처 필요]

[편집] 취임 5년차

집권 말기 대통령의 아들인 김현철의 권력형 비리가 드러나고, 외환금융이 악화되어 IMF 구제금융사건로 인해 국제통화기금의 원조를 받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그는 아들 현철을 그를 차기 국회의원이나 정치인 등으로 염두해 두었으나 신한국당의 신임 총재로 취임했던 이회창은 김영삼측의 생각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이 일로 김영삼과 이회창 간의 미묘한 감정싸움의 발단이 되어 알력으로 작용하다가 사이가 틀어지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편집] 대통령 퇴임 이후

대통령직 퇴임 후에도 꾸준히 정치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전임자인 박정희·전두환, 후임자인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기타 김구 임정 주석 등에게 비판적인 자세를 유지해 오고 있으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및 제17대 대통령 이명박에게 긍정적이며 호의적인 평가와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제18대 총선 공천에서 자신의 측근이 대거 탈락하자 간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2002년 4월부터는 일본 와세다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2003년 9월 30일 전 조선노동당 비서 황장엽의 천거로 자유북한방송 방송위원회 명예위원장에 선임되었다.[46] 2004년 3월 대통령 노무현이 탄핵될 때 노 대통령을 정계에 입문시킨만큼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잘 되기를 바랐으며, 그동안 여러차례 충고도 했다며 그럼에도 노무현이 이를 소홀히 한 채 일방적으로 국정을 운영해서 이런 결과가 온 것이라며 냉정한 반응을 보였다.[47] 2004년 12월 13일 오전 황장엽을 만나 회담하였으며, '북한민주화운동을 위해서 전력을 다해 돕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황장엽이 대표로 있는 북한민주화동맹의 명예위원장에 피선되었다.[48][49][46]

2005년 조병옥 박사 45주기 추도식에 참석하였으며[13] 2005년 8월, 1990년 3당 합당을 전후해 당시 민주정의당 총재이자 대통령인 노태우로부터 40억원 이상의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50] 3당 합당 과정에서 정치자금이 오고 갔다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2005년 8월 경쟁자였던 박철언에 의해 89년 6월 김영삼 총재의 소련 방문을 앞둔 시점에 노 대통령의 지시로 김 총재에게 20억 원과 여비 2만 달러를 전달한 것을 비롯해 그해 연말에 10억 원, 90년 3당합당 직후 설을 앞두고 10억 원 등 3차례에 걸쳐 40억 원 이상을 직접 김 총재에게 전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던 것이다.[50] 또한 1989년 3월 20일 당시 대통령 노태우가 자신의 대선 공약사항이었던 중간평가의 유보를 결정하는 과정에도 당시 그가 적극 개입했고 주장하였으며 89년 3월 16일 상도동 김 총재 자택 2층 서재에서 김 총재와 단 둘이 만나 중간평가 유보에 합의했고, 민정당과 통일민주당의 합당에 대해서도 사실상 합의했다"면서 "특히 김 총재는 중간평가 유보 성명서를 작성할 때 참고하라고 몇가지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고 의혹을 제기하였다.[50]

2007년 12월 성균관대학교 김일영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이승만은 나라를 건국한 국부이며, 당시 가장 현실적인 지도자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김구는 이루지 못할 일을 상상한 정치감각이 떨어지는 지도자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또한 박정희를 역사의 죄인으로 혹평하고 5.16 쿠데타가 없었다면 장면 정부가 나라를 잘 이끌었을 것이며 박정희의 경제개발은 장면의 민주당 정권에서도 가능하다고 평가하였다.[20] 2008년 5월 라디오 방송 광주MBC 표준FM <시선집중 광주>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28년의 비망록’과의 인터뷰에서 전두환을 비판하였고 5.18 당시의 비극을 회상하였으며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평가가 미흡한 것은 아쉽다는 소견을 피력하였다.[51] 2007년 5월 22일 김영삼은 국립 5·18 민주묘지를 11년만에 처음으로 참배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5·18 특별법 제정 공로로 5월단체로부터 감사패를 받고, " 5·18은 자유와 정의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결국 역사는 그 진실 그리고 정의를 세계에 알릴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 5·18 묘지 입구에서는 김 전 대통령의 참배에 반대하는 일부 대학생들의 시위가 있었지만 충돌은 빚어지지 않았다. 3당 합당 등에 대한 항의로 그동안 이뤄지지 못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5·18묘지 참배도 끝나 5·18은 이제 화해와 용서의 역사로 승화되었다고 평가한다.[52]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의 출마를 놓고 김영삼은 이회창을 맹비난하기도 했다. 노무현 정권때 대선에 출마한 이회창을 향해 먼저 인간이 돼야 한다, 자신의 무능과 잘못으로 두 번씩이나 집권의 기회를 잃게 만든 장본인이 이제는 자신이 몸담았던 정당과 후보에게 비수를 들이대고 있다며 이회창을 공격을 퍼부었다. 반면에 여당의 이명박 공격에 대해 대선이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았고 후보 등록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이 때, 이 정권이 범죄자를 데려와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는 후보를 겨냥해 검찰수사를 하고 있다라고 말하여 이명박 후보에게 우호적으로 평가했다.[53]

2008년 3월 가이후 전직 일본 총리요시무라 다다시 일본티볼협회 이사장을 통해 총재 수락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냈고[54] 이를 수락하여 3월 5일 한국티볼협회 총재에 취임하였다.[55] 2008년 11월 13일 김영삼은 "3·15 의거는 국가기념일로 반드시 제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3·15의거는 국민적 민주화 투쟁의 효시로 숭고한 정신의 계승을 위해 4·19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별도로 국가기념일로 반드시 제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56] 2009년 4월 10일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에 김영삼 대통령 기록전시관이 기공하였다.[57][58]

[편집] 외교

[편집] 대미관계

1993년 7월에 한미관계가 처음에는 클린턴 대통령이 김영삼을 자유민주주의의 투사로 존경하며 취임 후 첫 방문지로 한국을 택할 정도로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북한과 미국이 핵 협상을 하면서 틀어지기 시작했다. 대북 포용정책을 주장했던 클린턴 행정부는 “핵을 가진 집단과는 대화할 수 없다”며 대북 강경 정책을 표방했던 김영삼 정부와 엇박자를 냈다. 1994년 10월 남한을 제외한 북·미 간에 제네바 합의가 이뤄졌을 때 미국은 클린턴 대통령 명의로“북한이 합의를 위반하지 않으면 경수로 사업을 끝까지 보장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북한에 줬다. 미국은 이 사실을 한국에 알려주지 않았고, 나중에 이를 안 김영삼대통령은 상당히 화를 냈다. 이후 1996년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 처리 등으로 두 사람의 갈등 폭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이 때문에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말 외환위기 때 미국의 신속한 도움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59]

[편집] 대북관계

1994년 6월 1차 북핵위기는 파국으로 치달았고 빌 클린턴 행정부는 북폭을 결심했다. 미국은 한국에 살고 있던 자국민을 한반도 밖으로 빼내는 계획을 세웠다. 이 소문이 퍼지면서 남한에서는 쌀·라면 사재기가 벌어졌다. 그러나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6월 15~18일 평양에 가서 김일성 주석과 담판을 벌임으로써 전쟁 위기를 넘긴다. 그는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정상 회담까지 잡았다. 김영삼은 역사상 최초 남북 정상회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지만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사망으로 무산됐다. 당시 미국은 북미 협상을 진행하던 로버트 갈루치를 제네바의 북한 대표부에 보내 조문했다. 그러나 남한은 정반대로 김영삼이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려 조문을 막고 공안정국을 조성해 정상회담까지 약속했던 남북 관계는 불신만 커져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60]

[편집] 대일관계

1995년 10월 일본의 한 각료가 "일본이 식민지배시절 한국에 좋은 일을 많이 했다"는 라고 발언했고, 이후 1997년에는 일본 총리도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망언하자, 이에 김영삼 대통령은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격한 반응을 보였고 이후에도 한일관계는 순탄치못하다가, IMF사태가 터지자 한국은 일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도움을 받지못하였다. [61]

[편집] 사상

자유 없는 세계가 잘못하면 공산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그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이유로 자유를 너무 구속하면 공산주의와 비교해서 생각할 때,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것은 자유가 없고, 독재를 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제약이 많고, 인간을 전부 인간같이 취급하지 않는 것에서 공산주의를 반대한다고 하였다. [62] 자유가 전부 없어지고 그런 구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되면 공산주의에 호기심을 갖는 사람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62] 또한 그는 몽고메리 원수의 지도자가 가는 길을 감명깊게 읽었다고 한다.[62] 존경하는 인물로는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는 개인적으로 성격이라든가 지도력이라든가 정치가로서 조병옥 박사를 지목했다. 외국 사람으로서는 존 F. 케네디를 지목하였다.[63]

[편집] 종교

1975년 손세일과의 접견에서 국민이면 누구나 모든 문제에 참여해야 된다며, 종교인의 현실 참여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피력하였다. 그런데 그 방법을 어디까지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한정하였다.[64]

[편집] 평가

야당후보자 중 강경파 노선을 걷기도 했다. 군사정권 집권시 야당 지도자들 중 첩자·사꾸라 등으로 몰렸거나 부정부패와 문란한 사생활 등으로 입방아에 오르내리거나 좌익등으로 몰렸던 다른 야당 인사들에 비해 청렴하고 깨끗한 처신으로 3공화국과 유신, 제5공화국 기간 동안 잡음이 없었던 점 등 김영삼의 정치적 청렴성, 결백성 등이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1983년 5·18 광주 항쟁 3주년 기념식 때, 전두환 정권의 정치탄압에 맞서 23일간 단식투쟁 중 빵과 우유를 먹다가 목사 문익환에게 들켰다는 루머가 돌면서 비판이 일기도 했다. 3당 합당 이후 여당의 일원으로 소속됨으로서 야당성이 희석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1980년판 브리타니커의 국제연감 79년의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30]

[편집] 긍정적 평가

1962년 윤보선 정권 퇴진 이후 31년만의 민간인 대통령으로 문민정권을 수립했다는 점과 민주적 선거를 통해 정권교체를 이룩했고 군사정권을 종식시켰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 집권기간 중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등을 숙청하여 쿠데타의 가능성을 없앴고, 침략의 상징인 조선총독부를 철거하였으며, 거액의 비자금을 획득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들을 사법처리하였으며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의 죄도 함께 물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둔다. 또, 집권 초 1993년 8월 12일 모든 금융은 실명으로 거래하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하여 거래의 투명성을 가져왔다는 점도 높이 평가된다.

[편집] 부정적 평가

김대중과의 후보 단일화 실패로 노태우에게 정권을 넘겨준 점, 민주정의당과의 3당 합당, 재임 말년에 발생한 차남 김현철의 권력형 비리사건, IMF 구제금융사건 초래 등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편집] 정치적 노선과 유산

김영삼의 정치적 노선이 계승된 정당으로는 통일민주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이 있다. 6월항쟁에서 주도적 역할이 된 통일민주당제1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이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분열되었다. 이로 인해 범민주세력은 분열되어 민정당노태우가 당선되었다. 이후 김영삼은 3당합당으로 노태우, 김종필과 함께 민자당을 창당하였다. 하지만 김종필을 비롯한 신민주공화당 인사들은 일시적으로 합류하였으나 김영삼과의 갈등으로 탈당하였고, 자신의 통일민주당계열과 노태우민정당만이 존재하였다. 이후 민자당은 신한국당으로 변경되었고, 그의 정치적 노선으로는 신한국당한나라당의 주류 파벌을 이루는 민주계 파벌의 종주로 상정된다. 다른 파벌은 노태우전두환의 민정당 계열을 이룩하였다.(반면에 민주공화당계통은 김종필의 일시적 합당과, 탈당후 자유민주연합 창당, 김윤환계의 탈당 등으로 한나라당과는 정치적으로 무관하게 되었다.) 그의 정치적 노선의 뿌리로는 자유당과 민주당 구파를 거쳐 한국민주당에 정치적 기반을 둔다. 자유당 공천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자유당 계열의 인사인 국무총리 장택상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하였으나 1960년 이후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기면서 민주당에서 활동하였다. 타 정당에서 민주당으로 입당한 인사들은 신파 계열로 건너갔지만 김영삼은 김성수·신익희·조병옥·윤보선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구파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유신 체제 하에서 이철승·유진산·유진오·김대중 등과 함께 반유신체제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후 구파 내부의 다른 경쟁자인 이철승과 신파의 새로운 주자로 떠오른 김대중 등과 정치적 경쟁관계에 놓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갈등관계 끝에 김대중1987년 11월 통일민주당(새한민주당의 후신)을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자 통일민주당은 제1야당에서 원내 제3당으로 지위가 하락·축소되었고 김영삼과 김대중의 분열로 1987년 6.10 항쟁 이후 민간인 정부의 출범을 원하던 열기를 깼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노태우는 투표자 중 36.6%의 최저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김영삼은 1990년 민주정의당노태우, 박철언, 신민주공화당김종필 등과 함께 3당 합당을 하기도 하였다. 이를 두고 김대중은 3당합당을 야합이라며 비판을 하기도 했다. 국회의 정쟁과 파쟁을 김영삼·김대중의 대리전 내지는 유산으로 보는 비판도 있다.[65]

[편집] 신념

  • 대도무문(大道無門)1997년과 2002년 무렵 인터넷 상에서는 민주당 등의 지지성향 네티즌들에 의해 大盜無門 이라는 한나라당내 다른 인사들에 대한 비판적의 용어로 오르내리기도 했다.[66]

[편집] 일화

  • 퇴임 후인 1999년 6월 3일 일본 와세다대학에 강연을 위해 김포공항 귀빈실로 향하는 길에 재미교포 박의정이 던진 달걀에 얼굴을 맞았다. 달걀 안엔 적색 페인트가 들어있어서 김영삼의 얼굴은 붉은 페인트로 뒤범벅되었다. 당시 계란을 투척한 박씨는 "경제를 파탄낸 YS가 김대중 대통령을 돕지는 못할망정 '독재자' 운운하고 지역감정을 부추겼다"라고 투척 이유를 밝혔고,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계란투척 장면을 촬영한 고영권 기자는 31회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 1980년대 초반 직선제 개헌을 촉구하며 단식투쟁을 할 때 남몰래 보름달빵우유를 먹고 있었는데, 이것이 위문차 자택에 방문한 문익환 목사에게 발견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 이후로 문익환 목사와 사이가 나빠졌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 2000년 10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당시 고려대에서 학생들에 의해 문전박대당하자 노벨상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고 한탄하며 우유병에 소변을 누었다고 한다.

[편집] 상훈

  • 1993년 해리먼 민주주의상
  • 1994년 비폭력평화상
  • 1995년 UN협회 세계지도자상
  • 1995년 마틴 루터 킹센터 비폭력평화상
  • 1996년 제1회 루스벨트 국제장애인상

[편집] 학위

  •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 졸업
  • 미국 타우슨주립대 명예문학 박사
  • 미국 아메리칸대 명예국제정치학박사(1993)
  • 일본 와세다대 명예법학박사(1994)
  • 러시아 모스크바대 명예정치학박사(1994)
  • 프랑스 소르본대 명예철학박사(1995)
  • 미국조지타운대 명예인문학박사(1995)
  • 미국 뉴욕대 명예법학박사(1995)
  • 미국 미네소타대 명예법학박사(1996)
  • 대만중국문화대 명예정치학박사(2005)
  • 원광대 명예정치학박사(2006)

[편집] 주요 저서

  • 40대 기수론
  • 회고록
  • 지도자의 길
  • 인생을 뜻있게 보내려면
  • 우리가 기댈 언덕은 없다
  • 정치는 길고 정권은 짧다
  • 나와 조국의 진실(1985, 대형국판 288, 일월서각)
  • 나의 결단(1987)

[편집] 김영삼을 연기한 배우들

[편집] 가족

[편집] 같이보기

[편집] 기타

[편집] 어록

  • "집권자는, 언제나 학생은 조용히 학원 안에서 공부나 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집권자는 학생들에게 조용히 공부만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실정입니다. 물론 정치는 정치인에 맡기고 학생은 공부만 하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이지요. 그러나 정치가 잘못되고 정부가 국민을 억압할 때 학생이 반항하지 않고 방관하는 사회는 장래성이 없는 사회입니다. 나는 학생이 정치 참여 내지 사회 참여를 해야 할 때는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 때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한계를 두자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학생은 학생이기 때문에 정치 자체는 정치인에게 맡기고 학생들은 정치인에 대한 견제세력으로서의 영역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튼 스튜던트 파워가 없는 사회는 어딘가 잘못된 사회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69]


  • "기독교는 네로의 탄압 아래서도 믿음을 키워왔습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모세의 지도력과 다윗의 용기입니다. 위대한 역사가이며 사상가인 아놀드 토인비 박사도 /위기에 처해 있는 현대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신앙뿐이다/ 라고 말했는데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소중한 제도인 민주주의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는 오늘날 우리는 /교회 안의 기독교 신자/로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 "칼빈은 정부를 세운 목적에 대해, 첫째, 하나님에 대한 경배의 외적 조건을 보호하기 위함이며, 둘째, 종교의 순수한 교리를 보존하기 위함이며, 셋째, 공동의 평화와 안녕을 수립하기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은 칼빈의 정치관에 충성할 수 있는 정부는 그 정부가 민주주의를 시행하고 발전시켜 나갈 때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 민주주의로 위장해 놓고 독재주의를 추구할 때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70]

[편집] 관련 서적

  • 《김영삼 김영삼 대통령회고록(상,하)》 (조선일보사, 2001)
  • 《김영삼 정부의 성공과 실패》 (함성득 편 지음, 나남, 2001)
  • 《김영삼 회고록 1~3(부제: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김영삼, 백산서당, 2000)
  • 《김영삼의 사람들 1, 2》 (박정태 지음, 국민일보 펴냄, 1996)
  • 《통일정책론:이승만 정부로부터 김영삼 정부까지》(양영식 지음, 박영사 펴냄, 1997)
  • 《김영삼정부의 국정평가 및 차기정부의 정책과제》 나라정책연구회 편 지음, 현대정보문화사 펴냄, 1998)
  • 《김영삼행정부의 규제완화실적 평가》 (이주선 외 지음, 한국경제연구원, 1999)
  • 《김영삼대통령의 실천약속》 (편집부 편 지음, 삼삼, 1993)
  • 《경쟁과 공존의 역사(김대중.김영삼)》(한상휘 외 지음, 의암출판문화사, 1992)
  • 《김영삼 왜 그의 등장은 시대적 요청인가》 (송철원, 동광출판사, 1992)
  • 《김영삼대통령과 청와대사람들》(윤창중, 고려원, 1994)
  • 《김영삼대통령연설문집 제1~3권》 (편집부 편 지음, 공보처 펴냄, 1994)

[편집] 참고자료

         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         

전 임
노태우
1993년 2월 25일 ~ 1998년 2월 24일 후 임
김대중
이승만 · 윤보선 · 박정희 · 최규하 ·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 · 김대중 · 노무현 · 이명박
전 임
(통영군 갑)서상호
(통영군 을)이채오
제3대 국회의원(거제군)[71]
1954년 5월 31일 - 1958년 5월 30일
무소속
후 임
진석중
전 임
(부산시 서구 갑)이상룡
(부산시 서구 을)김동욱
제5대 국회의원(부산 서구 갑)
1960년 7월 29일 ~ 1961년 5월 16일
민주당
(부산 서구 을)김동욱
후 임
(부산 서구)김영삼
전 임
(부산 서구 갑)김영삼
(부산 서구 을)김동욱
제6대 국회의원(부산직할시 서구)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민정당
후 임
김영삼
전 임
김영삼
제7대 국회의원(부산 서구)
1967년 12월 17일 ~ 1971년 6월 30일
신민당
후 임
김영삼
전 임
김영삼
제8대 국회의원(부산 서구)
1971년 12월 17일 ~ 1972년 10월 17일
신민당
후 임
(부산 동구·서구)
박찬종,김영삼
전 임
(동구)김승목
(서구)김영삼
제9대 국회의원(부산 동구·서구)
1973년 3월 12일 - 1979년 3월 11일
신민당
박찬종
후 임
박찬종,김영삼
전 임
박찬종,김영삼
제10대 국회의원(부산 동구·서구)
1979년 3월 12일 - 1980년 10월 27일
신민당
박찬종
후 임
(중구·동구·영도구)왕상은,안건일
(서구)곽정출,서석재
전 임
(서구·사하구)
곽정출,서석재
제13대 국회의원(부산 서구)
1988년 5월 30일 - 1992년 5월 29일
통일민주당
후 임
곽정출
전 임
김의택
신민당 대표
1974년 8월 21일 - 1976년 9월 21일
후 임
 이철승 
전 임
이철승
신민당 대표
1979년 6월 7일 - 1980년 10월 27일
후 임
 (해산) 

[편집] 주석

  1. 손세일, 김대중과 김영삼(1985, 일월서각) 99쪽
  2. 金泳三의 ‘변신’행로 시사저널 1990년 02월 18일자
  3. 손세일, 김대중과 김영삼(1985, 일월서각) 100쪽
  4. 대통령과 '창씨개명'
  5. 손세일, 김대중과 김영삼(1985, 일월서각) 101
  6. 《2007년 대선 승자는 누구인가》 (전영기, 은행나무, 2009) 132 페이지
  7. 손세일, 김대중과 김영삼(1985, 일월서각) 103
  8. 손세일, 김대중과 김영삼(1985, 일월서각) 104쪽
  9. 손세일, 김대중과 김영삼(1985, 일월서각) 107쪽
  10. 손세일, 김대중과 김영삼(1985, 일월서각) 108쪽
  11. 도로 3김시대? - munhwa.com
  12. "나는 이젠 객석의 관람객 박수칠 준비만 하고 있죠" :: 네이버 뉴스
  13. 조병옥 박사 45주기 추도식 :: 네이버 뉴스
  14. 손세일, 김대중과 김영삼(1985, 일월서각) 109쪽
  15. 손세일, 김대중과 김영삼(1985, 일월서각) 110쪽
  16. 손세일, 김대중과 김영삼(1985, 일월서각) 112
  17. 손세일, 김대중과 김영삼(1985, 일월서각) 111쪽
  18. 손세일, 김대중과 김영삼(1985, 일월서각) 113쪽
  19. 손세일, 김대중과 김영삼(1985, 일월서각) 114
  20. 계간 시대정신 - 김영삼 전 대통령: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
  21. 손세일 김대중과 김영삼(1985, 일월서각) 97쪽
  22. 손세일 김대중과 김영삼(1985, 일월서각) 98쪽
  23. 손세일, 김대중과 김영삼(1985, 일월서각) 115
  24. 기자 趙 甲 濟 의 세 계 : Cho Gab-Je The Investigative Reporter's World
  25. 손세일 김대중과 김영삼(1985, 일월서각) 117쪽
  26. 손세일, 김대중과 김영삼(1985, 일월서각) 33쪽
  27.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이영훈, 에디터, 2006) 137페이지
  28. 손세일, 김대중과 김영삼(1985, 일월서각) 118쪽
  29. 손세일, 김대중과 김영삼(1985, 일월서각) 119쪽
  30. 손세일, 김대중과 김영삼(1985, 일월서각) 121
  31. 야당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게 배워야 할 것 프레시안 2008-06-30일자
  32. 조갑제 《내무덤에 침을 뱉어라》(조선일보사) 참조
  33.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④) 12·12 직후 만난 DJ, "군인들은 내게 충성할 것" 신동아 2004년 03월호(534호)
  34. 글로벌대백과
  35. 김영삼 - Daum 백과사전
  36. 고문저지 보고대회후 철야농성 성공회대학교 사이버NGO자료관 1985-11-11
  37. 성공회대학교 사이버NGO자료관 1987-05-01뉴스
  38.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결성 성공회대학교 사이버NGO자료관 1987-05-27자 뉴스
  39. 이경현씨 살인폭력사태 국민대책위 결성 성공회대학교 사이버NGO자료관 1989-04-27
  40. 오늘의 소사-5월 19일 :: 네이버 뉴스
  41. <전직 대통령 북핵실험 진단 `3인3색'> 연합뉴스
  42. (위안부) "일엔 정신대 보상요구 안해" /김 대통령 국민일보 1993-03-13
  43. 김영삼 대통령 망언 규탄 및 노동인권 보장 촉구 국민대회 성공회대학교 사이버NGO자료관 1995-06-03
  44. 뉴스한국 - 조선총독부 철거
  45. ¸¶ÀÌ´Ù½ºµ¿¾ÆÀϺ¸[µ¿¾ÆÀϺ¸¸Å°ÅÁø:news+-°æº¹±Ã]
  46. YS, 북한민주화동맹 명예위원장 수락 한겨레신문 2004.12.08일자
  47. DJ "매우 심각한 상황" , YS "사필귀정" 프레시안 2004-03-13일자
  48. YS "북한민주화동맹 명예위원장 맡겠다" 동아일보 2004년 12월 13일자
  49. 북한민주화위원회, 서울서 공식 출범
  50. 박철언 "YS, 3당합당 전후에 40억 받아" 프레시안 2005-08-11일자
  51. 김영삼 前 대통령 “전두환은 대통령도 아니야”
  52. YS, 국립 5·18 민주묘지 첫 참배
  53. 한국디지털뉴스 종합일간신문
  54. 한·미·일 전직 정상 나란히 티볼협 총재 한겨레 2008-03-07
  55. 김영삼 전 대통령, 티볼협회 총재직 수락 조선일보 2008년 03월 05일자
  56. YS "3·15의거, 국가기념일로 제정해야"
  57. 김영삼 前대통령 기록전시관 기공 경남일보 2009년 04월 10일자
  58. YS 기록관 착공, 지상 2층 규모 … 내년 봄 준공 중앙일보 2009.04.10일자
  59. YS-클린턴대통령 따라 출렁거린 한·미 관계 30년
  60. 딱 네 글자에 3조원 쓴 YS... MB는?
  61. 냉탕·온탕 오가는 한일관계 'MB式' 해법은 (schadenfreude)
  62. 손세일, 김대중과 김영삼(1985, 일월서각) 29쪽
  63. 손세일, 김대중과 김영삼(1985, 일월서각) 30쪽
  64. 손세일, 김대중과 김영삼(1985, 일월서각) 32쪽
  65. 엽기국회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유산 - 조갑제 닷컴
  66. 멸치로 아들 뒷바라지…YS ‘삶의 스승’
  67. 실제 향년은 99세라는 설이 있다.
  68. 탤런트 겸 영화배우 이덕화의 동창이라 한다.
  69. 손세일 김대중과 김영삼(1985, 일월서각) 25~26쪽
  70. 손세일 김대중과 김영삼(1985, 일월서각) 33쪽
  71. 1953년 1월 1일 통영군 중 장승포읍, 장목면, 둔덕면, 거제면, 사등면, 일운면, 동부면, 하청면, 연초면을 관할로 하여 거제군이 새로 설치됨으로써 신설된 지역구이다. (거제군설치에관한법률(제정 1952년 12월 14일 법률 제27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