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대한민국,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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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천년민주당→민주당
약칭 DP (영문)
전 대표 박상천
창당 2000년 1월 20일
해산 2007년 6월 27일
선행조직 새정치국민회의
통합된 정당 민주당
이전 당명 새천년민주당 (2005년 5월 6일)
중앙 당사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25-4번지
이념/정치노선 자유주의
웹사이트
minjoo.kr (폐쇄)
대한민국의 시계열적 정당 지도

민주당(民主黨, Democratic Party)은 대한민국에 있었던 정당(政黨)이었다. 당대표는 박상천이었고, 당사(黨舍) 소재지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25-4번지였다. 2000년 1월 20일 기존의 여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를 확대 개편해 새천년민주당으로 창당하였으며, 2005년 5월 6일 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2007년 6월 27일 중도개혁통합신당과 통합을 선언하면서 중도통합민주당으로 재출범하였다.

역사[편집]

창당 이전[편집]

창당 이후[편집]

2002년 대통령 선거[편집]

국민경선[편집]

일명 16부작 정치 드라마로 불렸던 국민 경선제2002년 3월 9일부터 제주를 필두로 전국 16개 시도를 돌면서 당원(50%)들과 국민(50%)들이 직접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민 경선제에는 노무현을 비롯해 김근태, 김중권, 유종근,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 등이 후보로 출마하였다.

국민 경선이 도입되기 이전에 민주당 부동의 1위는 이인제였고, 노무현은 군소 후보로 지지율은 10% 미만이었다. 경선 국면이 시작되면서 노무현은 “영남 후보론” 및 이인제 후보를 겨냥한 “정체성 시비”로 20%대 지지율에 진입하기 시작했다.[1]

  • 경선결과
김중권 노무현 정동영 김근태 이인제 한화갑 유종근 합 계
제주 55 125 110 16 172 175 18
울산 281 298 65 10 222 116 20
광주 148 595 54 사퇴 491 280 사퇴
대전 81 219 54 894 77
충남 196 277 39 1,432 사퇴
강원 159 630 71 623
경남 사퇴 1,713 191 468
전북 756 738 710
대구 1,137 181 506
인천 1,022 131 816
경북 1,246 183 668
충북 387 83 734
전남 1,297 340 454
부산 1,328 796 사퇴
경기 1,191 1,426
서울 3,924 2,305

첫 번째 지역이었던 제주에서 한화갑 후보가 의외의 1위를 차지했고, 노무현은 득표 3위를 기록했다. 두 번째 울산에서는 인상적인 연설을 한 노무현이 예상대로 1위를 차지했다.

한편 여론조사에서는 대선 판도에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3월 13일 문화일보SBS가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노무현과 이회창이 양자 대결을 벌일 경우 노무현이 41.7%로 40.6% 지지율을 기록한 이회창을 앞서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대선 주자 지지도 여론 조사에서 이회창이 민주당 후보에 뒤처지는 결과가 나온 것은 대선 구도가 형성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2]

관건은 3월 16일에 실시한 광주 경선이었다. 무엇보다도 광주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자 새천년민주당의 근거지로서 이곳의 결과가 사실상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를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최대의 승부처였다. 결과는 노무현의 승리였다. 이회창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카드라는 여론 조사 결과가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3]

이후 노무현은 단숨에 지지율이 급상승하며 ‘노풍’의 주인공이 되었다. 광주 경선 직후 이인제의 지역 기반인 대전· 충청권에서 일격을 당해 노풍이 꺾이는 듯싶었지만 대구광역시 경선 결과, 종합 1위가 확정되었다. 이후 노무현은 강원도와 전남, 전북, 경남, 대구를 비롯한 거의 전 지역을 석권해 나갔고, 2002년 4월 26일, 서울 경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경선이 끝난 4월 말 노무현의 지지율은 당시 역대 대통령 후보 가운데 사상 최고치라는 60%를 기록했다.[1]

지방선거와 민주당 후보 재신임[편집]

5월 들어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인 김홍업김홍걸의 비리가 불거지며 민주당의 지지율이 하락함과 더불어, 노무현의 지지율도 본격적인 내림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에 노무현은 6.13 지방선거에서 영남권 광역 단체장을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할 경우 재신임을 받겠다고 말했다.[4]

그러나 새천년민주당지방 선거에서 호남과 제주의 광역단체장만 당선시키며 참패했다. 노무현은 선거 전 약속한 대로 후보 재신임을 물었고, 민주당 당무 회의는 만장일치로 재신임을 의결했다.[5] 이에 대해 민주당 내 최대 계파 모임인 중도 개혁 포럼은 불복하고 ‘후보, 지도부 즉각 사퇴론’을 주장했다.[6]

정몽준 출마와 민주당 내분 사태[편집]

2002년 한일 월드컵 바람을 타고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정몽준이 거센 돌풍을 일으키자 노무현은 지지율도 토막이 나고 당내 의원들로부터도 배척받기 시작했다. ‘노무현 흔들기’는 더욱 노골화되었고, ‘후보 단일화론’은 물론이거니와 ‘후보 교체론’까지 나왔다.

10월 들어서는 아예 노무현의 낙마를 바라는 의원들이 탈당하여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후단협)를 만들고 후보 단일화를 주장했는데, 이들은 노무현으로 후보 단일화가 되면 함께 할 수 없다고 발언하였고 정몽준 지지의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7] 11월 19일 후단협은 정몽준에 대한 공개 지지를 밝혔으며,[8] 심지어 후단협 소속 의원이 정몽준 대표 측에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9] 후단협 해체 후 일부 의원은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12명은 민주당에 복당했다.[10]

이런 상황에서 정몽준의 국민통합21에 입당하기 위한 김민석의 탈당은 노무현에게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그의 탈당은 노무현에게 악재가 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있었으나, 답보 상태였던 그의 지지율은 20%대를 회복하고 후원금 액수도 크게 늘었다.[1]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편집]

단일화 방안으로는 크게 3가지가 있었는데, 국민 경선과 여론 조사, 협상 담판이었다. 이 중 협상 담판은 정몽준의 후보의 주장으로 11월 1일에 정식 제안했고, 국민 경선안은 국민 참여 50%, 당원 참여 50%의 민주당 안을 노무현 후보가 11월 3일 정식 제안했다. 여론 조사안은 단일화 여론 조사를 실시했을 때 우위를 점하는 정몽준 후보가 유리한 안으로 정몽준 후보가 선호하는 안이었다.[11][12]

노무현 후보는 11월 11일 자신에게 불리한 여론 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제의하였고, 단일화 재협상에서도 마지막 쟁점인 ‘무효화 조항’을 전격 수용하면서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민주당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설문 내용 변경도 단일화를 위해 수용했다. 이로 인해 노무현 후보의 지지도는 더욱 반등하기 시작했다.[13][14]

텔레비전 토론을 거쳐 2002년 11월 24일 노무현 후보는 극적으로 단일화 여론 조사에서 승리했다. 24일 실시된 2군데 여론 조사 중 리서치 앤드 리서치 경쟁력 조사에서 46.8%를 얻어 42.2%를 얻은 정 후보를 제쳤고, 월드 리서치 조사에서는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조사 유효화 조건인 31.1%에 미치지 못한 28.7%가 되어 무효가 되긴 했지만, 38.8%를 얻어 37%를 얻은 정몽준 후보를 앞섰다. .[15]

이후 선거 전날 정몽준 후보의 지지철회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은 당선되어 새천년민주당은 정권재창출에 성공한다.

논란과 비판[편집]

인위적인 정계 개편[편집]

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국민회의는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당선됨에 따라 정식으로 여당이 되었다. 이 때 단일화 과정에서 한 협상을 통해 자유민주연합과 함께 공동으로 여당이 된다.

하지만 곧 이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승리했고, 공동여당의 의석 수는 한나라당에 못 미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자유민주연합은 17석밖에 못 얻어 교섭단체가 될 수 없었다. 이 때 김대중 대통령의 공동여당 구제방침에 의거해 그 해 12월, 새천년민주당 소속이었던 유성의 국회의원 송석찬이 ‘의원 꿔주기’를 주도했다. 이때 장재식, 송영진, 배기선이 송석찬과 함께 자민련으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의원 꿔주기에 대해 당시 여론은 민의 배반과 정당정치 근간 훼손 등의 이유로 숱한 비난을 쏟아내었으며, 자유민주연합 내에서 송석찬 외 3명의 영입을 반대하던 국회의원 강창희가 제명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때 “연어의 심정으로 민주당을 떠납니다”라는 송석찬 의원의 탈당의 변이 화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두 정당간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었고, 당시 자민련의 권력남용 중 통일부 장관 해임 사건이 일어나자 민주당의 제안으로 공조가 파기되고 만다.

노무현 탄핵[편집]

2002년 민주당은 노무현의 당선으로 정권 연장에 성공했으나, 바로 이듬해 노무현이 탈당하면서 민주당은 야당이 되었다. 이후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과 함께 탄핵을 주도하였다가 국민들의 반감을 샀고, 17대 총선에서 군소 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역대 당수[편집]

1. 총재

  • 김대중 (金大中): 2000년 1월~2001년 11월 8일

2. 대표최고위원

역대 선거 기록[편집]

역대 대통령 선거 결과[편집]

실시년도 대수 후보자 득 표 득표율 결과 당락
2002년 제16대 노무현 12,014,277표
48.9%
1위 Presidential Standard of the Republic of Korea.svg

역대 총선 결과[편집]

실시년도 선거 지역구 당선자 현황 비례대표 당선자 현황 국회 정원
당선자 수 당선비율 당선자 수 득표율 당선자 수 당선비율
2000년 제16대 96/227
42.29%
19/46
35.9%
115/273
42.12%
2004년 제17대 5/243
2.06%
4/56
7.1%
9/299
3.01%

역대 지방선거 결과[편집]

실시년도 선거 광역자치단체장 당선자 현황 기초자치단체장 당선자 현황 광역자치의회의원 당선자 현황 기초자치의회의원 당선자 현황
당선자 수 당선비율 당선자 수 당선비율 당선자 수 당선비율 당선자 수 당선비율
2002년 3회 4/16
25%
44/232
18.97%
143/682
20.97%
2006년 4회 2/16
12.5%
20/230
8.7%
80/733
10.91%
276/2888
9.56%

참조[편집]

주석[편집]

  1. 김현재. "盧당선자 대선장정 1년7개월", 《연합뉴스》, 2002년 12월 19일 작성. 2010년 4월 22일 확인.
  2. 김현재. "선호도 노무현 41.7 이회창 40.6%", 《연합뉴스》, 2002년 3월 13일 작성. 2010년 4월 22일 확인.
  3. 신종수. "[민주 ‘光州 경선’ 의미] 노무현 대안론 ‘대세’잡나", 《국민일보》, 2002년 3월 16일 작성. 2010년 4월 22일 확인.
  4. 김현재. "노무현 "후보 재신임 받을것"", 《연합뉴스》, 2002년 6월 12일 작성. 2010년 4월 22일 확인.
  5. 이한기, 구영식, 이병한, 박수원. ""노무현 대선 후보 사퇴 반대" 73%", 《오마이뉴스》, 2002년 6월 27일 작성. 2010년 4월 22일 확인.
  6. 김선걸. "盧후보 사퇴론 또 불거지나", 《매일경제》, 2002년 6월 20일 작성. 2010년 4월 22일 확인.
  7. 박창식, 신승근. "후단협 속내는 '노후보 낙마'", 《한겨레》, 2002년 11월 12일 작성. 2010년 4월 22일 확인.
  8. 박창식, 신승근. "후단협의 목적은 '후보단일화'가 아니었다.", 《오마이뉴스》, 2002년 12월 19일 작성. 2010년 4월 22일 확인.
  9. 남기현. "후단협 순수성 도마 위에", 《매일경제》, 2002년 11월 20일 작성. 2010년 4월 22일 확인.
  10. 김현재. "후단협 12명 민주 복당", 《파이낸셜 뉴스》, 2002년 11월 26일 작성. 2010년 4월 22일 확인.
  11. "후보단일화에서 파기까지", 《연합뉴스》, 2002년 12월 19일 작성. 2010년 4월 22일 확인.
  12. 김현재. "후보단일화 방법론과 전망", 《연합뉴스》, 2002년 11월 5일 작성. 2010년 4월 22일 확인.
  13. 김현재. "盧 단일화 `승부수" 안팎", 《연합뉴스》, 2002년 11월 22일 작성. 2010년 4월 22일 확인.
  14. 김의겸, 이용호 (2002년 12월 5일). 승부사 노무현 마침내 해냈다. 《한겨레21》 436. 2010년 4월 22일에 확인.
  15. 김현재. "피말린 접전 盧승리 결말", 《연합뉴스》, 2002년 11월 25일 작성. 2010년 4월 22일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