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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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
약칭 KLP (영문)
초대 당대표 이승만
이범석
창당 1951년 12월 17일
해산 1970년
중앙 당사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념/정치노선 반공주의
보수주의
정치적 스펙트럼 우익 또는 극우익
상징색 하늘색

자유당(自由黨)은 1951년 12월대한민국에서 창당된 보수정당이며 대통령 이승만을 당수로 하였으며, 장택상 · 이범석 · 장면 · 배은희· 이기붕 · 함태영, 이갑성, 백성욱이 주요 간부였다. 독립촉성중앙회, 한민당 탈당파, 대한국민당 탈당파 및 기타 군소 집단을 중심으로 창당 조직했다. 1951년 이후 제1공화국 기간 중 여당으로 존속하였고, 1960년 이후 해체 위기를 겪었으며 일부는 탈당 민주공화당신민당 등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제3공화국에서 야당으로 존속하였다.

창당 과정[편집]

친이승만계 정치세력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한국독립당계 탈당파(이시영, 이범석 등) 등이 주축이 되어 창당, 조직되었다.

1952년 정·부통령 선거[편집]

  • 1952년 7월 19일 대전에서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범석을 공천하였다. 이승만은 이 전당대회에 메시지를 보내 후보 지명을 하지 말 것과 자유당에서 당수·부당수 이름을 제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7] 그러나 이는 발췌개헌안 자체가 이승만의 연임과 직선을 위한 것이 분명하였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또 하나의 흉계와 민의 동원 계획이었음을 시사하는 언명이었다. 직선제 개헌 파동을 전후해 차기에 출마할 의사가 없음을 수 차례 밝혔던 이승만으로서는 자신의 결정을 번의할 것을 요구하는 민의를 전국적으로 일으켜야만 했다. 자유당은 이승만의 재출마를 요구하는 탄원서에 350만명이 서명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과정을 거쳐 이승만1952년 7월 24일 '본의'는 아니지만 민의 압력에 굴복하여 양보했다는 걸 밝히면서 자신의 입후보 등록을 허락하였다.[8]
  • 그 계획의 또다른 목적은 이범석의 제거였다. 이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진 이상 이범석의 역할은 끝난 것이었다. 이범석은 당선을 확신하고 부통령에 출마하였지만, 이승만은 엉뚱하게도 선거 일주일을 앞두고 아직 입후보 선언도 하지 않았던 목사 함태영을 부통령 후보로 지지한다고 발표하였다. 목사 함태영은 당시 81세로 77세인 이승만보다 네 살 연상이었다. 이는 이승만이 자기보다 나이 많은 연장자를 부통령 후보로 선택함으로써 자기의 후계자 선택을 명백하게 회피했다는 걸 의미한다.[9] 함태영은 자유당 공천이 아닌 무소속 공천으로 부통령 후보자에 입후보하였다.
  •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당원으로 이갑성, 백성욱, 정기원(鄭基元)이 동시에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결국 자유당의 표는 부통령 후보에서 나뉘어 이갑성은 50만 1천표, 백성욱은 18,1천표, 정기원은 16만 5천표를 얻었다. 자유당의 표는 부통령 후보에서 갈렸고, 노동운동가 전진한이 대한노총 대표 자격으로 부통령 후보에 출마하여 30만 2천표를 받았고, 친(親) 이승만 성향의 대한국민당임영신까지 부통령 후보로 나서서 19만표를 가져감으로서 이범석은 181만 6천표로 2위로 낙선하고 말았다. 부통령은 무소속의 함태영이 294만 4천여 표로 당선되었다.
  • 원내자유당의 핵심 지도자였던 장면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일부 원내자유당 의원들이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 했고, 일부는 내각책임제로 전환시킨 뒤의 국무총리로 선출하려 시도하였다. 일치되지 않은 원내자유당 일부 인사들의 반기는 실패했고 이승만의 눈밖에 난 장면은 자유당을 탈당해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했다.

여당[편집]

자유당은 1952년 발췌 개헌을 통해 이승만에게 독재의 길을 터주게 되어 야당과 여론의 크나큰 비난을 받게 되었다. 자유당 창당 초기에 장택상 일파가 당에서 제거된 뒤 이범석의 족청계가 당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범석민족청년단계열의 영향력을 우려한 이승만은 자유당 공천으로 제3대 부통령 후보로 출마한 이범석 대신 장택상을 시켜 무소속의 함태영을 밀었다. 이후 이승만족청을 기반으로 당내 세력을 넓혀가는 이범석을 견제하기 위해, 이범석을 부당수에서 평당원으로 격하시키고, 이기붕을 당내 2인자로 끌어올렸다.

장택상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가하였으나 호헌동지회에 속한 민국당 계열 의원들의 조봉암 입당 반대에 실망하여 다시 자유당으로 되돌아왔다. 이범석은 탈당하여 1956년 1월 공화당을 조직했으나 제4대 부통령 후보 출마를 고집하는 바람에 당이 와해되면서 다시 자유당으로 복귀했다.

이승만의 비서 출신으로 야심을 보이지 않던 이기붕이 자유당의 당권을 장악하였고, 이승만에 의해 인위적으로 거세, 세력이 위축되었던 이범석 일파 및 족청계열과 대립하였다.

야당화[편집]

3·15 부정선거4·19 의거 뒤에도 일부 학생과 시민사회단체에서 자유당 후보자들의 공천과 출마를 반대하고, 방해하는 여론까지 존재했으나 자유당은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자유당을 강력한 반공주의 야당으로 키우려던 미국은 자유당을 포기하고 민주당장면을 지지하게 되었다.

이승만 퇴진 후에도 자유당은 제2공화국, 제3공화국 상당기간 동안 야당으로 존재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국회해산 뒤에도 잔존하다가 일부는 1963년 민주공화당에 흡수되었고, 일부는 1963년 9월 장택상을 당 총재로 선출하고[10] 야당으로 존재하다가 1967년 장택상의 탈당 이후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 1970년 신민당에 흡수되어 해체되었다.

역대 선거 결과[편집]

역대 대선[편집]

대수 후보자 득표율 득표수 결과 비고
2대 이승만 74.6% 5,238,769표 1위 당선
3대 이승만 70.0% 5,046,437표 1위 당선
4대 이승만 100.0% 9,633,376표 1위 “무효”

역대 부통령 선거[편집]

대수 후보자 득표율 득표수 결과 비고
3대 이범석 25.5% 1,815,692표 2위 낙선
이갑성 7% 500,972표 4위 낙선
임영신 2.7% 190,211표 7위 낙선
정기원 2.3% 164,907표 9위 낙선
3대 이기붕 44% 3,805,502표 2위 낙선
4대 이기붕 79.2% 8,337,059표 1위 “무효”

역대 총선[편집]

실시년도 선거 국회정원 당선자 현황
(지역구)
득표율
1954년 3대 총선 203 114 36.8%
1958년 4대 총선 233 126 42.1%
1960년 5대 총선 민의원 233 2 2.8%
참의원 58 4 5.9%
1963년 5대 총선 175 0 2.9%
1967년 6대 총선 175 0 3.6%

역대 지방선거[편집]

실시년도 시장 읍장 면장 도의원 시의원 읍의원 면의원
1952년 147/306 114/378 274/1115 4056/16051
1956년 2/6 8/30 282/544 249/437 157/416 510/990 10823/16051

같이보기[편집]

주석[편집]

  1. 서중석,〈한국전쟁과 이승만정권의 권력강화〉《역사비평》제9호(1990년 여름)141쪽
  2. 연시중,《한국정당정치실록2:6·25전쟁부터 장면 정권까지》(지와사랑,2001) 37쪽.
  3. 강준만,《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58쪽.
  4. 강준만,《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59쪽.
  5. 윤용희,〈자유당의 기구와 역할〉,한배호 편《한국현대정치론1: 제1공화국의 국가형성, 정치과정, 정책》(나남,1990),279~281쪽
  6. 강준만,《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60쪽.
  7. 강준만,《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315쪽.
  8. 그러나 이는 발췌~등록을 허락하였다.: 윤용희,〈자유당의 기구와 역할〉,한배호 편《한국현대정치론1: 제1공화국의 국가형성, 정치과정, 정책》(나남,1990),296쪽
  9. 김정원,《분단한국사》(동녘,1985),171쪽.
  10. 칠곡군 문화관광 - 문화유산 - 칠곡문화역사 -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