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족청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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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약칭 족청)은 이범석을 중심으로 1946년 10월 9일 ‘국가지상, 민족지상’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창설한 반공주의적 우익 민족 청년 운동 단체이다.

목차

개요 [편집]

이범석은 청년들을 광복된 새 나라의 역군으로 조직화하고 훈련하는 것이 제일 시급한 일이라 판단하고,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족청’을 창설했다.

미군정도 청년단체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1946년 중반 비밀리에 약 500만 달러와 미군 장비를 지원하고 훈련 고문으로 미군 대령 한사람 등을 특파하여 족청 결성을 지원하였다.[1]

문제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자금은 군정청이 아닌 일본 도쿄맥아더 사령부로부터 나왔다. 맥아더 사령부는 차량 지원에서부터 제복까지 모두 지원해 주었다.[2] [3][4][5] 안호상은 족청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6]

족청은 김활란, 백낙준, 최규동, 현상윤 등으로 이사회를 구성하였고 경기도 수원에 있는 구 일본군육군병원 건물에 족청 중앙본부를 설치하고 이곳에 훈련소를 마련하였다. 소련의 항의를 피하기 위해 비밀리에 수원 훈련소에서 약 7만명이 훈련을 받았다. 교육 목적은 장래에 군대였으며 이중 상당수가 국군에 편입되어갔다.[2] [5]

족청은 1946년 10월 9일 창설 당시 300명에 불과했으나, 1년 뒤인 1947년 11월에는 30만 명으로, 2년 후에는 8월 115만명, 그해 가을 120만 명으로 늘어났다. 1947년 4월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이던 지청천이 귀국해 대동청년단을 결성하면서 족청에 대해서도 합류를 요청했지만, 이범석은 합류를 거부하고 대동청년단과 경쟁관계에 들어갔다.

국수적이고 심하게 전체주의적 발상이라는 비판도 있었다.[6]

1948년 5월 10일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에선 6명이 족청을 표방하여 당선되었으며, 나중엔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 그러나, 1949년 모든 청년단체를 통합, 단일화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결국 대한청년단에 흡수, 해체되었다.

대한청년단과의 흡수 과정에서 이승만의 명령에 단계적인 합류안을 내놓는 등 저항을 하자, 이승만은 48년 1월 5일 담화문을 내 족청의 해산을 공식 촉구하였다. 49년 2월 족청은 해산되었고 이범석은 국방장관에서 해임되었다.[7]

역대 총선 결과 [편집]

실시년도 선거 국회정원 당선자 현황
(지역구 당선/후보)
득표 득표율
1948년 1대 총선 200 6 / 16 144,791 2.13%

함께 보기 [편집]


참고 자료 [편집]

주석 [편집]

  1.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66쪽
  2.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66~267쪽
  3. 최장집 외, 《해방전후사 인식 4》(한길사, 1989) 74, 94쪽
  4. 안호상, <안호상 박사 회고록: 족청 해산>(문화일보) 1995년 3월 23일자 19면
  5. 그레고리 핸더슨, 박행웅·이종삼 옮김 《소용돌이의 한국정치》(한울아카데미, 2000) 224~225쪽
  6.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68쪽
  7.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