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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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국당
약칭 NKP
전 대표 김영삼 (총재)
이회창 (총재), 김영삼 (명예총재)
창당 1995년 12월 6일
해산 1997년 11월 21일
선행조직 민주자유당
통합된 정당 한나라당
(민주당과 신설합당)
중앙 당사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17-7
(현, 대림산업 건물)
이념/정치노선 보수주의
신자유주의
반공주의
사회정의
민족주의

신한국당(新韓國黨, New Korea Party)은 1995년 12월 6일부터 1997년 11월 21일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정당이다. 현재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의 전신 중 하나이며, 민주자유당의 후신이다.

역사[편집]

배경[편집]

1980년대 후반 노태우 정부의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은 여소야대라는 상황 속에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를 타개하고자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을 끌어들여 거대 여당을 만들었으나, 오히려 계파 간의 갈등을 격화시켰다. 1992년 대선 당시 민주계가 당내 주도권을 쥐게 되었고, 공화계가 민정계에 반대하는 상황 속에서 민주계를 지지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은 또다시 분열을 일으키고 만다. 공화계와 민주계 간의 갈등이 심해지자, 마침내 김종필을 축으로 하는 공화계가 탈당하였다. 이로 인해 1995년 6월 27일에 실시된 제1회 지방선거에서 참패하였다. 그리고 당시 비자금 문제 등으로 논란에 휩싸이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수사를 받게 되었고, 이후 광주학살 등의 혐의가 겹치면서 수감된다.

이 과정에서 민자당을 창당하고 민자당의 축이 되었던 민정계는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나 총선거를 1년 앞둔 상태에서, 이 상태로 갔다가는 총선에서 큰 패배를 당할 것이라는 것을 예측했다. 당시 대통령 김영삼은 당을 개편하고자 한다.

창당[편집]

1995년 12월 6일, 김영삼(金泳三)은 1996년 4월에 치러지는 총선을 앞두고 제5공화국의 흔적이 강한 민주자유당이라는 당명을 버리고 신한국당을 창당하였다. 신한국당은 민주자유당에서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계·신민주공화당(新民主共和黨)계 등의 세력을 몰아내었고, 이회창·박찬종·이재오·김문수·이우재·홍준표·맹형규·정의화 등을 영입하였다. 김영삼 정부 하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이회창은 국무총리 시절에 김영삼에 항명한 전적이 있는 인물이었고, 이재오·김문수·이우재 등은 민중당 (民衆黨)지도부 출신이었다. 이회창, 박찬종, 이재오, 이우재, 홍준표, 맹형규, 정의화 등은 각계의 스타급 인사들이었다. 신한국당은 이들 외에도 신인 인사들을 대거 내세워 42%의 현역 교체율을 기록하면서 대대적인 물갈이를 단행했다. 이후 김영삼의 당 장악력은 강화됐다.[1][2]

총선 패배와 정치 공작[편집]

이념과 정파를 뛰어넘는 새로운 피 수혈을 통해 당(黨)의 면모를 일신하면서 신한국당은 1996년 4월에 치러진 15대 총선(第15代總選)에서 제1당이 되었고 대한민국 정당 역사상 처음으로 서울에서 여당이 야당을 제치고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였다. 이 15대 총선거에서 신한국당은 제1당이 되었지만 과반수에 못 미치는 139석을 차지했다. 이로써 김영삼의 국정 운영에 발목이 잡혔다.

그러자 김영삼은 자민련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등을 영입하면서 국회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고 김영삼은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3][4] 하지만 이 때부터 신한국당의 지지율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김영삼의 이러한 행위는 선거결과를 뒤엎는 정치공작에 지나지 않았으며 고로 국민들이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결국 국민들의 비판적 여론이 거세지기 시작했고, 당시 대선을 1년 앞둔 상황에서 차기 대통령 후보를 놓고 문제를 빚기 시작했다.

김영삼 정부의 위기와 해체[편집]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에 들어 김영삼의 친·인척 비리, 기업들의 도산, 외환 위기 등을 겪으면서 김영삼의 지지율이 하락하였다.[5]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 등으로 위기에 몰려있던 신한국당 대선 후보 이회창은 김영삼의 이인제 지원설 및 김대중의 비자금 의혹에 대한 검찰의 수사 유보 결정 등에 반발하며 김영삼에게 탈당을 요구했다. 이인제는 15대 대선를 앞두고 치러진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이회창에게 패한 뒤에도 30%의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자 신한국당을 탈당해 1997년 10월 10일국민신당을 창당한 인물이었고, 김대중(金大中)은 새정치국민회의 대선 후보였다.[6]

15대 대선을 불과 한 달여 앞둔 1997년 11월 7일, 신한국당 총재 이회창과 민주당 총재 조순(趙淳)은 '3김 시대 청산', 'DJP연합'의 부당성 등을 주장하며 당 대 당 통합과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였다.[7] 같은 날 김영삼은 신한국당을 탈당했다. 1997년 11월 21일, 신한국당과 민주당은 통합하면서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정했고, 이에 한나라당이 창당하였고 신한국당은 해산하였다.[8][9][10] 1997년 12월 3일, 김영삼 정부는 신자유주의(新自由主義)를 도입하는 조건으로 IMFIMF 구제 금융 양해각서를 체결하였고 이는 민심 이반을 가속화시켰다.[11] 이회창은 여러 악재 속에서 김영삼의 탈당·조순과의 단일화·한나라당 창당 등을 관철시켰지만 1997년 12월 18일에 치러진 대선에서 15대 대통령이 되는 데 실패하였고, 한나라당은 야당이 되었다.[12]

대통령 선거[편집]

1997년 대통령 선거[편집]

1997년 7월 21일 신한국당은 전당대회를 열고 이회창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13]

1차 투표 결과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이회창 4,995 40.9% 결선투표 진출
2 이인제 1,774 14.7% 결선투표 진출
3 이한동 1,766 14.6%
4 김덕룡 1,673 13.8%
5 이수성 1,645 13.6%
6 최병렬 236 1.9%
총투표수 12,104

결선 투표 결과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이회창 6,922 60.0% 당선
2 이인제 4,622 40.0%
총투표수 11,544

1차 투표 당시 후보들간의 분열이 심했고, 대개 10~20%로 낙선하였다. 반면에 이회창은 1차 투표에서 1위를 기록하였고, 2차 투표에서도 1위를 기록하여 최종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악화된 국내 경제상황과 흉흉한 민심, 기아자동차 부도사태 등으로 신한국당의 지지도는 최악으로 치닫고 여당인 이회창의 지지율도 경쟁자인 김대중에게 크게 뒤지게 된다.[14][15] 게다가 이인제가 경선 패배를 승복하지 못하고 독자출마를 강행하면서[16] 신한국당은 어려운 국면을 타개할 선거 전략의 일환으로 김대중후보의 670억 비자금 사건을 폭로한다.[17] 신한국당 강삼재 사무총장은 "김대중 후보가 신앙고백을 하면서까지 노태우씨로부터 20억원 이외에는 받은 돈은 없다며 국민을 기만했으나 이 모든것이 거짓임이 드러났다"며 김대중 후보를 공격했다.[18] 야당인 국민회의 내부에서도 "김대중 후보가 신앙 간증까지 하면서 20억원 이상은 받은 사실이 없다고 했고, 20억원 이상 받은 사실이 없다고 단언했기 때문에 광주 현지여론도 무마시킬 수 있었다. 사실로 드러나면 큰일이다"라며 충격에 휩싸였고[19] 다음날인 신한국당은 이것이 20+α 물증이고, 김대중 총재가 20억 +α외 6억3천만 원은 받은 적 없다며 우겨대자 [20] 신한국당은 20억+A의 입출금 계좌와 수표의 일련번호를 공개했다.[21] 다음 날에는 김대중후보가 야당총재직을 이용해 134억 7천만원을 챙긴 사실까지 폭로하여 정국은 큰 혼란에 빠진다.[22] 김대중 비자금 공방은 10월 14일 김대중 친인척 명의의 378억 비자금 폭로로 극한 대치로 치달았다.[23] [24] 10월 17일에는 신한국당이 김대중을 조세포탈 및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함으로써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25] 당시 김대중 비자금 폭로의 최선봉장이었던 강삼재 의원은, "김대중이 대통령 당선되더라도 대통령 자격 없고 당선 되더라도 걸어내려와야 될 것" 이라며 공격했고 김대중 지지자들은 강삼재씨 집에 24시간 넘게 살해협박까지 하며 신한국당사를 폭파시키겠다는 협박전화까지 걸려왔다. [26] [27] 10월 17일에 열린 한국일보 초청 토론회에서는 김대중후보와 이회창후보의 비자금 공방이 오고갔다. 이회창은 "야당총재(김대중)한테 뭐하러 기업들이 뼈빠지게 돈을 갖다주겠습니까?, 아무 조건 없고 받을 특혜가 없다면 뭐하러 돈을 갖다주겠습니까"라고 비난했는데 김대중은 "조건있는 돈은 받은 일이 없고 받은 돈은 모두 공적으로 썼고 은닉한 재산 없다"며 비자금 의혹을 전면 부인한다.[28] 이인제 후보는 "김대중씨가 당선되더라도 도덕적인 힘이 나올수 있겠습니까"라며 김대중 후보를 비난했다. 결국 10월 20일, 김대중후보의 비자금 수사가 시작되었으나 [29] 다음날이던 10월 21일, 검찰은 김대중의 비자금 수사를 대선 이후로 유보한다고 발표한다.[30]

당시 김대중의 비자금 수사를 유보한 배경에는 악화된 경제상황 및 흉흉한 민심과 기업체들의 부도사태등등 검찰 내부에서 비자금 수사를 개시한다면 호남을 중심으로 한 국민적인 저항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고 제2의 광주사태를 우려하여 수사를 중지시켰던 것으로 밝혀졌다.[31] 또 당시 검찰총장인 김태정 검찰총장의 고향이 호남출신인 것도 수사를 중지시킨 변수가 됐다.[32] 검찰이 김대중 비자금 수사를 중지하자 이회창은 검찰의 재수사를 요구했고, 김영삼 대통령의 잘못이 크다며 김영삼의 탈당을 요구했다.[33] 결국 김영삼 대통령은 11월 7일, 정치권 허위사실 유포에 엄히 대처한다며 담화문을 발표하고 신한국당을 탈당한다.[34] 소수 야당이던 민주당과의 합당 및 후보 단일화를 추진한 끝에 마침내 11월 13일 총재 조순, 대통령 후보 이회창이라는 합의를 도출해내 11월 21일 양당 합당합동회의를 통해 새로 출범한 한나라당의 명예총재 및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추대되었다.[35] 그러나 이회창은 낙선하였고, 이후 한나라당은 야당이 되었다.

사건[편집]

선거결과에 대한 정치공작[편집]

신한국당은 대대적인 당 개편에도 불구하고 여소야대라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에 정치공작을 펼쳐 야권 의원들을 대규모로 영입했는데, 이 때문에 국민들의 여론이 크게 악화되었다.

노동법 날치기 사건[편집]

1996년 12월 26일에 일어난 노동법 날치기 사건은 신한국당의 반민주성을 보여준다. 당시 신한국당 국회의원들[36] 154명이 잠입했는데 국회의장이 없었다. 그러자 국회부의장 오세응이 개회를 선언하고, 법안 11개를 짧은 시간 안에 날치기로 통과시킨다.[37] 그러자 대표 야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의 의원 전원이 항의농성에 들어갔고, 검은 넥타이를 맨 뒤 여당 의원들의 명패에 검은 천을 씌웠다.[38] 무엇보다도 이 사건은 정리해고를 법제화한 것이었으며, 사건 이후 노동계는 전면 총파업에 돌입했다.[36] 결국 국민들의 여론이 크게 악화되었고, 이는 1년 뒤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역대 총선 결과[편집]

실시년도 선거 국회정원 당선자 현황
(지역구/전국구)
득표율
1996년 15대 총선 299 (253/46) 139 (121/18) 34.5%

함께 보기[편집]

주석[편집]

  1. 신영호. 보수의 재구성 시작되나:정태근發 與의원 줄탈당 가능성..신당 추진 탄력받을 듯. 투데이코리아. 2011년 12월 13일.
  2. 고성국. 신동아 창간 80주년 특집 ‘국민이 원하는 국회의원’ 여론조사의 함의. 신동아. 2011년 9월 26일.
  3. 리멤버 1996년 공천혁명. 동아일보. 2011년 6월 17일.
  4. 김형준. 벼랑 끝에 선 한나라당. 여성신문. 2011년 12월 9일.
  5. 성홍식. 대통령 친인척 비리 수사로 본 레임덕. 내일신문. 2011년 12월 16일.
  6. 고광본. 탁월한 리더십 불구 대권ㆍ개헌의 꿈 못 이뤄… 절반의 성공. 서울경제. 2011년 12월 13일.
  7. 신한국-민주당 합당 선언, 후보 이회창 총재 조순. 한겨레신문. 1997년 11월 8일.
  8. 창당 14주년 맞은 한나라당 충북도당. 충북인뉴스. 2011년 11월 22일.
  9. 김영명. 무엇을 위한 신당인가. 국민일보. 2002년 8월 12일.
  10. 문주용. 역대 권력투쟁의 교훈.이데일리. 2006년 8월 6일.
  11. 최성진. IMF 구제금융 대신 모라토리엄 선언했다면. 한겨레21. 2010년 11월 5일(834호).
  12. 박준형. 대한민국 정치권 역대 신당 창당 사례는?. 뉴시스. 2011년 11월 27일.
  13. 與 대선후보 李會昌씨, 동아일보, 1997년 7월 22일.
  14. 김대중 지지율 계속 상승 1997.10.3 한겨레
  15. 2위 혼전…당선가능성 이회창씨가 이인제씨 앞서 1997.10.6 경향신문
  16. 이인제 경기지사 9월초 경기지사직 사퇴 결정 1997.8.20 mbc
  17. 신한국당, DJ 비자금 670억 조성했다 주장 1997.10.7 mbc
  18. 김대중 비자금 670억 1997.10.8 경향신문
  19. [1] 1997.10.8 동아일보
  20. 김대중 총재, 관훈 토론회에서 670억 비자금은 사실무근 1997.10.8 mbc
  21. 신한국당, 김대중 비자금 입출금 계좌와 수표 일련번호 공개 1997.10.9 mbc
  22. 신한국당,국민회의 김대중 총재 기업 돈 134억 받았다 주장 1997.10.10 mbc
  23. 비자금 극한 대치 1997.10.9 경향신문
  24. 신한국당, DJ 친인척 378억 비자금 1997.10.14 mbc
  25. 신한국 김대중총재 고발 1997.10.17 경향신문
  26. 비자금 전쟁 여야 표정 1997.10.12 경향신문
  27. 경찰, 여야 지구당 경비 강화 1997.10.10 경향신문
  28. 여야 대선 후보들, 비자금 문제 정면 격돌 1997.10.17 mbc
  29. 김대중 총재 비자금 의혹 검찰 공식 수사 선거전 종결 가능 1997.10.20 mbc
  30. 검찰,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비자금 수사 유보 1997.10.21 mbc
  31. 각하 제 2의 광주사태가 올 것입니다 1998.2.2 한겨레신문
  32. 김태정 검찰총장 임명, 야권 웬일이지 기우뚱 1997.8.8 경향신문
  33. 이회창 총재, 김영삼 대통령에게 탈당 요구 1997. 10. 22mbc
  34. 김영삼대통령, 정치권 허위사실 유포 엄단 1997.11.7 mbc
  35. 3김 청산 내건 한나라당 공식 출범 1997.11.21 mbc
  36. 프레시안 (2013년 6월 19일). 힘들게 대기업 합격, 그런데 출근은 하지 마라?. 2013년 8월 18일에 확인.
  37. MBC뉴스데스크 (1996년 12월 26일). 신한국당,노동법 개정안과 안기부법 개정안 기습처리[김상수]. 2013년 8월 18일에 확인.
  38. MBC뉴스데스크 (1996년 12월 26일). 야당, 신한국당의 법안 기습처리 관련 무효투쟁 결의[김세용]. 2013년 8월 18일에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