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부정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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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무효)
대한민국
1956 ←
1960년 3월 15일
→ 1960

투표율 100.0%
  Rhee Syng-Man in 1956.jpg


후보 이승만
정당 자유당 (대한민국)
득표수 9.633.376
득표율 100.0%

1956 South Korean election result map.png

광역시·도별 우세 지역
이승만

선거전 대통령

이승만
자유당 (대한민국)

대통령 당선자

이승만
자유당 (대한민국)

대한민국 제5대 부통령 선거
대한민국
1956 ←
1960년 3월 15일

투표율 100%
  Lee gi bung.png Chang Myon 194804'.png
후보 이기붕 장면
정당 자유당 (대한민국) 민주당
득표수 8,337,059 1,843,758
득표율 79.2% 17.5%

선거전 부통령

장면
민주당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
자유당 (대한민국)

3·15 부정선거(三一五不正選擧) 또는 3·15 개표조작(三一五開票造作)은 1960년 3월 15일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제4대 대통령 선거제5대 부통령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이기붕 후보가 79.2%의 득표율로 제5대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승만 후보가 제4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이 결과는 부정에 의한 것이었고, 이 선거는 결국 부정선거로 밝혀졌다.

전쟁 이후 미국의 무상 원조가 줄게 되었고 무리한 개헌 등으로 부정부패가 심해지자 자유당에 불리한 여론이 생기게 된 것이다. 결국 이에 분노한 자유당은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자 이기붕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그의 측근들이 내무부 관료들과 자유당 소속 정치 폭력배 이정재, 임화수 등을 동원하여 부정 선거, 개표 조작을 감행하였다.

부정 선거가 폭로되자 각지에서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부정선거를 시위하던 학생들 중 김주열 군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화장된 유골이 마산 앞바다에 유기되면서 후일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선거는 결국 국회에서 무효 처리되었다. 이 사건은 이승만과 이기붕은 각각 대통령직과 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제1공화국의 붕괴 원인이 되었다.

발단[편집]

정부 수립[편집]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단되었다. 이후 유엔은 한반도의 정부 수립을 위해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하지만 소련이 방북을 거부하였고, 결국 선거가 가능한 남한에서만 선거를 치르기로 한다.

1948년 5월 10일 드디어 총선거가 치러졌다. 이 선거는 만 21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이 국회의원을 선출하게 하였다. 이후 헌법이 만들어졌는데 이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4년으로 하며 대통령은 국회에 의한 간접 선거로 선출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선거를 통해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국제 연합은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의 인구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선거가 실시된 지역에서의 유일의 합법 정부로 승인하였다.

무리한 개헌[편집]

이후 이승만은 독재 정치를 펼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권력에 빠지게 된다. 그는 대통령을 한 번이라도 더 하길 원했고 이를 통해 일단은 1956년까지 집권하고자 했지만,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52년 국회에서 이승만 지지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지 못하였다. 결국 이승만은 자신이 낙선할 것이 확실해지자 대통령의 선출 방식을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바꾸었다. 이를 통해 이승만은 조봉암을 누르고 재선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임기가 반 쯤 됐을 무렵 다시 장기집권에 야욕을 보인 이승만은 3선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당시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중임'으로 제한시켰기 때문에 3선은 불가피했다. 문제가 발생하자 의회에 이를 맡기기로 하는데 의회에서도 정족수를 차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자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통해 법안을 통과시켰고 이를 통해 3선을 가능하게 했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그는 신익희의 사망으로 조봉암을 또다시 누르고 3선에 성공한다.

자유당의 위기[편집]

그러나 이 선거에서 대통령으로는 자유당 후보(이승만)가 당선되었지만, 부통령으로는 자유당 후보(이기붕)가 아닌 민주당 후보(장면)가 당선되었다. 이 결과로 인해 자유당 입장에서는 좋을 리 없었다. 한편으로 얼마 뒤 이승만은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법살(法殺)하였다.

물론 자유당의 위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이후 미국의 무상 원조가 줄기 시작하면서 경제 사정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이에 서민들의 삶도 악화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이승만 자신이 장기 집권을 위해 했던 무리한 개헌들은 결국 정치적인 부패를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서 자유당에는 불리한 여론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이승만의 4선은 실패가 유력시되었다.

급기야 1958년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의석수가 불어나자 자유당은 한 층 더 불리해졌다.

계획[편집]

이런 식으로 불리한 여론이 생기게 된 자유당이 택할 수 있는 것(이승만의 4선을 위해)이라곤 오로지 부정 선거일 뿐이었다. 이들은 어떻게든 이승만의 4선을 위해 계획을 짜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선거일을 바꾸는 것이었다.

원래 대통령 선거일은 1956년 선거와 마찬가지로 5월에 치르는 것이 올바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법으로 규정된 날보다 2달을 앞당겨 치르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3월 15일에 대통령 선거를 치르기로 한다. 이것이 발단이었다.

전개[편집]

선거 운동 이전의 반응[편집]

자유당 및 보수 진영[편집]

이렇게 법으로 규정된 날보다 앞당겨 대선을 치르기로 하였고 한편으로 자유당은 이승만의 4선을 원했으면서도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추대하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경선을 치르게 되었고 이승만이 1위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1959년 6월 29일 이승만이기붕 진용을 재구축하였고 서둘러 출마를 강행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다른 측근들인 이범석, 윤치영은 이기붕의 출마를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부통령으로 출마하기로 한다. 이들은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힌 뒤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다. 한편, 조선민주당이윤영 역시 대통령 후보로는 이승만을 지지한다며 부통령 후보로 각각 출마하였다.

민주당[편집]

한편 부통령 선거에서도 승리하고 이어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의석 수를 훨씬 더 얻는 등 사실상 조금씩 권력을 획득한 민주당은 이러한 자유당의 계획에 맞서기로 한다. 그러나 신구파의 갈등으로 인한 내홍(內訌)으로 혼란을 빚기도 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자유당보다 5개월 늦은 1959년 11월 26일 정·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통해 조병옥과 장면을 각각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이렇게 해서 자유당에 맞서게 되었다.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조병옥 484 50.1% 대통령 후보
2 장면 481 49.7% 부통령 후보
총투표수 966

선거 운동 기간과 부정 선거 계획[편집]

두 정당(자유당, 민주당)은 어떻게든 서로 이기고자 선거 운동에 몰두하였는데 상황이 1956년 때와 비슷하게 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조병옥이 선거를 한 달 가량 앞둔 1960년 2월 25일 하와이에서 신병치료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이승만은 이번에도 단독후보가 되었다(물론 지난 대선 때도 민주당 후보 신익희가 유세 중 사망하였다). 그동안 자유당은 민주당과 대결해야만 했지만 민주당 대선 후보가 갑자기 죽었으니,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 결국 자유당은 이 틈을 노리게 된다.

이 틈을 노리게 된 자유당은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지난 번의 그 어느 선거보다도 부정선거 활동에 열을 올렸다. 처음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계획을 짜게 된다.

  1. 정부로 하여금 공무원을 통한 선거운동망을 조직한다.
  2. 전국경찰에 지시하여 이를 감시독찰하도록 한다.[1]

위의 두 가지 방법 이외에도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이는 이승만이 이미 고령이었기 때문에 헌법상 대통령 승계를 하는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한 수작이었다. 그밖에 이들은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웠다.

  1. 정치 깡패를 동원한다.
  2. 공개 투표를 계획한다(예: 사람들이 단체로 지나가면 정부의 지원을 받은 이들이 그들에게 "자유당인 거 잊지 마라" 등의 말을 하는 것).
  3. 완장 부대를 활용한다(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누구 찍어야 하는 지 알지" 따위의 말로 자유당에 한 표를 던지라고 협박하는 것).
  4. 투표가 시작되기 전에는 자유당에 한 표를 던진 가짜 투표용지를 무더기로 집어 넣는다.
  5. 야당 참관인은 투표하는 장소에서 추방시킨다.

이 모든 것에는 경찰이 가담하였다. 그러자 몇몇 유권자들이 "경찰이 수사는커녕 오히려 폭력을 조장하고 있다" 라고 호소하였지만, 깡패들이 "사실을 해명하라"고 소동을 일으켰다. 또한, 3월 9일과 10일에는 전라남도 여수광산에서 민주당 간부가 구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민주당은 이에 대해 '부정선거 거부운동에 참여해 줄 것'을 호소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2]

선거일[편집]

선거일이 가까워지자 이들은 위에서 짠 계획들을 적용하기로 했다. 선거 전날인 3월 14일 자유당은 모든 선거함에 이승만과 이기붕이 찍혀 있는 위조 투표지를 무더기로 집어넣었다.

3월 15일 드디어 선거가 치러졌다. 이들은 투표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가 하면, 한 명 당 투표 용지를 20장까지 가져가는 등의 선거 조작 행위를 저질렀다. 또한 자유당 당원들이 기표소까지 들어가 자유당을 뽑는 지 아니면 야당을 뽑는지 감시하는가 하면 야당 선거 관리인을 투표소에서 쫓아내는 행위까지 저질렀다.[3] 이러한 부정 행위에는 자유당 소속 정치깡패들이 동원되었고 그 밖에도 내무부 소속의 공무원들까지 조직적으로 개입하였다(이 일로 내무부의 차관급과 실국장급 간부들이 구속되었고,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민주당은 오후 4시 30분에 언론에 담화를 발표하였으며, "3·15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선거의 이름 하에 이루어진 국민주권에 대한 포악한 강도 행위"라고 규정하고 불법, 무효임을 선언했다.[3] 이에 부정선거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날 오후 늦게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발생하였다.

한편 선거가 종료된 뒤 개표를 시작했다. 그런데 개표 중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득표율이 100%에 육박하는 결과가 나오자 국무위원들은 자유당 후보가 95%또는 97%를 넘어 갈 것을 우려하였고, 이렇게 되면 부정선거임이 들통 날까봐 "걱정"을 하였다.[4] 그러자 최인규·이강학 등은 경비전화를 통해 "이승만은 80%로, 이기붕은 70~75% 선으로 조정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각 지에서는 감표에 들어갔으나, 일부 지방에서는 최병환 내무부 지방국장이 50%선 조정을 지시해 혼란을 빚기도 하였다.[5] 하지만 이러한 혼란에도, 이기붕의 표는 79%로 하향 조정하게 되었다.[6]

선거 결과[편집]

27일동안 행방불명이었던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중앙부두에서 발견된 김주열

대통령 선거[편집]

1960년 3월 15일자 동아일보. 3.15 부정선거를 다룬 기사.
득표순위 기호 이름 정당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1 이승만 자유당 9,633,376 100% 당선 후 무효 당선
2 2 조병옥 민주당 선거운동 중 사망
선거인 수 11,196,490
총투표수 10,862,272
투표율 97%

부통령 선거[편집]

득표순위 기호 이름 정당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1 이기붕 자유당 8,337,059 79.2% 당선 후 무효
3 2 김준연 통일당 249,095 2.4% 낙선
4 3 임영신 대한여자국민당 97,533 0.9% 낙선
2 4 장면 민주당 1,843,758 17.5% 낙선
선거인 수 11,196,490
총투표수 10,527,445
투표율 94%

그렇게 온갖 부정이 치러진 결과 46.4%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민주당의 장면 후보는 17.5%로 뚝 떨어지고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는 79.2%의 기록적 상승세를 보여서 당선에 성공했다.

선거 이후[편집]

1960년 3월 17일동아일보. 3.15 부정선거 개표결과 이승만 대통령 4선 당선, 이기붕 부통령 당선을 보도한 기사.

하지만 이미 부정 선거라는 사실이 들통 났고, 선거 이튿 날인 1960년 3월 16일 마산 등지에서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시위(3·15 마산시위)가 발생하였다. 한편 일부 지방에서는 투표함을 확인하던 중 투표자 수가 유권자 수보다 많은 경우가 발견되자 급기야 투표함을 불에 태우는 일까지 일어났다.

시위가 지속되자 정부는 계엄령까지 선포하여 시위를 진압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시위를 일으켰다. 그러나 정부는 "공산주의 세력이 개입했다"는 말도 안 되는 말까지 꺼내며 폭력적인 진압을 강행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한편 학생들까지 시위를 일으키자 이들도 죽어나갔고, 서울에서도 심심찮게 데모가 일어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귀가하는 도중에, 정치 깡패들이 그들을 덮쳐 학생 2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순식간에 이승만은 인기가 땅에 곤두박질 치는 등 그야말로 몰락했다. 1960년 4월, 마산 앞바다에서 실종되었던 학생 김주열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주검으로 발견되자 시위는 격화되었으며, 이는 4·19 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끝에 이승만대통령 선거를 다시 치르기로 약속했으며 얼마 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미국으로 망명했다. 4월 27일, 제1공화국은 결국 붕괴되었으며 대신에 내각 책임제를 바탕으로 하는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이렇게 해서 집권한 민주당은 대통령 선거를 다시 치르게 되었고, 이 선거에서 대통령으로는 윤보선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무능력했고, 결국 2년도 못 가 군사쿠데타로 종말을 고하게 된다. 한편, 이승만은 제3공화국이 출범하고도 귀국하지 않았으며, 1965년 미국에서 91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기타[편집]

2008년 11월 13일 김영삼은 "이승만 독재정권에 항거해 일으킨 '3.15의거'를 국가기념일로 반드시 제정해야 한다[7] 고 주장했다.

김영삼11월 13일 한나라당 경남 마산 출신의 안홍준, 이주영 의원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3.15는 국민적 민주화 투쟁의 효시로 그 숭고한 정신의 계승을 위해 4.19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별도로 국가기념일로 반드시 제정해야 한다[7], 18일로 예정된 국회 토론회에서 좋은 성과를 내어 국가기념일로 꼭 제정되기를 바란다"고 주장했다. 이후 김영삼 등의 적극 주도로 3.15 기념일 제정 사업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보수 세력은 오히려 김영삼을 공격하고 나섰다.

11월 18일 안홍준, 이주영 의원 등 마산지역 의원들은 국회에서 세미나를 개최, '3.15의거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와 국가기념일 제정의 당위성' 토론회를 열었다. 이어 3.15의 국가기념일 제정에 박차를 가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3.15 기념 계획은 보수세력의 반발로 무산되고 만다.

같이보기[편집]

주석[편집]

  1.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81, 743
  2. 한국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편, 1962[1], 121쪽. 2차 출처 : 한국민주화운동사 1편 111p 인용
  3. 이에 민주당은~: 유숙란, 〈선거의 권위주의적 운용과 역기능〉, 한배호 편, 《한국현대정치론 I:제1공화국의 국가형성, 정치과정, 정책》(나남, 1990), 387쪽.
  4. 학민사 편집부 편, 1985,70~71쪽. 2차 출처 : 한국민주화운동사 1편 113p 인용
  5. 한국민주화운동사 1편 113p
  6.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 역사 (전면 개정판)》(경세원, 2004), 590쪽. ISBN 89-8341-057-4
  7. YS "3.15의거, 국가기념일로 제정해야" 뷰스앤 뉴스 2008-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