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자유당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약칭 민자당)은 1990년부터 1995년까지 존재하였던 대한민국의 정당이다.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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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창당 배경
제5공화국의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은 1987년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당선시켰으나, 1988년 13대 총선에서 과반수(150석)에 한참 미달하는 125석 획득에 그쳐 여소야대 구도에 몰리면서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 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되는 등 난관에 부딪혔다. 또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었던 6월 항쟁이후 날로 고조된 국민들의 민주화와 군사정권 청산 요구는 5공화국 후신세력인 민정당 세력에게 위협이 되고 있었다.
[편집] 창당 과정
이 부분의 본문은 3당 합당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정당 세력인 노태우 정부가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이른바 "보수대연합"이 비밀리에 추진하여, 1990년 2월 9일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대통령,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총재,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총재가 3당 합당을 선언하여 민주자유당이 새로운 거대 여당으로 탄생하였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며 재 집권하였으나, 1995년 김종필이 김영삼과 반목한 끝에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고, 6월 27일 지방 선거에서 패배한 후, 11월과 12월 노태우, 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면서 신한국당으로 당 이름을 바꾸었다.
[편집] 기타
[편집] 노태우, 김영삼 갈등
민자당 대선후보였던 김영삼 후보가 노태우대통령의 사돈인 SK그룹에 대한 이동통신사업 허가 문제, 한준수 당시 연기군수가 폭로한 `관권선거 의혹사건`에 대한 중립 선거관리내각 구성을 위한 부분 개각 요구로 노태우대통령과 충돌했고, 1992년 9월 18일 노태우 대통령이 민자당을 탈당했다.[1]
[편집] 지역감정 조장 논란
이 부분의 본문은 초원복집 사건입니다.
3당합당으로 비춰진 `영남패권주의 논란`이나 초원복집사건과 공천,유세등을 통해 지역감정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았다.[2]
[편집] 공화계 탈당
내각제 개헌 약속 위반과 지역감정 논란등으로 계파갈등이 빚어져 김종필을 비롯한 공화계인사들이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
[편집] 역대 당수
[편집] 역대 선거 결과
[편집] 역대 대선 결과
| 대수 | 후보자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선거방식 | 비고 |
|---|---|---|---|---|---|---|
| 14대 | 김영삼 | 9,977,332표 | 1위 | 직접선거 | 당선 |
[편집] 역대 총선 결과
| 실시년도 | 선거 | 국회정원 | 당선자 현황 (지역구/전국구) |
득표율 |
|---|---|---|---|---|
| 1992년 | 14대 총선 | 299 (237/62) | 149 (116/33) |
[편집] 역대 지방선거 결과
| 실시년도 | 선거 | 광역자치단체장 당선자 현황 | 기초자치단체장 당선자 현황 | ||
|---|---|---|---|---|---|
| 당선자 수 | 당선비율 | 당선자 수 | 당선비율 | ||
| 1995년 | 1회 | 5/15 | 70/230 | ||
[편집] 전국구 의원
14대 총선에서 54명의 전국구 후보 중 33명이 당선되었다. 그런데 14대 임기 중 전국구 의원의 의원직 상실이 많아서 후순위의 예비 후보까지 모두 승계되는 보기 드문 현상이 있었다. 선거 때 당선되지 못한 23명의 예비후보 중 4명이 승계 전 탈당하여 17명이 남아 있었지만 그보다 3명이 많은 20명이 의원직 상실되어 전국구 의원의 의석 수가 3석 감소하였다. 의원직 상실 사유로는 탈당이 13명(자민련 입당 10명 포함)이었으며, 사직이 6명, 사망이 1명이었다.
[편집] 주석
- ↑ 역대 권력투쟁의 교훈
- ↑ “<대선(大選)현장> 유세장 지역감정 조장 빈발”, 《연합뉴스》, 1997년 12월 12일 작성. 2010년 4월 21일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