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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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출생 1935년 6월 2일
일제 강점기 대한제국 황해도 서흥군
거주지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별명 '대쪽', '대쪽판사'
학력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직업 법관, 법조인, 국회의원
종교 천주교
배우자 한인옥
자녀 2남 1녀
부모 이홍주, 김사순
친척 이회성(동생)
웹사이트
http://www.changsarang.com/

이회창 (李會昌, 1935년 6월 2일[1]~ , 황해도 서흥 출생)은 대한민국의 법관, 법조인, 정치인이다.

1993년 2월 25일부터 1993년 12월 16일까지 제15대 감사원장, 1993년 12월 17일부터 1994년 4월 21일까지 제26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한나라당 소속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2번 출마하여 2번 낙선하였고, 2007년 11월 7일한나라당을 탈당, 이후 무소속 후보로 제17대 대선에 출마 의사를 발표하며 정계에 복귀하였다. 2008년 보수정당인 자유선진당을 창당하여 당총재에 피선되었다. 본관은 전주이다. 종교는 천주교로서 세례명은 울라프이다.

목차

[편집] 이력

[편집] 생애 초기

법관 집안 출신으로 검사출신인 이홍규 옹과 김사순 여사 사이에 4남 1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2] 본관은 전주이씨로 그는 이성계의 고조부 목조의 넷째 아우 주부공(主簿公) 이영습(李英襲)의 23대손이었다.[3] 이회창은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났으며 본적은 충청남도 예산군이다. 따라서 그를 충청남도 예산군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부친의 발령지에 따라 서너살땐 전남 장흥에서 살았고[2], 유년기에 그의 부모는 외가가 있는 광주광역시로 이주하여 전라남도 광주광역시에 있는 광주 서석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초등학교 5학년때 '중학입학자격 검정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며, 졸업 후 광주광역시 광주서중학교에 합격하였으나 법관이었던 아버지 이홍규가 청주시로 발령되어 충청북도 청주중학교로 전학갔다.[4] 그뒤 다시 경기중학교로 전학갔다. 17세때는 아버지가 모함으로 구속되자 소년가장이 돼 가족을 부양하면서 주린 배를 찬물로 채웠다 한다.[2] 경기중학교 졸업 후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 서울대학교 법대 재학 중인 1957년 제8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고 군 법무관으로 입대하여 공군대위로 예편하였으며, 제대 후 법관으로 임용되었다.

[편집] 법관 활동

[편집] 군사정권에서의 법관 활동

1960년 서울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법관 생활을 시작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당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사형 판결을 한 1심의 재판부에 배석판사로 참여했다.[5]

법관시절 군사정권하에서는 '박세경 변호사 계엄법 위반사건' 등에서 정부측 압력과는 상반된 소신있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2]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사법연수원 교수, 대법원판사 등을 역임했고[2], 1981년 최연소 대법원 판사로 임명되었다. 법관으로 재직하면서, 사법적극주의나 법관에 의한 법형성의 강조, 정권의 입맛과 배치되는 소수의견으로 유명하였으며 법관 재직 중 권부와 타협하지 않아 '대쪽판사'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대한변호사협회의 학술지인 [인권과 정의]에서 특집으로 "20세기를 대표하는 각 분야별 판례 20선"를 선정했을 때, '주요 대법원 판례 민법총칙 분야 20선'에 그가 대법원에 재직하면서 참여한 판례가 포함되었다.[6]

다음은 주요 대법원 판례 민법총칙 분야 20선에 선정된 판례 중 일부이다.

  • 6. 대법원 1993.1.19. 선고, 91다1226 전원합의체판결(교회분열 사건)

관련쟁점 중 일부: 일부 교인들은 종전 교단에 계속 남아 있는 반면, 나머지 교인들이 다른 교단으로 소속을 옮기겠다고 주장하여 새 교단에 가입한 사건 이었다. 백태승 교수는 당시 다수 의견은, 교회가 분열되어 발생한 분쟁을 해결할 수 없었다고 비판한다. 이회창은 당시 다수 의견에 반대하였다.[7]

[반대의견 1] 이회창 대법관: 교회의 분열은 인정하나, 하나의 총유단체인 교회가 두 개의 총유단체인 각 교회로 분열 되면 종전 총유단체인 교회에 속한 재산은 분열 후의 두 개의 총유단체인 각 교회의 공유로 되고 각 교회의 공유지분은 총유의 형태로 각 교회 및 그 구성원에게 귀속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고, 이 경우에 있어서 각 교회의 공유지분비율은 분열 당시 총유재산에 대하여 개별적 사용수익권을 가진 교인의 각 교회별 비율, 즉 각 교회의 세례교인의 수에 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8]

[편집] 노태우 정부 시절

1988년에 중앙선거관리위원장에 임명된 그는 당시 동해시와 영등포 재선거에서 당선자 대부분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하여 당시 만연된 불법 선거 풍토에 경종을 울렸다. 1989년 민정, 평민, 민주, 공화 4당의 입후보자 전원을 불법 선거혐의로 고발했다.[2] 재선거에서 노태우 대통령 등 민자당 내 서한을 공개적으로 문제시하였으며, 또한 김영삼 민주당 총재에게 서면으로 경고를 하기도 하였다. 이회창은 노태우 대통령의 서한이 당시 여권 내에서 크게 문제가 되자, 1년 3개월만에 스스로 사표를 제출하였다. 그 뒤 변호사 사무소를 개설하여 변호사로 활동했다.

[편집] 정치 활동

[편집] 감사원장 재직 중 활동

1993년 김영삼 정권(문민정부)에서 감사원장에 임명됐다. 감사원장 공관입주를 거부했으며[2],‘성역’으로 일컬어지던 청와대 비서실이나 국방부의 율곡 사업, 평화의 댐에 대한 감사를 강행하며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등에 대한 서면조사를 하였다. 이어 율곡사업 비리에 대한 감사로 전직 국방부장관 2명을 포함, 전직 해.공군참모총장, 전직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등 6명을 수뢰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는 등 감사원장 재직 중 성역을 허물기도 했다.[2] 선관위원장과 감사원장 당시 강직함이 회자되어 속칭 '대쪽'이라는 그의 별명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편집] 문민정부 시절

1993년 12월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헌법에서 위임된 총리의 권한을 행사하려고 노력하였다가 김영삼 대통령과 충돌,“법적 권한도 행사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총리는 안 한다”고 127일만에 사표를 냈다. 이러한 행동들로 인해 ‘대쪽’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당시 국민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1996년 1월, 김영삼 대통령은 이회창을 신한국당에 영입했고, 1997년 3월에는 당 대표에 임명했다.[9] 이후 신한국당내 경선을 거쳐 대통령 후보가 된 이회창은, 김현철 비리를 비롯 집권말기의 김영삼 정권이 크게 여론의 비판을 받자 김영삼 대통령과의 거리두기를 시도하였다. 심지어 김영삼 대통령의 허수아비를 불태우는 극단적인 거리두기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아들의 병역문제가 불거지고, 이인제가 경선 패배를 승복하지 못하고 독자출마를 하면서, 1997년 대선에서 패배했다. 김영삼은 아들 현철을 그를 차기 국회의원 이나 정치인 등으로 염두해 두었으나 신한국당의 신임 총재로 취임했던 이회창은 김영삼측의 생각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이 일로 김영삼과 이회창간의 미묘한 감정싸움의 발단이 되어 알력으로 작용하다가 사이가 틀어지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편집] 국민의 정부 시절

1997년 대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김대중이 새로운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이회창은 몇십 년만에 야당의 위치가 된 한나라당의 총재였던 조순과 더불어 당을 이끈다. IMF 구제금융사건과 계속되는 지지율 하락을 극복하기 위해 당명을 신한국당에서 한나라당으로 바꿨음(1997년 11월 21일)에도 불구하고 대선에서 패배한 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회창은 IMF 구제금융사건의 책임을 가지고 있는 김영삼이나 노태우, 전두환 등 군사정권과 친밀했던 인사들과 거리를 둘 것을 주장했고,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는 당시 한나라당 지도층을 비판했다.

김대중이 새로운 대통령이 된 1998년 당시 한나라당은 원내 과반석을 보유한 제1당이었다. 한나라당은 이것을 이용해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추진하려는 햇볕정책김종필 총리 임명안 및 각종 정책들에 대해 계속해서 반대로 일관했다. 그러나 30여년 만에 등장한 새로운 집권세력에 기대를 하고 있었던 국민들의 여론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급기야 1998년 6월 지방선거에서 영남과 강원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한나라당은 참패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단순한 대선 후보 경험자에서 한나라당 총재로 부상한다(1998년 8월). 이회창이 한나라당 총재로 등장한 것을 전후로 김대중의 여당은 세풍, 총풍 사건을 이용해 한나라당을 압박하였으며, 40명에 가까운 한나라당 의원을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으로 빼돌렸다. 그러나 김대중과 김종필의 사이가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각종 권력형 비리 사건들이 터지면서 이회창은 다시 기회를 잡는다. 전대 한나라당 총재였던 조순을 비롯해 그의 지지자들의 당내 입지를 좁혀 탈당하게 만들었으며(이들은 민주국민당을 창당했지만, 2000년 총선에서 아무런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사라진다), 김대중 정부의 여러 가지 부패, 비리 사건을 이용해 집요하게 여당을 공격했다. 이런 이회창의 활발한 활동 덕분에 2000년의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수도권에서는 패배하였지만 어쨌든 원내 제1당의 지위는 유지하게 된다.

[편집] 200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비록 세풍, 총풍 사건이 있었지만 2002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도 이회창의 대쪽같은 이미지, 흔들리는 한나라당을 수호해낸 인물, 할 말은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까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새천년민주당의 당내 경선에서부터 돌풍을 몰고온 노무현 후보의 등장으로 이회창 후보의 초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민주당 내에서도 무명이었던 노무현의 등장 과정과 달리 이회창은 1997년 대선 때부터 실질적인 한나라당의 지도자였으며, 사실상 2002년 대선 후보로 이미 내정된 상태였다. 당시의 노무현 후보가 노사모의 도움과 국회의원 시절의 독특한 정치행보, 서민 위주의 정책을 통해 서민적인 이미지를 구축해 나갔다면, 이회창 후보는 엘리트 코스로만 승승장구하며 달려온 정치가, 지난 30여년간 집권 세력이었던 한나라당을 거느리고 있는 귀족적인 정치가의 이미지를 구축해 나갔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서민적인' 행보를 하던 이회창 후보는 유세를 위해 2002년 5월 15일 서울 은평구 대조동 동명여자정보산업고등학교를 방문해 강연을 했다. 이 자리에서 이회창은 여자 고등학생을 "빠순이"로 지칭하고[10], 시장에서 서민들의 일을 도와주려다 서투른 행동으로 방해만 되는 등 서민적 이미지 만들기에는 실패한다.[출처 필요] 노사모에 비견될만한 팬클럽인 창사랑 역시 노사모 만큼 활발한 활동을 보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노무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쌓아온 여러 가지 경력, 신뢰감을 주는 이미지, 김대중 정부 말기의 대형 측근 비리 사건은 이회창에게 호재로 작용했다. 2002년 6월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새천년민주당의 지지도가 높은 호남, 충청 지방을 제외한 대부분의 곳에서 승리를 거둔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세 아들도 각종 비리 사건으로 구속되고, 9월에는 정몽준이 월드컵 열기를 타고 대선 출마를 결심하는 등 이회창이 노무현의 초반 돌풍을 극복하고 작은 차이나마 꾸준히 앞서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회창도 비리 혐의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2002년에만 500억 정도를 운반한 것으로 알려진 차떼기를 비롯하여, 115평 초호화 빌라에 공짜로 거주한 점, 1997년 대선에서 불거졌던 두 아들의 병역비리 혐의(법정에서는 무혐의로 판결) 등으로 이회창은 여당의 악재를 적절하게 활용하지 못했다. 또한 월드컵 열기를 틈타 발생한 서해교전 때문에 국가 안보를 강조하는 입장인 이회창에게 유리한 국면이 조성될 뻔했으나,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때문에 전사회적으로 퍼진 반미감정 때문에 별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정몽준과 노무현의 단일화로 인해 11월부터는 노무현이 여론조사 상에서 이회창을 2~3% 앞서는 국면이 계속되었다. 대선 하루 전날인 2002년 12월 18일 정몽준은 노무현과의 지지를 철회하고, 각종 보수 언론에서 이를 대서특필하였으나, 대세가 바뀌지는 않았다. 이회창은 대선이 끝난 이후 정치계 은퇴를 선언한다.

2007년이명박과는 다르게 이회창은 여러 가지 비판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거나, 자신이 귀족이다 어쩌다 하는 말에 대해 당당하게 자신의 색채를 드러내지 않았다. 또한 제대로 된 당내 경선을 치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총재를 거쳐 대선 후보가 된 것이기 때문에, 당내에서 미리 비판이 나와 자정작용을 할 수 없었다는 점도 있다. 이런 요인들이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에게 패배한 한 이유들로 거론되고 있다.

[편집] 정치계 은퇴와 복귀

2007년 대선에서 선거 유세를 하고 있는 이회창

이회창이 정계를 떠난 이후 그의 자리였던 한나라당 총재 자리는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주정의당민주자유당에서부터 활동해온 서청원최병렬, 그리고 박정희의 딸이자 정치적 후계자를 자처하는 박근혜에게 이어졌다. 노무현의 당선 이후 한나라당은 원내 제1당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여러 정책에 발목을 잡았다. 이에 한나라당에 대한 국민여론이 크게 악화되었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를 기점으로 원내 제2당으로 내려앉았다.

이렇게 한나라당이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그는 한나라당에 관련된 발언을 하지 않고 자신의 개인 활동에 전념했다. 2006년에 한나라당이 열린우리당의 실정과 여러 가지 측근 비리 사건을 틈타 지방선거에서 대승했을 때에도 어느 지역구에 출마한다거나, 한나라당에 관련된 발언을 일체 삼갔다. 2007년 들어 박근혜이명박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 행보를 시작했었을 때, 이회창의 근황을 궁금해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정작 본인은 후보에 오를 생각도 하지 않았고, 특정인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명박이 한나라당의 2007년 대선후보로 선출된 이후, 이회창의 측근을 중심으로 이회창의 대선 출마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집중 보도되었다. 이회창이 이명박의 각종 비리 의혹 때문에 불안해하고 있으며, 자신과 비교적 정치 성향이 비슷한 박근혜를 끌어들여 대선판을 재편성하겠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이회창 본인은 이에 대해 특별한 언급이 없었지만, 이회창의 지지자들은 2006년 5월에 있었던 박근혜 커터칼 테러 사건 등을 들먹이며 소위 '스페어 후보론'을 내세워 이회창의 출마가 임박했음을 선전했다. 드디어 2007년 11월 7일, 이회창은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기호 12번)가 되었다.

그가 뒤늦게 11월에서야 세 번째 대선 출마를 결심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이후 정치적 행보를 거의 하지 않았는데도 출마하지도 않은 자신의 지지도가 당시 범여권의 정동영 후보를 앞지르고 있었다는 점, 박근혜의 합류를 기대했다는 점, 이명박의 비리 혐의와 자신과 다른 정치 성향에 불만이 있었다는 점 등이 거론되고 있다. 실제로 이회창은 대선 출마를 선언한 후, 대선 직전까지 박근혜의 합류를 기대하였으며,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경제만 강조한다면서 "좌파적"이라고 비판했다.

그의 등장 이후 50% 이상을 유지하던 이명박의 지지율은 한때 30% 중반까지 떨어졌지만, 그는 더 이상 특별한 돌풍을 일으키지 못한 채,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에게도 크게 뒤처진 15.1%의 지지율(3위)로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마감한다. 20대층에서는 창조한국당문국현 후보에 이어 4위를 기록했다.

[편집] 자유선진당 창당

그가 대선 레이스에서 가장 역점을 두어 강조한 정책이 바로 국가 안보와 법질서 확립이었다. 이명박 역시 햇볕정책에 부정적이고, 다른 후보들에 비해서 안보와 질서를 강조하는 면에서는 이회창과 비슷했지만, 경제에 역점을 두고 다른 정책들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했기 때문에 이회창으로부터 "좌파"라는 공격을 받았다. 그는 한나라당과 이명박을 비판하는 한편 "정통 보수 정당"을 창조하기 위해 대선 이후에도 바쁜 행보를 계속하였다.

2008년 2월 1일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자유선진당을 창당했으며, 2008년 2월 12일에는 비슷한 정치성향의 국민중심당과 합당을 선언하였다. [11]

이후 자유선진당은 18대 총선에서 기존 자유민주연합, 국민중심당처럼 충청도 지역의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하여 총 18명의 국회의원을 당선시켰다. 이는 기존 자유민주연합, 국민중심당보다 한층 뛰어난 결과였지만, 국회 내의 교섭단체가 될 20명에는 2명이 모자란 결과이기도 하다. 이후 자유선진당은 2명의 국회의원을 더 받아들이기 위해 무소속과 한나라당을 탈당해 국회의원에 당선된 의원들을 접촉하였으나 성과가 없었고, 대신 창조한국당과 공동교섭단체를 구성한다.

한편 이명박 정부 초기부터 이명박 대통령의 방식에 많은 비판이 있었다. 특히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수입을 재개하기로 한 협상은 노무현 정부에서처럼 전문가 회의를 거치지도 않았고, 훨씬 완화된 검역조건을 가지고 1주일만에 합의되어 각종 논란을 낳았다. 이회창은 이 논란에 대해 미국산 수입재개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으나, 협상이 졸속으로 진행되었다며 재협상을 주장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TV토론회에 나오라", "선진당이 쇠고기 궐기대회를 열어야 한다"는 식으로 강도높은 비판을 하였지만, 촛불집회와 대통령 탄핵서명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12]

[편집]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논란

2009년 1월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의 처벌 수위가 심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실정법에 위반되면 처벌하는 형식적 법치주의는 국민을 억압하는 독재의 유물이며 우리는 사회적 정의에 부합여부를 가려서 처벌을 정하는 실질적 법치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두 가지 허위 사실이 있다고 해서 곧바로 처벌하는 건 실질적 법치주의에 반한다며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처벌에 대한 이명박정부의 태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시하였다.[13] 이에 1월 13일 한나라당홍준표는 원내대책회의에서 어느 야당 총재를 지칭하며 박씨 사건은 형식적 또는 실질적 법치주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국민의 기본권엔 내재적인 한계가 있으며 정부비판이 잘못이 아니라 거짓말로 우리가 불가피하게 쓰지 않아도 될 20억 달러를 환율 안정을 위해 썼다는 데 있다며 반박하였다. 이어 내재적인 한계를 넘어선 행동을 했기 때문에 책임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13]

[편집] 약력

[편집] 평가와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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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불법 대선자금 모집 의혹

일명 '차떼기 의혹'으로도 불린다. 1997년 대선 당시에 집권당이 세무 권력을 동원해 기업들에게 불법적 정치헌금을 모금하였으며 2002년 대선에서도 다시 비슷한 방법으로 불법 정치자금을 모았다.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측근이였던 서정우 변호사는 엘지그룹에 대선자금 지원을 요청하였고 엘지그룹에서는 경부고속도로만남의 광장 휴게소에 150억 원이 넘는 현금을 실은 2톤 트럭을 세우고 서정우 변호사는 이를 받아 직접 운전하여 한나라당에 전달하였다. 이외에 현대자동차도 같은 방법으로 두 차례에 걸쳐 109억 원을 전달하였고 SK 그룹은 100억 원, 한화그룹은 40억 원, 그리고 삼성그룹은 채권 325억 원과 현금 40억 원을 전달하였다. 2002년 이 사건이 밝혀지면서 한나라당의 비밀 선거자금모집이 드러나게 되었고 한나라당이 847억9천만 원의 불법선거자금 모금을 한 것이 밝혀졌다. 이때 정치인 30여 명 기업인 20여 명이 기소됐으며 차떼기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대선에 뛰어들면서 차떼기를 하고 남은 것으로 추정되는 154억 원에 대한 처리 의혹을 한나라당측에서 제기하고 있다.[16]

[편집] 병풍 의혹

1997년 17대 대선 당시 이회창의 두아들 모두가 병역을 면제 받았다는 의혹이 일어났고 특히 이회창의 장남의 경우 최초 병무청 징병검사에서 1급 현역 판정을 받았으나 추후 정밀신체검사에서 신장 178cm/45kg으로 군입대면제를 받은 것에 대한 의혹이 제기 되었다. 이러한 병역비리 관련 스캔들을 병풍이라고 한다. 이 병역 비리 관련 시비는 2002년 대선에도 다시 이슈가 되었다. 병역비리 전문가인 김대업은 이정연의 군면제에 비리가 개입되었다며 이를 은폐하려고 시도한 대책회의가 1997년에 있었고 전태준 전 의무사령관이 장남의 신검부표를 파기토록 지시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김대업과 이를 보도한 오마이뉴스, 일요시사등을 상대로 허위보도로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여 소송을 제기 하였다. 대법원은 김대업의 주장을 진실로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으며 대선에 영향을 주려 시도한 피고측의 악의가 의심된다고 하여 1억원의 배상을 판결하고 김대업은 5천만원을 배상하도록 하였다. 또한 김대업은 이와 관련한 형사사건에서도 명예훼손 및 무고, 공무원자격 사칭등으로 2004년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아 1년 10월의 실형을 살았다. 하지만 이러한 의혹은 이회창이 1997년과 2002년의 대선에서 민심을 잃어 패배하게 되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한나라당은 이러한 병풍 스캔들을 조직적인 정치공작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일각에서는 의혹의 당사자인 이회창의 장남 및 이회창의 처 한인옥 등에 대해선 검찰에서 직접적인 조사를 한 바가 없기 때문에 병역 비리 의혹이 완전히 해소된 것이 아니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17][18] 병풍 테이프는 조작된 것이며 여당의 정치공작의 희생양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정치공작의 여부를 떠나 병역문제에 매우 민감하여 병역기피를 큰 범죄로 인식하는 대부분의 예비역들은 이 때문에 대선때마다 이회창을 외면했고 그래서 이회창은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예비역들의 관점에서 이회창과 유승준은 별반 차이가 없다.

[편집] 20만 달러 수수설 의혹

2002년 당시 새천년민주당 소속 설훈 의원이 기자회견을 통해 제시한 의혹으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가 측근 윤여준씨를 통해 최규선씨로부터 20만 달러를 받고 정책특보로 임명했다는 의혹이다. 그는 이와 관련한 녹취 테이프가 있으며 이를 입증할 증인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병풍등 다른 사건들과 함께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의 이미지에 타격을 입혀 대선에서 패배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선거가 끝난 이후 이뤄진 조사에서 설훈의원은 녹음테이프등 관련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선거법 및 명예훼손 혐의로 징역 1년 6뤌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피선거권등을 박탈당하였으며 관련된 민사소송에서도 1억원을 배상해야 했다. 한나라당은 이 사건 또한 조직적인 정치공작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19][20]

[편집] 총풍과 세풍 의혹

이 부분의 본문은 총풍 사건입니다.
이 부분의 본문은 세풍 사건입니다.

1997년 대선 직전에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측이 지지율 상승을 위해 북한측 인사와 접촉하여 판문점 내에서 총격시위를 요청하였다는 의혹이다. 2001년 4월 오정은(당시 청와대 행정관)은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징역2년 자격정지 2년 집행유예4년을 선고받았고, 한성기(진로그룹 회장 고문), 장석중(대북 사업가)도 유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검찰은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후보의 친동생인 이회성씨가 핸드폰으로 베이징의 한성기씨와 통화한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이회성씨는 한성기씨에게 여비 명목으로 500여만원을 전달하였다. 한나라당은 이를 일부 인물들에 의한 해프닝적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출처 필요]

이회창 대통령 후보의 친동생 이회성과 이후보의 최측근 서상목 변호사 등으로 구성된 대선 비선조직인 부국팀이 병역문제로 대선자금이 잘 걷히지를 않자 국세청을 동원한 대선자금 모집을 이회창 후보에게 보고한후 1997년 10월 하순 부터 대선직전까지 국세청 차장 이석희와 선거 자금을 불법으로 모은 사건. 부국팀은 9월에 차수명 한나라당 재정위원장으로부터 기탁금 고액미납자 명단을 건네받아 미납기업들을 상대로 기탁금 납부를 독촉하였는데 이때 국세청한나라당이 대선자금 모금을 위해 조직적으로 공모한 사건이다. 또한 이 자금을 이석희국세청 차장이 관리하던 차명계좌에서 사적으로 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2003년 4월 8일 검찰은 23개기업으로부터 166억3천만원을 모금한 혐의로 이석희를 기소하였다. 이때 검찰은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가 모금하던 임채주 당시 국세청장에게 전화를 하여 격려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은 미국 도피중 2002년 2월 16일 미국 FBI에 체포되어 한국으로 송환되었다. 이회성은 1998년 구속되었다.[출처 필요]

[편집] 땅, 빌라 투기 의혹

2002년 3월 당시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에서는 당시 한나라당의 이회창 총재 일가가 가회동에서 초호화 빌라에 공짜로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였으며 이에 한나라당은 민주당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공박하였다. 115평 빌라의 3개층을 공짜로 자식과 살고 있었던 이회창은 같은 해 3월20일 기자회견을 통해 “서민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 것은 큰 잘못”이라고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였다.[출처 필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이회창 총재에 반대하여 한나라당을 탈당하였으며 빌라 게이트는 당시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지지율을 역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편집] 위장전입 의혹

1999년 4월 이회창은 같은 당 국회의원의 친척 소유인 송파구 장미아파트로 위장전입하였으며 해당 주소에서 투표를 하였다. 주민등록법 위반 및 당시 선거법 위반 행위이나 처벌 받지 않았다. 1999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후 이회창은 송파구 신천동 7-28 현대타워아파트 706호에 전입 신고했는데, 이회창은 단 하루도 그 집에 살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그후 99년 11월 아시아선수촌에 있는 딸의 아파트에서 마치 그곳에 사는 것처럼 기자들을 초청하여 파티를 하였으나 실제로는 1998년 4월부터 타인 소유의 가회동 115평의 빌라에서 거주하였다. 2002년 빌라게이트에서 이회창은 모두가 다른 사람의 집이었다고 사과하였다.

[편집] 제3공화국 부역

1961년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사형 집행 당시 혁명재판소 배석판사였던 탓에 진보 성향의 유권자들로부터 군사정권에 부역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회창 자신은 나이가 어린 순으로 혁명재판소에 차출된 탓에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하나 같은 입장에 있었던 한복 서울지방법원장이 차출을 거부했다가 직무정지 명령을 받았고, 당시 사법연수원생으로 조용수의 관선 변호인으로 배석했던 강신옥이 "나는 이 재판을 인정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다가 판사발령에서 불이익을 받았던 점을 생각하면 비판을 면하기 힘들다.


[편집] 가족관계

[편집] 기타

[편집] 저서 및 논문

  • 1997년 5월아름다운 원칙》, 에세이집
  • 주석형법각칙 / 註釋形法各則(下)
  • 미국의 독립규제위원회 제도에 관한 논문
  • 사법의 적극주의 - 논문
  • 조세사건에 관한 제문제- 논문
  • 법과 정치에 관한 논문
  • <논문집>법과 정의 ,1995
  • 형사법에 관한 제문제 - 논문
  • 세계화와 법치주의 - 논문
  • 개혁과 우리의 미래 - 논문

[편집] 관련 항목

[편집] 바깥 고리

[편집] 참고자료

[편집] 주석

  1. 이회창 공식팬카페 창사랑, 인물소개.
  2.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2050943711&intype=1
  3. 이총재·이인제위원 종묘대제서 인사만 나눠 '냉랭' :: 네이버 뉴스
  4. 昌 뛰어난 학생 아니었다? :: 네이버 뉴스
  5. "이총재, 민족일보 조용수 사형때 판사 맡아"”, 《오마이뉴스》.
  6. 당시 민법총칙 분야를 담당한 연세대 법대 백태승 교수가 선정한 것이다. 인권과 정의, 2000/10(제290호), 8면 이하, 백태승, [민법총칙], 제2판, 법문사, 2006, p.627에서 재인용
  7. 백태승, [민법총칙], 제2판, 법문사, 2006, p.649
  8. 백태승, [민법총칙], 제2판, 법문사, 2006, p.648
  9. 이회창 후보 걸어온 길, 〈한겨레〉, 2002년 5월 9일.
  10. 오마이뉴스, 2002년 5월 15일
  11. 자유선진당 창당…昌 초대 총재로 추대.
  12. '갈라지는 보수' 與 “쇠고기 좌파선동”-朴·昌 “졸속·재협상”, 〈경향신문〉 2008년 5월 7일
  13. 대법관 출신 이회창 vs 검사 출신 홍준표 ‘미네르바 논쟁’ 중앙일보 2009-01-14일자
  14. <한나라당 대선후보 이회창>원칙-대쪽이미지…˝유연성 부족˝ 지적 [동아일보] 2002-05-09
  15. New Document
  16. 현대차도 '차떼기'로 100억원 전달
    만남의 광장에서 스타렉스에 실어 - 오마이뉴스
  17. 김대업씨 1심보다 높은 1년 10월형 [한겨레] 2003-11-18
  18. 법원, ‘兵風’ 김대업씨 유죄 확정 [동아일보] 2004-02-27
  19. 설훈 前의원 허위사실 유포 집유3년 확정 [문화일보] 2005-01-25
  20. 설훈 前 의원 1억 배상판결 [동아일보] 2006-02-11
  21. 이회창-노무현 서로 다른 길 [MBC] 2002-05-13
  22.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이회창> 전두환ㆍ노태우씨와 먼 사돈 [매일경제] 2002-05-08
  23. <이회창 누구인가… ⑵ 친인척> 政·官·財·법조계 망라 [국민일보] 2002-05-09
  24.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이회창> '李후보 가족관계' [한국경제] 2002-05-09
  25. 《조선일보》(2005.10.24.)
  26. 중앙일보 특집 기사 2002 대통령 선거 후보
전 임
황인성
제26대 국무총리
1993년 12월 17일 ~ 1994년 4월 21일
후 임
 이영덕 
전 임
김영준
제15대 감사원장
1993년 2월 25일1993년 12월 16일
후 임
 이시윤 
전 임
조순환(송파구 갑)
김종완(송파구 을)
제15대 국회의원(송파구 갑)
1999년 6월 4일 - 2000년 5월 29일
한나라당
(송파구 을: 맹형규, 송파구 병: 김병태)
후 임
맹형규(송파구 갑)
김성순(송파구 을)
전 임
홍문표
제18대 국회의원(홍성군·예산군)
2008년 5월 31일 - 2012년 5월 30일
자유선진당
후 임
(현직)
전 임
이한동 총재권한대행
제3대 한나라당 총재
1998년 8월 30일2002년 5월 26일
후 임
 박관용 총재권한대행 
전 임
(없음)
제1대 자유선진당 총재
2008년 2월 1일 ∼ 현재
후 임
 (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