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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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çois-Marie Arouet
Atelier de Nicolas de Largillière, portrait de Voltaire, détail (musée Carnavalet) -002.jpg
출생 1694년, 11월 21일
프랑스, 파리
사망 1778년 5월 30일 (83세)
프랑스, 파리
직업 작가, 철학자
국적 프랑스
종교 이신론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François Marie Arouet)는 필명볼테르 (Voltaire, 1694년 11월 21일~1778년 5월 30일)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계몽주의 작가이다. 《샤를르 12세사》, 《루이 14세의 시대》, 《각 국민의 풍습·정신론》 등이 대표작이다.

생애[편집]

파리의 공증인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볼테르는 열 살에 예수회가 운영하던 루이 르그랑(Louis le Grand) 학교에 들어가, 금세 두각을 드러내고 평생 이어갈 교유관계들도 형성했다.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대부(代父)인 샤토뇌프 신부가 그를 쾌락주의적이고 무신론적인 귀족들과 시인들이 모이는 ‘탕플(Temple)’이라는 문학 살롱에 데리고 갔다. 17세에 루이 르그랑 학교를 떠나면서 아버지에게 문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지만 아버지는 이에 반대하며 법조계를 택하라고 강경하게 권한다. 그래서 법학 대학에 등록은 하지만 탕플을 계속 드나들면서 사치와 방탕을 선망한다. 이후에도 소(Sceaux) 성(城)의 문학 살롱을 드나들면서 재기를 발휘하며 문학적 재능을 증명해 보이던 그는 24세라는 아주 이른 나이에 《오이디푸스》(Oedipus, 1718)라는 비극 작품으로 유명해진다. 그 시대의 많은 작가들이 그렇듯 볼테르도 존중받는 장르였던 비극과 시로써 작품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일찍부터 문학에 뜻을 두고 자유사상가와 사귀었다. 1717년 루이 15세섭정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를 풍자한 시를 썼다고 오인돼 투옥되었다. 출옥 후 비극 《오이디푸스》의 대성공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또한 궁정에서도 주목을 끈다. 그는 '아루에(Arouet)'라는 평민의 성을 버리고 '아루에 2세(Arouet Lejeune)'의 글자 순서를 바꾸어 자칭 '드 볼테르 씨(M. de Voltaire)'가 되었다. 이 필명은 쉽게 받아들여졌고, 왕비는 친밀하게 그를 ‘내 가엾은 볼테르’라고 불렀다.

그러나 어느 날 슈발리에 드 로앙이 하인들을 시켜서 그를 곤봉으로 후려치게 한다. 자기의 좋은 친구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공작이나 후작들이 자신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만류하거나 옹호해주기보다는 재미있어 하는 것을 본 그의 분노는 극도에 달한다. 그는 슈발리에에게 결투를 요구했지만 그의 이 불손한 행위로 그는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영국으로 건너간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겨우 풀려났다. 이러한 것이 불평등과 전제정치에 관해서 그가 겪은 첫 경험이 된다.

전제정치의 악폐를 통감한 그는 자유로운 영국에 공감을 가지고 로크뉴턴의 영향을 받아 비판정신은 더욱 강고히 되었다. 영국에 머무르는 동안 서사시 《앙리아드》(La Henriade, 1728)를 출판하였다.

1729년 프랑스로 귀국했지만 셰익스피어 연극의 영향이 짙은 비극 《자이르》(Zaïre, 1732)에 이어서 발표한 《철학서간》(Lettres philosophiques)이 영국을 찬미하고 프랑스를 비방하였다는 이유로 당국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책은 불태워지고 그의 애인인 사틀레 후작 부인의 영지에 가서 10년간 저술과 연구를 하며 세월을 보냈다. 한때 프랑스 궁정의 역사 편찬관이 되었고 이어 프리드리히 국왕의 초청으로 프로이센에 가서 《루이 14세의 세기》(Le Siècle de Louis XIV, 1751)를 완성하고 그 후 여러 곳을 전전하였다.

수년간을 제네바에서 보내다가 1753년 프랑스령으로 제네바와 가까운 페르네에 정주하며 시·극시·우화·소설·수필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작품을 발표하여 전 유럽에 '볼테르 시대'를 이룩하였다. 진보파의 영수로서 '페르네 장로'라 불렸고 반 봉건, 반 교회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그 중에서도 광신이 원인이 된 부정재판을 탄핵한 카라스 사건 등의 실천운동은 유명하다. 그 소산인 《관용론》(Traité sur la tolérance, 1763)을 비롯하여 역사책 《풍속시론》(Histoire des voyages de Scarmentado écrite par lui-même, 1756), 사상소설 《캉디드》(Candide, ou l'Optimisme, 1759), 《철학사전》(1756)은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작가로서의 볼테르는 비극 작품들과 서사시, 역사물 등을 통해 빠른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은 오늘날에는 별로 읽히지도 않거니와 잘 알려져 있지도 않다. 반면, 나중에 재미삼아 쓰고 익명으로 출간한 콩트들이 오늘날까지 매우 잘 알려져 있다. 그중 가장 많이 읽히고 널리 알려진 작품은 《캉디드》, 《자디그》(Zadig, ou la Destinee, 1748), 《랭제뉘》(L'Ingenu, 1767)이다. 디드로의 『백과전서』 집필에도 참여하는 등 철학자로서, 작가로서,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평생 왕성한 활동을 벌인 볼테르는 84세까지 장수를 누렸지만, 프랑스 대혁명은 보지 못하고 1778년 5월 30일에 죽었다. 1791년에는 국가를 위해 큰 공헌을 한 인물들만 들어가는 팡테옹에 안치되었다.

사상[편집]

개방적인 기독교 신앙[편집]

프랑스 계몽기의 대표적 철학자로 꼽히는 볼테르는 프랑스의 지성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종교적 광신주의에 맞서서 평생 투쟁했던 그는 관용 정신이 없이는 인류의 발전도 문명의 진보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그의 저서들 속에는 당대의 지배적 교회 권력이었던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비판이 꾸준히 등장한다. 그의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가 전통적 가치들의 토대인 기독교 정신을 무너뜨리려 하고, 풍기를 문란케 한다고 비난했다. 나이가 70세에 가까웠을 때는 그 유명한 ‘칼라스 사건’을 계기로 종교적 불관용의 희생자들을 변호하고 돕는 활동들을 사재를 털어가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벌여서 오늘날까지도 관용의 상징적 인물로 존경받고 있다. 볼테르는 개신교종교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진보적인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사상적 관용[편집]

그는 디드로 등의 백과전서파를 적극 지지하고 기독교적인 광신, 종교적 편견, 독단적 형이상학 등을 맹렬히 공격하면서 17세기의 이원론적 경향에 반기를 들어 뉴턴이 확립한 자연과학적 인식을 휴머니즘윤리에 의하여 현실 사회와 결부시키려고 하였다. 그의 회의적 상대주의는 자연 과학적 인식의 현실화·통속화의 결과였다. 만년에는 이론적 회의를 실천적 확신에까지 끌어올려 자연법의 규범성을 신이 준 불변의 법으로 인정하려 하였다. 그가 각광을 받은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으나, 유럽의 모든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저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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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서한 Lettres philosophiques sur les Anglais (1733), revised as Letters on the English (circa 1778)
  • Le Mondain (1736)
  • Sept Discours en Vers sur l'Homme (1738)
  • Zadig (1747)
  • 미크로메가스 Micromégas (1752)
  • 캉디드 Candide (1759)
  • 관용론 Treatise on Tolerance (1763)
  • Ce qui plaît aux dames (1764)
  • Dictionnaire philosophique (1764)
  • 랭제뉘 L'Ingénu (1767)
  • La Princesse de Babylone (1768)

랭제뉘(L'Ingénu)[편집]

볼테르가 『랭제뉘』(L'Ingénu)를 쓴 시기는 1760년대이지만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은 1689년이다. 그런데 이야기 속에서는 두 시기의 다양한 사건들이 서로 뒤섞여 있다. 때문에 당대의 프랑스 독자들은 『랭제뉘』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사건들로부터 당시의 현실들과 관련된 은유적인 부분들을 찾으려 했고, 그러는 가운데서 큰 즐거움을 느꼈다. 이 작품이 그만큼 시사적인 문제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얘기다. 볼테르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케넬 신부의 원고들에서 발췌한 실화(Histoire veritable tiree des manuscrits du Pere Quesnel)’라는 부제를 붙인 것도 그러한 민감한 사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랭제뉘』는 1767년 봄에 집필되고 7월에 인쇄되어 8월에 제네바에서 익명으로 먼저 출간되고 이어서 파리에서도 출간되었으나, 파리에서는 경찰에 의해 즉각 회수되었다.

주제[편집]

주인공 랭제뉘는 이야기 초반에서 아메리카 대륙휴런족 청년으로 소개된다. 아메리카 대륙이 있다는 사실이 유럽에 알려지자,유럽에서는 문명의 발전이 빚어낸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이상적인 인간형을 원시 상태에서 찾고자 하는 흐름이 존재했다. 이로써 볼테르는 당시 유행하던 ‘선한 원시인(bon sauvage)’이라는 문학적·철학적 전통의 흐름을 타는 셈이다. 랭제뉘는 이 작품에서 유럽의 문명에 대한 판을 감행하는 볼테르의 대변자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는 문명을 희생시키고 원시적인 삶을 찬양하는 ‘선한 원시인’ 신화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때문에 그는 작품에서 자신의 ‘선한 원시인’ 랭제뉘에게 문명을 학습할 기회를 제공하며, 이를 통해 이 휴런족 청년은 지식의 습득과 함께 정신적 성장도 하게 된다. 자연 상태에서 오염되지 않았던 그의 자유롭고 순수한 정신이 교육으로 인해서 비로서 을 발하게 된다는 것이 바로 ‘선한 원시인’ 담론에 대한 볼테르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볼테르는 일찍이 『사교계인(Le Mondain)』(1736)이라는 시를 통해 문명의 이점들을 찬미한 바 있다. 즉, 그는 문명의 폐해를 벗어나 자연으로 회귀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과 회복해야할 인간적 덕성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 논박[편집]
  • 기독교 논박
    『랭제뉘』가 이렇게 프랑스 정부 당국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된 바처럼 당대의 프랑스 사회에 대한 다양한 풍자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볼테르는 종교적인 갈등 상황을 묘사하면서 반목하고 있던 장세니스트들과 예수회 양쪽 모두를 포함해서 가톨릭교회 전체를 비난하고 있다. 이 책에 나타난 종교적 비판의 내용은 광신주의에서 비롯된 폭력, 예수회 신부들의 위선과 부패, 성서를 하느님이 구술한 책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실은 매우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순, 장세니스트들의 형이상학적 논쟁 취향, 사랑이라는 자연적 감정에 반대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반자연적 성향 등에 관한 것들이다.
  • 정치 논박
    또한 그는 왕의 봉인장 제도 및 궁정인들의 도덕적 타락, 군대 계급이나 행정직들을 사고파는 제도 등 정치적인 비판에도 힘을 쏟는다. 특히 왕이 마음대로 시민들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봉인장 제도의 폐해는 이 작품의 플롯에서 핵심적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볼테르 자신도 이 제도의 희생자가 되어 두 차례나 바스티유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을 만큼, 봉인장 제도는 18세기의 근본적인 문제이자 주된 관심사로 떠오른 사안이었다.

미크로메가스(Micromégas)[편집]

볼테르가 인식하고 있는 인간과, 그 인간이 깃들이고 있는 지구의 실체는 비참하리만큼 초라하다. 지구라는 이 행성은 기껏 하나의 ‘진흙덩이’ 혹은 ‘진흙 원자’에 불과하다. 또는 하나의 ‘개미탑’이나 ‘두더지 흙두둑’일 뿐이다. 그리고, 광막한 우주 공간에서 그 ‘먼지 알갱이’ 표면에 기생하며 꺼떡거리는 우리 인간의 모습은 ‘벌레’나 ‘좀’의 꼴과 다름없다.[1] 그렇건만, 그 무한히 작은 것이 무한히 거만하다. 심지어, 그 보잘것없는 주제에, 유독 자기들에게만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는 점을 무슨 특권처럼, 혹은 절대자가 내린 신표(信標)처럼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그 영혼이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무도 시원스러운 대답을 하지 못한다. 영혼이란, 소크라테스다이몬(daimon)이나 플라톤이데아 등이 그렇듯이, 그 실체가 규명되지도 정의되지도 않은, 순전한 몽상 내지 망상의 소산일 뿐이다. 물론 망상의 소산이라고 하여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우주에 존재하는 무한수의 생명체들 중 유독 자기들에게만 영혼이라는 그 입증되지도 않은 신표가 있다고 주장하는 일부 인간 집단의 몽상은, 또 하나의 불가사의이며 경이로운 현상이다. 물론 그 현상 역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같은 몽상가들의 유산일 수 있으며, 그것이 아마 미신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한 ‘형이상학’이라는 아귀다툼의 실마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없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예수교의 존속을 가능케 한 자양을 공급한 이들이 그 두 몽상꾼 아닌가? 델포이를 비롯한 여러 곳 신전들의 신탁(信託)[2]과 ‘선지자’란 말은 무관한 것일까? 델포이 신전과 바티칸 신전이 전혀 이질적인 유물일까? 나아가, 프로메테우스크리스토스(Christos)[3]는 전혀 무관한 존재들일까?

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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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편집]

  1. 쟈디그》, 《미크로메가스
  2. 일종의 점괘
  3. 메시아의 그리스어 명칭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