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보들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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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보들레르
Charles Pierre Baudelaire
Étienne Carjat, Portrait of Charles Baudelaire, circa 1862.jpg
샤를 보들레르 (1863년)
출생 1821년 4월 9일(1821-04-09)
프랑스 프랑스 파리
사망 1867년 8월 31일 (46세)
프랑스 프랑스 파리
직업 비평가, 시인
국적 프랑스 프랑스
활동 기간 1844년-1866년
문학 경향 상징주의, 모더니즘
서명
Baudelaire signatur.jpg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프랑스어: 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년 4월 9일 - 1867년 8월 31일)는 프랑스비평가이자 시인이다.

생애[편집]

어린 시절[편집]

보들레르는 1821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보들레르의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François Baudelaire)는 환속한 사제이면서 아마추어 화가였는데 1827년, 보들레르가 6살 때 죽었다. 보들레르는 아버지에게서 유산을 상속받았다. 어린 보들레르를 배려해 가족 내에서 유산 관리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보들레르는 생애 내내 여기서 모멸을 느꼈다. 남편보다 34살 어렸던 고아 출신으로 알려진 보들레르의 어머니 카롤린 뒤페(Caroline Archimbaut Dufays)는 이듬해 권위 의식이 몸에 소령 밴 오픽과 재혼한다. 보들레르와 보들레르의 어머니와의 가깝고도 복잡한 관계가 보들레르의 생활 내내 계속되었다. 그 후에 보들레르는 "나는 그 여자의 고결 때문에 내 어머니를 사랑했지요. 나는 조숙한 댄디였습니다."[1]:13–14라고 말했으며 그 여자에게 쓴 편지에서 “어린 시절에 당신을 열렬히 사랑했던 기간이 있었습니다”라고 쓰기도 했다.[1]:16

보들레르는 리옹에서 교육받았다. 리옹 왕립기숙학교의 학생이 되면서 보들레르는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생활해야만 했으며, 보들레르의 성적이 떨어지면 귀가하지 못하게 하는 의붓아버지의 엄격한 방식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보들레르는 이런 시간을 회상하면서 "탈속의 잔인한 시간에 대한 떨림, … 비참하고 버려진 어린 시절을 대상으로 한 불안, 학교의 강압스러운 친구들을 향한 증오, 그리고 마음의 고독."[1]:30,32이라고 쓴다. 14살 때 학급 친구는 보들레르를 두고 "그 학생은 다른 어떤 학생들보다 세련되었고 독특했지요… 우리는 훌륭한 문학작품을 향한 취향과 공감, 조숙한 사랑으로 서로 묶여있었습니다."[1]:35라고 표현했다. 그 후에 보를레르는 파리의 루이 르 그랑 고등학교의 기숙생으로 편입하게 된다. 보들레르는 공부할 때는 산만하고 이따금 성실했으나 게으른 경향이 있었으나 이미 당시 전국 경시대회 라틴시 부문에서 장려상을 받고 프랑스시 부문에서 2등 상을 받는 등 문학에 유별난 재능을 보였다.[2]:8

18살에 보들레르는 "우아한 성품, 때로는 신비주의에 빠져있고 때로는 비도덕성과 냉소(과도하지만 오직 말로만 이루어지는)로 충만해 있음"[1]:42이라고 묘사되었다. 보들레르는 졸업 직전 학급 친구가 수업 시간에 보들레르에게 보낸 쪽지를 선생에게 보여주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하나[2]:8 그 후에도 가정교사가 도운 덕에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미래를 향한 기대 없이 파리 법과대학에 등록한다. 보들레르는 자신의 형에게 “나는 내가 그 어떤 직업에도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보들레르의 의붓아버지는 보들레르가 법관이나 외교관이 되기를 원했지만 보들레르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이어지는 2년간 불규칙한 생활에서 보들레르는 다수한 보헤미안 화가와 작가를 만난다.[1]:46

사창가를 드나들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입학 전에 이미 처음으로 성병에 걸렸다. 보들레르는 유대인 매춘부였던 사팔뜨기 사라(Sarah la Louchette)와 관계했고 돈이 바닥나면 자신의 형과 동거했던 보들레르그는 돈이 생기면 바로 써 버렸고 옷을 사려고 많은 빚을 냈다. 1841년 의붓아버지는 보들레르를 환락가에서 건져내서 새사람으로 만들려는 희망에서 보들레르를 인도에 있는 콜카타로 보내나 그 고된 여행은 문학을 직업으로 삼으려는 보들레르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고 보들레르가 지금까지 가져왔던 생활 태도도 바꾸지 못했다. 레위니옹 섬의 생드니까지만 갔다가 프랑스로 결국 돌아온 여정에서 보들레르는 열대의 강렬한 풍경에 매료되고 이것은 그 후에 보들레르의 시의 소재가 된다.[2]:10–11

보들레르는 철학스럽게 사색하고 자신의 출판되지 않은 여러 시를 낭송하고자 선술집으로 돌아간다. 21살 때 보들레르는 십만 프랑이 넘는 재산 상당량과 땅 네 군데를 상속받으나 25개월 만에 절반 가량을 탕진해 버린다. 보들레르의 가족은 절망에 차서 금치산을 선고하고 보들레르의 돈을 법정 후견인인 앙셀에게 맡겨 1년에 연금 일정량을 받게끔 한다.[1]:71 이 기간 보들레르는 낭트에서 온 매춘부의 딸이자 아이티 태생 흑백 혼혈인 잔 뒤발(Jeanne Duval)을 만나고 그 여자는 보들레르에게 가장 긴 기간 애인으로 남는다. 보들레르의 어머니는 잔 뒤발을 “모든 방법으로 보들레르를 고문하는” “검은 비너스”이자 기회가 생길 때마다 보들레르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여자라고 묘사했다.[1]:75

작가 데뷔[편집]

1843년 보들레르는 아직 어떤 글도 출판하지 않았지만 예술계에서 보들레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책과 예술작품과 골동품을 사들이는 댄디로 통했다. 전술했듯이 1844년쯤에 친아버지의 유산의 절반을 탕진하였고 어머니를 정기로 찾아가 자신이 작가로 성공할 수 있게끔 돈을 요청한 보들레르는 이 시기에 오노레 드 발자크를 만났고 그 후에 《악의 꽃》에 나타날 여러 시를 쓰기 시작했다.[1]:83

첫 번째로 출판된 보들레르의 작품은 예술 비평 《1845년의 살롱》이었고 그 대담성 때문에 이 책은 출판 직후 대중에게 관심을 끌었다. 들라크루아를 높이 사는 것과 같은 보들레르의 여러 비평은 당시 새로웠으나 그때부터 일반으로 받아들여졌다. 보들레르는 그 자신이 견문이 넓고 열정 있는 비평자라는 사실을 증명했으며 더 큰 예술계에서 관심받게 됐으나[1]:95 그 해 여름에 보들레르의 얼마 안 되는 연금과 쌓이는 빚, 고독, 불투명한 미래에 절망하여, 그 자신에 의하면 “잠이 드는 것의 피곤과 깨어나는 것의 피곤은 견딜 수 없는 것”이기에 보들레르는 보들레르가 상속한 돈의 나머지를 모두 잔 뒤발에게 남기기로 하고 자살을 결심했으나 보들레르는 의지를 잃고 칼로 자신을 상처냈을 뿐이다. 보를레르는 회복 기간 자신의 어머니에게 방문해 달라고 간청했으나 그 여자는 이것을 무시해 버렸다.[1]:101–102 잠시 보들레르는 머물 곳이 없었고 보들레르의 부모는 보들레르의 불쌍한 상태를 다시 연민하기 시작하기 전까지 보들레르와 소원하게 지냈다.

1846년에 보들레르는 자신의 두 번째 살롱 평론을 쓰고 낭만주의의 변호사와 비평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보를레르가 낭만주의 예술가의 선두주자로서 들라크루아를 지지한 행위는 세간에 많이 주목받았다.[1]:110 이듬해 보들레르의 소설인 《라 팡파를로》가 출간되었다.[2]:56

보들레르는 1848년 혁명에 참가했다.[1]:127 몇 년간 보들레르는 공화당 정치에 관심했었으나 보들레르의 정치 성향은 확고한 확신이기보다는 감정에 경도된 상태였기에 프루동무정부주의로 돌아섰다. 보들레르의 의붓아버지도 혁명에서 잡혔으나 교수형에서 살아남았으며 신정부는 왕족을 대상으로 한 보들레르의 충성심에도 보들레르를 터키로 가는 비밀 사절로 임명했다.[1]:125

1850년 보들레르는 악화한 건강과 많은 빚, 비정기인 창작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보들레르는 거처를 자주 바꾸고 돈을 자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의 어머니와 불편한 관계를 계속했다. 보를레르는 감당하기 힘든 많은 작업을 떠맡았으나 에드거 앨런 포의 책을 번역을 끝마쳤다.[1]:181 보들레르는 어린 시절에 영어를 배웠고 포의 단편과 같은 괴기 소설은 보들레르가 좋아하는 장르 중 하나이고 보들레르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악의 꽃》[편집]

보들레르는 느리고 까탈스러운 작가였고 종종 게으름과 감정에 치우친 고통과 병환으로 작업을 미루곤 했다. 1857년에 가서야 보들레르의 첫 시집이자 가장 유명한 작품인 《악의 꽃》(Les fleurs du mal)이 마침내 출판되었다.[1]:191 이런 시 중 몇 편이 이미 《르뷔 데 되 몽드》(Revue des deux Mondes)에 소개된 적이 있었다. 안목 있는 소수 독자들만이 《악의 꽃》을 읽었으나 여러 시의 주제는 큰 쟁점이 되었다. 다른 작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고 막대하며 예측불허였고 선망과 정의할 수 없는 공포와 뒤섞여” 있었다.[1]:236 당시 《보바리 부인》의 소재를 다룬 방식이 풍기문란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재판받았던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보들레르에게 보낸 편지에 “당신은 낭만주의를 새롭게 할 방법을 찾아냈소. 당신은 대리석만큼 견고하고 영국의 안개처럼 예리하군요"[1]:241라고 썼다.

《악의 꽃》의 주제인 섹스와 죽음은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졌으며, 보들레르는 레즈비언 관계, 성스럽고 불경한 사랑, 변형, 우울, 도시의 붕괴, 사라진 순수성, 생의 억압성을 주제로서 다뤘다. 노스탤지어를 일깨우는 후각과 향기의 이미지가 《악의 꽃》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나[1]:231 《악의 꽃》은 불건전하다는 이유로 당대 주류 비평가들 사이에 웃음거리가 되었다. 몇몇 비평가는 보들레르의 시 몇 편을 “열정과 예술, 시의 여러 대작”이라고 칭했으나 여타 시는 판매 금지를 목적한 법 제제가 당연시되었다.[1]:232-237 보들레르를 고발했던 비평가 하바스는 《르 피가로》에 “이 시집에서 흉측하지 않은 것이라곤 이해 불가능한 것들뿐이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타락한 것들뿐이다"라고 쓰자 보들레르는 이 항의에 대답으로 자신의 어머니에게 예언성을 띤 편지를 썼다.

어머니는 내가 항상 문학과 예술이 도덕에서 독립된 목적을 추구한다고 생각해 왔던 것을 압니다. 내게는 구상과 스타일의 아름다움이면 족하나 당신도 알게 되겠지만, 이 《악의 꽃》이라는 책은, 차갑고 불길한 아름다움을 입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노와 인내로 쓰인 책인 데다가 이 책의 바람직한 가치의 증거물은 사람들이 이것을 말하는 악 내에 있습니다. 이 책은 사람들을 화나게 할뿐만 아니라 내가 느껴야 하는 고통이 두려워 나는 그 증거들 중 삼분의 일 가량을 잘라 버렸습니다. 그사람들은 내게서 일체를 부정합니다. 발명의 정신과 심지어 국어를 대상으로 한 지식까지도. 나는 이 모든 바보짓꺼리는 신경쓰지 않고 미덕과 단점이 있는 이 책이 문학상 소양이 있는 독자들에게 빅토르 위고테오필 고티에 심지어 조지 고든 바이런의 여러 명시와 나란히 기억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1]:238

보들레르와 보들레르의 출판업자들은 풍기문란죄로 고소당했고 결국 벌금을 물게 되었으나 수감형에 처해지지는 않았다.[1]:248 이 시 6편은 그 후에 브뤼셀의 다른 출판사에서 《잔해들》(Les Épaves)이란 제목으로 다시 출판되었다. 1861년에 6편이 삭제된 시 상당양이 첨가되어 《악의 꽃》의 또다른 판본이 출판되었다. 많은 유명인사가 보들레르 뒤에 결집하여 법원의 판결을 비난하였다. 보들레르가 탄원하지는 않았지만 보들레르의 벌금은 감경됐다. 거의 100년이 지나서 1949년 5월 11일, 보들레르가 무죄라고 판결됐고 보들레르의 삭제된 시 6편이 프랑스에서 재출판되었다.[1]:250

사양길[편집]

1858년 보들레르는 파리를 떠나 바닷사의 옹플뢰르에 정착하려 하나 잘 되지 않는다. 다음해 잔 뒤발이 중풍 발작을 일으키고 반신불수가 되자 보들레르는 잔 뒤발을 보살피려고 잔 뒤발과 동거한다. 1860년까지 보들레르는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인 《고든 핌의 모험》을 번역하고 작가론 <테오필 고티에>와 <리하르트 바그너탄호이저>라는 평론 한 편을 쓰는 등 작문행위를 계속한다. 1861년 잔 뒤발의 또다른 애인이 보들레르와 잔 뒤발이 동거하는 집에서 동거하게 되자 보들레르는 잔 뒤발을 떠난다. 보들레르는 이런 상황과 매독 재발, 상처받은 자존심과 좌절된 창작욕으로 자살 충동을 느끼고 빚을 갚고자 발표되지 않은 작품의 저작권까지 모두 팔아 버린다.[2]:24–27

1861년 보를레르는 "진정한 문인이 부끄러워하지 않고 바랄 수 있는 유일한 명예란 아카데미 회원이 되는 일"이라며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입후보하려고 시도하나 이내 그것이 광기 어린 실수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이때 당대 문단의 실세였던 비평가 샤를 오귀스탱 생트뵈브도 보들레르의 입후보를 맹비난하고 철회하라고 공개로 촉구한다. 보들레르는 처음에는 샤를 오귀스탱 생트뵈브가 한 주장에 반대하나 나중에는 그 남자가 한 요구를 결국 받아들인다.[2]:27-28

말년[편집]

말년에 자살을 자주 생각했고 어머니와 잔 뒤발을 걱정한 보들레르는 프레스誌에 《파리의 우울》에 담길 자신의 여러 산문시를 발표하고 《들라크루아의 작품과 생애》와 《현대 생활의 화가》를 쓰나 그런 시는 이내 "독자들을 권태롭게 한다"는 이유로 중단된다.[2]:29-31

1864년 빚에 쪼들리던 보들레르는 브뤼셀에 가서 책을 출판하고 강연하려하나 출판업계는 보들레르에게 냉담했다. 그 시기에 스테판 말라르메폴 베를렌가 보들레르를 찬양하는 글을 기고하며 보들레르는 상징주의의 아버지로 추앙받으나 보들레르는 이것을 반기지 않고 되려 경계하며 귀찮아한다.[2]:31–33

이 시기에 보들레르는 이미 계속되는 성병과 중풍으로 건강이 매우 악화했고 빚에 여전히 쪼들리고 있었다. 결국 보들레르는 요행원에 지내다가 파리로 돌아오고 1867년 8월 죽는다.[2]:33–34

보들레르와 상징주의[편집]

상징주의를 설명하고자 우리는 기술상 난점에도 문학사조 간 상호 관계를 부득이 일별해 보아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상징주의는 이전 낙관주의에 기초한 사조나 여러 사회사상을 대상으로 한 반발 일종으로 태동하였다. 즉 사회사상으로서의 사회주의(socialisme), 과학만능주의(scientisme), 실증주의(positivisme)은 상징주의가 행할 ‘모든 가치 전도’의 대상이었으며, 상징주의 이전 시기를 풍미했던 고답파(le Parnasse),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를 대상으로 해서도 마찬가지였으나 우리는 후자를 대상으로 해서는 상징주의가 적극인 부정만을 행하였다고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 상징주의는 고답파의 유미주의 선언처럼 보이는 저 전언,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의 개념에서 지대히 영향받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기에 보들레르는 자신의 《악의 꽃》을 테오필 고티에에게 헌사할 수 있었다.

프랑스 문학의 상징주의를 살펴보려면는 그것에 앞선 고답파의 시론 검토해야 유용하다. 고답파는 과학에 기초한 방법론을 이용해 사물을 객관으로, 정확하게 보고 그것을 시에서 형상화하게 하려고 목표하였다. 즉 과학과 예술의 행복한 결합을 꿈꿔 온 고답파의 고티에에게 예술가는 놀라우리만치 정확한 눈과 손의 확실성이 있고 마치 그림이 실현할 수 있음직한 정확하고 고유한 느낌을 말로 형상화하게 하는 사람이지만, 고답파는 시의 회화다운 조형성에 지나치게 치중한 나머지, 시를 이용한 형이상학까지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바로 이 지점이 상징주의의 정신주의(spiritualisme)가 부재하는 지점이고 고답파가 종국에는 현실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요약하면, 고답파에게 예술의 이상은 칸트 미학에서 말하는 ‘무관심한 쾌’ 혹은 ‘예술의 무목적성’ 일종으로 설정되어 있고 시인의 주관성을 중시하기보다는 고대의 테크네(τέχνη)다운 예술 개념을 고수하고 있었다.

독일 낭만주의에 있어 30년 전쟁이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듯, 프랑스 문학사에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의 참패가 미치는 영향도 그러하다. 보불전쟁에서의 패배는 상징주의를 태동하게 하는 물질상 토대로 작용하였는데 이것은 그 전 프랑스에 팽배했던 진보를 대상으로 낙관 일련이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프랑스의 예술과 관련된 기운은 퇴폐주의(décadentisme)을 거쳐 드디어 상징주의로 이행하게 된다.

우선 상징주의의 현실 인식은 상징주의에서 현실은 가상 하나로 존재하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플라톤주의(platonisme)의 영향하에 있지만 상징주의와 플라톤 철학 사이의 변별점은 개개 현상에 하나의 본질로서의 관념(idée)이 상징주의의 세계관에 포함되어 있으며 플라톤 철학이 세계의 이원론에 기초한 구조를 상정했다면 상징주의는 더 나아가 이원론(dualisme)에서 출발하여 궁극으로는 일원론에 토대한 세계로 이행하고자 한다. 상징주의의 초월하는 세계 인식은 가상의 현실, 즉 ‘상징의 숲’을 시인이 직관을 이용한 해독을 의미한다. 자신의 내부에 본질로서의 관념을 내포하는 현상으로서의 세계는 완전하게 자족스러운 존재(ens a se)가 되지는 못하나 인식 주체, 즉 시인이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를 이용해 하나의 실상 존재자로 도약하게 되서 상징주의는 현실 세계를 초월하고자 하지만, 현실 세계야말로 시인에게 ‘때때로 모호한 말을 새어 보내고 친근한 눈길로 그를 지켜보는 상징의 숲(보들레르의 《조응》에서)이자 시인에게 상징을 이용해 자신의 존립성과 진실성의 빛을 발하는 존재이므로 현실 세계 자체를 폐기하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상징은 하나의 기호이면서 하나의 의미이다. 물론 일반 언어와 상징 언어 양자가 공히 기호이면서 의미이지만 양태가 문제가 된다. 상징은 단순히 약속되고 정태스러운 기호라는 정의에서 탈피하여 배후에 스스로 지닌 은폐되고 불명료한 형이상학에 기초한 본질(이나 관념)이 파악되기를 기다리는 역동하는 기호이기에 상징이 유추나 암시를 이용해 기호에서 의미에로의 간접이고 우회인 초월을 감행한다고 말할 수 있다. 되풀이하면, 상징은 해석자가 부재하고 그것과의 관계에 존재하지 못한다면 한갓 무의미한 대상에 불과하다. 앙리 페르의 정의를 인용하면, ‘그러므로 상징은 하나의 기호이되, 그 빛을 받고 감동하여 그 뜻을 이해하고자 하거나 그 신비를 캐내고자 하는 사람에 의해 해독되고 설명되기를 요구하는 기호’이다.

대표시[편집]

  • 교응(Correspondances)
자연은 살아 있는 기둥들이

때때로 모호한 말을 새어 보내는 사원.
사람들은 친근한 눈길로 자기를 지켜 보는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그곳으로 들어간다.

어둠처럼 빛처럼 드넓으며
컴컴하고도 심원한 통일 속에서
긴 메아리 멀리서 섞이어 들듯
향과 색과 소리가 서로 화답하네.

어린 아이들의 살처럼 싱그럽고
오보에처럼 달콤하고 초원처럼 푸르른 향내,
또 그밖에도 썩고 풍만하고 의기양양한 것들.

정신과 향기의 교통을 노래하는
용연향, 사향, 안식향, 훈향처럼
끝없는 사물의 확산을 가진다.

  • 취해라 (Enivrez-vous)
언제나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은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이다.
그대의 어깨를 짓부수고 땅으로 그대 몸을 기울게 하는
저 '시간'의 무서운 짐을 느끼지 않기 위하여,
쉴새 없이 취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에?
술이건 시건 또는 덕이건, 무엇에고 그대 좋도록.
그러나 다만 취하여라.
그리고 때때로, 궁전의 섬돌 위에서, 도랑가의 푸른 풀 위에서, 그대의 밤의 침울한 고독 속에서, 그대가 잠을 깨고, 취기가 벌써 줄어지고 사라져 가거들랑, 물어보라, 바람에, 물결에, 별에, 새에,시계에, 사라져 가는 모든 것에, 울부짖는 모든 것에, 흘러가는 모든 것에, 노래하는 모든 것에, 말하는 모든 것에, 물어보라, 지금은 몇 시인가 를.
그러면 바람도, 물결도, 별도, 새도, 시계도, 그대에게 대답하리, "지금은 취할 시간! '시간'의 학대 받는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하여, 끊임없이 취하여라! 술이건, 시건, 또는 덕이건, 무엇에고 그대 좋도록." 

저서 목록[편집]

  • Salon de 1845, 1845
  • Salon de 1846, 1846
  • La Fanfarlo, 1847
  • Les Fleurs du mal, 1857
  • Les paradis artificiels, 1860
  • Réflexions sur Quelques-uns de mes Contemporains, 1861
  • Le Peintre de la Vie Moderne, 1863
  • Curiosités Esthétiques, 1868
  • L'art romantique, 1868
  • Le Spleen de Paris|Le Spleen de Paris/Petits Poèmes en Prose, 1869
  • Oeuvres Posthumes et Correspondance Générale, 1887-1907
  • Fusées, 1897
  • Mon Coeur Mis à Nu, 1897
  • Oeuvres Complètes, 1922-53
  • Mirror of Art, 1955
  • The Essence of Laughter, 1956
  • Curiosités Esthétiques, 1962
  • The Painter of Modern Life and Other Essays, 1964
  • Baudelaire as a Literary Critic, 1964
  • Arts in Paris 1845-1862, 1965
  • Selected Writings on Art and Artist, 1972
  • Selected Letters of Charles Baudelaire, 1986
  • Critique d'art; Critique musicale, 1992

주석[편집]

  1. Joanna Richardson, ‘’Baudelaire’’, St. Martin’s Press, New York, 1994, ISBN 0-312-11476-1.
  2. 이건수 (2006). 《저주받은 시인 보들레르》. 서울: 살림출판사.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