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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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로스웰이 1840년에 그린 메리 셸리의 초상화

메리 셸리(Mary Shelley, 혼전이름: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고드윈 Mary Wollstonecraft Godwin, 1797년 8월 30일 ~ 1851년 2월 1일)는 영국소설가·극작가·수필가·전기 작가이자 여행 작가이다. 그는 또한 낭만주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남편 퍼시 비시 셸리의 작품을 편집하고 소개하기도 하였다. 정치철학자 윌리엄 고드윈, 철학자이자 여권운동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부부의 딸이다.

메리 고드윈은 고작 생후 11일에 모친을 여의었는데, 이후 배다른 언니인 패니 임레이와 함께 부친의 손에서 자라났다. 메리가 네 살 때, 부친 윌리엄 고드윈은 그의 이웃 메리 제인 클레어몽과 결혼했다. 고드윈은 딸에게 자금·학술·교육 면에서 모든 자원을 아끼지 않고 지원해 그가 그의 자유주의 정치 이론에 동참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1814년에 메리 고드윈은 부친의 정치적 추종자 중 한 사람, 나중에 남편이 되는 퍼시 비시 셸리와 연애하기 시작한다. 메리의 배다른 자매 클레어 클레어몽과 함께 이 둘은 프랑스로 떠나 유럽을 여행하게 되는데, 그들이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메리는 퍼시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이 후 2년 동안, 그와 퍼시는 도편 추방과 계속된 자금난을 겪게 되고, 이 와중에 뱃속의 딸을 유산하였다. 퍼시 셸리가 그의 첫 번째 부인인 해리엇과 사별한 뒤, 이 둘은 1816년 말엽에 혼인하였다.

1816년, 부부는 바이런 경존 윌리엄 폴리도리, 클레어 클레어몽과 함께 스위스 제네바 근방에서 여름을 보낸 것으로 유명한데, 이곳에서 메리는 그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큰 틀을 구상하였다. 셸리 부부가 1818년에 영국을 떠나 자리잡은 이탈리아는, 그들의 아이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는 넷째 아이 퍼시 플로렌스를 낳기 전, 둘째와 셋째 아이를 잃은 곳이다. 1822년에 그의 남편은, 라스페치아 근해에서 항해 중 폭풍을 만나 타고 있던 배가 침몰하여 익사하였다. 일 년 뒤 메리 셸리는 영국으로 돌아왔고, 이 때부터 그의 여생을 아들의 양육과 전문 작가로서의 활동에 헌신하며 보냈다. 그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십 년을 지루한 투병생활로 보냈는데, 그가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을 두고 사람들은 뇌종양이 원인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1970년대 까지의 메리 셸리는 주로 남편 퍼시 셸리의 작품을 출판하는 데 참여한 공로와, 전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고 많은 희곡과 영화로 재구성되고 있는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작가로만 대중에게 알려져 있었다. 최근에서야 학계는 메리 셸리가 남긴 자료를 조금 더 포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가치를 인정하였다. 문단에서는 점차 그의 집필 자료들, 특히 역사소설 《발퍼가》(1823)와 《퍼킨 워벡의 행운》(1830), 묵시소설 《최후의 인간》(1826), 그리고 그가 남긴 마지막 두 소설 《로도어》(1835)와《포크너》(1837) 등, 그가 남긴 소설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기행문 《1840, 1842, 1843년 독일과 이탈리아 산책》(1844)과 다이어니셔스 라드너의 전기문인 《잡동사니 백과사전》(Cabinet Cyclopaedia)(1829~46) 등 그의 덜 알려진 작품들에 대한 연구는 메리 셸리의 생애 전반에서 정치적 급진주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평가를 뒷받침한다. 메리 셸리는 종종 작품을 통해 당시 여성들이 가정에서나 보여주던 협력과 조화로 시민 사회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시선은 부친 윌리엄 고드윈으로부터 물려받은 계몽주의 정치론과 남편 퍼시 셸리의 조력에 기인했으며, 개인주의가 팽배했던 낭만주의의 품위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저서[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