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아르투르 쇼펜하우어or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년 2월 22일 ~ 1860년 9월 9일)는 단치히 태생의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이다.

쇼펜하우어 간단 연보[편집]

-미완-

생애 단순 설명[편집]

쇼펜하우어는 1788년 상인 하인리히 플로리스 쇼펜하우어 (Heinrich Floris)와 요한나 헨리에테 트로지에너 (Johanna Heriette Trosiener) 사이에서 당시의 한자동맹의 회원인 자유도시 단치히에서 태어났다. 1793년 단치히가 프로이센의 지배하에 들어간 후 쇼펜하우어 가족은 함부르크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 하인리히는 자신의 회사를 아들이 나중에 이어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상업과 관련된 교육을 받게 하였다.

1797년부터 1799년까지 쇼펜하우어는 프랑스르 아브르에 사는 아버지와 사업 관계로 친분이 있는 상인의 집에서 묵으면서 프랑스어를 배운다. 1803년에 가족은 약 1년간에 걸쳐 유럽을 두루 여행하며, 1804년에 쇼펜하우어는 영국에 남아 윔블던에 머무르면서 영어를 배운다. 1805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는 여동생 아델레와 함께 바이마르로 이사했고 쇼펜하우어는 함부르크에 남아서 1807년까지 상업학교를 다닌다.

1811년 쇼펜하우어는 괴팅겐 대학교에 입학하여 한 학기 동안 자연과학과 철학(특히 플라톤칸트)를 깊이 공부한 후 가을에 당시의 독일에서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베를린대학으로 옮겨슐라이어마허피히테의 강의를 듣는다. 1813년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Über die vierfache Wurzel des Satzes vom zureichenden Grunde)라는 논문을 제출해서 예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같은 해에 쇼펜하우어는 어머니의 문학살롱에 자주 드나들던 괴테와 친분을 맺은 후 괴테의 색채론을 주제로 자주 접촉하였다. 사이가 나빴던 모자관계는 1814년에 절정에 이르러 쇼펜하우어는 어머니 요한나와 살아 있는 동안 서로 보지 않기로 합의를 한 후 드레스덴으로 이주한다. 1816년 아이작 뉴턴을 비판하고 괴테를 지지하는 논문 《보는 것과 색채에 관하여》(Über das Sehen und die Farben)을 출판했다.

쇼펜하우어가 쓴 이력서에 따르면 1819년 드디어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독창적인 철학을 구상해서 약 5년간에 걸쳐 구상하고 집필한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출판하였다. 같은 해이탈리아 여행 길에 나선다.

1820년에 쇼펜하우어는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다. 일부로 헤겔과 동 시간대에 강의를 했지만 당시 뛰어난 학자라며 칭송받던헤겔의 강의와는 달리 쇼펜하우어의 강의를 들으려 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의 재주를 알아본 사람도 거의 없었다.

1833년 프랑크푸르트에 정착하였다.

파일:Http://en.wikipedia.org/wiki/File:Slaves ruvuma.jpg
유럽 국가들의 노예가 된 흑인들.

쇼펜하우어 이야기 (기구한 만남)[편집]

기구한 만남ㅡ쇼펜하우어는 단치히(Danzig)에서 무역 사업을 벌이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쇼펜하우어의 증조할아버지 요한은 곡물, 목재, 커피 무역으로 활약한 사업가였다. 할아버지 안드레아스가 사업을 맡았을 때도 프러시아의 왕이 직접 방문할 정도로 쇼펜하우어 집안은 단치히에서 크게 활동한 무역상이었다. 쇼펜하우어의 할아버지 안드레아스는 네덜란드계의 안나레나테 죄르만과 결혼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할머니가 되는 안나레나테는 여성인데도 폭력을 휘두르고 불안해하다가 정신병원에 자주 입원하는 등 문제가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


할머니의 이런 문제는 유전적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가 낳은 자식들, 다시 말해 쇼펜하우어의 아버지와 삼촌들도 문제가 있었다. 1명은 중증 정신지체 장애인이었고 1명은 34살에 미쳐 죽었다고 한다. 쇼펜하우어의 아버지 하인리히도 원만한 성격은 아니었다. 꼭 유전 때문인 것은 절대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추론해볼 수 있는 것이다.


ㅡㅡ 하인리히 플로리스 쇼펜하우어(Heinrich Floris Schopenhauer)(1747-1805) ㅡㅡ


쇼펜하우어의 아버지 하인리히는 할머니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우울증이 있기는 했으나,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아 부지런하게 운영했다. 그는 사업가답게 자유주의자이면서도 성격이 굳세고 자존심이 센 사람이었다. 쇼펜하우어 집안이 사업을 벌였던 단치히는 프로이센(지금의 독일), 폴란드 왕국에 둘러싸여 있고 바다를 접하고 있어서 무역 사업을 하기는 좋지만, 자주 전쟁이 벌어지고 합병되었다가 독립되는 상황이 반복된 역사를 지닌 곳이다.

쇼펜하우어가 태어나기 5년 전에는 프러시아가 단치히를 봉쇄해서 식량과 가축 사료가 부족해졌다. 이 때 프러시아 장교는 쇼펜하우어의 아버지에게 집을 장교 숙소로 제공하면, 말 사료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아버지 하인리히는 ‘필요 없다. 사료가 떨어지면 말을 다 죽이겠다. 라고 응수했다. 이 때문에 쇼펜하우어 집안은 나중에 단치히프로이센에 합병되자 보복이 두려워서 이사를 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ㅡㅡ 20대의 요한나 쇼펜하우어(Johanna T. Schopenhauer)(1766 – 1838) ㅡㅡ


쇼펜하우어의 어머니 요한나 헨리에타 트로지너(Johanna Henrietta Trosiener)도 단치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생기발랄하고 열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독일에서 처음으로 유명한 여류 작가가 될 정도로 재주가 있었다. 그녀의 집안도 중산층이었고 아버지 크리스티안 하인리히 트로지너(Christian Heinrich Trosiener) (쇼펜하우어의 외할아버지)는 시의원이었으나, 쇼펜하우어 집안과는 세속적인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었나 보다. 38세의 하인리히가 청혼했을 때 그녀는 아직 십대 소녀였다. 그러나 평소에 쇼펜하우어 집안을 존경했던 그녀의 부모는 기뻐했다고 한다. 이 때,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으나, 18세기 초에는 여자가 자기 마음대로 결혼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녀의 부모는 결혼을 결정했고, 그녀는 애인을 포기하고 20살이나 많은 사업가와 결혼하게 된다. 이 때 그녀의 나이는 18살이었다. 남편 하인리히는 다정한 남편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릴 때부터 자유롭고 싶었던 그녀는 엄격한 남편을 만나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척 연기를 해야 했다. 하인리히와 요한나가 결혼하고 4년 정도가 지나자, 단치히는 사방의 강대국들에게 위협을 당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앞으로 자유롭게 사업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앞으로는 영국에서 사업 기반을 닦아야겠다고 결심한 하인리히는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영국 런던으로 장기 여행을 떠났다.


남편에게 강제로 끌려온 처지였지만 아내는 런던에 금방 적응했고,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아직 10대에 불과한 그녀가 생기발랄한 본색을 드러내자, 사람들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런 광경을 지켜 본 남편이 그냥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질투심과 불안에 사로잡힌 나머지, 갑자기 여행을 취소하고 임신 6개월째인 아내를 끌고 단치히로 돌아왔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단치히의 겨울은 매우 추웠다. 아내는 반항했으나 소용없었다.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녀는 감옥의 죄수같았다. 혼자 슬픔을 안고 살아야 했다. 결혼하고 몇 년 지난 후 요한나는 ‘돈과 명성 때문에 결혼하면, 천벌을 받는다’라고 젊은 여자들에게 얘기했다. 이는 분명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얘기일 것이다.


ㅡㅡ Danzig, Polen, ehem Heiligegeistgasse (ul. Św. Ducha)(사진: Pumeks. 2006) 쇼펜하우어는 단치히 하일리겐가이스트 114번지에서 태어났다. 현재 단치히폴란드에 속해있고, 이름은 그단스크(Gdańsk)로 바뀌었다. ㅡㅡ


요한나는 1788년 2월 22일에 아들을 출산했다. 원래 요한나는 아들을 친정 엄마 집에서 낳고 싶어했으나, 남편은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버지 하인리히는 아들의 이름을 ‘아르투어’(Arthur)라고 지었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이 태어나기 2년 전에 이름을 지어놓은 상태였다. 쇼펜하우어의 이름 ‘아르투어’(Arthur)(영어로는‘아서’)는 독일어, 불어, 영어 철자가 똑같고, 독일보다는 영국에 훨씬 많다. 쇼펜하우어의 아버지는 언젠가 영국에서 사업할 것을 대비해 아들의 이름을 영국식으로 지은 것이다. 아들을 가업을 계승하는 사업가로 키우고 싶었다는 얘기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엄격하고도 질투에 불타는 아버지와 남편을 무서워하고 슬퍼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애정이 없는 결혼이었다.


쇼펜하우어의 어머니 요한나는 출산 후 몇 개월 동안은 아기를 ‘인형’처럼 보살폈지만, 몇 달 만에 싫증이 났고, 집안에 갇혀 사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도 쌓여갔다. 쇼펜하우어의 인생을 알아보면 특이한 점을 알 수 있는데,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상대방이 이상하다고 느끼면 경멸하는 성격이 있었다는 것이다. 뻣뻣한 아버지조차 '남들과 어울려야 한다' 라고 말했을 정도로 쇼펜하우어는 어릴 때부터 혼자 놀았으며, 어른이 되어서도 거의 그대로였다.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쇼펜하우어를 멀리했고, 친구와는 거의 교제를 하지 않았다. 쇼펜하우어의 유난히 속물을 경멸하는 독창적인 성품과 쇼펜하우어의 저작에서 강하게 드러나는 고독한 느낌은 이러한 유전, 가정환경을 가지고 추론해 볼 수 있다. ㅡㅡㅡ


하지만 쇼펜하우어가 고독했다고 해서 세상과 '고립'된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플라톤, 탈레스, 제논, 데카르트, 스피노자, 데이비드 흄, 존 로크, 블레즈 파스칼, 뉴턴, 애덤 스미스, 칸트, 키에르케고르, 니체, 귀스타브 르 봉, 알프레드 노벨, 니콜라 테슬라, 라이트 형제, 비트겐슈타인 등은 독신자들이었기 때문에, 삶을 학문에 온전히 바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유난히 철학 등 이런 부류의 인간 중에는 독신이 많았고, 고독했던 사람이 꽤나 많았다.


이들 중에는 위대한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처럼 가난에 시달리는 생활을 했던 사람도 있지만, 귀스타브 르 봉의 경우에는 의학을 연마하여 돈을 벌기도 해서 학문에 삶을 바쳤다. 애덤 스미스, 쇼펜하우어같은 경우는 약간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매우 검소하고 부지런했고, 재산을 허무하게 탕진한 일이 없었다. (고독했던) 철학자 중에 독신이 유난히 많은 것은 플라톤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ㅡㅡㅡㅡㅡ

쇼펜하우어 이야기 (인간 세상은 무서운 곳이다)[편집]

ㅡ인간 세상은 무서운 곳이다ㅡ 쇼펜하우어는 어릴 때부터 ‘학자’ 기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버지 하인리히는 사업가로 키우려고 비즈니스 학교에 보냈으나, 이 우울한 소년은 무역, 사업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틈만 나면 집에 있는 커다란 서재를 들락거렸다. 책을 좋아하는 엄마조차 ‘그만하면 많이 봤잖아, 책 좀 그만 읽어라’고 야단칠 정도로 소년은 집요하게 책을 읽었는데 철학, 문학, 역사를 깊이 공부했다. 학교에서도 그랬는지, 비즈니스 학교 교장은 아예 김나지움(인문계 고등학교)에 보내면 잘 할 것이라고 아버지 하인리히에게 말했다.


아버지 하인리히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온 가업을 물려받아야 하는데 학자가 무슨 말인가? 안 그래도 사업이 잘 풀리지 않는데, 아들마저 저 모양이니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었다. 아버지 하인리히가 보기에, 학자는 굶어 죽는 직업이었다.


쇼펜하우어의 어머니 요한나도 집안에 갇혀 사는 신세가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외국에 다시 가보자고 남편을 졸랐으나, 하인리히는 어지러운 세상에 한가롭게 여행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업이 어려워지고 아들을 후계자로 키워야 한다는 느낌에 계속 시달리면서 하인리히도 점점 지쳐갔다. 게다가 아들이 외국에 가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결국, 하인리히는 기분 전환을 하고, 아내의 비위를 맞추고, 아들 문제를 해결한다는 1석 3조의 효과를 위해 마음을 바꾸게 된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아들 쇼펜하우어에게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앞으로 사업 공부를 계속한다고 약속하면, 1년 동안 해외여행을 하게 해준다. 그래도 학자가 되고 싶으면, 집에 혼자 남아라.’ 아무리 공부를 좋아하는 아이라도 ‘해외여행 갈래? 집에서 혼자 공부할래?’ 물어보는 것은 차라리 고문이라 하겠다. 대답은 뻔하다. 이때는 아무나 해외여행을 갈 수 없었다. 보통 사람들에게 외국은 가끔 그림책에서 볼 수 있는 별나라였다.


결국, 소년은 여행을 갔다와서 계속 사업을 배우기로 하고,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났다. 1803년, 아버지 하인리히는 6살짜리 딸을 친척에게 맡긴 다음,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스위스, 영국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해서 1년이 넘는 시간을 유럽 여행으로 보냈다. 아버지 하인리히는 쇼펜하우어에게 여행 일기를 쓰게 했다.


이 예민한 사춘기 소년은 1년이 넘는 유럽 여행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소년은 프랑스에서 몇 년전에 같이 살았던 친구 앙티엠을 다시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소풍을 갔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 툴룽에 들러 아름다운 농장을 둘러봤다.


그런 다음, 쇼펜하우어 가족은 바닷가에 있는 무기 공장을 방문했다. 쇼펜하우어는 무기 공장에서 목격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무기 공장안에는 엄청나게 많은 흑인들이 쇠사슬에 묶인 상태로 힘든 노동을 하고 있었다. 사형 당하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대로 죽을 수가 없는 이 사람들을 보고 경악했다. / 쇼펜하우어 ‘1804년 여행일기’

유럽 제국의 포로가 되어 강제 노동을 하는 노예들 - http://en.wikipedia.org/wiki/File:Slaves_ruvuma.jpg


18세기부터 유럽 국가들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본격적으로 흑인을 노예로 삼아 대려오기 시작했다. 쇼펜하우어가 봤던 노예들도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프랑스로 끌려왔을 것이다. 유럽 제국주의는 아프리카 원주민 수 천만명을 노예로 삼아 부려먹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방관하는 종교에 대해서 쇼펜하우어가 큰 환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2천만 명이 넘는 노예가 있으며, 특히 동남아시아에 많다.

쇼펜하우어의 충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파리에서는 사람의 목을 자르는 단두대를 보았다. 영국 런던에서 몇 달 지내는 동안에도 사람이 공개 처형당하는 모습, 군인들이 채찍으로 폭행 당하는 모습, 그리고 전쟁이 터진다며 날뛰는 사람들을 봤다. 소년은 가난한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는 런던의 빈민가를 혼자 걸어 다니다가, 거지들이 경찰에게 질질 끌려 다니는 모습도 봤다. 그렇지 않아도 우울하고 예민했던 소년은 이런 광경을 보고 경악 했고, 인생이 비루하다는 생각을 했다. 소년은 그 옛날 석가모니가 궁궐 밖에서 병자들과 노인들, 시체를 처음 보고 어떤 충격을 받았을지 헤아렸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존경하는 칸트와는 대조적인 부분이 있는데, 바로 여행에 대한 것이다. 칸트는 거의 평생 동안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데카르트가 '세상이라는 거대한 책'이라고 방법서설에서 말하였는데, 그와 같이 긴 여행을 통해 몸으로 현실을 인식하고 체험하며 사색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여행은 쇼펜하우어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여행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정규 교육과는 다른 방식의 길을 걸었다. 그 덕에 어릴 때부터 사물의 이름만을 암기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게 되었다. 사물을 관찰하고, 탐구하고, 나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다음에 비로소 인식하였고 이해하게 되었다. 별 의미를 모르면서 책을 읽고 단어를 암기만 하는 것보다 그런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단어를 아는 게 사물 그 자체를 아는 것이라는 착각을 안하게 됐다...'


‘하느님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천만에. 이 세상은 악마가 만들었어.’ 18세의 청년 쇼펜하우어는 일기에 또한 이렇게 적었다.



ㅡㅡㅡㅡㅡㅡ

쇼펜하우어 이야기 (고독한 인간의 공부)[편집]

‘삶은 어렵고 불쾌한 겁니다. 나는 이러한 삶에 대해 깊이 사유하며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 쇼펜하우어 (1811년, 빌란트(Wieland)에게 쓴 편지)


쇼펜하우어는 늦게 공부를 시작했으나, 엄청난 흥미와 열정으로 임해서 다른 학생들을 금방 따라 갔다. 또한 고전 문학과 고대 그리스 사상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쇼펜하우어는 고전을 공부하면서 글솜씨가 좋아졌다고 생각했다. 이 때 쇼펜하우어는 연극배우 카롤리네 야게만(Karoline Jagermann)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녀를 집에 데려오겠다고 어머니에게 장담했으나, 귀족의 애첩이었던 그녀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1809년, 21살이 된 쇼펜하우어는 아버지의 유산 가운데 3분의 1을 물려받은 후, 그해 가을에 괴팅겐대학교(Göttingen)에 들어갔다. 처음에 쇼펜하우어는 철학과가 아니라 의학과에 들어갔다.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2년 동안 의학, 해부학, 물리학, 식물학, 천체물리학, 광물학, 화학, 수학과 같은 과학을 주로 공부한다. 그러나 공부의 방향을 철학으로 바꾸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특히 논리학, 형이상학, 심리학을 가르쳤던 슐체(Schulze)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슐체의 조언에 따라 쇼펜하우어는 플라톤칸트의 사상을 깊이 공부하게 되면서, 공부의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다. 슐체는 쇼펜하우어에게 조언했다. "일단 플라톤, 칸트를 공부해보거라. 이 두 사람을 독파하기 전까지는 아리스토텔레스스피노자같은 다른 철학자를 쳐다 보지도 말거라."


- 슐체(Gottlob Ernst Schulze)(1761–1833) -


쇼펜하우어"임마누엘 칸트를 공부하지 않은 인간은 눈뜬 장님"이라고 말할 정도로 칸트 철학을 높이 평가했고,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칸트에 비판적인 슐체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오리엔탈리스트프리드리히 마이어(F. Mayer)에게는 고대 인도사상을 소개받았다. 이미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 슐레겔(Friedrich Schlegel)을 통해 인도 사상을 접했던 쇼펜하우어는 30대에 접어들 무렵에 앙크틸 뒤페롱(Anquetil Duperron)이 라틴어로 번역한 우파니샤드를 읽고 ‘살아갈 때 위로가 되는 책이고, 죽을 때도 위로가 될 만한 책’으로 칭송했다. 이렇게 해서 쇼펜하우어는 서양 철학자로서는 최초로 인도 사상을 철학에 끌어 들였다. 유럽의 작가로서는 최초로 동양사상이 지적으로 세련된 것이라는 점을 독자들에게 알려주었다.


쇼펜하우어의 과학 공부는 시간 낭비가 아니었다. 쇼펜하우어가 ‘뜬구름 잡는 공허한 관념이 아니라, 확실히 알고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사유를 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한 것은 과학을 공부한 덕분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쇼펜하우어 철학의 기본적인 방향은 괴팅겐 대학 시절에 거의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 베를린 --


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을 굳힌 쇼펜하우어는 22세에 베를린 대학으로 전학을 간다. 그는 이곳에서 세상의 모든 학문을 정복하겠다고 작정을 했는지,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학, 화학, 물리학, 천문학, 지질학, 생리학 등을 두루 섭렵했고, 전자기 강연’, ‘동물학 강연’과 같은 공개 강연에도 꼬박꼬박 참석했다. 특히, 베를린 대학은 피히테와 신학자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같은 당대의 거물들이 직접 강의하는 곳이었다.

--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1762~1814) --


쇼펜하우어는 피히테의 철학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공개 강연에서는 피히테와 오랫동안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피히테의 강의를 열심히 들어본 다음, ‘피히테는 얼굴이 시뻘건 허풍쟁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종교적이지 않은 인간은 철학자가 될 수 없다’라는 슐라이어마허의 입장을 ‘종교 신자는 철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고 종교인은 철학자가 될 수도 없다‘고 간단하게 처리했다.


슐라이어마허’종교의 본질은 의존적인 감정‘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헤겔이 나섰다. "그렇다면, 개가 최고의 기독교인이겠군" 쇼펜하우어는 베를린에 계속 살면서 박사 학위를 따고 싶었다. 그러나 베를린에 전쟁이 터지려고 하자, 전쟁과 군대를 경멸했던 쇼펜하우어는 드레스덴으로 피난을 갔으나, 오래 머물지 못하고 다시 엄마가 살고 있는 바이마르로 오게 된다.



여기서도 엄마가 사는 꼴이 못마땅하자 시골 마을 루돌슈타트(Rudolstadt)의 줌 리터(Zum Ritter)라는 여관에서 박사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세상은 전쟁 때문에 난리였으나, 쇼펜하우어는 사람이 없는 산골짜기에서 탐구하고 책을 읽고 논문도 썼다. 이 때, 쇼펜하우어는 세상이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쇼펜하우어는 7월부터 11월까지 4개월 동안 박사 논문을 썼는데, 이 논문은 쇼펜하우어 사상의 토대가 되는 것으로, 논문의 제목은 <충족이유율의 네겹의 뿌리에 관하여>였다.


-- 쇼펜하우어의 박사 논문 (1813). "충족이유율의 네겹의 뿌리에 관하여"(Uber die vierfache Wurzel des Satzes vom zureichenden Grunde) --


쇼펜하우어는 박사 논문을 베를린 대학에 제출해 박사 학위를 받고 싶었으나, 베를린에는 전쟁 때문에 봉쇄되어 접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근처의 예나 대학에 논문을 제출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1813년 10월 18일) 이 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쇼펜하우어는 대학에 혼자 틀어박혀 공부를 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완전한 운둔자는 아니었고 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시원시원하고 까칠한 태도와, 상대방이 이상하다고 느껴지면 경멸하는 버릇 때문에, 사람들이 오래 붙어 있지 못했고, 마음에 드는 친구를 떠나보냈다. 이 시절의 이러한 태도는 냉정하고 통찰력이 있는 시야를 선사했지만, 주위 사람을 쫓아내는 역할을 했다.


엄마와 대판 싸우고 바이마르를 떠날 때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으면, 니가 먼저 세상을 인정해라" 라는 괴테의 충고를 무시했던 쇼펜하우어는 26살에 "사람들과 사귀려면 나 자신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하며, 상대방에게 많은 것을 바라면 안 된다" 라고 썼다. 이런 태도 때문에, 쇼펜하우어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고립된다. 쇼펜하우어와 관계가 있었던 괴테는 쇼펜하우어에게 분명히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열렬히 추종하던 괴테에커만과 나누면서 했던 말을 잠깐 여기서 언급하겠다.


ㅡㅡㅡ "인간 각자는 자기 일부터 돌아 봐야하네. 우선 자기의 행복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야. 그러면 사회 전체에 복이 틀림없이 생길 거야. 대체로 사회주의(생시몽주의)는 망상적이고 실현 불가능한 거라 생각하네. 그건 자연, 경험, 사물과 인류의 진보를 가로 막는 거야. 만약에 대중이 개인으로서 자신의 직무, 가까운 것에 대해 성실히 하면 사회 전체의 복리도 좋아질 거야. 나 괴테는 작가를 천직으로 살고 있지만 대중의 입맛을 연구한다거나, 사회 전체를 위해 뭘 해야겠다는 점을 문제시한 적이 없어. 나는 언제나 나부터 현명하게 만들고, 나를 좋게 하는 일에 관심을 두었어. 나의 인격 도야를 위해 노력했을 뿐이야. 나는 쉬지 않고, 내가 옳다고 여기고 진실된 것을 표현하려고 힘썼지. "

"나는 앞서 말한 것이 넓은 범위에 걸쳐 영향을 주었고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네. 만약에 내가 작가로서 대중의 입맛을 연구하며 설쳤다면, 나는 죽은 코체부가 했던 것처럼 짧고 한심 우스꽝스런 얘기를 하며 대중의 환심을 사려고 했을 것이야."

다음의 발언은 괴테메피스토펠레스를 흉내내며 많은 재산을 얻고 있는 성직자 등에 대해서 농담과 풍자를 하는 것이다. 괴테의 반종교적, 반위선적, 반이념적 성향이 나타난다. 나는 영국의 주교처럼 매년 받는 3만 파운드를 얻기 위해 시나 산문을 써서 신앙심이 강한 인간처럼 겉과 속을 다르게 해서 거짓말을 다할 거야. 그리고 그런 높은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할 거라네. 특히 (대중이)무지의 깊은 밤에서 허우적거리게 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거야.

나는 대중들에게 교묘히 다가가서 환심을 살 거야. 또한 어린이, 학교(교육) 학생들을 그런 식으로 교묘히 조종할 거야. 그리고 세상의 누구도 나의 이런 번지르르한 지위가 나의 추잡한 짓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게 할 거야. 설령 알게 된다고 해도 발설하지 못하게 할 거야. 에커만이 말했다.그렇다면 대중은 괴테 선생님이 훌륭한 재주로 그런 지위에 있는 줄로 착각하고, 선생님의 이야기에 위로를 받으려고 달려들겠군요. 실제로는 한심하고 무능한 자들이 영국에서는 자주 그런 부귀를 누리고 있더군요. 그들은 자신의 정당한 공훈으로 그런 걸 얻은 것도 아니고요. 곧 괴테가 말했다. 어느 경우나, 어느 시대에나 처음으로 재산을 챙긴 놈들은 대부분 대중의 무지, 광신, 약점을 연구한 놈들이었지. 정신병원에 안 가봐도 이 세상에는 돌팔이와 그 때문에 생긴 눈뜬 장님, 바보들로 가득하다는 거야. - 괴테와의 대화 중, 에커만 지음 - ㅡㅡㅡ


-- 20대 중반의 쇼펜하우어 (그림: Ludwig Sigismund Ruhl, 1815) --


박사 학위를 취득한지 한 달 만에 한가롭던 시골 마을에도 군대가 밀고 들어오자, 쇼펜하우어는 바이마르로 돌아가 엄마와 함께 겨울을 보냈다. 이 때, 요한 볼프강 폰 괴테를 만났다. 당시, 괴테는 색채론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쇼펜하우어와 색채에 관해 토론도 하고 색채 연구에 필요한 장비도 쇼펜하우어에게 보냈다. 괴테는 쇼펜하우어와 몇 시간씩 철학에 관해 토론하기도 했다. 괴테는 쇼펜하우어의 어머니 요한나가 운영하는 살롱에 출입할 때부터 쇼펜하우어를 눈여겨 보았던 것 같다. 쇼펜하우어를 향해 여자들이 쓸데없이 진지한 인간이라고 놀릴 때 괴테‘그 녀석을 가만히 두세요. 언젠가는 우리 전부를 뛰어넘을 겁니다’라고 하며 소란을 잠재운 적이 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남자친구 문제와 돈 문제로 엄마와 대판 싸운 후, 바이마르를 떠나 드레스덴으로 갔고, 그 이후로 엄마와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


--- 드레스덴 ---


1814년의 드레스덴은 과학을 공부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곳에 있는 도서관에는 조각품이 전시되어 있었고, 과학 장비가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4년 동안 과학을 공부했고, "과거의 철학자를 거론하면서, 짜깁기해서 우려 먹는 사이비철학 장사꾼들이나 언어로 장난하는 샌님보다는 자기만의 생각을 내놓는 사람들이 훨씬 낫다" 라고 했다. 그 다음 해에는 색채론을 완성해 괴테에게 보낸 후에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쇼펜하우어는 괴테를 비판하고 독창적인 생각을 제시하였다. 괴테는 젊은 놈이 건방지다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자네는 나랑 겨룰 때가 아니야, 공부를 더해라" 라면서 충고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미 괴테를 내려다 보기 시작했다.


"나한테는 나만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나는 당신처럼 하찮은 사생활에 신경을 써대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나 괴테와 대화를 나눈 것은 ‘시각과 색채에 대하여’(Über das Sehn und die Farben)(1816)라는 글을 쓰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며, 괴테는 쇼펜하우어가 평생 존경하고 탐독했던 인물이었다. 드레스덴에서 철학자이자 프리메이슨리 단원인 카를 크라우제(Karl Christian Friedrich Krause)(1781–1832)을 알게 된 것은 큰 소득이었다. 이 사람은 만유재신론(panentheism) 신봉자였는데, 만유재신론은 신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면서도 세계보다 더 크고 세계를 초월한다는 입장으로, 범신론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의지 이론’은 이런 관점을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형이상학과 윤리학을 결합한 철학이 나의 머리에서 자라나고 있다. 마치 아기를 품은 임산부가 된 것 같다. / 메모 - 드레스덴에 도착한 후에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말에 따르면, 뭔가에 홀린 듯이‘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쓰기 시작했고, 5년을 투자한 끝에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완성했다. 1818년 3월이었다.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1818)- 이 책은 칸트 철학을 대거 수용하고 있으나, 슐체의 영향으로 칸트를 비판적으로 계승한다. 쇼펜하우어는 이 책의 말미에 칸트 비판을 삽입했다. ---


1818년 3월, 쇼펜하우어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철학'이라고 자랑스럽게 책을 소개하면서, 출판업자 브로크하우스(Brockhaus)에게 출판을 부탁했다. "나의 이 책은 하나의 새로운 철학입니다. 과거의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재탕하고 짜깁어서 새로 쓴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도 생각하지 못한 매우 농축된 사유로써 쓴 책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출판업자에게 지금 여행을 떠나야하기 때문에, 인세를 당장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사이비같은 글이 더 잘 팔린다는 것과 세상 물정에 밝았던 출판업자는 ‘책이 휴지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군요' 라고 응답한 후에 내키지는 않았으나, 일단 책을 출판했다.(1819년) 결국에 출판업자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책은 전혀 인기를 얻지 못했고, 1년이 지난 후에 100권을 넘게 팔리지 않았다. 쇼펜하우어에게 돌아온 것은 출판업자가 제공한 '증정본 2권'이 전부였다.

칼스바트에서 머물던 괴테에게 보팬 편지에는 이렇게 썼다. 드레스덴에서 4년 이상 걸린 작업이 드디어 완성되었습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제목을 붙혔습니다. 이 책은 제가 단순히 지방에서 이룬 작업의 산물이 아닌 제 인생의 산물입니다 괴테는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오랜만에 자네 편지를 받아서 기뻤네 기운차게 자신의 길을 걷는 자네를 위해 축복을 빌고 있네. 나는 자네 책을 흥미롭게 읽을 거야. -칼스바트 1818년 8월 9일 괴테-


쇼펜하우어의 여동생 아델레도 이 책을 읽었다. 그녀는 책이 너무 어려워서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문장이 뛰어나고 명쾌하게 쓴 것 같다고 오빠에게 고백했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칸트의 중국식 수수께끼, 헤겔의 장황스러움, 스피노자의 기하학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놀란다. 모든 것이 명쾌하고 문장이 논리정연하며, '의지, 투쟁, 고뇌로서의 세계'라는 중심개념이 훌륭하게 집중되어 있고 꾸밈없이 솔직하다.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것이다. - 윌 듀런트 '철학이야기'-


여동생 아델레의 편지에 따르면, 괴테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편하게 읽으려고, 반으로 잘라서 진지하게 심취되어 읽었다고 한다. 그러나 괴테는 어떤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쇼펜하우어드레스덴에서 하녀와 성교를 해서 딸을 낳았는데, 이 아이는 몇 달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성욕에 대해 고뇌했을 것이다.


-- 이탈리아 --


1818년 9월 23일,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완성한 일을 자축하고 10년을 넘게 학문과 탐구에 매진해서 생긴 심신의 피로를 풀기 위해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오랫동안 고생하고 쓴 책이 지금은 무시당하고 있지만, 미래에는 인정을 받을 것이다. / 1819년 4월 나폴리에서


이 때 쇼펜하우어는 무려 11개월 동안 베니스, 볼로냐, 피렌체, 나폴리, 로마를 돌아다니면서,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친구를 만났다. 쇼펜하우어는 이탈리아에서 평소의 그답지 않게 상당히 명랑한 시간을 보낸 것 같다. 로마와 나폴리에서는 영국 사람들과 어울렸고, 이런저런 여자들과 이불 속에서 성교를 하였다. 베니스에서는 '테레사'라는 여자와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가 여자를 비판했는데, 그 자신은 여자서 놀고 만났다는 일각의 견해가 있다. 쇼펜하우어는 비열하고 여자의 속물같은 성향을 날카롭게 해부한 것이지, 단순히 남자는 여자를 만나면 안된다라는 등의 주장을 한 적이 없다. 한국에 떠돌아 다니는 쇼펜하우어에 대한 이같은 비판은 전적으로 헛소리인 것이다. 그가 여자를 단순히 혐오했다는 것은 쇼펜하우어에 대한 날조이자 모함이다. 쇼펜하우어는 서양 여성들에게도 매우 인기있는 철학자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얘기를 동생에게 편지로 솔직하게 털어놓았던 모양이다. 여동생 아델레는 '당신네 남자들은 많은 여자를 원하는 군. 여자가 무슨 장난감이냐. 제발 여자들을 진심으로 대해줘. 여자들이 불쌍하잖아.'고 현명하게 충고했다.


--- 바이런 (Baron Byron)(1788 ~ 1824) 어느 날 쇼펜하우어는 테레사와 데이트를 하다가,말을 타고 지나가는 바이런을 보았다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바이런을 찾아가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쇼펜하우어는 바이런을 만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여자친구를 사로잡은 멋쟁이 영국 시인 때문에 열등감에 빠지기도 했다. ---


쇼펜하우어어는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엄마와 여동생이 재산을 신탁한 회사가 부도나서 재산을 잃게 되었다는 소식을 여동생 아델레에게 전해 들었다. 이 때, 쇼펜하우어는 어머니 요한나에게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불성실했지만, 이번에는 아버지의 유산으로 도움을 주겠다'라고 제안했으나, 요한나는 아들의 손길을 뿌리쳤다.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신탁회사의 부도로 협상을 벌이고 있는 엄마와 여동생에게 '돈 때문에 꼼수 부리지마라, 지금 엄마와 너는 교활한 대리인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라며 비판을 했다.


분개한 여동생 아델레는 '오빠 편지를 읽고 정나미가 떨어졌어. 앞으로 상종하지 말자' 라고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오빠랑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말아야겠다' 라고 메모지에 적었다. 쇼펜하우어는 이 문제로 바이마르로 직접 달려 갔으나, 엄마를 만나지 못했다. 나중에 아델레는 자신이 오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빠 말대로 대리인에게 속아 넘어가 재산을 잃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의 비판은 세상 물정에 대해 정확했던 것이다.


1819년, 여행을 돌아온 쇼펜하우어는 출판시킨 책이 망하고 혼자 버티고 있자니 미래가 불안하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싶어서 이런저런 대학에 강사 자리가 있나 알아보았다. 쇼펜하우어는 독일에서는 베를린 정도는 되어야 자기 철학을 이해할만큼 수준 높은 학생들을 만날 수 있겠다고 판단하고, 베를린 대학교 철학과에 강사 자리를 신청했다. 그런데 이 학교의 강사 채용 심사위원회에는 2년 전부터 피히테에게 바통을 물려받아 위세를 떨치는 교수가 버티고 있었는데, 이 사람의 이름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이었다.



ㅡㅡㅡㅡㅡㅡ

쇼펜하우어 이야기 (헤겔은 추잡한 사이비꾼이다.)[편집]

ㅡ헤겔은 공허한 장광설을 난해함으로 둔갑시키는 추잡한 사이비꾼이다.ㅡ

후세 사람들은 지금 시대를 신비주의, 사기, 허풍, 인간 수면제가 휩쓸었던 ‘불성실의 시대’로 평가할 것이다. 이 사이비 철학자들은 책을 읽는 독자들과 함께 공부하겠다는 태도가 없다. 지금 영웅으로 대접받는 피히테, 프리드리히 셸링이 그런 인간들인데, 이런 재주꾼들보다 훨씬 더 돌팔이 사기꾼 헤겔이 특히 눈에 띈다.


헤겔이라는 이 사이비 학자는 사람들을 가르치지 않고, 속이고 꼬드기려고 한다. 이 놈은 사람들 앞에서 진지한 척 하면서, 자기도 모르는 '무한', '절대' 같은 헛소리를 심각한 표정으로 지껄여댄다. 이러니 사람들은 난해하다고 취급하면서 헤겔이 대단한 줄 착각하며 궤변에 더욱 열광한다. 헤겔.... 이 인간은 천박하고 우둔하고 역겨운 야바위꾼이다. 유례없이 뻔뻔스럽고 터무니없는 난센스를 휘갈겨 놓은 헤겔이라는 이 사이비 철학도에게는 후세의 비웃음이 기다리고 있다.-아르투어 쇼펜하우어-

ㅡ도대체 헤겔은 어쩌다가 이런 맹비판을 받게 되었을까? 쇼펜하우어의 대답은 이렇다. 헤겔은 진리가 아니라 사실은 부귀영화를 갈망했다. 헤겔 그놈이 원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 사실은 국가의 부르심, 기만 당하고 현혹돼서 자신을 추종하는 학생, 우매한 대중들, 그리고 출판업자의 돈, 명성이다. 칼 포퍼쇼펜하우어의 헤겔 비판에 호응을 하듯이 자신의 저서에서 헤겔마르크스를 무자비하게 비판한 바가 있다.

-쇼펜하우어는 거대한 기만술을 구사하는 것이 헤겔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그 사기극은 사람들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현실을 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언어를 엄청나게 오용하는 것이며 실제로는 무의미한데 장광설을 늘어놓아 '심오한 사상'으로 둔갑시키는 사이비 철학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건 공허함에서 가져온 것이고 나름의 결말도 없고 증명되지도 않는 것이고 설명이 제대로 되지도 않는다고 한다. 더군다나 독창성이란 것도 없고 스콜라철학의 실재론이나 스피노자철학 등을 기괴하게 모방할 뿐이라는 것이다. '덴마크 왕립 학술원'의 현상 공모에 쇼펜하우어는 혼자 참여하지만, 쇼펜하우어의 논문에 대해 유능한 학자인 헤겔을 비판한다면서, 말도 안되는 반론을 펴며 덴마크 학술원은 무시하였다. 그러나 이 논문은 나중에 결국 인정받게 되고 만다.

-헤겔 짓거리- 진리를 모르고, 정신이 나가고, 상식을 내다버린, 전대미문의 괴담을 퍼트리고 다니는 짓거리를 나는 '헤겔 짓거리'라고 부른다. 그런데도 이 궤변론자 미치광이는 당대에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칭송받고 있었다. -쇼펜하우어-

이건 뭔가 잘못된 일이 아닐까?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장소'가 문제였다.


독일은 다른 곳에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는 곳이다. 허망한 언어유희로 사람들의 머리를 철저히 망가뜨리는 궤변론자, 사기꾼을 '천재요'. '심오한 사상가요' 하고 떠들어대는 곳이 바로 독일이다. 헤겔 철학이 쓸모 있을 때도 있다. 헤겔 철학은 사람을 멍청한 광신자로 만드는 수단으로는 최고다. 아이가 너무 똑똑해서 걱정되면, 헤겔 철학을 열심히 가르치면 된다. 헤겔이 써갈긴 잡동사니를 약물로 분류해 '구토제'로 약국에 갖다놓으면 될 것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잘 나가는 교수 헤겔과 인기없는 강사 쇼펜하우어는 처지도 크게 달랐지만, 이론적으로도 대립된다. 헤겔도 '정신현상학'에서 쇼펜하우어 스타일의 관념론을 '공허한 빈껍데기'라고 비판한 바 있다. 아무튼 저세상에서는 서로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 것이다.


헤겔같이 '무능'을 '유능'으로 잘 둔갑시키는 재주가 출중하고, 이해하기가 엄청나게 어려운 '장광설'을 휘갈기는 사이비 철학자를 30년 동안이나 가장 위대한 사상사로 칭송하는 국민들에게 도대체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헤겔의 얼굴 생김새도 '심각한' 문제였다.

쳐다보기만 해도 더러운 느낌을 주는 얼굴도 있다. 어떤 평범한 인간을 골라서 위대한 천재라고 30년 동안 거짓말을 치고 싶더라도, 헤겔처럼 맥주집 주인 같은 몰골을 골라서는 안된다.





ㅡㅡㅡㅡㅡㅡ

쇼펜하우어 이야기 (고독한 인간의 30년)[편집]

ㅡ30년 간의 고독ㅡ 콜레라를 피해 프랑크푸르트로 피신한 쇼펜하우어는 이곳에서 그야말로 ‘고독한 30년’을 보냈다. 가족, 애인, 친구가 없었고, 모임에 일체 나가지 않았다. 헤겔이 유행이었고, 쇼펜하우어의 책이 팔리지 않으니 팬이나 독자가 매우 없었다. 번역을 해서 돈벌이를 하려고 했으나 헛수고였고, 월세만 꼬박꼬박 빠져 나갔다. 아버지 유산이 없었다면, 쇼펜하우어는 이곳에서 얼마간 생활고 때문에 고뇌했을지도 모른다. 쇼펜하우어가 책에서 아버지를 찬양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생활은 평소에 존경하던 칸트처럼 부지런한 태도가 몸에 베어 있었고 규칙적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3시간 정도 글을 쓴 다음, 플루트를 1~2시간 불었다. 점심은 정장 차림에 흰색 타이를 걸치고 영국식 레스토랑에서 먹었기도 했다. 이 때 쇼펜하우어는 옆자리에 아무도 앉지 못하도록 2인분을 시켰다. 오후에는 ‘인간보다 나은’ 애완견 푸들 '아트만'을 데리고 2시간 정도 빠른 걸음으로 산보를 했다. 잘 때는 총알이 장전된 권총을 침대 옆에 놔두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으며, 밤에 어떤 소리라도 나면, 침대에 벌떡 일어나 칼과 권총을 손에 쥐었다.


--- 쇼펜하우어와 아트만 (그림 Wilhelm Busch) (1908년 이전) ---

쇼펜하우어는 평소에는 아트만에게 ‘여보시오 경’이라고 존대하다가, 말을 안들으면 ‘여보게, 인간!’이라고 호통을 쳤다. 이런저런 특이한 버릇 때문에 쇼펜하우어는 프랑크푸르트 시민들, 특히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쇼펜하우어는 유사시에 재빨리 도망칠 수 있도록, 항상 건물 1층에서 살았고, 자신이 콜레라에 걸리거나 군대에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몸서리를 치기도 했다. 사람을 피하기도 했다. 오랫동안의 은둔과 독신생활로 신경은 갈수록 예민해졌다. 걸핏하면 사람들에게 사소한 일로 비판을 한 적이 있고, 그런 일에도 불같이 화를 냈다. 쇼펜하우어는 통속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독창과 개성에 가까웠던 것이다. 심지어 음악회에서 기침하는 사람들에게도 화를 낸 적이 있다. 쇼펜하우어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음악을 듣고 있는데, 거대한 재채기 소리가 뜬금없이 들린다면 조금 화가 날 법도 할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에는 어느 정도의 재산과 건강이 필수적'이라는 자신의 지론을 실천했다. 건강을 위해 한 겨울에도 거의 매일 라인강에 뛰어들어 수영을 했다. 재산 관리는 철저했다. 돈을 벌지 못하고 아버지의 유산만으로 버텨야 하는 처지를 잘 알고 있었던 쇼펜하우어는 채권, 서류를 옛날 편지 묶음 속에 넣어 비밀 장소에 숨겼고, 각종 문서는 제목을 바꿔 보관했다. 은행에서는 항상 똑같은 담당자와 거래했다.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던 은행이 파산 위기에 빠져, 투자금의 일부만 환불될 수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다른 투자자들의 환불금을 깎더라도 자신에게는 투자금의 70%를 달라고 은행 담당자를 노골적으로 협박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고독해서 그런지 괴짜같은 면이 있었지만 '세네카'의 경구를 마음이 새겨서 위안을 받고 자신은 언젠가 '인류'에 도움이 될 것이고 반드시 인정받을 것이라고 여겼다. 쇼펜하우어는 여타 사이비 철학자들처럼 장광설을 대중한테 설파하며 돈벌이를 하고 연명할 수 있었지만 결코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쇼펜하우어의 정치적인 관점은 반몽상적이었다. 1848년 독일과 유럽 전역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 쇼펜하우어는 들고 일어난 시민들이 자신에게 난폭 행동을 할까봐 자기 집에 들어온 군인들에게 사격에 도움이 되도록, 오페라 관람용 안경을 빌려 주었다. 이 때 한가지 다행인 것은 성욕에 대해 별 흥미가 없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 쇼펜하우어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고뇌를 했고, 36살 때는 알 수 없는 병으로 집에서 머물며 1년 간 고생을 했는데, 성생활 때문에 매독에 걸렸을 가능성이 있다.


--- 50대 중반의 쇼펜하우어 (1845 . 작자 미상) ---

가끔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까칠한 철학자에게 접근하기도 했다. 어떤 젊은이는 아주 어려운 질문을 했는데, 쇼펜하우어가 답을 하지 못하자, ‘당신 같은 철학자는 모든 걸 다 아는 줄 알았죠?’라고 말했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응수했다. ‘인간의 지식은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한계가 없는 건 인간의 어리석음이지요.’


사람을 피하고 대화 거부 명단을 갖고 있을 정도로 까탈스러웠지만, 가끔 진지한 대화를 하기도 했다. 성교를 한 후, 성기를 표백제에 담그면 성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거침없이 말하는 등, 개성적인 이야기도 마다하지 않았고, 썰렁한 농담도 자주했다. 어느날, 수다쟁이 여자가 자신의 결혼이 얼마나 비참한지 한참 동안 설명한 후, 자기를 이해할 수 있겠냐고 쇼펜하우어에게 물었는데, 쇼펜하우어는 비판자의 본색을 드러냈다. ‘아니요. 하지만 당신 남편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식당 테이블에 금조각을 올려 놓았다가 밥을 다 먹고 가져가곤 했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어보자, 쇼펜하우어는 식당에 있는 군인들이 개나 여자에 관한 잡담을 하지 않고 진지한 얘기를 하면 금조각을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진지한 군인'을 찾지 못했던 모양이다.


생활은 이토록 개성이 넘쳤으나, 탐구와 독서는 꾸준했다. 쇼펜하우어는 모국어보다 외국어로 된 책을 더 많이 읽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독파했고, 스토아학파, 플루타르코스, 여러 그리스 라틴 고전들, 세네카 키케로와 같은 사상가는 물론이고, 볼테르, 세익스피어, 괴테, 세르반테스, 루소등 문학도 열심히 읽었으며, 특히 가톨릭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런던 타임즈를 정기적으로 읽으면서 세상사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소설 돈 키호테를 종교나 망상에 빠진 사람을 풍자한 풍자소설로 평가했다.


쇼펜하우어는 번역본을 읽으면 놓치는 것이 많기 때문에, 되도록 원어를 배워서 원전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라틴어를 아는 사람을 '교양인', 그렇지 않은 사람을 '일반인'으로 취급했다.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모르면,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위대한 문학이나, 사상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Meister Eckhart, 1260? ~ 1327]

교회가 철권을 휘두르던 시대에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인간과 신의 합일이 가능하다고 설교한 독일의 신비주의자. 그의 주장은 당시로는 파격적이었으며, 시민들로부터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 하느님은 이성, 감각으로는 알 수 없는 무한자이며, 자기를 무(無)로 돌리고 하느님의 무와 합일하면 완전한 자유에 도달한다고 설파했다. 프란체스코회는 그를 이단으로 판정했다.


쇼펜하우어는 심리학, 과학에 관심이 많았고, 마하바라따, 우파니샤드 등 인도 경전과, 인도 사상, 중국의 노자, 공자, 주자 같은 동양 사상가에 관해서 탐구했다. 자신의 철학이 불교와 비슷한 것을 발견했는데, 그는 불교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종교라고 극찬했다. 쇼펜하우어는 예술에도 시간을 투자했다. 그는 틈날때마다 극장, 콘서트장, 미술관을 둘러보면서 음악, 미술, 조각을 나름대로 연구했다.


이러한 노력은 고스란히 책으로 쏟아져나왔다. 1836년에는 생리학, 병리학, 비교해부학, 식물생리학, 물리천문학, 언어학, 중국학, 윤리학 등, 자연과학에 대한 연구 성과를 담은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Uber den Willen in der Natur)을 출간했다. 이 책에는 '철학자는 뜬구름 잡는 궤변을 늘어 놓지만 말고 탐구하고 관찰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하며, 철학도 어느 정도는 과학을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는 쇼펜하우어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3년 후에는 논문 '인간 의지의 자유에 관하여'(Ueber die Freiheit des menschlichen Willens)(1839)를 노르웨이 왕립학회에 제출해 학술상을 받았다. 수상 소식에 어린애처럼 흥분한 쇼펜하우어는 메달을 빨리 보내달라고 왕립학회를 들볶았다. 그 다음 해에는 덴마크 왕립학회에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Uber die Grundlage der Moral)를 제출했는데, 심사위원들은 근거없이 헤겔과 같은 뛰어난 학자들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이 논문을 탈락시켰다. 쇼펜하우어는 이 논문들을 묶어 ‘윤리학의 2가지 근본 문제’(Die beiden Grundprobleme der Ethik)(1841)라는 이름으로 출판했다. 이 때부터 쇼펜하우어를 따르는 추종자가 하나씩 생겨났다.


1844년에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개정판을 완성했다. 그동안의 연구 성과가 추가되면서, 개정판은 초판보다 2배나 두꺼워졌다. 이때도 쇼펜하우어는 출판사에게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다가 '당신은 철학자가 아니라 천박한 장사꾼'이라는 욕을 들으면서 인세도 받지 못하고 책을 출판했다. 3년 뒤에는 박사 논문 '충족이유율의 네겹의 뿌리에 관하여' 개정판을 완성했다.


그러나 처절한 외로움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절간의 스님들도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고독'이라고 털어놓는다. '고독할 줄 모르는 인간은 자유로울수 없다'고 단언했던 철학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쇼펜하우어는 고독이 버거운 나머지, 평범하게 살고싶다고 기도까지 했으나, 이미 굳어버린 성격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이가 먹을수록 서로 갈라서고 마지막에는 완전히 혼자가 된다’는 자신의 주장은 현실이 되었다. 1839년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10년 후에는 동생이 그 뒤를 따랐다.


-- 아델레 쇼펜하우어(Adele schopenhauer)(1797–1849)

쇼펜하우어의 여동생 아델레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와 바이마르에서 살았다. 그녀도 어머니, 오빠와 마찬가지로 글솜씨가 있었다. 그녀는 괴테와도 친분이 있었는데, 특히 괴테의 며느리와 친했다고 한다.아델레는 어머니로부터 부동산을 조금 물려받기는 했으나, 유산이 자체가 워낙 적었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녀도 쇼펜하우어처럼 우울증이 있었고 남자도 사귀지 못했다. 그녀는 가끔 오빠와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는데, '마땅히 결혼할 사람도 없고, 차라리 콜레라에 걸려 죽었으면 좋겠다'고 오빠에게 털어놓았다. --


외로웠던 아델레는 폐를 끼치지 않을테니 오빠 근처에서 살고싶다고 말했으나, 쇼펜하우어는 여동생의 접근을 냉혹하게 거부했다. 아델레는 이탈리아에서 5년 동안 살다가 1849년에 독일에 돌아온 후, 오빠와 한 번 만났기는 했으나, 시름시름 앓다가 그 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소설, 시집, 일기는 1920년대에 독일에서 출판되었다.


딱히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그나마 편지를 주고받던 가족마저 세상을 떠나 완전히 혼자가 되었으나, 쇼펜하우어는 다른 철학자들과는 달리, 미신이나 종교에 의지하지 않았다. 그 대신, '나 같은 천재는 고독할 수밖에 없고, 친구나 가족보다는 인류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사람들이 알아 줄 것'이라고 마음을 다졌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처지를 살펴보고 '나보다 처절한 인간들도 있다'고 스스로 위로를 하기도 했다, 궤변술로 민중을 현혹하는 헤겔을 신나게 비판하는 것도 외로움과 패배감을 해소하는데 약간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적어놓은 '지나간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고통의 원인이다. 지금 순간에 집중하라'는 바로 쇼펜하우어 자신을 위한 처방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괴팍한 생활 때문에, 동네 아이들에게조차 놀림감이 될 정도였지만, 이 정도에 그친 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TV, 인터넷도 없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대에 가족도, 친구도 없이 혼자 수십년을 버티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절간의 스님들도 모여살지 않는가? 사실을 말하자면, 미치지 않은 것만해도 대단한 일이라 하겠다. 


이렇게 근근히 버티던 쇼펜하우어에게 마냥 쓸쓸한 일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어느날 갑자기 쇼펜하우어는 까칠한 비판자에서 '명랑 노인'으로 변신했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봄날'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ㅡㅡㅡㅡㅡㅡ

쇼펜하우어 이야기 (결실과 영광)[편집]

ㅡ결실과 영광ㅡ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신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입니다.'-


백발의 쇼펜하우어는 여동생의 친구이자,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며느리인 오틸리에 괴테에게 이렇게 썼다. 오빠처럼 결혼을 못하고 암울하게 지내던 여동생 아델레가 시름시름 앓다가 1849년에 눈을 감았다. 어머니 요한나는 이미 10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쇼펜하우어의 가족은 사라졌다. 어릴적 프랑스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는 30년이 지나자 '속물'이 되어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이 친구를 '상종할 가치가 없는 인간 명단'에 추가했다.


쇼펜하우어한테도 고독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혼자 지내다보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심하면 망상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는데, 쇼펜하우어가 엉뚱한 사람들을 의심하고, 침대 옆에 권총을 놓고 잤던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그는 부모도, 아내도, 가족도, 친구도, 소속된 단체도 전혀 없는 상태가 되었다.


-쇼펜하우어는 철저하게 고독했고 친구가 없었다. 친구가 1명이라도 있는 것과 친구가 1명도 없는 것은 천지 차이다. / 니체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그렇다고 소란스럽게 떠들어댄다는 이유로 여자를 패대기치고, 사소한 일로 시비를 거는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을 것이다. 20세기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쇼펜하우어를 '지독한 심술쟁이'라고 불렀다. 무신론자인 러셀의 말이 긍정적인 의미일지도 모른다. 쇼펜하우어는 종교를 비난하고 사이비꾼들에 대해 심술을 부렸기 때문이다. 여동생마저 세상을 떠나자 슬픔과 외로움을 감당해야 했던 쇼펜하우어는 인생의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 또 다시 글을 적었다. '인생론' 등으로 한국에 알려지고,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쇼펜하우어가 알려지는 데 큰 역할을 한여록과 보유or소품과 부록(Parerga und Paralipomena)는 이렇게 해서 탄생한다.

 그러나 무명 철학자가 책을 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브로크하우스에 출판을 부탁했지만, 거절 당하고 말았다. 그도 당연한 것이 브로크하우스는 지난 번에 쇼펜하우어의 책을 냈다가 돈만 날렸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2년이 지나서야, 그것도 ‘전도사’를 자청한 율리우스 프라우엔슈타트(Julius Frauenstadt)가 하인(A.W.Hayn)이라는 출판사를 끈질기게 설득한 후에, 2권짜리 책으로 750권을 출판할 수 있었다. 이 때 쇼펜하우어는 돈도 못받고 증정본 10권만 얻었다.


여록과 보유or소품과 부록(Parerga und Paralipomena) (1851) ㅡ


쇼펜하우어는 이 책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보충하면서,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다고 소개했다. 이 책은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길다란 에세이 6개, 2부는 31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우여곡절 끝에 출판된 책이 쇼펜하우어의 팔자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당시 독일 문학을 번역하던 존 옥센포드(John Oxenford)라는 사람이 영국의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리뷰(Westminster Review) 4월 호에 '독일 철학자의 인습 타파'라는 제목으로 쇼펜하우어를 소개했다. 헤겔처럼 공허한 장광설을 늘어 놓기를 좋아하는 다른 독일 철학자들에 비해 명쾌하고 간결한 쇼펜하우어의 문장에 영국인들이 감명을 받았을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대해 격찬하는 외국의 글이 독일어로 번역되어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도 이런 글이 떠돌았다.



쇼펜하우어는 일약 유명 인사가 되었고, 전 세계에서 팬레터가 날아 왔다. 사람들은 쇼펜하우어의 점심 식사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멀리 러시아에서도 손님이 찾아왔다. 심지어 쇼펜하우어가 데리고 다니던 삽살개가 많이 팔리기도 했다.  덴마크의 키에르케고르는 ‘기자, 작가들이 쇼펜하우어 때문에 난리법석’라고 신문에 기고했다. 이렇게되자, 쇼펜하우어는 까칠한 고독자에서 순식간에 '유쾌 발랄한 노인'으로 변신했다.


쇠렌 키에르케고르 (Søren Aabye Kierkegaard, 1813 ~ 1855)


우울한 덴마크산 반항아 키에르케고르에게도 쇼펜하우어는 제법 인상적인 인물이었던것 같다. 그는 쇼펜하우어를 만나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하고 쇼펜하우어보다도 '훨씬' 착잡한 인생을 살다가 갔다. 실존주의의의 아버지는 사실은 쇼펜하우어인 것이다. 


그 책은 종교나 미신에 기대지 않고도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는 것이 다른 수필과 결정적으로 달랐다. 이 책은 누구에게도 의존하려 하지 말고, 내 안의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강조한다. 쇼펜하우어는 이 책에 시를 첨가했는데 이는 독자와 개인적으로 소통하고 싶었던 쇼펜하우어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잘 알려진 속물 여성에 대한 악명 높은 비판이 이 책에 실려있다. 



ㅡㅡ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 ㅡㅡ

-- 쇼펜하우어를 읽고 철학의 길을 걷기 시작한 니체, 니체는 나중에는 쇼펜하우어를 비판을 하기도 했으나, 니체는 언제나 쇼펜하우어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플라톤, 탈레스, 제논, 데카르트, 스피노자 데이비드 흄, 칸트, 니체, 귀스타브 르 봉, 비트겐슈타인 등의 철학자는 쇼펜하우어와 더불어 평생 독신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


책이 잘 팔리려면, 일단 제목을 잘 달아야 하는데,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이 많이 팔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일반인들이 읽기 쉽게 편집되어  ‘인생론’, ‘인생의 지혜’, ‘쇼펜하우어의 철학’, ‘명언집’ 같은 제목으로 많이 팔렸다고 한다. 이 책이 성공했던 것은 혁명이 실패한데다가 자본주의와 개인주의가 침투하면서 또 다른 고통에 빠지고 그 어느때보다 고독해진 사람들이 쇼펜하우어 특유의 현실주의와 간단 명쾌한 글에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점에는 그의 책이 당당하게 진열되었다. 대학에도 쇼펜하우어를 연구하는 모임이 생겨났다. 성공의 조짐이 보이자, 쇼펜하우어는 '혹시 내가 안 나왔나?' 하고 신문, 잡지를 마구 뒤졌다. 여행을 떠날 때는 자신을 따르는 '통신원'에게 그 일을 맡겼다.



60살이 넘어선, 쇼펜하우어는 만일을 대비해 유언장을 작성했다.(1852년)


쇼펜하우어의 책은 철학자들에게 보다는 법학자, 변호사, 예술가들에게 매우 인기를 끌었다. 이들은 사태를 냉철하게 바라보면서도 예술을 높이 평가하는 쇼펜하우어의 주장에 공감했다. 이 때문에 팬들이 많이 생겼다. 음악가 바그너는 손으로 ‘존경하며’ 라고 직접 써넣은 '니벨룽겐의 반지' 악보를 보냈다. 쇼펜하우어의 반응은 시원 찮았다. 

 바그너의 혁신적인 음악을 이해하지 못했던 쇼펜하우어는 '나는 모차르트, 로시니를 좋아합니다. 대본을 보니 음악보다는 시에 소질이 있네요'하고 논평한 후, 연락을 끊었다.

 쇼펜하우어의 추종자들 가운데 쇼펜하우어가 말년까지 신뢰했던 사람은 변호사이자 소설가 빌헬름 그비너 박사였다. 그비너는 쇼펜하우어가 세상을 떠나고 2년이 지난 후에 쇼펜하우어의 전기를 썼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에 대한 그비너의 비판에 거칠게 반론했다


-- 65세의 쇼펜하우어 (1854년) --


율레스 룬테쉬츠, 율리우스 하멜, 앙길베르트 괴벨을 비롯한 화가들도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를 그리기위해 몰려 들었다(1855년)


 --- 홈불트, 그림 형제와 같은 유명인 조각상을 전문적으로 제작해온 여류 조각가 엘리자베스 나이(Elisabeth Ney)는 쇼펜하우어의 집에서 한달이나 머물면서 작업했다. 쇼펜하우어는 이 '사랑스러운' 여자와 달콤한 커피 데이트를 하기도 했는데, 그녀와 쇼파에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실때는 부부가 된 느낌이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는 쇼펜하우어의 친구(개)도 조각했는데, 쇼펜하우어는 이 조각품에 특히 기뻐했다.


1858년에는 베를린 왕립학술원으로부터 회원으로 추대하겠다는 제안이 왔으나 오래전부터 학계의 추잡스러움에 불만을 품고 있던 쇼펜하우어는 거절했다.


1859년, 쇼펜하우어는 이웃집 쇠네 아우스지히트 16번지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쇼펜하우어는 오랜 셋방살이를 마무리했다. 이 당시, 쇼펜하우어가 지내던 방을 둘러본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테리어 같은 것은 일체 없고, 잠깐 쉬다가는 하숙집 같았다. 방안에는 금으로 만든 부처 입상과 칸트의 흉상이 있었고, 벽에는 세익스피어와 데카르트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소파 옆에는 삽살개가 쉬고 있었다. 쇼펜하우어와 이야기를 나눠봤던 루이 알렉상드르 백작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스처를 크게하고 말하는 편인데, 라틴어, 그리스어, 불어,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위트도 있고 아는 것도 많아서, 이야기 나누다보면 시간이 금방 간다. 태도나 행동은 전형적인 상류층 스타일이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이 인류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고, 어려운 사람들, 폭동이나 전쟁에서 고생한 군인들을 측은하게 여겼다.


이렇게 사람들이 쇼펜하우어와 나눈 대화는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일반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좋아'하는 사실이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특히, 자신의 사상이 종교를 대체해서 사람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아주 기뻐했다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그동안 썩고 있던 책들을 다시 출판했다. 이렇게 해서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1854), '시각과 색채에 관하여', '윤리학의 2가지 기본 문제'의 개정판이 잇달아 출간되었고,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3번째 개정판도 빛을 보았다.(1860년)


 쇼펜하우어는 유언장을 다시 한번 작성한다. 쇼펜하우어는 대책없이 쓰다가 거지 신세가 된 엄마 요한나와는 달리,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을 알뜰하게 관리하면서, 거의 2배로 늘렸다.그비너 박사에게는 책을 주었다. 그는 조카의 아이들에 유산을 주기로 했고, 몇 년 동안 도와준 가정부 슈네프에게는 살림살이 도구와 수고비를 연금으로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애완견 관리권도 그녀에게 맡겼다. 쇼펜하우어는 가정부가 애완견을 돌보지 않는 사태를 대비해, 애완견을 대신 맡아줄 사람들의 명단을 우선순위별로 작성하기도 했다. 이처럼 쇼펜하우어는 애완동물 관리 방법을 몸소 보여주었다. 한 때, 사귀였다가 헤어졌으나 말년에 편지를 다시 주고 받은 여성 카롤리네는 무려 20년 동안이나 연금 형태로 쇼펜하우어의 유산을 받았다. 배우를 그만두고 바느질로 연명하던 카롤리네에게는 꽤나 요긴한 돈이었을 것이다.


--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쇼펜하우어의 실제 모습 (사진: 요한 쉐퍼, Johann Schäfer en 1859) -- 


꾸준한 운동과 부지런한 생활로 노년기에도 건강했지만 1860년 9월 9일, 쇼펜하우어는 피가 섞인 기침을 내뱉는다. 일주일 뒤,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믿는 몇 안 되는 사람인 그비너 박사를 만났다. 이 때까지도 철학자는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1860년 9월 21일 금요일 아침, 쇼펜하우어는 소파 구석에 엎드려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향년 72세로 사망했다. 사인은 폐렴이었다. 쇼펜하우어의 주치의 슈티베르가 방문했을 때 발견했는데, 슈티베르는 죽은 쇼펜하우어의 얼굴이 평안해 보였다고 전한다. 그런 모습으로 쇼펜하우어는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음을 맞이한 방구석의 대리석 탁자 위에는 금박을 입은 불상이 놓여있었다. 책상 위에는 임마누엘 칸트의 흉상이 있었다. 그가 죽은 소파 위 벽에는 유화로 그려진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사방의 벽에는 칸트, 셰익스피어, 르네 데카르트, 클라우디우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쇼펜하우어 자신의 젊은 시절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소파 옆에는 골동품같은 둥근 원탁이 있었고, 그 밑의 검은 곰 가죽 위에는 애완견 "아트만"이 잠자고 있었다. 아트만은 쇼펜하우어가 애정을 품고 좋아했던 개다.

쇼펜하우어가 생전에 희망한대로, 묘비는 검고 평평한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그 위에 "이름 말고는 날짜도 연호도 아무것도 적지마라"는 쇼펜하우어의 지시에 따라 간결하게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라고만 새겨졌다. 묘지 자리는 어떻게 하겠냐는 그비너의 질문에 쇼펜하우어는 웃으며 답했다. "어디라도 괜찮아, 내가 어디에 있든 사람들이 나를 찾아 낼 테니까" 그비너와 그의 친구들은 프랑크푸르트 시립묘지를 택했다. 쇼펜하우어의 자택과 기념비 등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때 전부 파괴되어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그러나 그의 무덤만은 15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다. 평평한 비석은 다른 묘비처럼 지면에 박혀 있다. 그 주위에는 80센티미터 정도의 울타리가 둘러 싸여 있다. 쇼펜하우어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 자식이 없었으므로, 쇼펜하우어라는 성을 가진 마지막 사람이다. ㅡ 

쇼펜하우어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벨리사르에게 은전 한 닢을 주시오' 였는데,

이에 대해 2가지 학설이 있다.

벨라사르는 비잔틴 제국의 최고 사령관에 올랐다가 그의 위세를 질투한 황제 때문에 맹인이 되버린 사람인데, 쇼펜하우어가 그동안 사람들에게 무시당했던 처지를 벨라사르에 비유했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1848년에 시민들의 반란으로 불구가 된 군인들을 벨리사르라고 보고, 이들에게 유산을 나눠주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실제로 쇼펜하우어는 이 때 부상당한 군인, 유가족 기금에 유산을 배당했다. 정치적인 일에 관심이 거의 없던 쇼펜하우어는 시민들이 왜 분노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경멸했다. 쇼펜하우어가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저서-소품과 부록-에서 정치관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http://www.democraticunderground.com/discuss/duboard.php?az=view_all&address=105x9496434

 프랑크푸르트 시립묘지(1860년 9월 21일 안장)-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서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조촐하게 모여 쇼펜하우어의 장례식을 치뤘다. 그러나 이들은 밀폐된 영안실에서 시체 썩는 냄새를 참아야 했다. 쇼펜하우어가 죽지 않은 상태로 생매장 당할까 무서워 시체를 최소 5일동안 영안실에 두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악취가 얼마나 지독했던지 사람들이 황급하게 영안실을 빠져 나가야 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ㅡ

매일 아침 쇼펜하우어를 뿌리치고 나왔다가는 저녁이 되면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만다. 그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는 나보다 완전하고 순수하고 이해심이 있었다. 광기도 나보다 약간 더했다. / 프리드리히 니체 '유고집'

ㅡㅡㅡㅡㅡㅡㅡㅡㅡ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사상[편집]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요약이 불가능하다. 요약이 가능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요약이라는 것은 본문을 본 후에 보는 것인데, 한국에서는 이와 반대로 통한다. 독자들께서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느끼려면 원전을 읽는 것이 좋지만 일반인으로서는 원전 번역본을 읽는 것이다. 그 외의 것을 가지고는 단지 피상적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대부분 약간씩 왜곡되어 알려지는 경우가 있으니 가능하면 직접 원전을 읽되 원전 번역을 읽는 것이라도 좋다.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대체로 플라톤·칸트·인도 고전우파니샤드등의 영향을 받았으나 독창적인 체계를 이루어 니체를 거쳐 생의 철학, 실존주의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생(生)을 '맹목적인 삶의 의지'로 보고 이성은 의지의 시녀라고 하였다. 따라서 "생명은 살기 위한 끊임 없는 투쟁이며, 악의 술책으로서 고(苦)의 세계일 뿐만 아니라 최악의 세계이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생의 의지를 끊고 관조의 세계인 예술과 종교에 들어가는 것도 좋지만 철학을 하는 걸 권장하였다. 그는 좋은 예술로 음악을, 좋은 종교로는 불교(인도)를 꼽았다.

그는 칸트와 같이 현상과 물자체(物自體)를 구별하지만, 경험적 현상의 세계는 주관의 여러 형식(시간, 공간 및 인과법칙)에 의존하는 단순한 표상에 불과하고 물자체에 해당하는 것은 의지, '맹목적인 생존의지'라고 본다. 무기적 자연에서 동식물, 인간에 이르기까지 전체는 이러한 의지의 객체화ㆍ개별화의 여러 단계이기 때문에 세계는 보편적으로 무근거, 무원리이고, 부단한 욕망에 쫓기어 만족할 수 없는데 이러한 생은 고통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런 생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예술적 관조에 의해 욕구를 다스리고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경지에 달하는 게 좋다고 한다.

-쇼펜하우어가 왜곡되어 소개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알고자 한다면, 쇼펜하우어의 저서를 직접 읽는 것이 좋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서적에 대해 깊이 이해하려면 플라톤 칸트 우파니샤드를 읽어야 한다고 독자들에게 부탁했다.

쇼펜하우어의 영향, 관련[편집]

한국의 문화적 토양이 매우 척박해서 한국에는 쇼펜하우어가 왜곡되어 소개되거나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플라톤 마르크스 못지 않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Tristan und Isolde를 만들 때, 친구인 Georg Herwegh에게서 쇼펜하우어의 저작을 소개받고 감화되어 일생동안 추종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의 반응은 냉담했다고 한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바그너가 애독한 것은 유명하다.

쇼펜하우어만큼 예술가, 문학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드물다. 톨스토이가 대표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방에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만 걸어 두었다고 한다. 구스타브 말러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심취하였다.


  • 톨스토이가 친구인 페트 센신에게 보낸 편지 (1869년)-

"쇼펜하우어의 위대함과 내가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엄청난 정신적 기쁨이 나를 사로잡았다네. 이런 생각이 언젠가 변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쇼펜하우어가 세상의 인간들 중에서 제일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네, 나는 쇼펜하우어의 이름이 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 아마도 그 이유는 세상에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사기꾼과 그 사기꾼에게 맹종하고 현혹 당한 한심한 인간이 바글바글 해서 그렇겠지."


이반 투르게네프, 마르셀 프루스트, 에밀 졸라, 토마스 만, 콘래드, D.H 로렌스 등은 쇼펜하우어의 사상의 큰 도움을 받았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는 쇼펜하우어의 이름이 등장한다.

모파상, 안톤 체호프, 서머싯 몸, 보르헤스 등의 뛰어난 단편 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조지 버나드 쇼, 사무엘 베케트, 토마스 하디, 시인인 릴케, 토마스 엘리엇, 헤르만 헤세 등이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저작물을 읽었기 때문에 철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으로 유명하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심리분석의 기초인 억압 메커니즘은 쇼펜하우어가 먼저 발견했다고 인정했다. 카를 구스타브 은 자신의 저서에서 여러 번 쇼펜하우어를 언급한다. 알프레드 아들러는 쇼펜하우어의 어머니와의 관계에 주목하였고 영향을 받았다.

아인슈타인은 쇼펜하우어보다 뛰어난 독일어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를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자신의 상대성이론을 구상하면서 쇼펜하우어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에르빈 슈뢰딩거는 일찍이 쇼펜하우어 사상에 매우 심취하였고 고대 인도 사상인 베단타 철학에 몰두하였다.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칼 포퍼헤겔마르크스를 거칠게 비판하였다. 칼 포퍼플라톤에 대한 비판은 플라톤의 부분만을 보고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쇼펜하우어의 직관적 인식론은 앙리 베르그송, 윌리엄 제임스등 영미철학에 영향을 주었으며, 수학자 중에서는 직관주의 수학을 정초한 브로우베르 (L.E.J. Brouwer)에 큰 영향을 끼쳤고 쇼펜하우어의 이론은 현대의 수학 교수법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위키페디아 영문판이 언급하고 있는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유명인으로 다음의 사람들을 언급한다. Campbell, Gray, Kraus, Ryle · 산타야나Santayana · Schrödinger · Weininger · Zapffe


하버드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첼리스트 장한나는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플라톤, 칸트와 더불어 쇼펜하우어에 대한 호감을 밝혔다.

쇼펜하우어의 저서[한국어 번역본][편집]

-> (김미영 역, 책세상 -완역본)

  • 《보는 것과 색채에 관하여》 (Über das Sehen und die Farben), 1814년.

-> 2014년 4월 현재 칸트 비판 부분은 빠진 채로 몇 권의 번역본이 존재한다.

  • 《윤리학의 두 가지의 근본 문제》(Die beiden Grundproblemeder Ethik), 1841년.

->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라는 제목의 완역본이 존재한다.

  • 《여록과 보유or소품과 부록》(Parerga und Paralipomena), 1851년.

->한국에서는 "인생론" '행복론' 등의 제목을 달고 나오는 책들이 바로 이 "Parerga und Paralipomena"를 번역한 것이다. 그것들은 대부분 완역이 아니다. Parerga und Paralipomena 라는 책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부록격인 책이다. 2014년 4월 현재 이 책의 완역본은 없다.


괜찮은 한국어 번역본은 다음의 것이 있다. [한국어판 제목, 역자, 출판사, 원제목 등]

  •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 김미영 역 / 책세상

-> 김미영 교수의 번역본은 완역이다.


  •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 / 김미영 역 / 아카넷 / 2012
  •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 / 김미영 역 / 나남 / 2010
  •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 홍성광 역 / 을유문화사 / [완역이 아님] / Parerga und Paralipomena


  • 세상을 보는 방법 / 권기철 역 / 동서문화사 / [완역이 아님]

->칸트 비판 부분을 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여록과 보유"를 합해서 한 권으로 출간한 책이다. / 괜찮은 판본이다 / 여록과 보유 부분은 편역이다.


  • 세상을 보는 지혜 / 권기철 역 / 동서문화사 [위 책과 똑같고 표지만 다름]

->이 책은 위 책과 똑같은 책이다. 다만 이 판본은 동서문화사의 '월드북 시리즈'로서 나온 것이다. / 저렴하고 나름대로 괜찮은 판본이다 / 이 판본에는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글을 쇼펜하우어가 독일어로 번역한 세상을 보는 지혜가 실려 있다.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권기철 역 / 동서문화사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만 들어 있는 번역본이다. / 괜찮은 번역본이다. / 칸트 비판 부분은 빠져 있다. / 휴대용으로 적합.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곽복록 역 / 을유문화사

-> 2014년 4월 현재 절판 상태. / 괜찮은 번역본이다. / 칸트 비판 부분은 빠져 있다.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홍성광 역 / 을유문화사

->2014년 4월 현재, 칸트 비판 부분이 있는 번역본은 없다 / 칸트 비판 부분은 빠져 있다.


  • 토론의 법칙 / 최성욱 역 / 원앤원북스

-> 이 책은 쇼펜하우어의 유고다 / 토론의 법칙이 아니라 사실 쇼펜하우어는 사이비꾼의 수법을 적어 놓은 것이다. /


-플라톤의 대화편

  • 플라톤 원전 연구, 번역 사이트 참고 바람 - <정암학당 http://www.jungam.or.kr/> [여러 학자들이 협동하여 번역 연구등의 과업을 수행 중]
  • 박종현 역 / 서광사. *천병희 역 / 숲 출판.

ㅡ>두 학자께서 국내에서 거의 독보적으로 여러 그리스 로마 고전의 좋은 한국어판을 내놓고 있으나, 이 분들의 번역본에는 장기적으로 볼 때 주석이 필요함.

  • 그렇다면 단 3장을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칸트쇼펜하우어를 깊이 느끼기 위해 플라톤을 먼저 탐구 하거나 병행하길 권한다. 과학은 변해도 인간의 감정과 본성은 1만 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다. 플라톤과 같은 고전이 현대인에게 무시되는 것은 전적으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일반인 입장에서 원전 읽기는 어려우니 원전 번역을 보는 것이 좋다.
  • 플라톤은 인간의 '삶'에 중요한 거의 모든 물음을 던졌다. 플라톤은 약 2400년 전의 사람이지만 아직도 플라톤의 물음은 유효하고 수 천년이 지나도 유효할 것이다. 플라톤은 단언적으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플라톤이 글을 남긴 이유는 후대들에게 바라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철학자화이트헤드는 '서양철학사 2000년은 플라톤의 주석에 불과하다' 라고 했다. 이 말은 서양인들이 플라톤 사상을 가지고 시대를 구워삶았기 때문일 것이다. 플라톤철학은 유토피아를 갈망하는 공허한 철학이 아니라 '인간이 마주하는 일상과 삶'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 그리스 사상, 플라톤 관련 강의를 듣는 것도 일종의 방법이겠지만 직접 플라톤을 보고 사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때마침 소수의 학자들이 서양의 뿌리격인 고대 그리스 로마 고전, 플라톤 원전 번역을 준비, 실천하고 있다. 이러한 양서는 척박한 현대문명의 토양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 플라톤 등이 사용하는 고대 그리스어에 대한 개념 파악이 있어야 하므로, 단순 번역어로서는 읽기에 한계가 있다. <정암학당>이 출간하는 번역컨텐츠에는 대체로 (고대 그리스어 등에 대한)주석이 풍부하며, 꼼꼼한 걸로 알려져 있다.


  • 쇼펜하우어에 대한 편역서가 한국에 다수 존재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쇼펜하우어가 그다지 소개 되어 있지 않다. 매우 안타까운 것이다. 소크라테스 등을 괴롭힌 인간과 같은 간신배가 난무하고, 궤변이 진리로 통용되는 사회에 쇼펜하우어같은 인물이 알려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쇼펜하우어는 그 누구보다도 장황설난해함으로 둔갑시켜서 대중을 현혹하는 사이비 철학자를 경멸했다. 이런 점에 대해서 쇼펜하우어만큼 괴짜인 사람은 드물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문장이 명쾌하고 독일어 역사상 가장 뛰어난 것 중 하나라고 독일인들로부터 칭송받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독일어 문장은 독일에서 작문의 모범 등으로서 인식된다.

쇼펜하우어에 대한 오해[편집]

-쇼펜하우어는 헤겔에 비해 덜 심오했다?- 쇼펜하우어가 헤겔에 비해 당대에 주목받지 못한 것은 당대 독일의 학계 사정이, 현재 한국 학계와 비슷해서 그런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교육은 매우 놀라울 정도로 비효율적이다. 이러한 한국의 공교육의 처참한 상태나, 전반적인 학계의 상태를 비추어 보면 꼼수로써 연명하지 않는 '학자' 쇼펜하우어가 당대 독일에서 일찍이 주목받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는 걸 알 수가 있다. 괴테색채론도 이 때문에 무시당했다. 쇼펜하우어의 어록이 그것을 대변한다.

"요즘 독일 학자는 가난하기도 해서 솔직하거나 명예롭게 행동할 수가 없다. 그래서 왜곡하고 비틀고 순응하며, 자신의 확신을 일부로 부정한다. 자신이 믿지 않는 것을 믿는다고 가르치고 쓴다. 굽실거리고 아첨하며 당파에 소속되어 산다. (이해관계가 들어 맞는) 장관이나 권력자, 동료, 대학상, 출판업자, 평론가와 연대를 이룬다. 이런 게 독일 학자들의 처세술이다."

"그 때문에 독일 학자는 심오한 사기꾼이 된다. 또한 대다수 독일 문학, 독일 철학에는 장광설이 난무한다. 대중을 기만할 줄 모르는 학자는 쓸모없는 사람이 될 지경이다." "이러한 사이비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이유는 진짜 학자의 등장을 막기 위해서다. 그런 학자가 나타나면 사이비학자들은 위기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학문 분야의 꼴이 이 모양이라는 것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자였다?- 이 말은 쇼펜하우어를 날조하고 왜곡하는 대표적인 헛소리다. 쇼펜하우어가 쓴 에세이에 나타나는 극히 단편적인 부분만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인간사회의 온갖 기만적 요소, 참상을 글로 표현했다고 해서 염세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 정작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 중에서 쇼펜하우어의 독일어 원전을 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봤다고 해도 일부로 쇼펜하우어를 왜곡하고 모함하는 사람일 것이다. 독자들은 쇼펜하우어 저서를 탐구하다가 보면 오히려 유쾌하다고 느낄 것이다. 일반 독자로서는 원전 보다는 괜찮은 원전 번역본을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날조, 왜곡, 대중이 일부로 오해하게 만든 예시를 간단히 들겠다. 이와 비슷한 취급을 받는 것이 마키아벨리다. 군주론이 금서가 된 이유는 지극히 정상적이라서 그런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진정으로 대중을 위한 통치를 위해 그랬지만 당대의 성직자들은 이를 매우 악마적인 것으로 매도했다. 마키아벨리는 결코 교활한 권모술수의 화신이 아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소리를 해서 애초에 국가나 종교는 일종의 권력집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르네상스기의 에라스무스같은 인문주의자들은 알고 있었다. 지극히 정상적인 소리를 하면 파문 당하는 것이 인간사회라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미 자신의 저서에서 이러한 인간사회의 모습을 '동굴의 비유'로써 표현했다. 사이비꾼과는 다르게 진실을 설파하고 다니다가 '민주주의자' 들에게 수모를 겪다가 결국 사형 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도 그런 사람이었다. 쇼펜하우어가 플라톤을 보고 '신과 같은 플라톤'이라고 부른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단 한 문장의 글을 남기지 않았다. 단지 플라톤이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빌려서 자신의 작품에 등장시킬 뿐이다.

이솝우화를 지은 고대 그리스의 이솝은 단순 동물 사회를 그린 작가가 절대 아니다. 이솝은 그리스 성직자들의 추잡함, 비리를 폭로하다가 처형 당한 인물이다. 쇼펜하우어가 애독했던 볼테르, 세르반테스, 괴테도 이런 인간사회의 모습을 꿰뚫고 있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귀스타브 르 봉(1841~1931)은 군주제의 폐단은 민주주의를 잉태시켰고, 부르주아와 함께 성장한 자본주의는 '자본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 그러나 르 봉은 ‘자본민주주의’라는 허상 깊숙이 감춰진 현 시대의 본질은 ‘이성’ 또는 ‘자본’이 아니라 '인간의 심리'라고 넌지시 말한다. 또한 귀스타브 르 봉은 의견이 대립되는 영역, 예를 들면 정치적 혁명, 종교적 혁명 등은 '믿음의 영역'이라서 이성적 논리로 접근하면 반드시 난관에 봉착한다고 주장하였다. 쇼펜하우어와 비슷하게 프랑스 학계 전반과 20세기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귀스타브 르 봉도 당연히 당대 학계에서 주목 받지 못하고 아웃사이더로서 소임을 다하였다.

쇼펜하우어의 교육관[편집]

쇼펜하우어의 글에서는 교육에 대한 글이 꽤나 보이는데 이는 꽤나 통찰력이 돋보이는 것들이다. 에세이 형식이라서 체계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다. 그의 주요 어록이 교육관을 대변한다. "조금만 더 지나면 고전어 교육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스 라틴 고전은 독일어 각주를 달고 발간되는 지경이다" 쇼펜하우어는 고전어 교육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우려하면서, 젊은이들이 야만과 게으름의 길을 걸으며 헤메고 있다고 비판한다.

"사태가 이 모양이라면 이제 인문주의는 끝장이다. (첨단 과학 덕에)철도가 건설되고 전선이 만들어진다 해도 소용없다. 또 다시 야만성이 난무하는 시대가 도래한다."

"썩어 넘치는 대학생의 숫자를 줄여야 한다" "수많은 교수, 교사들은 돈벌이를 위해 가르친다." 독자들은 교육사상가로 유명한 존 듀이한테서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감지할 수가 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영미철학에 매우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학자라는 자들은 책만 많이 읽은 자들이다. 진짜 사상가, 인류의 후원자는 직접 세상이라는 책을 읽은 사람을 말한다"

"질이 떨어지는 수많은 작가, 학자는 신간 도서만 읽으려하는 대중의 광신에 의존해 연명한다." "여러 편집자가 만들어내는 책은 되도록 적게 읽어야 한다. 그런 책을 전혀 읽지 않는 건 어렵다. 수백 년 동안 누적된 지성을 좁은 지면에 수록한 편람도 편찬된 책이다."

"현대의 사상, 주장(철학이든, 과학이든)이 항상 옳은 것이고, 현대에 등장한 사상은 모두 과거의 사상을 개선한 것이라 믿는 것은 제일 위험한 광신이다." "현대의 변화가, 여러 변화가 진보라고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경우 세상 어디서나 기생충같은 인간의 사상이 유행한다"

"대중의 입맛, 관심을 확보하려고 사이비학문을 퍼트릴수록, 점점 더 괴상한 장광설로써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글을 쓸 수밖에 없다."


"고전, 위대한 고전을 쓴 작가를 평론, 해설한 책이 나오면 독자는 그 따위 책을 읽지, 그 작가의 원본 자체는 읽지 않는다. 독자는 단지 신간 도서를 추종한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듯이, '심오한 사상가'로 둔갑된 사이비꾼의 장광설이 대중의 입맛에 맞아서 그렇다."

"아이들에게는 일찍부터 책(매스미디어 등)만 많이 읽게 하는 대신에 사물과 인간관계를 알게 해야 한다. 아이들이 현실을 순수히 파악하도록 이끌고 개념보다는 언제나 현실 그 자체에서 얻은 지각을 토대로 개념을 형성하도록 해야 한다."

"망상으로 가득 찬 머리는 현실을 잘못 파악하거나, 주입된 환상에 따라 현실을 개조하려고 한다. 그래서 결국에는 이론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미로에 빠진다." "이 때문에 생긴 선입견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해악을 입히는지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어릴 때부터 주입된 오류는 쉽게 지울 수가 없다. 16세가 되기 전까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각종 철학, 종교, 도그마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 "청소년이 공허한 장광설에 현혹되는데, 소녀들이 더 심각해지는데 이상한 소설을 읽어서 실현불가능한 것을 추구하고 기대를 한다. 이런 게 거의 평생 동안 인간한테 해악을 끼친다"

"수많은 사람은 직관과 경험을 통해서 개념을 형성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게 수많은 사람들이 매우 피상적이고 통속적인 이유다."


사람들은 지성이 뛰어나면 인격이 그만큼 고결하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거대한 착각이다. 지성과 인성은 절대 비례하지 않는다. 지성과 인격은 별개의 문제다. 쇼펜하우어는 당대의 지성인으로 칭송받는 자들과 권위자들을 대중의 '광신'을 악용하는 사이비꾼으로 취급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런 '지성인' 보다는 자신과 같은 '아웃사이더'가 인류에 진정으로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상, 학문 분야에서는 누구나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새로운 것을 내놓으려고 한다. 이런 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현재까지 통용되던 좋은 것을 박살내고, 이것저것에서 따와 짜깁은 장광설로 대체하려는 것이다."

"어떤 의문에 대해 탐구하는 사람은, 역사는 진보한다거나, 학문은 언제나 진보한다거나 하는 이런 헛주장을 맹신하고서 그 문제를 다룬 최신 서적만을 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새로운 학문, 사상은 진보가 아니라 퇴보를 위한 과정이 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현대에는 더이상 쇼펜하우어같은 사상가는 존재가 새로운 장광설을 짜깁어서 지배이념으로 둔갑시키는 사상가만이 있을 것이다.

황장엽헤겔[편집]

  • 황장엽헤겔 ㅡ 쇼펜하우어가 공허한 '장광설'을 '난해함'으로 둔갑시킨 사람을 맹비판하고, 그러한 사이비학자로 헤겔을 꼽았는데, 북한의 지배이념인 주체사상의 창시자인 황장엽 선생의 헤겔 관련 이야기가 있다. 마르크스헤겔을 공부했고 큰 영향을 받았다.

"도서관에 가서 헤겔 변증법에 빠져들었다. 헤겔의 '논리학'을 읽고 또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가 된다면서 해설서를 쓰고 있었는데, 나는 해설된 책의 도움을 받으면서 읽어도 이해를 못하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었다. 철학적 사고의 재능이 없으면서 공연히 철학연구에 뜻을 둔 게 아닌가 하고 은근히 두려움이 생겼다."

"풀리지 않는 것 중의 또 한 가지는 철학 강좌장의 특강내용이었다. 연구원 2년과정이 끝나갈 무렵에 강좌장이 여러 시간에 걸쳐 특강을 했는데 나는 겨우 절반 정도만 이해할 수 있었다. 노트를 해놓았지만 그걸 읽어보고 재독해도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고민하던 나는 후배 연구원들을 위한 강좌장의 특강을 처음부터 다시 들었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학위논문에서 내가 염두에 둔 것은 이론과 실천을 어떻게 통일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는데, 강좌장은 실제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을 주장하는 것 같았다. 또 그의 성격이 변태적인 듯해서 평소에 나는 강좌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강의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와 헤어진다는 것은 서운한 감이 있었다. 그래서 하루 정도 시간을 내어 그를 찾아갔다. '조선에 나가서 철학연구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는 게 도움이 될까요?' 나는 특강에 대한 그의 주장을 묻지 않고 그렇게 우회해서 물었다. 그의 철학적 사고에 깊이가 있다면 천천히 의논할 작정이었다. 그 사람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말했다. '마르크스자본론을 공부하는 게 좋겠죠. 하다못해 자본론의 제1권만이라도 잘 연구할 필요가 있어요' 나는 이 사람에게 더 물어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미련 없이 그와 작별했다."

"학위논문이 통과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논문개요를 심사위원들에게 돌리고 도서관에도 비치해야만 했다. 그 일을 하려면 우선 지도교수의 서명을 받는 게 급선무였다. 나는 논문개요를 작성하여 오랜만에 지도교수를 찾아갔다. 그는 읽어보더니 두어 글자 고쳐주고는 말했다. '내가 지도한 연구생 가운데 논문개요를 무수정으로 통과시킨 예는 당신이 처음이오. 당신 논문은 독창적인 사상을 담고 있소' 나는 지도교수가 그때까지 전혀 지도를 해주지 않다가 미안한 나머지 과찬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논문개요가 간결해서 산뜻한지는 몰라도 논문 자체는 소련학자들이 발표한 논문들의 사상을 여기저기서 따다가 조립한 것에 불과하고, 독창적인 사상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음을 나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황장엽 회고록-

"중앙당학교 교장으로 우리에게 철학 강의를 하며 뽐내었던 소련 출신 조선인이 내가 유학하고 있을 때 고관 자격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했다고 해서 만난 적이 있다. 그런데 철학은 말할 것도 없고, 러시아어도 엉터리였다. 내가 그의 실력을 안 것도, 모스크바에서 공부한 덕이었다. 그는 마르크스, 엥겔스의 노작들은 거의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초기 북한의 철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제대로 모르면서 그걸 가르쳤던 셈이다."

"그런데 중국과 소련이 서로 편싸움을 하는 걸 보고는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권력욕이 강하고 권력을 위해서는 사상이나 이론의 정당성에 관계 없이 그걸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왜곡해서 해설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정치지도자라는 인간들도 이론수준은 높지 않으면서 오로지 권모술수에만 능하다는 걸 알았다. 나는 그러면서 마르크스주의 자체에는 명백한 과학적 기준이 없기 때문에 절대로 마르크스레닌의 학설을 교조주의적으로 대해서는 안되며, 사회주의의 미래를 위해 이론을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걸 느꼈다"

같이 보기[편집]

참고한 것[편집]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쇼펜하우어 '여록과 보유'
  • 쇼펜하우어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 쇼펜하우어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다른 판본] / 인생론 /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
  • 유쾌하고 독한 쇼펜하우어의 철학 읽기’랄프 비너 지음.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에라스무스 '우신예찬'
  • 토마스모어 '유토피아'
  • 데카르트 '방법서설'
  • 귀스타브 르 봉 '혁명의 심리학'
  • 발터 아벤트로트 - '쇼펜하우어'
  • 어빈 얄롬 - '쇼펜하우어 집단 치료'
  • 랄프 비너 - '유쾌하고 독한 쇼펜하우어의 철학 읽기'
  • 김선희 - 쇼펜하우어 & 니체,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때'
  • 수잔네 뫼부스 - 쉽게 읽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박은미 -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김진 -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읽기 
  • 프리드리히 니체 -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 선악의 저편 / 도덕의 계보 / 나의 누이와 나
  • 헤겔 - '정신현상학' 
  • 월터 카우프만 - '헤겔'
  • 토마스 베른하르트 - 혼란
  •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 '서양철학사'
  • 버트란트 러셀 - 서양철학사, 서양의 지혜
  • 윌 듀란트 - '철학이야기'
  • 새무얼 스텀프 - 서양철학사
  • 스털링 램프레히트 - 서양철학사
  • 윌리엄 어빈 '욕망의 발견'
  • 브라이언 메기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철학의 역사  / 철학사 비판 (동녁 편집부)
  • 안승일 - '열정의 천재들, 광기의 천재들' / 셔원 눌랜드 -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 노명우 -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 강성률 - '2500년 간의 고독과 자유' / 김용관 - '생각의 진화'
  • 김태형 - 베토벤 심리상담 보고서
  • 황장엽 - 황장엽 회고록 
  • Arthur Hübscher - Manuscript Books of 1830-1852 and Last Manuscripts
  • Christopher Janaway - Cambridge companion to Schopenhauer
  • Brain Magee, Frederic Coplestone - An Introduction to Western Philosophers
  • Irwin Edman - The Philosophy of Schopenhauer
  • Patrick Stokes - Kierkegaard’s Uncanny Encounter with Schopenhauer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