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릭스 멘델스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펠릭스 멘델스존의 초상화. 영국의 세밀화가 제임스 워렌 차일드(1778–1862)가 1839년에 그렸다.

야코프 루트비히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독일어: Jacob Ludwig 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년 2월 3일 ~ 1847년 11월 4일)는 독일의 초기 낭만파 시대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오르가니스트, 지휘자로, 영어권 국가에서는 흔히 펠릭스 멘델스존이라고 한다.[1]

생애[편집]

철학자 모제스 멘델스존의 손자로, 그는 나중에 기독교로 개종했던 명망있는 유대인 집안에서 은행가의 아들로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충분한 음악 교육을 받아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나타냈으나, 그의 부모님은 신중하여 그의 재능을 이용하려 들지 않았다. 아버지는 멘델스존 자신이 음악에 헌신하겠다고 진지하게 뜻을 세운 뒤에야 음악 교육을 시켰다.[2]

멘델스존은 3세 때 베를린으로 이주, 17세 때 <한여름 밤의 꿈>의 서곡을 발표하여 작곡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어린 시절에 독일에서 성공하면서 유럽 전역을 여행하였는데, 특히 잉글랜드에서 작곡자, 지휘자, 독주자로 크게 인정받아 이 곳을 10번이나 방문하였으며, 이곳에서 자신의 여러 수작을 초연하여 잉글랜드는 성인 멘델스존의 인생 역정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멘델스존은 원래 보수적인 음악 취향을 보여서 프란츠 리스트, 리하르트 바그너, 엑토르 베를리오즈 같은 당대의 대담한 음악가와 동떨어졌다. 그가 라이프치히에 세운 음악학교는 전통적인 고전 음악의 보루가 되었다.

멘델스존은 교향곡, 협주곡, 오라토리오, 피아노곡, 실내악곡을 썼다. 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음악에 대한 관심을 되살리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음악 취향이 변화하고 반유대주의가 대두되면서 오랜 세월동안 그는 무시를 받다가 오늘날 그의 독창성이 재평가되고 있다. 멘델스존은 이제 낭만주의 음악 음악가 가운데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1843년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창립하고, 이어 프로이센 국립 음악장, 라이프치히 대학 명예 박사가 되었다.

1847년 봄, 몹시 따르고 좋아했던 누이가 숨지자, 그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몸져 누웠다. 시름시름 앓던 그는 그해 가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향년 38세.

사후[편집]

원래 유대인 혈통이었으나 아버지 아브라함이 개신교로 개종하면서 멘델스존이라는 이름에 바르톨디(bartholdy)를 붙여 다른 멘델스존 가와는 구별되게 하였다. 그러나 혈통이 유대인이었던 탓에 독일에서 나치시대에 라이프치히에 있던 그의 동상이 철거되고 그가 작곡한 <결혼 행진곡>연주까지 금지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3]

작품[편집]

그의 일생은 실로 작곡과 연주의 연속이었다. 그는 슈베르트와 같은 생활의 고통이 없이 비상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작품상에 나타나, 명쾌하고도 아름다운 음악이 되었다. 그는 색채적이며 우아한 낭만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베토벤·브람스의 곡과 함께 3대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손꼽힌다. 그의 유명한 작품은 바흐의 고전 음악 연구에서 배워 얻은 바가 많고, 바흐를 세상에 소개한 공적은 실로 크다. 그는 낭만파의 선구자로, 신고전파의 길을 지시한 것으로서, 음악 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4]

초기 작품[편집]

멘델스존은 어린 시절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의 영향을 크게 받아 12살에 작곡한 초기 현악 교향곡을 보면 이들을 따라간 흔적이 보이는데, 이 작품들은 멘델스존의 가정에서 연주하였으며, 그가 죽은 뒤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출판되어 사람들이 연주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1821년에서 1823년 사이, 즉 그가 12살에서 14살이던 시절에 쓴 것이다.

그의 놀라운 재능은 특히 성년기 초의 작품에서 잘 나타나는데,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E♭장조(1824년), 현악 8중주(1825년), "한여름 밤의 꿈" 서곡(1826년, 이 곡 종결부는 당시 멘델스존의 절친한 친구 아돌프 베른하르트 마르크스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다), 현악 4중주 A단조(1827년, 2번으로 표시되나, 1번곡이 나오기 전에 먼저 작곡된 곡이다) 등이 바로 그러하다. 이러한 작품은 형식, 화성, 대위법, 음색, 베토벤의 작곡 기법을 그가 직관적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주며, 때문에 흔히 멘델스존의 재능이 지적인 이해 면에서 모차르트를 능가했다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5]

교향곡[편집]

멘델스존이 성년이 되어 작곡한 교향곡의 번호는 작곡 순서가 아니라 대개 출판 순서를 따른다. 작곡한 순서로는 1번, 5번, 4번, 2번, 3번순(그가 10년이 넘도록 교향곡을 작곡하는 데 매달렸기 때문이다. 작곡 순서에서 교향곡 3번의 위치가 문제가 되는데, 교향곡 5번 이후에 3번 초고를 시작했으나, 5번과 4번 다음으로 완성하였기 때문이다.)

전체 관현악단 편성의 교향곡 1번 C단조는 그가 15살이던 1824년에 작곡하였다. 이 곡은 실험적인 작품으로,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의 영향을 나타내고 있다. 멘델스존은 1829년 런던을 처음으로 방문하여 로열 필하모닉 협회(Royal Philharmonic Society)와 함께 이 교향곡을 지휘하였다. 3악장은 자신의 8중주곡을 스케르초인 관현악곡으로 편곡한 것이다. 이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두어 영국에서 명성을 얻게 쌓게 되었다.

1829년에서 1830년 사이에 멘델스존은 "종교 개혁"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교향곡 5번을 썼다. 이 곡은 종교 개혁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곡이었다. 그는 이 작품에 만족하지 못하였으며, 악보 출판을 허락하지 않았다.

교향곡 3번 a단조 "스코틀랜드" 는 1830년에서 1842년 사이에 작곡되어 간간히 수정하였다. 이 작품은 낭만주의의 감성으로 스코틀랜드의 분위기를 담아냈지만, 사실 스코틀랜드의 민요를 차용하지는 않았다. 1842년 멘델스존은 이 작품을 피아노 2중주곡으로 편곡하여 출판하였으며, 관현악 악보는 1843년에 나왔다.

멘델스존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감명을 받아 교향곡 4번 A장조 "이탈리아"를 썼다. 그는 1833년 이 곡을 초연하였으나, 계속 수정하려고 하여 살아 생전에 출판을 허락하지 않았다.

1840년 멘델스존은 교향곡 2번 B♭장조 "찬가"(Lobgesang)를 작곡하였으며, 이 악보는 1841년에 출간하였다.

기타 관현악 작품[편집]

멘델스존은 1820년대 후반경 스코틀랜드를 방문하여 느낀 인상으로 1830년 연주회용 서곡 헤브리디스 서곡(핑갈의 동굴)을 작곡하였다. 그는 유럽을 순회하던 중 헤브리디스 제도스태파 섬에서 핑갈의 동굴에 가서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재빨리 서곡의 도입부 주제를 썼으며 그날 저녁 이것을 집에 편지로 보내었다.

그 밖에도 그는 여러 연주회용 서곡을 썼다. 오늘날 널리 연주하는 곡으로는 뤼 블라스 서곡(멘델스존 본인이 싫어하던 빅토르 위고의 연극의 자선 공연회에 쓰이기 위한 곡이었다), 고요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 서곡(Meerestille und Glückliche Fahrt, 괴테의 시에서 영감을 얻은 곡이다), 아름다운 멜루지네 서곡이 있다.

부수 음악(incidental music) 한여름 밤의 꿈(Op.61)은 서곡이 나온지 17년 만에 1843년에 작곡한 것으로,결혼 행진곡1843년작곡했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Op.64 (1844년)은 페르디난트 다비트를 위해 쓴 곡으로, 멘델스존의 인기있는 음악 가운데 손꼽히는 곡이다. 이 작품을 준비할 때 멘델스존과 함께 일하던 다비트는 자신의 과르네리 바이올린으로 이 곡을 초연하였다.

멘델스존은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두 피아노 협주곡을 쓴 바 있으며, 바이올린 협주곡(D단조),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두 곡,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2중 협주곡도 작곡하였다. 또 한 악장짜리로 된 독주자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도 더러 있다. 이러한 곡 가운데 피아노 편성이 있는 곡으로 "화려한 론도"(Rondo Brillante, Op.29, 1834년), "화려한 카프리치오"(Capriccio Brillante, Op.22, 1832년) "세레나데와 알레그로 조코소"(Serenade and Allegro Giocoso, Op. 43, 1838년)이 있으며, Op.113과 Op.114는 콘체르트슈튀케(Konzertstücke)로 원래 클라리넷, 바세트 호른, 피아노를 위한 곡이었으나 멘델스존 생전에 관현악용으로 편곡되어 연주된 바 있다.

실내악[편집]

멘델스존은 성인이 되어 여러 실내악곡을 남겼는데, 이 가운데 여러 곡은 혹자가 그의 큰 작품에서 결여하고 있다고 보는 강렬한 감정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그의 마지막 현악 4중주곡인 현악 4중주 6번은 누이 파니(Fanny)가 죽은 뒤에 쓴 것으로, 강렬하면서도 감동적이다. 다른 작품으로는 현악 5중주 두 곡과 클라리넷, 첼로, 비올라, 바이올린을 위한 여러 소나타 작품, 피아노 3중주 두 곡, 피아노 4중주 세 곡 등이 있다. 피아노 3중주 1번 D단조의 경우 멘델스존은 전과 달리 동료 음악가(페르디난트 힐러)의 조언을 받아 더욱 낭만적인 "슈만풍"으로 피아노 부분을 수정하여 곡의 효과를 높였다.

성악[편집]

멘델스존은 피아노가 반주하는 독창이나 이중창 등 여러 성악곡도 작곡하였다. 노래의 날개 위에와 같은 곡이 있다.

각주[편집]

  1. 영어로된 인쇄물에서는 거의 대부분 '멘델스존 바르톨디'가 아닌 '멘델스존'이라고만 쓰고 있다.(가령 참고문헌이나 아마존닷컴 등에서도 그러하다) 그로브 음악 및 음악가 사전에도 표제어를 '(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Bartholdy)'라고 괄호를 써서 나타내고 있으며, 본문에서도 그저 '멘델스존'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다른 언어에서는 대개 '멘델스존 바르톨디'(혹은 하이픈을 붙여서)으로 쓰인다.
  2. Brown (2003), 115
  3. 신동헌. 《재미있는 음악사 이야기》. 서울미디어, 236쪽
  4.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5. See e.g. Todd (2003), 79–108, esp. pp. 102–107

참고 문헌[편집]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