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푸시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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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푸시킨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러시아어: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 문화어: 알렉싼드르 뿌슈낀, 1799년 6월 6일~1837년 2월 10일)은 러시아시인이자 소설가이다. 외조부는 표트르 대제를 섬긴 아비시니아 흑인 귀족이었다.

그가 어렸을 때 유모 아리나가 들려준 러시아의 옛날 이야기 및 설화가 그를 대시인으로 성공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가정교사로부터 배운 외국어 가운데 프랑스어에 가장 뛰어나 10세경에 이미 프랑스어로 시를 썼다. 1811년(12세), 차루스코에 세로에 있던 학습원에 들어가서 자유주의적 교육의 영향을 받았다. 1816년(17세)의 공개 진급시험에서는 자작시 <차루스코에 세로의 추억>을 낭독하여 이곳에 나와 있던 노시인 가브릴라 데르자빈을 감격시켰다고 한다. 1817년(18세), 학습원을 졸업하고 외무성에 들어간다. 그 후 거의 3년간은 고등 룸펜이 되어 사교계에 출입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보냈으나 명석한 판단력은 잃지 않고 자유주의적 정신으로 농노 제도 및 전제정치를 공격하는 시 《자유》(1817), 《마을》(1819) 등을 발표했는데, 이 때문에 1820년 남러시아로 추방당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설화를 주제로 하면서 구어를 대담하게 채용한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발표하여서 러시아 시에 새 경지를 개척하는 동시에 시인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추방생활 중 바이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카프카스의 포로》(1822), 《집시》(1823), 《바흐치사라이의 샘》(1824) 등 낭만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서사시 및 서정시를 썼으며, 이 동안에 릴레예프데카브리스트와 친해졌다. 1824년 오데사 총독과 충돌, 프스코프 현에 있는 모친 영지 미하일로프스코 촌에 칩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점차로 바이런의 영향에서 벗어나 이미 남방체제 중에 제1장을 발표한 바 있는 시형식 소설 《예프게니 오네긴》의 후속 장이나 《보리스 고두노프》에는 리얼리즘에의 이행이 엿보인다. 1825년의 데카브리스트 반란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거주는 허용되었으나 위험인물로 취급되어 황제의 직접 검열을 받아야 하는 중압하에 우울한 기분을 나타내는 서정시나 연애생활을 하면서 기분전환을 꾀하다가, 1830년부터 새로운 창작생활 시기에 들어간다.

푸시킨의 아내 나탈리아 곤차로바

그는 우선 《오네긴》을 완성하고 이어 《인색한 기사》(1833) 등 시작품을 내는 한편, 신문에도 손을 대 단편집 《벨킨 이야기》(1830), 《스페이드 여왕》(1834), 소설 《대위의 딸》 등 허다한 걸작을 썼다. 이러는 동안 1831년 미모로 소문난 나탈리야 곤차로바와 결혼했으나 그의 반역정신을 적대시하는 귀족들이 나탈리야가 부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날조된 소문을 퍼뜨림으로써 푸시킨은 부득이 결투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비운의 죽음을 당했다.

그는 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로서 문학의 온갖 장르에 걸쳐 그 재능을 발휘했다. 과거 100년간 러시아 시분야에서 그의 간결하고 평이 명료한 시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지 않은 시인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산문에 있어서도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의 기초는 그에 의해 구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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