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막시밀리앙 프랑수아 마리 이지도르 드 로베스피에르(프랑스어: Maximilien Franç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1758년 5월 6일 ~ 1794년 7월 28일)는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혁명 정치가로, 법학자이기도 했다. 공포정치를 행하다가 되려 테르미도르의 쿠데타로 반대파에의해 처형당했다.
루소의 이상을 목표로 한 자코뱅파의 지도자로, 사실상 독재자로서 프랑스를 지배했고 숙청을 통한 공포 정치로 많은 반대파를 단두대에 보냈기 때문에 “루소의 피로 물든 손”이라고 칭했다. 결국 자신도 1794년 단두대의 희생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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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편집] 초기 생애
1758년 5월 6일 프랑스 북부의 아라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모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는 아라스에 변호사로 자리를 잡았으며, 그의 아버지 막시밀리앙 프랑소와 드 로베스피에르도 변호사로 일했다. 그는 1758년 양조업자의 딸인 자클린느 마르게리테 카롤과 결혼을 했다. 막시밀리앙은 4형제 중 맏이로, 혼외로 태어났으며, 그의 부모는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결혼을 서둘렀으며, 그의 조부는 참석하지 않았다. 1764년 로베스피에르 부인이 난산으로 사망하였다. 당시 막시밀리앙은 6세, 동생인 오거스틴은 1살이었다. 홀로 된 아버지는 1777년 뮌헨에서 사망할 때까지 재혼을 하지 않고, 유럽 각지를 떠돌았다. 홀로 남은 아이들은 외가집으로 보내졌다.
막시밀리앙은 8살 때 아라스의 칼리제(중학교)에서 입학했고, 이미 읽고 쓸 줄 알고 있었다.[1] 1769년 10월 주교의 추천으로 그는 파리에 있는 리세 루이 르 그랑(루이왕립 고등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로마공화국의 이상과 키케로의 수사와 카토 등 고전 인물들을 접할 수 있었다. 동급생으로 카미유 데물랭과 스타니슬라 프레롱이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 루소를 접했으며, 그에서 많은 원칙을 채용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의 의식으로만 홀로 서는 고결한 자아의 사상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2]
루이 16세는 대관식 직후 루이 르 그랑을 방문했고, 당시 17살이던 로베스피에르는 500명의 학생들 중 대표로 선출되어 환영사를 읽었다. 상을 받은 학생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선출은 당연한 것이었다. 연설 당일 로베스피에르와 군중들은 빗 속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국왕 부부는 도착하자마자 머물렀고, 기념식 직후 바로 가버렸다.[2]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로베스피에르는 국민 공회에서 루이 16세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즉시 처형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편집] 정치입문
1780년 루이 르 그랑 학원을 졸업하였다. 판사를 거쳐, 아르투 주 고등법원에 변호사가 되어, 학회에 선출되었다. 이때 발표한 《형사 사건 가해자 일족도 그 죄를 공유해야할까?》라는 논문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1781년에서 1789년까지 고향 아라스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789년 30세의 나이로 시민층의 지지를 받아 아르투 주 제3신분 대표- 귀족, 성직자, 평민(엄밀하게 말하면 부르주아 계급)-로 삼부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정치에 입문한다. 자코뱅파 내부의 산악파에 속해 지롱드파 내각이 추진하는 대외 전쟁에 반대했다. 그의 전반적인 이미지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 《사형제 폐지 법안》을 제출했고, 범인 친족에 대한 형벌을 금지하는 법안에 관여하는 등 인권변호사 상승의 의원으로 많은 인도주의 법안에 관여 했다.
그는 루소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프랑스 혁명 운동을 시작하여 자코뱅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소시민과 노동자의 입장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시도 하였다. 1793년 혁명 정부를 세웠다.
[편집] 공포정치
이 부분의 본문은 공포 정치입니다.
1793년 6월 2일, 상 퀼로트의 지지를 얻어 국민 공회에서 지롱드파를 추방하고 권력을 장악하면서 공안위원회, 안보위원회, 혁명재판소 등의 기관을 통해서 공포 정치(Terreur: 테레르는 테러의 어원)을 단행하면서, 반대파를 단두대로 보내 숙청하였다.
그리하여 지롱드당을 물리치고 자코뱅당의 독재 정치를 펼쳤으며, 혁명에 반대하는 외국 세력도 물리쳤다. 그러나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와 함께 공포 정치를 폈는데 루이 16세를 처형한 지 1년 만에 1만 7000명을 단두대에서 죽이고 지방 곳곳에서 반혁명파 학살을 벌였는데 방데에서는 한번에 25만 명을 죽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프랑스 최고의 과학자로 손꼽히던 앙투안 라부아지에, 루이 16세를 변호했던 크레티앵 기욤 드 라무아뇽 드 말제르브, 유명한 천문학자이자 혁명 초기 국민의회 의장을 지냈던 장 실뱅 바이이, 낭만주의 시의 선구자던 앙드레 드 셰니에 독일 출신의 프랑스 장군 니콜라 뤼크네르 등 너무 많은 사람들을 단두대에서 처형하였으며, 같은 동지였던 조르주 당통 마저도 부정부패 혐의로 처형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공포 정치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1794년 결국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일어났다.
[편집]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 부분의 본문은 테르미도르의 반동입니다.
프랑스 혁명력으로 10월인 테르미도르(양력 1794년 7월) 초부터 행동은 개시되었다. 사람들은 다들 언제 로베스피에르가 자신을 죽일까 걱정했다.
7월 26일, 로베스피에르가 공회에 나타나 반혁명파를 숙청하겠다고 말하자 의원들은 ‘반혁명파가 누구냐? 이름을 밝혀라!’ 라고 저항했다.
다음날, 즉 7월 27일 반로베스피에르 파는 행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를 구해줄 사람은 없었다. 그의 공포 정치는 민심을 그에게서 떠나보냈던 것이다.
1794년 7월 28일,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이 수많은 사람을 죽였던 도구인 단두대에 올라가 처형당했다. 생 쥐스트, 조르즈 쿠통, 친동생인 어거스틴 로베스피에르 등과 함께 처형당했다.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으로 혁명 주도권은 부르주아가 쥐게 되었고, 나폴레옹의 등장까지 새로운 국면이 나타났다.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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