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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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두대(斷頭臺)또는 기요틴(Guillotine)은 프랑스 혁명 당시 사용한 사형 기구이다. 이 기구는 1792년 정식 사형 도구가 되었다.

개발 및 도입[편집]

1791년에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국민의회에서 계급에 상관없이 참수형에 처할 죄수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왕의 주치의이자 외과학회의 사무국장이던 안토닌 루이 박사와 파리 의료기기부의 해부학 교수인 조세프 이그나스 기요탱 박사를 필두로 이 건에 관한 위원회가 형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이탈리아의 “만나이아” (혹은 만나자)와 스코틀랜드의 “메이든”, 그리고 “헬리팩스 기벳” 등의 참수기구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전처럼 무딘 도끼나 교수형으로 사형수의 형을 집행하는 것은 인도적이지 않고, 형집행자들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주기에, 기구로 형을 집행하자는 주제의 논문으로 제출하였다. 기요탱은 이 기구로 사형수들이 고통없이 죽을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실제로 이 기구의 설계에 기요탱 박사의 공헌은 미미하고, 안토닌 루이 박사가 기요탱 박사가 제안한 생각을 발전시켜, 설계한 뒤 이 기구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그 사형기구가 루이종, 또는 루이세트로 불렸으나, 언론에서 기억하기 쉽다는 이유로 기요탱 박사의 이름을 따서 이름붙여졌다. 그 결과 기요탱 박사의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단두대의 구조는 2개 기둥이 맨꼭대기에 연결되어있고 두 기둥 사이에 날이 비스듬한 묵직한 무쇠칼이 끼워져 있다. 사형 집행인이 밧줄을 끊으면 칼이 떨어져 목을 자르는 것이다.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도 여기서 죽었으며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인 당통 역시 이 기구로 인하여 죽었고, 과학자 라부아지에도 여기에서 죽었다. 단두대로 많은 사람을 죽인 로베스피에르는 역설적으로 이 기구에 의해 죽었다. 단두대를 고안한 기요탱 박사도 단두대에서 죽었다고 전해지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는 1814년 5월 26일에 자연사하였다.

프랑스에서 단두대를 마지막으로 사용한 때는 1977년이었으며, 1981년에는 사형제를 폐지했다.

1930년아돌프 히틀러는 기요틴을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데 사용하였으며 그 수만 2만명을 넘는다. (이는 프랑스에서의 기요틴으로 인한 죽은 자들의 수 보다 많은 수치이다.) 베트남 전쟁 시절 남베트남 간수들에 의해 공산 포로들이 단두대로 처형당했다. 그 밖에도 벨기에스웨덴, 룩셈부르크도 단두대를 사용한 바 있다.

논란[편집]

단두대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부터, 기요탱 박사의 주장처럼 이 사형도구가 죄수의 고통을 최소화시켜주는 것이 맞느냐는 논란이 있었다. 과거의 사형 방법과 비교하면 고통이 덜하다는 데에는 이견이 적었으나, '인도주의적' 차원으로 논의할 경우 사형수의 고통 여부가 논쟁거리가 되었다. 게다가 단두대의 신속함이 죄수의 고통을 더 지속시킨다는 주장도 있었다. 기요틴 처형방법은 두개골에 충격을 별로 주지 않기 때문에, 교수형이나 다른 과격한 사형 방법과는 달리 죄수의 의식이 오랫동안 유지된다는 것이다.

단두대 처형에 대해 대중들은 절단된 머리가 눈을 깜빡였다든지, 말을 했다든지, 눈동자를 움직였다든지, 입을 움직였다고 이야기해 왔다. 여러 국가의 해부학자들과 과학자들은 1956년 전까지 잘린 사람 머리에 대한 명료한 실험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불가피하게 결과물들은 이야깃거리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죄수의 이름을 부르니 대답했다든지, 바늘로 찌르자 고통을 느끼는 모습을 보였다는 등의 진술은 의식이 수반된 행위가 아닌, 근육이 무작위적으로 움직였거나 자동 반사 행동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대뇌 혈액이 대량으로 유출될 경우 수 초 내로 인간의 두뇌는 의식을 잃을 수 있다.

비고[편집]

이를 본떠서 하는 하위 팀끼리 시합하는 더비 경기인 단두대 매치(斷頭臺 -)가 이 이름을 본떠서 사용하기도 한다. 주로 야구, 축구 등 각종 프로 스포츠 경기에서도 흔히 나타난다.[출처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