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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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6세
Ludvig XVI av Frankrike porträtterad av AF Callet.jpg
프랑스와 나바르의 국왕
재위 1774년 5월 10일~1791년 10월 1일
대관식 1775년 6월 11일
전임자 루이 15세
프랑스 국왕
재위 1791년 10월 1일~1792년 9월 21일
후임자 나폴레옹 1세
배우자 마리 앙투아네트
본명 루이 오귀스트
왕가 부르봉 왕가
부친 도팽 루이 페르디낭
모친 작센 공녀 마리아 요제파
서명 Signature of Louis XVI on 20 January 1793.jpg

루이 16세(프랑스어: Louis XVI, 1754년 8월 23일 ~ 1793년 1월 21일)는 1774년부터 1792년까지 프랑스 왕국을 통치한 부르봉 왕가 출신의 이다. 본명은 루이 오귀스트이다. 프랑스 혁명으로 퇴위당한 후 참수형에 처해졌으며, 그로 인해 ‘마지막 루이(Louis le Dernier)’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루이 15세의 손자이다.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하였다. 선량했던 그는 프랑스 사회를 개혁할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나약하여 의지와 추진력이 부족하였고 국왕으로서의 적성이 결여되어, 이후 닥쳐온 비운의 최대 원인이 되었다. 당시 귀족층의 사치스러운 생활 또한 심각하였다. 튀르고를 등용하여 구제도의 모순 해결, 재정위기를 타개하도록 하였으나, 궁정 및 특권 신분의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이어 네케르를 기용하였으나, 아메리카 독립혁명에 개입하여 국비를 낭비함으로써 재정은 더욱 곤란해졌다. 이후 칼론, 브리엔을 기용하였으나, 재정은 악화될 뿐 개혁은 특권신분의 반항으로 실현할 수가 없었고, 1788년 삼부회(三部會) 소집을 결정, 재차 네케르를 기용하였다. 1789년 6월 삼부회가 국민의회로 성장하여 입헌왕정에의 움직임이 높아지자, 군대에 의해 의회를 탄압코자 책동하였다가, 이것이 도리어 바스티유 공격을 초래하였고, 시민의 봉기에 굴복하였다. 이후 소위 1789년 체제에 입각한 입헌 왕정에의 움직임에 대하여 자신의 무정견과 왕비 마리앙투와네트를 중심으로 하는 궁정의 압력으로 신체제에 저항하면서도 일보일보 양보하였으며, 한편 미라보, 라파예트, 바르나브 등과 손을 잡고 권력의 회복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791년 6월 20일 일가와 함께 국외로 도망하려고 하였으나 실패, 입헌 왕정을 기조로 한 1791년의 헌법의 승인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국민공회는 왕을 퇴위시키고 공화국을 선포했고, 루이 16세는 국민공회(國民公會)의 투표결과 반역자로서 1793년 1월 단두대(斷頭臺)의 이슬로 사라졌다. [1]

역사[편집]

성장 과정[편집]

루이 16세는 1754년 8월 23일, 루이 15세의 손자이자 왕태자인 루이 페르디낭과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의 딸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1세의 외손녀인 작센의 마리 조제프 공녀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베리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1760년 9월 8일 보귀용 공작이 가정교사로 낙점되었다. 1761년 부활절 형 부르고뉴 공작 루이 조제프가 으로 사망하고, 11세였던 1765년에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할아버지의 뒤를 이을 왕세손에 봉해졌다.

결혼[편집]

오랜 세월 동안 서로 적대시해 온 부르봉 왕가합스부르크 왕가 사이에 화해를 조성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마리 앙투아네트와 부르고뉴 공작 루이 조제프 간에 정략 결혼이 획책되고 있었지만, 1761년 루이 조제프의 사망으로 인해, 1763년 5월 오스트리아로부터 사절이 파견되어 루이 오귀스트와 대신 결혼하게 해달라고 하였다. 결혼을 반대했던 루이의 아버지가 1765년에 사망한 후 1769년 6월, 루이 15세로부터 허락을 받아내어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약혼 문서를 보내게 하였다. 1770년 5월 16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왕태자 루이 오귀스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루이 16세는 포경(包莖)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것이 성행위를 고통스럽게 했고 그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때문에 남편을 멸시했다. 왕은 균형잡고 싶었고 또 양심의 가책도 있고 해서 그녀를 국사(國事)에 깊이 관여하게 했으며 총신(寵臣)들과 사치를 위해 돈을 물쓰듯 하게 했다.[2]

즉위[편집]

1774년 5월 10일 루이 15세가 천연두로 서거하자 1775년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여 왕위에 올랐다. 그때 그의 20세였으며, 아내와의 사이에서 1778년 장녀 마리 테레즈와 1781년 장남 루이 조제프(요절), 1785년 차남 루이 샤를(훗날의 루이 17세), 1786년 차녀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요절)를 낳았다.

20살 때의 루이 16세

1789년 과세의 승인을 요구하기 위해 170년 만에 삼부회를 소집하였는데, 이 회의는 제3신분을 중심으로 하는 국민의회로 발전하였다.

루이 16세는 이를 무력으로 탄압하였으므로 프랑스 혁명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파리 시민은 바스티유 감옥을 부수고, 9월 폭동을 일으켜 마침내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의회는 "사람은 나면서부터 자유·평등해야 하며, 정치를 하는 권리는 국민에게 있다"고 하는 '인권 선언'을 발표하여 혁명의 뜻을 밝혔다. 루이 16세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외국으로 피하려다 실패하여, 1793년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정치 활동[편집]

1774년 국력이 쇠약해진 때에 즉위하였다.

궁전의 경비 등으로 인하여 초래된 재정 악화는 루이 14세의 치세 말기부터 시작되어 루이 15세 치세하에서도 호전되지 못했고 루이 16세가 즉위할 즈음에는 다른 나라로부터 빚을 지는 처지가 되었다. 특히 북아메리카에서의 영국의 세력 확대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 독립 전쟁에 관여하여, 미국을 지원하였기 때문에 프랑스의 경제는 한층 더 악화되고 말았다. 때문에 루이 16세는 즉위 직후부터 만성적인 재정난에 계속 골치를 썩어야만 했다. 여기에 프랑스의 고질적인 사회적 모순이 사태 해결을 가로막고 있었는데, 구 체제하에서는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는 정치능력이 아니라, 문벌이 사회적 성취와 출세를 좌우하여 문벌은 없지만, 학식,기술, 재산같은 실력을 갖춘 부르주아 계급의 힘이 강해지는 시대적 흐름을 제대로 따를 수가 없었다. 또한 당시 프랑스는 통일된 기준 없이 각 지역별로 서로 관습, 법 등이 달랐다. 북부와 중부지방의 세금이 가장 무거웠으며 파리의 경우가 특히 심했다. 농부들은 추수한 곡식의 10~15%를 세금으로, 8%는 로마 가톨릭 교회성직자를 부양하는 돈으로 내야했으며, 강제 노역에 종사해야 했다.뿐만 아니라 프랑스 국민들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폐지될때까지 소득의 십분의 일 즉, 소득의 10%를 교회에 헌금하는 십일조를 해야 했다.[3]

루이 16세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조세개혁을 통해서 난관을 타개하려고 했지만, 수구적인 귀족들은 이러한 개혁조치에 크게 반발하였다. 이에 루이 16세는 부르봉 왕조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좀 더 과감하게 밀어붙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시간만 질질 끌다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말았다. 1787년 거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145명의 귀족과 성직자들이 모인 명사회를 소집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대책 모임을 가졌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삼부회와 테니스코트 서약[편집]

결국 남은 방법은 1614년 이래 열리지 않았던 삼부회를 여는 것이었는데, 바로 이것이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왕족이나 귀족은 삼부회를 소집해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었고, 그러한 속셈을 알아차린 부르주아 계급은 그것을 계기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자 했으니 그 결과는 뻔했다. 우여곡절 끝에 1789년 6월 제3신분의 대표들은 제1신분 및 제2신분에 속한 일부 대표들과 합세, 테니스 코트에 모여 프랑스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선서했다. 이 선서는 훗날 ‘테니스 코트 선서’라 불리게 된다.

프랑스 대혁명[편집]

그러나 루이 16세가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국민의회의 활동을 방해하자, 팔레 루아얄에 모여 있던 군중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7월 14일 오후 구체제를 상징하는 바스티유 감옥[4]을 습격함으로써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였다. 무정부 상태가 된 파리 시내에서 민중들은 혁명을 상징하는 삼색기를 들고 민병대를 조직하였다. 또한 서로 알아보기 위해서 밤나무 잎을 모자에 걸었다.

바렌느 사건[편집]

탕플 탑의 루이 16세

민중들의 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난 루이 16세는 가족들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망명하려 했으나, 국경 근처 바렌느에서 발각되어 군인들에 의해 파리로 이송되어 탕플 탑에 유폐되었다. 그 곳에서 루이 16세 일가는 엄중한 감시 아래 놓이게 되었다.

루이 16세의 처형

한편 유럽의 다른 군주들은 심각한 우려의 시선으로 이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민중들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정치권력에 맞서 싸운 프랑스 대혁명이 자기들 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을 두려웠기 때문이다. 유럽의 군주들은 루이 16세와의 연대를 선언하고 그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1792년부터 그들은 동맹을 맺고 프랑스 혁명 세력과의 전쟁을 시작했으며, 프랑스 왕가에 무슨 변이 일어날 경우 파리를 파괴하겠다고 위협했다. 굴욕적인 패배를 당할 위험에 직면한 프랑스는 식량 부족에다가 엄청난 물가 상승까지 겹쳐 다시 소요 상태에 빠져들었다.

최후[편집]

1792년 9월 21일, 국민공회라고 불리는 새로운 의회가 구성되어 그 첫 번째 회의에서 공화제가 선포되었다. 루이 16세는 새로 생긴 혁명 정부로부터 국가반역죄로 기소되어 1793년 1월 21일에 사형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 재판에서 루이 16세는 721명의 투표자 가운데 무죄 334표, 유죄 387표를 받아 유죄 판결을 받았다.[5] 그리고 그는 바로 그날 콩코드 광장에서 샤를 앙리 상송에 의해 단두대에 의한 공개 참수형을 당했다.

세간에서는 “나는 망했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발버둥치자 사형집행관이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며 협박해 단두대로 끌고 올라갔다는 것이 루이 16세의 마지막 모습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당시 기록을 보면 기독교적 수련으로 단련된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왕으로서의 당당함을 잃지 않은 채 꿋꿋하고 냉정하게 모든 절차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루이 16세는 단두대 계단 앞에서 코트를 벗기를 거부했다. 함부로 윗옷을 벗는 것은 예의범절에 벗어난다는 이유였다. 사형집행관이 절차이므로 어쩔 수 없다고 설명하자, 그는 스스로 코트를 벗었다. 수갑도 차기를 거부했지만 결국 받아들였다. 단두대의 칼날이 목에 떨어지기 직전에 루이 16세는 몰려든 군중을 향해 “프랑스인들이여, 나는 무고하게 죽는다”라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는 이어 사형집행인들을 향해 몸을 돌린 뒤 “나는 기소된 모든 죄목으로부터 결백하다. 내 피가 프랑스 국민의 행복을 강화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루이 16세의 배우자 마리 앙투아네트같은 해 10월에 참수당했다. 향년 38세.

가족 관계[편집]

주석[편집]

  1. (2004) 〈루이 16세〉,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Louis ⅩⅥ (1754 1793, 재위 1774 1794)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손자.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앙투와네트와 결혼. 성격은 우유부단하고, 국왕으로서의 적성이 결여되어, 이후 닥쳐온 비운의 최대 원인이 되었다. 튀르고를 등용하여 구제도의 모순 해결, 재정위기를 타개하도록 하였으나, 궁정 및 특권 신분의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이어 네케르를 기용하였으나, 아메리카 독립혁명에 개입하여 국비를 낭비함으로써 재정은 더욱 곤란해졌다. 이후 칼론, 브리엔을 기용하였으나, 재정은 악화될 뿐 개혁은 특권신분의 반항으로 실현할 수가 없었고, 1788년 삼부회(三部會) 소집을 결정, 재차 네케르를 기용하였다. 1789년 6월 삼부회가 국민의회로 성장하여 입헌왕정에의 움직임이 높아지자, 군대에 의해 의회를 탄압코자 책동하였다가, 이것이 도리어 바스티유 공격을 초래하였고, 시민의 봉기에 굴복하였다. 이후 소위 1789년 체제에 입각한 입헌 왕정에의 움직임에 대하여 자신의 무정견과 왕비 마리앙투와네트를 중심으로 하는 궁정의 압력으로 신체제에 저항하면서도 일보일보 양보하였으며, 한편 미라보, 라파예트, 바르나브 등과 손을 잡고 권력의 회복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791년 6월 20일 일가와 함께 국외로 도망하려고 하였으나 실패, 입헌 왕정을 기조로 한 1791년의 헌법의 승인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국민공회는 왕을 퇴위시키고 공화국을 선포했고, 루이 16세는 국민공회(國民公會)의 투표결과 반역자로서 1793년 1월 단두대(斷頭臺)의 이슬로 사라졌다.”
  2. 디트리히 슈바니츠, 《교양-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들녘, 2004년, ISBN 89-7527-420-9, 219쪽 “…루이 16세가 그러했다. 게다가 그는 포경(包莖)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것이 성행위를 고통스럽게 했고 그의 오스트리아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Marie-Antoinette 는 그 때문에 남편을 멸시했다. 왕은 균형잡고 싶었고 또 양심의 가책도 있고 해서 그녀를 국사(國事)에 깊이 관여하게 했으며 총신(寵臣)들과 사치를 위해 돈을 물쓰듯 하게 했다. ”
  3. 《이야기교회사》-십일조는 반드시 해야 하는 걸까?:십일조와 교회세,독일교회의 경우/이성덕 지음/살림 p.247
  4. 바스티유 감옥은 흔히 양심수를 수감한 감옥으로 알려져 있으나, 혁명당시 감옥에는 잡범들이 수용되어 있었다고 한다. 구체제를 상징하는 의미만 있는 것이다. 《교실밖의 세계사》/김성환 지음/사계절
  5. 이원복 글, 《21세기 먼나라 이웃나라 제2권 프랑스》, ISBN : 89-349-1385-1, 김영사 출판,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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