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걸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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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걸이 디자인 이미지

목걸이 사건(Affaire du collier de la reine )은 1785년, 프랑스 혁명 전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기 사건이다. 발루아 왕가의 혈통을 칭하는 잔느 드 라 모트 백작 부인이 왕실 보석상 뵈이머에게서 160만 리브르의 목걸이를 로앙 추기경에게 구매하게 하여 그것을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게 전달한다고 속여 가로챈 전형적인 사기 사건이다.

배경[편집]

복원된 목걸이 모형

1772년 루이 15세는 당시 푹빠져 있던 바리 백작 부인에게 200만 리브르 정도하는 특별한 선물을 하기로 했다. 그는 파리의 보석업자 뵈이머와 바상주에게 가장 좋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것은 그 보석업자에게도 오랜 시간이 걸렸고, 적절한 다이아몬드 세트를 모으기 위해 많은 재료들이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 루이 15세는 천연두로 사망을 했고, 뒤 바리 부인은 후임에게 쫒겨나게 된다.

보석상 샤를르 뵈이머와 파트너인 폴 바상주는 선왕 루이 15세의 주문을 받아 크고 작은 540개의 다이아몬드로 구성된 160만 리브르짜리 목걸이를 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이 15세가 갑자기 사망하자 계약은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고액의 상품을 떠안게 된 뵈이머는 이것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팔려고 했지만, 워낙 고가의 상품이었고,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바리 백작 부인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선뜻 구입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뵈이머는 왕비와 친하다고 소문난 라 모트 백작 부인에게 중재를 의뢰했다.

라 모트 백작 부인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한 친구라고 자랑하고 다니면서 루이 드 로앙 추기경에게 아첨하며 왕비의 이름을 팔아 금전을 가로채고 있었다.

궁정사제장의 지위에 있었던 로앙 추기경은 스트라스부르의 명가 출신의 성직자이면서 매우 방탕한 모습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추기경은 포기하지 않고, 언젠가 왕비에게 잘 보여 재상으로 출세하려고 했다.

사건[편집]

잔느 드 셍레미 드 발보아

스스로를 잔느 드 셍레미 드 발보아라고 부르는 사기꾼은 목걸이를 이용하여 부와 권력 그리고 왕실의 후원을 얻을 계획이었다. 앙리 2세의 사생아의 후손으로 잔느 드 발보아는 군인인 니콜라 드 라 모트와 결혼을 했으며, 왕이 주는 적은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1784년 3월 루이 드 로앙 비엔나 궁의 프랑스 전대사였던 추기경의 정부가 되었다.[1]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그녀의 어머니인 오스트리아 여황제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그녀의 행실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는 그를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왕비는 또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에게 보편 편지에서 무례하게 말한 것도 알고 있었다.

당시 추기경은 왕의 수상이 되기 위해 왕비의 호감을 사려했다. 잔느 드 라 모트는 남편의 친구이자, 정부인 레토 드 빌레트를 통해 궁정을 출입하고 있었고, 추기경에게 그녀의 취향을 잘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관계를 듣자마자 로앙 추기경은 왕비의 호감을 얻기 위해 백작부인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잔느는 추기경에게 그를 대신해 힘써 주겠다고 설득시키기 시작했다.

드 로앙 추기경

이것이 왕비가 추기경과 연루되기 시작하는 시초였으며, 로한에게 적절한 회답을 줌으로써 그녀의 의도가 여왕에게서 왔음을 시사했다. 편지의 어투는 매우 따듯했으며, 추기경은 왕비가 자신에게 넘어왔음을 확신했고, 열렬히 호응을 했다. 추기경은 잔느에게 여왕과 밤중의 비밀스런 회동을 졸랐다. 그리하여 그런 만남을 1784년 8월에 잡았다. 추기경은 베르사유 궁전 정원의 작은 숲에서, 여왕이라고 믿은 한 여자를 만난다. 이 여자는 사실 니콜 르과이 돌리바라는 창녀였으며, 그녀는 왕비와 닮았다는 이유로 잔느에게 고용되었다. 추기경은 들리바에게 장미를 주었고, 여왕 역을 하는 그녀는 그에게 과거의 유감은 잊어버리겠다고 약속을 한다.

잔느 드 라 모트는 추기경의 믿음을 이용하여 여왕의 자선사업에 쓸 돈이라고 말하면서, 그에게서 많은 돈을 빌렸다. 이런 과정으로 부유해진 잔느는 귀족사회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녀가 공공연하게 왕비와의 친분을 떠벌리고 다녔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왕비와 그녀의 관계가 진짜인줄 알았다.

보석상 샤를르 뵈이머와 파트너인 폴 바상주는 보석을 매각하기 위해 그녀를 이용하기로 했다. 처음에 그녀는 그들의 수수료를 거부했지만, 이후에는 마음을 바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1785년 1월 21일, 잔느는 추기경에게 왕비가 목걸이를 사고 싶다는 말을 꺼낸다. 하지만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공공연하게 그렇게 비싼 구매는 원치않는다는 말을 꺼내면서, 왕비가 추기경에게 비밀중계상이 되어주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얼마 후 로앙은 200만 리브르짜리 목걸이 가격을 협상을 하여 분할납입하기로 하고 한다. 추기경은 그 구매에 대한 여왕의 위임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손으로 쓴 여왕의 협상조건을 보석상에게 보여준다. 추기경은 그 목걸이를 가지고 잔느의 집으로 가서, 그곳에서 왕비가 파견한 시종으로 믿은 사람에게 건네준다. 잔느 드 라 모트의 남편은 그 목걸이를 가지고 런던으로 몰래가서, 다이아몬드를 따로따로 팔기위해 분해를 한다.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비용 지불일이 다가오자 잔느 드 라 모트는 추기경의 수표로 지불을 했지만, 충분하지 않자 뵈이머는 여왕에게 불평을 늘어놓지만, 여왕은 목걸이를 받은 적도, 주문한 적도 없다고 말을 한다. 왕비는 협상 내용에 대해서 말을 들었고, 대반전이 일어나게 된다. 1785년 8월 15일, 성모승천일 궁정대신들이 예배를 보기 위해 왕과 왕비를 기다리고 있을 때, 식을 주관하는 로앙 추기경이 국왕 부부와 내무장관이 브리테이 앞에 불려온다. 로앙 추기경은 "마리 앙투아네트 드 프랑스"라고 서명한 편지를 내놓는다. 왕족은 성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읽은 루이 16세는 추기경이 자신을 기만했다고 분노한다. 로앙 추기경은 바스티유 체포되어 감옥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왕비라고 생각했던 이와 주고받았던 서신을 파기한다. 게다가 잔느는 그가 그 서신들을 파기한 3일 후까지 체포되지 않았다.

경찰은 그녀와 연관된 모든 사람들을 수사하기 시작했고, 창녀인 니콜 드과이 돌리바, 궁전 출입을 허가한 레토 드 빌레트 등을 체포했으며, 그에게 그 편지가 자신이 여왕의 서명을 도용하여 쓴 것이라고 자백했다. 이 사건에 대해 그게 관계되었다는 것에는 의문이 들지만, 유명한 사깃꾼인 알레산드로 칼리오스트로도 또한 체포되었다.

로앙 추기경은 파리고등법원의 판사직을 수락했다. 1786년 5월 31일 이 떠들석한 사건의 재판에서 추기경과 창녀 니콜, 칼리오스트로는 무죄판결을 받았다. 잔느 드 라 모트는 유죄선고를 받고, 채찍형과 낙인형을 언도받아 창녀들이 수감되는 감방에 갇혔다. 그러나 태형과 낙인형은 집행되지 않았다. 다음 해 7월 그녀는 소년으로 변장해서 감방을 탈옥한다.[2] 그녀가 도망을 가자 남편이 유죄선고를 받아서 종신형으로 갤리선으로 보내졌다. 빌레트는 추방되었다.

영향[편집]

프랑스에서는 이 사건은 사실과는 달리 왕비의 음모에 의한 것으로 소문되고, 마리 앙투아네트를 싫어하는 여론이 강해졌다. 또한 국왕 루이 16세는 판결 직후 무죄를 선고받은 로앙 추기경을 궁정사제장에서 파면하고, 오베르뉴의 세즈 디유 대수도원으로 좌천하여 국민의 반감을 샀다. 로앙 추기경은 원래 평판이 나쁜 타락한 성직자였지만, 그의 좌천을 욕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몰랐다. 이러한 경위로 목걸이 사건을 프랑스 혁명의 계기가 된 사건 중 하나라는 사람도 있지만, 프랑스 혁명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평판과는 상관없는 것에서 발발하였기 때문에 연관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이 사건으로 대부분 세상에 나오지 않았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깍아내렸고, 그녀의 비참한 죽음으로 이어졌다.

주석[편집]

  1. Joan Haslip "Marie Antoinette", page 167
  2. Haslip, page 179

참고 문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