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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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Marie-Antoinette, 1775 - Musée Antoine Lécuyer.jpg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비
재위 1774년 5월 10일~1791년 10월 1일
전임자 마리 레슈친스카
프랑스 왕비
재위 1791년 10월 1일~1792년 9월 21일
후임자 조제핀 드 보아르네
배우자 루이 16세
자녀 마리 테레즈
루이 조제프 그자비에
루이 샤를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
본명 Maria Antonia Josepha Johanna
왕가 혼전: 합스부르크 왕가
혼후: 부르봉 왕가
부모 신성 로마 제국의 프란츠 1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출생 1755년 11월 2일(1755-11-02)
오스트리아 호프부르크 궁전
사망 1793년 10월 16일 (37세)
프랑스 콩코드 광장
서명 Marie-AntoinetteSignature.png

마리 앙투아네트(프랑스어: Marie Antoinette d'Autriche, 1755년 11월 2일 ~ 1793년 10월 16일)는 프랑스루이 16세왕비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1세오스트리아 제국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에서 막내딸로 태어났으며, 결혼 전의 이름은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폰 외스터라이히로트링겐(독일어: Maria Antonia Josepha Johanna von Österreich-Lothringen)이며, 결혼한 후의 이름은 마리 앙투아네트 조제프 잔 도트리슈로렌(프랑스어: Marie Antoinette Josèphe Jeanne D'Autriche-Lorraine)이다. 오스트리아와 오랜 숙적이었던 프랑스와의 동맹을 위해 루이 16세와 정략결혼을 했으나 왕비로 재위하는 동안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38살 생일을 2주 앞두고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1]

초기 삶[편집]

열 두살의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아 안토니아)는 1755년 11월 2일, 에서 신성 로마 제국황제이자 토스카나 대공인 신성 로마 제국의 프란츠 1세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녀이자 헝가리보헤미아여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이며 오스트리아 제국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이에서 막내인 15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자유분방하게 성장한 그녀는 모국어인 독일어를 비롯하여, 프랑스어이탈리아어등 외국어와 음악과 댄스 등을 배웠다. 그녀는 유독 프랑스어를 익히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훗날 프랑스의 왕비가 되어 생활하는 동안에도 공식 문서의 철자 맞춤법도 간간히 틀리는 경우가 여러번 지적되곤 하였고 이는 적국 출신의 왕비라는 곱지 않은 시선에 일조했음이 분명했다. 오스트리아의 예술적 풍토에서 자란 그녀는 음악과 미술을 좋아했으며 악기중에선 하프연주에 소질을 보였다. 상냥하고 아름다운 소녀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1762년, 비엔나 궁정 음악회에 온 여섯 살난 모차르트가 넘어지자 일으켜주었고 즉석에서 청혼을 받기도 하기도 하였다. 자매들중에는 마리아 카롤리나와 가장 친하였으며, 모후와 같은 날에 태어나 모후의 총애를 받았던 마리아 크리스티나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당시 오스트리아프로이센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에, 그녀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통적인 외교 관계를 전환하여 그동안 적대국이었던 프랑스와 동맹을 강화하려고 했고, 그 일환으로 프랑스의 도팽루이 오귀스트와 그녀를 정략 결혼시키려 하였다. 프랑스 역시 신흥국가인 프로이센을 견제키 위해 평소 앙숙이었던 오스트리아와의 협력이 필요했고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 나서서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 앙트아네트와 루이 오귀스트의 정략결혼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1769년 6월, 루이 15세가 보낸 약혼 문서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전해졌고 미래의 왕비를 교육하기 위해 프랑스 오를레앙 교구의 주교인 베르몽 주교가 보내졌다. 1770년 5월 16일, 마리는 14살의 나이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와의 결혼식을 치러 프랑스의 마담 라 도핀느 마리 앙투아네트가 되었다.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 찬가’가 만들어져 성대하게 축복되었다.

루이 오귀스트와의 결혼[편집]

프랑스 왕태자비[편집]

슈미즈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부부는 취미나 기질 등이 달랐으나 (앙투아네트는 활달하고 사교적이며 화려한 성향이었으나 루이는 정반대로 조용하고 사색하는 것을 즐기는 성향이었다) 사이가 좋은 편이었고 그로 인해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왕실로부터 수많은 보석을 부여받게 됐다. 루이의 성(性)적 문제로 결혼한 후 7년 동안 자녀가 없었으나 치료를 받아 네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여느 왕들과는 달리 루이는 정부도 두지 않았다.

그녀는 프랑스 왕실에서 적국 출신이라는 출생적 이질감에서 오는 소외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사교에 몰두했다. 여러 총신들을 총애했으며 베르사유 정원 한 구석에 있는 프티 트리아농(앙투아네트가 첫 딸을 출산 후, 루이가 선물한 별장)에서 파티나 가면무도회를 열기도 하고 시골처럼 꾸며놓고 전원생활을 즐기기도 하며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왕족과 귀족들은 절대 왕정 위기의 중대한 원인이었던 재정 궁핍을 고려하지 않고 화려한 로코코 문화에 물들어 있었다.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마담 뒤 바리가 사용했던 도자기 티세트는 한 세트에 수천만 원을 호가했던 것 등으로 미루어 보아 상류층 전원이 무절제한 사치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결국 루이 16세 재위에 이르러, 재정이 바닥나는데 일조했으며 신고전주의로 변화를 이끈다. 비록 당시 귀부인들이 예술품과 예술 후원 등으로 인해 돈을 많이 써 문화재들을 많이 남긴 덕택에 현대의 프랑스가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긴 해도, 적어도 그 당시엔 분명 프랑스 왕실 국고가 휘청할 만큼 돈을 많이 썼던 것이다.

프랑스의 다른 왕비들과 비교하면 마리 앙투아네트가 쓴 돈은 그다지 많은 수준이 아니었다. 루이 16세가 검소했던 탓에 이들 부부는 왕실 예산 중 겨우 1/10 정도만 사용했을 뿐이었지만, 이미 왕실의 재정상태가 좋지 않았다. 희고 고운 피부와 탐스러운 머리, 늘씬한 체형을 가지고 있던 마리는 복장과 머리 손질에 관심이 많았고 당시 프랑스 패션을 주도하고 유행을 선도했다. 더구나 당시 프랑스 왕실이 왕비가 옷을 갈아입는 것과 화장하는 모습까지도 모두 공개하던 탓에 베르사유 궁전에는 왕비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매일 북새통을 이루었고, 적국 출신의 왕비로 본래 곱지 못한 시선을 받던 처지라 그녀에 대한 소문은 좋지 못하게 퍼져나갔다. 그녀는 ‘적자부인’이라는 비난 어린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로인해 모후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녀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를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 왕비[편집]

드레스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

1774년, 루이 15세가 병으로 서거함으로써 남편이 루이 16세로 즉위하자 마리는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고, 남편 루이 16세로부터 베르사유프티 트리아농 궁전을 선물 받았다. 루소의 자연주의를 지지했던 마리는 프티 트리아농을 전원적인 분위기로 개조하였으나 호화별장 개조로 소문이 나버렸다. 거기에다 1785년에는 부르봉 왕가의 치세 말기를 상징하는 스캔들인 목걸이 사건이 발생하며 그녀에 대한 민중의 불신은 한층 더 가중됐다. 사건의 개요는 라 모트 부인이 로마가톨릭 주교인 로앙 추기경에게 마리의 관심을 끌기위해서는 540개 다이아몬드가 박힌 160만 리브르짜리의 값비싼 목걸이 구입해야한다며 주교를 목걸이 구입의 증인으로 서게 하고 목걸이를 가로챈 사건으로 이는 훗날 재판을 통해 사기극으로 밝혀져 사기꾼 라 모트 부인이 국외 추방령을 받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 되었지만 이로인해 왕비의 체면과 위신은 크게 떨어져버렸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음에도 파리 시민들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마리 앙투아네트가 두 사람에게 누명을 씌었다고 생각했고 목걸이 사건은 그녀를 향한 증오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러한 와중, 궁정 내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스웨덴 귀족 한스 악셀 폰 페르센 백작의 염문이 확산되고있었다. 그녀는 폴리냑 백작 부인 등 자신이 마음에 드는 소수의 귀족들만을 극단적으로 총애했고 그로인해 그녀의 그룹에 끼지 못한 귀족들은 그녀와 총신들을 향해 매일같이 악담을 퍼부었다. 베르사유 외의 다른 장소, 특히 파리에서는 이러한 정세가 심했다. 더구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 하라'는 말은 한적이 없지만 혁명군들은 이말을 정치적 선동을 위해 고의적으로 퍼뜨렸다. 결과적으로 여러 유언비어들은 파리 민중들의 증오를 가중시키며 마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프랑스 혁명기[편집]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의 참수.

선량했지만 우유부단했던 루이 16세는 프랑스 개혁을 시도하려 했으나 귀족들에게 과세를 거두지도 못했고 입헌군주제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1789년 7월 14일, 혁명군에 의해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였다. 폴리냑 백작 부인 등 그 동안 마리 앙투아네트로부터 비호를 받던 귀족들은 망명해 버린다. 국왕 일가역시 망명을 하려다 혁명군에 의해 포로 신세로 전락하여 베르사유 궁전에서 파리의 튈르리 궁전으로 신병이 옮겨져 그곳에 갇혀 지내며 혁명군의 감시를 받게 된다.

바렌느 사건[편집]

루이 16세는 국외 도피라는 불명예를 두려워하여 프랑스에 머물고자 했으나 마리 앙트와네트는 모국 오스트리아로 망명을 계획했다. 그녀는 메르시 대사를 통해 비밀 편지로 본국과 연락을 취했고 망명이 성공하면 친가는 물론이고, 친족이 있는 외국에 도움을 요청하고자 했다. 그녀는 페르센 백작의 도움을 얻어 위조 여권을 손에 넣었고 1791년 6월 20일 계획을 실행에 옮겨 대형 마차를 준비시키고 식량과 술과 옷을 가득 싣고 남편과 아이들을 비롯하여 시녀와 미용사까지 동반하여 몰래 파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소문이 난데다 짐이많고 진행속도가 느렸던 탈출은 곧 군인들에게 발각되었고 결국 국왕 가족은 6월 25일, 파리로 끌려오게 됨으로써 탈주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국왕 일가의 권위는 매우 실추되었으며 친국왕파 세력으로부터도 호감을 잃었다. 게다가 공화파가 전면에 등장하여 루이 16세가 반(反)혁명 측에 있다는 인식을 퍼뜨렸다.

8월 10일 사건[편집]

1792년, 프랑스 혁명전쟁이 발발하였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적군에게 프랑스군의 작전을 몰래 알려주고 있다는 소문이 퍼진다. 8월 10일, 파리 시민과 의용군은 튈르리 궁전을 습격하여 국왕 일가를 탕플 탑에 모두 유폐시킨다.

9월 학살[편집]

8월 26일에 롱위가 프로이센군에 의해 공략되고, 파리 침공에 대한 위기감이 한층 높아졌다. 의용병을 모집했지만, 한편으로는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반혁명주의자들이 의용군의 출병 후 파리에 남은 가족을 학살할 것"이라는 풍문이 떠돌고 있었다.

9월 2일 아침부터 반혁명파 사냥이 시작되었고, 파리 코뮌의 감시위원회는 모든 포로를 인민의 이름으로 재판할 것을 명령했다. 자치 단체는 경비를 강화하고, 경종을 울리며 시 문을 닫았다. 의용군 편성이 시작된다. 며칠 전부터 "암살자"가 모이고 있었다. 삼색 휘장을 붙인 빨간 모자를 쓰고, 주홍색 겉옷을 입은 그들은 충실하게 임무를 완수했다. “반혁명의 음모에 당하기 전에 처단하자!” 그리하여 그 날 오후, 민중에 의한 감옥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감옥은 차례차례로 습격당했으며, 죄수들은 닥치는대로 끌려 나왔다. 문답무용의 살인이나 약식 재판을 흉내 후 학살했다.

학살은 며칠동안 계속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운명을 함께하기 위해 귀국하여 체포된 랑발르 공작 부인도 비참하게 죽었다. 군중은 그녀의 시체에서 옷을 벗겨내 신체를 절단하고 유린했다. 어떤 무리는 창 끝으로 그녀의 머리를 찔러 탕플 탑 앞에서 왕비에게 보여주며 시위를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창에 꽂힌 랑발 부인의 머리를 직접 보지 못했으나, 나중에 그 얘기를 듣고 혼절했다.

죽음[편집]

1793년 1월 21일, 혁명 재판은 루이 16세에게 사형 판결을 내려 단두대로 참수형에 처했다. 그 해 7월에는 왕위계승자인 루이 샤를이 어머니와 고모에게서 떼어 놓아졌다. 그해 8월 1일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콩세르쥬리 감옥으로 이감된 뒤, 10월 초에 공개 재판을 받았지만, 결과는 처음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다. 민족주의에 깊이 물든 혁명기의 민중에게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른 무엇보다도 오스트리아 여자였고 반역자였다. 1793년 10월 15일, 그녀는 혁명 재판으로부터 사형 판결을 받았으며, 다음날인 10월 16일, 콩코드 광장에서 남편의 뒤를 따라 단두대에 의해 참수당했다.

참수형 당일, 마리 앙투아네트는 특별 죄수로서 거름통을 싣는 짐수레에 실려 처형장으로 끌려갔다(루이 16세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콩세르쥬리 감옥에서 나올 때 그녀는 머리카락이 짧게 깎여져 있었으며 두 손은 뒤로 묶여져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람답게 품위를 중시했던 그녀는 반혁명의 혐의로 3일 간 받은 심문 내내 의연하고 담대한 모습을 보였으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순간에도 품위를 잃지 않았다. 혁명 직전, 마리 앙투아네트는 편지글에 "불행 속에서야 겨우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문구를 남겼고, 사형장에서 사형 집행인의 발을 실수로 밟아버렸을 때에도“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라며 에티켓을 지킨 마지막 말을 남겼다.

기본적으로 단두대로 처형할 시에는 사형수의 얼굴을 아래로 향하게 하였지만, 마리 앙투아네트의 경우는 얼굴을 일부러 위로 향하게 해서 위에서 칼날이 떨어져 내려오는 것을 볼 수 있게 했다는 소문이 있으나 진위는 불분명하다. 아마도 이러한 이야기는 그 당시 그녀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증오심이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형집행일 전날 머리카락이 하룻밤만에 하얗게 세어버렸다는 설이 있으나, 과학적으로 그런 급속한 변화의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평가[편집]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평가가 매우 극도로 부정적이었으나, 최근의 연구들에 따르면, 당대 퍼져 있던 그녀에 대한 평판의 대부분이 과장된 것으로 부정되고 있는 편이다. 왕정 시대 프랑스의 왕비로서는 특별히 부적합한 행동이 없었다는 평가가 주류를 잇고 있다.[2] 최근 연구에 따르면, 당시 왕비들은 거의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적 능력을 이유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폄하하는 것 역시 지나치다고 보고있다.[2]

1793년 로베스피에르의‘공포정치’가 시작되면서 혁명광장에 설치된 단두대에는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았으며 프랑스 혁명에서 가장 참혹하게 꺾인 인물은 ‘베르사유의 장미’였다. 혁명세력은 그녀를 성적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만들었으며 로베스피에르는 그녀가 만족할 줄 모르는 ‘자궁의 충동’을 갖고 있다고 몰아붙였다. 남성 공화주의자들은 왕비의 부정한 사례를 들어 여성의 정치참여를 도덕적 타락으로 몰고 갔다. 미국의 여성 사학자 린 헌트는 “그것은 남성끼리의 새판 짜기였다. 남성 중심의 혁명, 여성을 정치에서 배제한 절반의 혁명. 이것이 프랑스 혁명에 감추어진 보수성”이라고 말했다.[3]

당시 오스트리아프랑스는 앙숙관계였고, 두 국가간의 전쟁으로 프랑스는 많은 아들과 형제들을 잃었으며 국민 대부분이 오스트리아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두 나라의 화해와 동맹을 위해 앙투아네트는 프랑스로 왔지만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라는 죄를 뒤집어썼다.

그녀가 왕비로 있었을 때 국고가 파산지경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그녀의 사치 때문이 아니라 선대의 향락과 미국 독립 전쟁 지원 때문이었고, 그것은 그녀의 선택이 아니었다. 결혼당시 15살밖에 안된 정치에는 무관심한 순수한 마음을 가진 행복한 소녀였던 마리앙투아네트는 '사치와 환락의 궁전'으로 알려진 쁘띠 트리아농 궁에서 실제는 시골처럼 꾸며놓고 전원생활을 즐겼을 뿐이었다. 그녀는 프랑스 왕실에서 유일하게 소작인의 밭에 마차를 몰아 밭을 망치지않게 배려한 사람이었으며 루이 16세가 활을 쏘다 실수로 농민을 다치게했을때에도 직접 치료를 해준 사람이었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프랑스 왕비로선 이례적으로 빈민구제와 프랑스식 농경생활에 관심을 가졌다.빈민구제를 위해서 자신의 드레스를 직접 팔고 당시 악마의 음식이라고 불린 감자에 혐오감을 없애기 위해 직접 꽃을 꽂아 나눠주거나 감자꽃을 머리에 꽂았으며 그녀는 오히려 그녀의 딸 마리 테레즈에게 사치를 도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도록 가르치다 딸의 불만을 사기도 했을만큼, 천상여자로 아름답게 꾸미고 자애롭게 돌보는 것을 좋아했던 여인이었다.

유명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역시, 마리 앙투아네트가 결백하다고 알려진지 오래다. 그 목걸이는 애초 루이 15세가 애첩 마담 뒤 바리의 사치를 위해 제작된 것이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목걸이 구입을 거부했다. '빵이 없다면 과자를 먹으세요"라는 말도 원래는 거리에서 굶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신하에게 "저 아이들에게 브리오 슈를 주세요"였지만 혁명군은 의도적으로 그말을 왜곡해서 퍼뜨렸다. 더구나 아들을 무척 사랑했던 앙투아네트는 혁명군 측의 음모로, 재판에서 아들을 성추행했다는 누명을 쓰기도 했다. 당시 8살이었던 루이 17세는 마약까지 먹은 상태로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동의했고, 그것은 마리 앙투아네트 생애 가장 큰 상처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끝까지 위엄으로써 많은 오욕에도 잘 견디고 품위있는 태도를 보였다.[4]

자녀[편집]

마리 앙투아네트와 마리 테레즈, 루이 샤를(루이 17세)
  1. 마리 테레즈(1778년 12월 19일 – 1851년 10월 19일)
    루이 16세의 장녀로 1793년 부왕과 어머니가 처형된 후 혁명 정부와 오스트리아 황실 사이의 계약에 의해 포로가 된 혁명당원 몇 명과 교환되기로 결정되었다. 후일 샤를 10세가 되는 숙부 아르투아 백작의 장남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과 결혼하여 앙굴렘 공작 부인이 되었다.
  2. 루이 조제프 그자비에(1781년 10월 22일 - 1789년 6월 4일) 8세에 요절
  3. 루이 17세 (루이 샤를, 1785년 3월 27일~1795년 6월 8일)
    떵플 탑에 수감되었고, 힘든 감옥생활과 부모의 죽음에 대한 충격, 시몽에 의한 심한 구박 등으로 건강이 나빠져 1795년 6월 8일, 결국 루이 17세는 임파선 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나이는 겨우 10살이었다.
  4.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1786년 7월 29일 - 1787년 6월 19일) 1세에 요절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Gerald Leinwand (1986). 〈Chapter 14 The French Revolution and Napoleon: A Close Look at a Revolution〉, 《The Pageant of World History》. Allyn & Bacon, 320쪽. ISBN 978-0-205-08680-1 “The wife of Louis XVI was Marie Antoinette, Austrian by birth. Her thoughtlessness and extravagance hurt her reputation and her position. The king and queen, together with the lords and ladies at court, spent their time thinking about comforts and luxuries rather than about the problems of the nation.”
  2.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청아출판사. p447
  3. "1793년 루이 16세 단두대에 서다", 《동아일보》, 2004년 1월 20일 작성.
  4. 네이버지식백과 마리앙투아네트. 민중서관 인명사전. 2002년 1월 10일에 확인.

바깥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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