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레슈친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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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레슈친스카
Maria Leszczynska Frankreich.jpg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비
재위 1725년 9월 4일~1768년 6월 24일
전임자 오스트리아의 마리 테레즈
후임자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투아네트
배우자 프랑스의 루이 15세
왕가 혼전:레슈친스카 왕가
혼후:부르봉 왕가
부친 폴란드의 스타니스와프 1세
모친 카트린 오팔링스카
출생 1703년 6월 23일(1703-06-23)
사망 1768년 6월 24일 (65세)
프랑스 왕국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마리 레슈친스카(폴란드어: Maria Karolina Zofia Felicja Leszczyńska, 1703년 6월 23일 - 1768년 6월 24일)는 프랑스의 루이 15세왕비(1725년 - 1768년)이다. 폴란드 공주 출신으로, 스타니슬라우스 레슈친스키와 카타르지나 오팔린스카의 딸로 태어났다.

생애[편집]

1709년 폴란드가 스웨덴군의 침략을 받아 부왕인 스타니슬라우스가 권좌에서 쫓겨나 그의 일가족은 졸지에 망명자 신세가 되었다. 스웨덴, 오스만 제국 등 이곳저곳을 유랑하다가 프랑스의 온정으로 알자스의 작은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

1725년 9월 21살의 나이에 당시 16살이던 루이 15세와 결혼을 하였다. 당시 섭정 오를레앙 공이 죽은 후 실권자가 된 부르봉 공은 상속자를 많이 생산할 수 있는 나이 든 왕녀를 물색하다가 마리를 최종적으로 선발하였다. 굳이 그녀를 선택한 이유는, 폴란드 왕실의 다산력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의 극빈함 때문이기도 하였다. 즉 딱한 처지에 있던 마리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왕의 배우자가 될 수 있게 해준 자신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매우 순응적이고 협조적일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실제로 마리는 훗날 부르봉 공의 실각을 저지하려고 딱 한번 정치적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어쨌든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왕과 유럽에서 가장 빈곤한 공주의 혼인은 당시 세인들의 빈축을 샀다. 궁중에 들어온 후부터 마리는 종종 폴란드인이라는 수근거림과 비아냥을 견뎌내야 했다.

결혼한 지 처음 9년 동안은 부부간의 금실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 마리는 조용하고 상냥하였으며, 독실한 로마 가톨릭교도였다. 그녀는 폴란드 왕실의 다산력을 인정받았듯이 매년 1명꼴로 아이를 낳아 총 9번의 출산을 하여 상속자를 생산해야 하는 왕비의 소임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그러나 너무나 헌신적이고 얌전한 아내에게 점차 싫증을 느끼게 된 루이 15세는 아내에 대한 애정이 식어버려 정부를 여러 명 두게 되었다. 마지막 아이를 낳고 나서 그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나누는 형식적인 말 몇 마디 외에는 일생동안 아내에게 단 한 마디의 말도 건네지 않았고, 사실상 두 사람은 별거 상태에 들어갔다. 궁정의 일상적인 행사에서 제외된 마리는 자신의 처량한 신세에 별 불평없이 매일 시녀들을 거느리고 미사에 참례했고 자기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자수를 놓기도 하며, 악기를 연주하며 시간을 보냈다. 또 몇몇 친한 친구들을 불러 모아 같이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인생의 낙이었다. 마리는 궁정의 음모에 연루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다가 65살에 루이 15세보다 6년 앞서 서거하였다.

가족 관계[편집]

전 임
오스트리아의 마리 테레즈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비
1725년 9월 4일~1768년 6월 24일
후 임
마리 앙투아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