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니스 코트의 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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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루이 다비드 작, 《le serment du Jeu de Paume》

테니스 코트의 서약(Tennis Court Oath, 프랑스어: Serment du Jeu de paume)은 1789년 6월 20일 프랑스 대혁명 직전에 파탄 직전의 국가 재정을 보전하기 위해 특권 계층에 대한 과세 문제를 둘러싸고, 신분간 갈등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제3신분베르사유 궁전 공희처에 모여 헌법 제정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던 사건이다. 왕권에 공공연한 반대 의사를 표명한 최초의 사건이 되었다.

배경[편집]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 궁전의 삼부회 개회식

당시 프랑스는 미국 독립 전쟁 등 거듭된 전쟁과 기근으로 경제가 파탄할 지경에 이르렀고,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그때까지 과세를 면제해 온 제1신분(성직자)와 제2신분(귀족)에 과세를 할 수 밖에 없었다. 1789년 5월 5일 루이 16세는 새로운 과세 제도를 규정하기 위해 1614년 이후 열리지 않았던 신분제 의회인 《삼부회》를 175년만에 베르사유에 소집되었다. 1614년 모델에 따라 삼부회는 각 신분별 동일한 대표자로 구성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제3신분(평민)은 지방 의회에서처럼 2배수를 요구했고, 결국 이 요구는 관철되었다. 이후 5월 5일 삼부회가 소집되었고 제3신분의 대표들이 기존의 신분별 표결 방식에 대해 항변할 것은 명백했다. 왜냐하면 578명의 제3신분 대표가 다른 신분들 각각과 동일함 비중이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금 문제에만 국한하려던 왕실의 의도는 빗나갔다. 삼부회는 세 개의 계층이 따로 회합을 가짐으로써 즉각 파행되었고, 국가의 재정보다는 자신들의 안위에 대한 논란만 다루었다. 표결 방식에 대해 제1신분과 제2신분은 삼부회에서 분리 심의와 신분별 투표를 주장했고, 제3신분은 합동 심의와 인원별 투표를 주장하면서 신분간에 격렬한 대립이 있었다.

진행[편집]

서명
  • 1789년 6월 10일: 의결 방법을 둘러싸고 분규를 거듭한 삼부회에 대해 “때는 왔다. 닻줄을 잘라라!”라는 시에예스 연설로 제3신분은 독자적인 행동을 취할 것을 선언했다.
  • 6월 17일: 오노레 가브리엘 미라보가 이끄는 제3신분은 스스로 집회를 열고,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National Assembly)[1]라고 칭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독자적으로 심의를 진행시킨 제3신분의 행동에 개명파의 성직자들과 일부 귀족들도 점차적으로 합류하기 시작했다.
  • 6월 19일: 격론 끝에 마침내 제1신분 의원이 제3신분의 심의에 합류하기로 결정했지만, 이에 위협을 느낀 왕의 동생 아르투아 백작 등 강경파가 국왕을 재촉하여 한밤 중에 제3신분 회의장은 폐쇄되었다.
  • 6월 20일: 국민의회는 회의장을 베르사유 궁전의 테니스코트 건물[2]로 옮기고, 자신들의 요구가 승인되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는 이 의회를 해산하지 않는다고 선서했다.

갤러리[편집]

관련 항목[편집]

주석[편집]

  1. P105, Doyle, William The Oxford History of the French Revolution (1989)
  2. 테니스코트 서약이 이루어진 곳은 현재에도 베르사유 시내에 존재하고 있다.
  3. 왕정시대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추기경등의 고위 성직자들은 정치에 관여하는 등 교회권력을 형성했으나, 로마 가톨릭 사제들은 민중들을 대상으로 목회했으므로 진보적인 사고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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