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4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루이 14세
프랑스 국왕
Louis XIV of France.jpg
프랑스의 군주
본명 Louis-Dieudonné de France
재위 1643년 5월 14일 ~ 1715년 9월 1일
대관식 1654년 6월 7일
별명 태양왕(프랑스어: Le Roi Soleil)
대식가, 냄새왕
출생일 1638년 9월 5일(1638-09-05)
출생지 프랑스 왕국 프랑스 왕국 생제르맹앙레
사망일 1715년 9월 1일 (76세)
사망지 프랑스 왕국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매장지 프랑스 왕국 프랑스 왕국 생 드니 대성당
배우자 에스파냐의 마리아 테레사
부친 루이 13세
모친 안 도트리슈
전임자 루이 13세
후임자 루이 15세
왕가 부르봉 왕가
서명 Louis XIV Signature.svg

루이 14세(프랑스어: Louis XIV, 1638년 9월 5일 ~ 1715년 9월 1일)는 프랑스의 왕이자 나바라[1]의 군주이다. 본명은 루이 디외도네(프랑스어: Louis-Dieudonné)이고, 공식 칭호는 루이 드 프랑스-나바라(프랑스어: Louis de France et de Navarre)다. 그는 다섯살 생일이 채 되기도 전에 왕위에 올랐지만, 그러나 아직 정치를 개인적으로 통치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탈리아 추기경 쥘 마자랭이 1661년 죽을때까지 사실상 맡겼다. 루이는 1715년 9월에 죽을때까지 왕의 자리에 있었는데, 77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4일 전이었다. 그의 치세기간은 최종적으로 72년 3개월 18일이었는데, 유럽의 군주 중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루이 14세는 세간에는 태양왕(프랑스어: Le Roi Soleil)이란 별명으로 알려져 있다. 루이 14세는 왕권신수설을 믿었기에, 국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받는 것이라는 학설을 지지했다.

루이의 치세 상당부분은 유럽에서 프랑스의 힘과 세력을 확장시키고자 3번의 주요 전쟁프랑스-네덜란드 전쟁,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스페인 왕위계승전쟁─과 2번의 작은 분쟁─상속 전쟁, 재결합 전쟁─을 치렀다. 이 시대 프랑스의 정치와 군사상 걸출한 인물의 면모를 살펴본다면 마자랭, 장바티스트 콜베르, 튀렌, 보방을 들 수 있다. 프랑스 문화 또한 이 시대 번성하여 위대한 명성을 가진 인물들이 나타났는데, 몰리에르, 장 라신, 부알로, 라 퐁텐, 르브룅, 리고, 루이 르 방, 쥘 아르두앙 망사르, 클로드 페로, 르 노트르 등이 이 시기의 사람이며, 이들의 대다수는 루이로부터 지원금을 받고 왕과 왕실을 찬양하는 작품을 쓰기도 했다.

루이 14세는 그의 전임자가 만든 중앙 집권화의 일을 계속 추진하여 프랑스의 지방에 끝까지 남아 있던 봉건제도의 잔재를 청소하고 수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따라 통치할 수 있게 만들어 갔다. 그의 성과를 방해한것은 지방의 힘있는 귀족들로 많은 이들이 반란으로 일어났고, 그들 소수를 가리켜 프롱드라고 불리었다. 루이는 이들 힘있는 귀족들을 베르사유 궁전의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여 사치스런 생활을 즐기게 하면서 서서히 약화시켰고, 이를 통해 귀족들의 힘을 제어했다. 그 결과 그는 오랫동안 유럽에서 절대 군주의 전형으로 고찰되게 되었다.

또한 절대 군주의 자리를 다져 “짐이 곧 국가니라(L'État, c'est moi)”와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역사학계에서 이 말은 그의 정적들이나 볼테르가 퍼뜨린 헛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생애[편집]

만 8세의 루이 14세

정치입문[편집]

1638년 생제르맹앙레에서 루이 13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루이 13세가 1643년에 사망했을 때 루이 14세는 겨우 5살이었다. 섭정을 맡은 모후 안 도트리슈는 국사 운영을 로마 가톨릭 추기경마자랭에게 맡겼다. 뛰어난 협상가였던 마자랭 추기경은 전임자인 리슐리외 추기경과 동일한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절대 군주제를 성립시켰다. 귀족들에게 눌렸었던 왕의 권력이 마자랭 추기경의 지도로 강해진 것이다. 마자랭 추기경은 당시 왕자였던 루이 14세의 정치수업을 지도하였는데, 덕분에 1661년 마자랭이 죽자 22살의 어른이 된 루이 14세는 재상과 같이 프랑스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국력과 문화발전[편집]

전임자와 선왕의 낭트 칙령을 통한 위그노들에대한 수용 및 중상주의 정책으로 루이 14세는 당대 유럽의 왕들 중에서 가장 부유한국가를 물려받았었다. 에스파냐의 무적 함대를 1588년 네덜란드와 연합, 격파한 후 점점 강해지는 영국에 뒤지지 않으려고 루이지애나 등 식민지에서 돈을 징수해온 프랑스의 국력은 이윽고 영국에 맞설 만한 수준에 이르렀으나. 유명한 베르사유 궁전증축과 사치스러운 궁정생활 그리고 말년의 계속된 패전으로 이 막대한 부는 모두 사라지며 루이 15세 때에는 몇차례의 국가부도나 그에 버금가는 경제위기 등을 겪는다. 베르사이유 궁전은 착공한 지 20년 후인 1682년, 아직 완공 전이었으나 루이 14세는 왕궁과 정부를 베르사유로 모두 옮겼으며 그때부터 베르사유 궁전에는 프랑스의 왕족들 뿐만 아니라 대귀족들 전부가 이주해 와서 살게 되었고, 왕과 귀족들의 궁정 생활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 민중들의 희생과 부담으로 구축되었다. 민중들은 베르사유 궁전을 짓기 위한 부역에 동원되어 노동력을 수탈당했으며, 사고로 죽은 자들은 보상과 사과는 커녕, 시체가 암매장되었다. 그럼에도 루이 14세는 정사를 돌보는 한편, 사냥과 기마 경기를 개최하였고, 트럼프당구 그리고 춤을 즐겼다. 특히 루이 14세는 발레에 지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7세부터 직접 무용을 수련하며 최초의 직업무용수로도 꼽힌다. 1653년 15세의 나이에는 밤의 발레(Ballet de lanuit)에 '아폴로'역으로 출연해 '태양왕'의 호칭을 얻게 된다. 또한 1661년 왕립무용아카데미라는 발레학교의 효시인 무용예술원을 설립하였다. 이러한 예술에 대한 애정과 노력들로 화려한 궁정 문화가 눈부시게 꽃피워 전 유럽의 왕가에 확산되었다. 루이 14세 정부는 극히 다양한 기술에 관한 특허장을 무수히 나누어 주었다. 그중에는 예컨대 맹트농 후작 부인이 약간의 자본을 투자한 경제적 난방 방식 같은 것도 있었다. [2]

결혼식을 올리는 루이 14세

전쟁[편집]

루이 14세는 피레네 산맥알프스 산맥, 라인 강이 프랑스의 국경이라고 선언했다. 프랑스의 국경은 하느님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그것은 자연 환경에 의해 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뒤부터 이러한 ‘자연 국경설’을 내세우며 루이 14세는 그의 재위 기간 72년 4개월 중 31년 동안 그 당시 프랑스 영토가 아닌 라인 강 방면의 영토 획득을 위해 다른 나라에 대한 침략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침략 전쟁을 위해 프랑스군의 근대화가 행해졌고, 루이 14세는 최강을 자랑하는 군대를 편성하기 위해 징병제도를 실시 하여 유럽에서 최강을 자랑하는 육군이 편성되었다. 프랑스는 이 강력한 군대로 우선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틈을 타서, 1667년과 그 다음해에 걸쳐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독립한 네덜란드에 침입했다. 또한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때에도 네덜란드에 침입하여(1672년~1678년) 많은 영토를 빼앗았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네덜란드를 지원한 독일로부터 알자스 로렌 지방도 획득하였다.

루이 14세에 의한 침략 전쟁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그는 다시 이번에는 독일의 팔츠 지방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하며 침입했기 때문에 독일은 영국, 네덜란드,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어 대항하였다. 이른바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이라고도 불리는 팔츠 계승전쟁이 10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식민지 문제로 영국과 세력 다툼을 벌여 싸우게 되는 제2차 백년전쟁이 발발된 것도 루이 14세 때였다. 또한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에 뛰어드는 등 루이 14세는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되었다.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에서 초반 전세는 프랑스에 유리했으나 점차 밀리게 되었고, 결국 루이 14세의 손자 스페인의 펠리페 5세의 스페인 왕위만이 인정되어 프랑스가 얻은 이득은 없었다.

카나발렛 호텔 앞에 서 있는 루이 14세의 동상

루이 14세의 무리한 전쟁수행으로 프랑스의 영토는 루이 14세가 처음 친정을 시작하던 당시의 영토로 줄어들었고 잦은 전쟁으로 빚만 산더미같이 쌓였다. 모든 도시에 거지가 들끓고 굶어 죽거나 전염병에 걸려 죽은 민중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당시 프랑스인의 평균 수명은 25살 이하였으며, 파리를 비롯한 모든 도시에는 거지들이 들끓었다. 더구나 전쟁수행에 필요한 세금때문에 민중들은 경제적으로 수탈당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계속적으로 전쟁을 치루었으니 나라가 평안할 수 없을 것은 당연했다.

낭트칙령 폐지[편집]

루이 14세는 프랑스 교회로마 가톨릭으로 통일하는 것이 절대왕정에 유리하다고 생각하여(이것은 그의 애첩 맹트농 부인의 사주 때문이라고도 한다.), 1685년 개신교 신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한 낭트 칙령을 폐지, 개신교를 탄압했다. 낭트 칙령은 프랑스 내 개신교 신자들을 공직자 취임제한등의 차별로부터 보호하는 차별금지정책이었는데, 이를 폐지함으로써 탄압을 받게 된 위그노 25만 명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네덜란드영국으로 망명했다. 그런데 이들의 대부분은 숙련된 상공업 기술자들이어서, 이후 프랑스의 수공업은 거의 마비되다시피 했다.인가봥~

죽음[편집]

1715년, 76살의 늙은이가 된 루이 14세는 72년 동안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무리하게 전쟁을 수행, 경제를 파탄시킨 자신의 정치행적에 대해 자각과 후회를 가져 임종을 맞기 직전에 증손자인 루이 15세에게“너는 이웃 나라와 싸우지 말고 평화를 유지하도록 힘써라. 이 점에서 짐이 밟은 길을 따르지 말라. 국민들의 괴로움을 덜어 주는 정치를 하여라. 아쉽게도 짐은 행하지 못했었다.”라는 간곡한 유언과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3]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향년 77세. 루이 14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프랑스 국민들은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려온 해방을 주신 하느님 앞에 감사하며 크게 기뻐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부터 프랑스에는 혁명의 싹이 움트기 시작하여 76년 뒤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부인들과 자녀들[편집]

정부인과 적자[편집]

정부와 서자[편집]

  • 아테나이 드 로슈슈아르 모르트마르³ - 몽테스팡 후작부인
    • 루이즈 프랑소와즈 드 부르봉 (1669-1672)
    • 멘 공작 루이 오귀스트 (1670-1726)³
    • 루이 세자르 (1672-1683)²
    • 부르봉과 콩데 공비 루이즈 프랑수아즈 (1673-1743)³
    • 오를레앙 공작 부인 프랑수아즈 마리 (1677-1749)³
    • 툴루즈 백작 루이 알렉상드르 (1678-1737)³

주석[편집]

  1. 보기 나바라의 군주나바라 왕가 가계도.
  2. 페르낭 브로델 (1995). 〈제6장 기술의 보급: 혁명과 지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Ⅰ-2 일상생활의 구조 下》, 주경철 옮김, 서울: 까치, 620~621, 870쪽. ISBN 89-7291-084-8 “…루이 14세 정부는 "극히 다양한 기술에 관한 특허장을 무수히 나누어주었다. 그중에는 예컨대 맹트농 부인이 약간의 자본을 투자한 경제적 난방 방식 같은 것도 있었다." 117) … 117) Marc Bloch, Mélanges historiques, 1963, Ⅱ, p.836.”
  3. 네이버캐스트 :: 세계인물

3 마리 안은 1667년에 루이는 1669년에 적자로 인정되었고, 몽테스팡 부인의 자녀들은 1676년과 1681년 사이에 걸쳐 적자로 인정되었다

바깥 고리[편집]

전 임
루이 13세
(재위 1610 - 1643)
프랑스의 군주
칭호상 나바라의 왕
1643년 5월 14일~1715년 9월 1일
후 임
루이 15세
(재위 1715 - 17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