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필리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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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필리프 1세
Louis-Philippe de Bourbon.jpg
프랑스 국왕
재위 1830년 8월 9일~1848년 2월 24일
전임자 앙리 5세
배우자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마리 아멜리
왕가 오를레앙 왕가
부친 오를레앙의 루이 필리프 2세
모친 루이즈 마리 아델라이드 드 부르봉
출생 1773년 10월 6일(1773-10-06)
사망 1850년 8월 26일 (76세)
영국 영국 서리 클레어몬트

루이 필리프 1세(프랑스어: Louis-Philippe Ier, 1773년 10월 6일 ~ 1850년 8월 26일)는 프랑스의 국왕(재위 : 1830년 ~ 1848년)이다. 본명은 루이 필리프 도를레앙(Louis-Philippe d'Orléans )이다.

그의 아버지의 별명이 평등한 필리프(Philippe Égalité)였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 중에는 평등한 자의 아들(Égalité fils)로 불렸으며 나중에 1830년부터 1848년까지 프랑스의 왕으로 지냈다.

그는 그의 통치 모델로 선택한 영국의 정치 제도에 열광하였으며, 그의 통치기간 동안에는 금융과 수공업 부르주아들이 빠르게 자본을 쌓아갔던 반면 노동자들은 극도로 비참했다. 그로 인한 끊임없는 민중 반란이 그의 통치의 막을 내리게 하였다.

생애[편집]

초기 생애[편집]

파리에서 루이 필립 도를레앙은 오를레앙 공작(duc d'Orléans)이며 평등한 필리프(Philippe Égalité)이라고 알려진 루이 필리프 조셉 도를레앙(1747년-1793년)과 루이즈 앙리에트 마리 아데라이드 드 부르봉(1753년-1821년)의 아들로 태어났다. 1785년 죽은 그의 할아버지의 발루아의 공작(duc de Valois)의 작위를 1747년 출생할 때 수여받았고 그리고 이어서 샤르트르의 공작(duc de Chartres)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는 프랑스 혁명에 참여하였다. 그는 사령관으로써 발미, 제마프, 네르빈덴 전투에 참전하였다.

1790년 자코뱅 당에 들어갔다가 1792년 아버지가 처형당하자 그의 상관인 뒤무리에 장군을 따라서 루이 필리프는 1793년을 오스트리아에서 보냈고 미국필라델피아에서 4년을 망명하는 등 인생의 방황기를 보냈다.[1]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권력을 잡았지만 그의 추방생활은 끝나지 않았다. 1809년 루이 필리프는 양시칠리아 왕국의 공주이고 페르난도 1세의 딸인 마리 아멜리 드 부르봉(1782년-1866년)과 결혼을 한다. [2] 그들은 열명의 자녀를 두었다.

181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사임을 한 후, 루이 필립은 프랑스로 돌아와서 살기 시작했고 자유사상을 보호하는 데 힘썼으며 팔레 루아얄과 오를레앙공작(duc d'Orléans)작위를 받았다. 그는 프랑스 혁명 중 잃은 재산을 사람들을 위한 보상법으로 가장 혜택을 많이 본 사람이다.

루이 18세샤를 10세 치하의 부르봉 왕정복고기간 동안 루이 필립의 인기는 커졌다. 그는 극단적인 왕권주의에 반대했고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잊지 않았다. 루이 필리프는 자녀들을 일반고등학교에 보냈고 겸손하고 평범하게 행동하는 방법을 알았다. 루이 18세가 죽은 다음날, 그는 새로운 프랑스의 왕 샤를 10세에 의해 왕위계승권을 얻었다.

프랑스의 국왕[편집]

즉위 과정[편집]

1830년 7월 혁명샤를 10세를 타도하기 위해 일어났다. 샤를 10세는 '루이 필리프'를 왕실 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루이 필리프는 금융 귀족들의 지지로 하원 의회에 의해 《프랑스 국민의 왕》으로 발표되었다.(《프랑스의 왕》이 아니다.) 이 새로운 직위[3]는 국민에 국민의 왕정정치를 나타내는 하나의 충격이었다. 그러므로 루이 필리프의 왕정은 국민의 대표와 왕사이의 하나의 계약서가 기반이 되는 계약 왕정이었다.[4] 7월 왕정이라고도 불리는 이 새로운 왕정의 다른 상징은 왕정복고때의 하얀 국기를 현재의 프랑스의 국기로 교체한 것이다. 국민들의 지지와 함께 루이 필리프가 권력에 오르는 것은 유럽 각국 왕궁의 적대감을 샀고 루이 필리프폭동왕 혹은 시민왕 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통치[편집]

루이 필리프의 왕권에 이의를 제기한 앙리 5세의 지지자들은 정통왕정파를 이루었다. 사실 《진짜》 왕정파들은 샤를 10세가 왕위에 있는 것처럼 여겼으며 그의 왕위 계승은 무효라고 여겼다.

프랑스영국이 협정을 맺으면서 루이 필리프는 1844년 윈저 성을 방문하지만 루이 필리프는 영국빅토리아 여왕을 그의 성에서 1843년1845년에 두 번 맞는다.

몇 년 동안, 루이 필리프는 그의 선임자들이 보여주었던 거만하고 막대한 지출을 하는 것을 피하며 겸손하게 국가를 운영했다. 처음에는 그는 시민왕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인기는 그의 내각이 점점 왕정주의와 보수주의로 변모하자 추락하기 시작했다. 일반 시민들의 삶의 질이 악화되었고 봉급의 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졌다. 1846년부터 1848년사이의 경제위기는 공화당 당원들이 왕에 대항하는 새로운 혁명모임을 야기시켰다. 그리하여 산업 자본가·공화파의 소시민층·노동자들로부터 반감을 사게 되어, 1848년 2월 혁명 때 왕위를 잃고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권력양위와 추방[편집]

드뢰(Dreux)의 생루이 성당

폭동의 전개 이전, 루이 필리프는 1848년 2월 24일 자신의 어린 손자 루이 필리프 2세에게 왕권을 양도했다.[5]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와 같은 일을 겪을까봐 그는 변장을 하고 《Mr Smith》라는 평범한 마차를 타고 파리를 떠나 영국으로 도망갔다.

하지만 상원의회는 그의 손자를 왕으로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생각을 바꿔서 여론을 쫓아 프랑스 제2공화국의 발표를 결정한다.

루이 필리프와 그의 가족은 영국에서 그의 죽음(1850년 8월 26일)까지 클레어몬트에서 지낸다. 1876년 그의 시신과 그의 부인의 시신은 1816년 드뢰에 루이 필리프의 어머니가 건설하고 1820년대 루이 필리프가 성장한 왕실 성당으로 옮겨졌다.

가족 관계[편집]

형제[편집]

자녀[편집]

주석[편집]

  1. 공화국 사령관과 샤를 10세의 사령관이라는 직위로 루이 필리프의 이름이 파리 개선문에 기록되어있다.
  2. 마리 아멜리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카이고 루이 17세의 사촌이다.
  3. 사실 루이 16세가 1789년부터 1792년까지 먼저 사용 똑같은 명칭을 사용했다.
  4. 계약서란 곧 헌법을 말한다.
  5. 그의 아들 페르디낭 필리프는 이 사건 이전에 죽었다.

바깥 고리[편집]

전 임
루이 필리프 1세
오를레앙 공작
1793년 11월 6일~1830년 8월 9일
후 임
페르디낭 필리프
전 임
앙리 5세
프랑스 국왕
1830년 8월 9일~1848년 2월 24일
후 임
나폴레옹 3세
전 임
신설
― 명목상의 ―
프랑스 국왕
1830년 8월 9일~1848년 2월 24일
오를레앙파 계열
후 임
파리 백작 루이 필리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