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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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敎皇, 라틴어: papa, 그리스어: πάπας)은 교황청 연감(Annuario Pontificio)에 의하면 로마주교이자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적 지도자이며, 바티칸 시국의 국가원수이다. 기독교 시대 개막 이래 2천 년 동안 성 베드로부터 시작해 총 265명의 교황이 있었으며, 현재(265대) 교황은 베네딕토 16세이다.

목차

[편집] 개요

전통적으로 로마 가톨릭에서는 교황을 사도들의 으뜸인 성 베드로의 정통 후계자로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를 내세워 로마 가톨릭은 교황이 모든 교회에서 완전하고 직접적이며 보편적인 최고의 직권을 행사할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하는데 반해, 다른 기독교 종파들은 주교들 가운데서도 베드로좌(=교황좌)가 우월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상에 있는 교회에 있어 예수의 대리인이라는 교황의 개념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상이며, 다른 기독교 교파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교황은 종교 외에도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권리 및 의무를 누려 왔다. 교황은 단순히 종교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바티칸 시국이라는 독립된 도시국가를 다스리는 세속 지도자이며, 그 나라는 로마 시에 둘러싸여 있다. 1870년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기 이전까지 교황의 영토(교황령)는 이탈리아 반도 중부를 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으로서 독립적인 권한을 지녔다. 이후 1929년 라테란 조약을 통해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였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종교적 또는 세속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누린 자리로 평가받는 교황들은 초기에는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고 교리적 논쟁을 해결하는 데 몰두하다가 차츰 세속 문제에도 개입하여 수천년간 서유럽에서 황제의 대관식(샤를마뉴는 교황을 통해 즉위한 최초의 황제였다)을 주관하였으며 세속 통치자들끼리의 각종 분쟁에 개입하였다. 8세기까지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었으며, 로마를 중심으로 교황이 실질적으로 다스렸던 지역은 피핀의 기증을 시발점으로 교황령의 기원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또한 로마 교황이 서유럽의 다른 군주들보다 정치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교황의 직위를 가리켜 교황직(敎皇職; papacy)이라고 부른다; 교황이 통치하는 세속적 영역은 ‘성좌’ (Sancta Sedes) 또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가 순교한 로마 위에 세워진) ‘사도좌’로 불린다.

중세 시대에 세속 군주들과 권력 다툼을 벌여왔던 교황들은 가톨릭 개혁 이후로 점차 세속 권력이 약화되자 본연의 임무인 종교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수세기가 넘도록 교황의 종교적 권한에 대한 주장은 1세기 이후 더 명확해진 가운데 신앙이나 도덕에 관하여 엄중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교황무류성 선언은 최고조에 달했다 (교황무류성으로서의 마지막 선언은 1950년의 성모 몽소승천 교리이다).

[편집] 역사

[편집] 고대 : 로마 주교좌의 권위 확립

예수로부터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는 성 베드로
예수로부터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는 성 베드로

로마는 초기 기독교의 사도였던 성 베드로가 순교한 땅이자 그의 묘소가 있는 장소로서 하나의 성지였으며, 기독교는 예로부터 역사적으로 로마를 존중해 왔다. 또 로마 제국 최대의 도시인 로마에는 일찍부터 교회가 확립해, 그들의 우두머리인 로마 주교는 이른 시일 안에 교회 내에서 일정한 권위를 가지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 다음은, 교회 행정의 중심이 제국의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5대 총대주교좌로 불리는 다섯 개의 교회가 특히 가장 권위가 있는 곳으로서 확립해 오면서, 그 서열이 문제가 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가 ‘세계총대주교’로서 두 번째의 선두를 차지하게 되었다.

6세기 말기, 교황 그레고리오 1세게르만족들에게 활발히 포교를 하기 시작해, 서유럽 각지에 교회를 세우고 세력을 확대하여, 로마 가톨릭은 동로마 황제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획득하여 갔다. 이 때문에 서방 교회에서는 로마 가톨릭의 총대주교를 교황이라고 부르게 된다. 특히 칼케돈 공의회 이후, 신약성서마태오 복음서 16장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들 중 최초의 제자인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Πετρο). 나는 이 반석(πετρα)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리라.”(마태 16,18)고 한 말이, 로마 주교를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권위를 높이려는 목적으로 강조되었다.

[편집] 서방과 동방의 분리

서방 교회가 독립성을 획득함에 따라 동방 교회와의 문화적·정치적·종교적 균열도 심해졌다. 이 문제는 8세기 이후 표면화되어, 마침내 1054년 교회의 대분열이라고 하는 기독교 세계의 최대 분열에 이른다.

수도 천도 후 곧 서유럽 지역의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은 6세기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이탈리아 반도를 다시 제국령으로 탈환했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의 지배·비호 아래 놓이게 되었지만, 서서히 동로마 황제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교리나 문화, 교회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대립하게 된다.

로마 제국의 후계자를 자처한 동로마 제국은 알렉산드리아를 필두로 하는 북아프리카 지역, 안티오키아를 필두로 하는 소아시아 지역, 그리고 로마를 필두로 하는 서유럽 지역의 교회와의 분리를 저지하는데 고심했다. 북아프리카나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는 단성론 문제 때, 결정적으로 분열을 맞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계의 주교를 임명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극복하려고 했다.

그리고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과는 6세기 무렵의 《삼장서》 문제나 7세기단의론, 8세기의 성상파괴운동 문제, 9세기필리오쿠에 문제와 거기에 따른 ‘포티우스의 분리’ 등에서 만성적인 불화가 잇따라 일어나, 1054년에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가 서로를 파문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이것은 주교 간의 상호 파문에 지나지 않고, 동서 교회 간의 파문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 두 교회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교회의 대분열 이후 화해가 시도된 적도 있었지만, 15세기에 결정적으로 분열을 맞게 되었다.

그 원인으로서 1204년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 함락시킨 것과 피렌체 공의회 후 로마가 약속한 군사적 지원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아서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공략당한 일, 또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러시아 정교회가 동서 교회 화해에 반대 견해를 표명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다만, 상호 파문 상태에 있었어도 교황 대사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의 파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의 친선사절 파견은 이루어지고 있어서 화해를 위한 교섭은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또한, 상호 파문은 20세기 중반부터 해소되고 있는 상태다.

[편집] 중세 이후

동방정교회와의 분열 이후 교황의 영향력은 당연히 서방 교회 내부에 한정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서방 교회에 대해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강력한 종교적 권위를 확립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중세 초기 교황은 〈콘스탄티누스의 기증〉같은 문서로 세속 황제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했다.

중세부터 근대에 걸쳐, 교황은 단순한 종교적 권위자일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중부를 중심으로 교황령이라는 광대한 영지를 소유한 영주이기도 했다.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등 세속 권력과 대립해온 역사를 갖고 있다. 여기에는 성직 서임권 투쟁과 같은 종교 정책 대립과 교황령의 주인으로서의 교황이 세속 제후들과의 정치적 대립이 있다. 세속 권력과의 대립은 중세 말기부터 아비뇽으로의 교황청 이전(아비뇽 유수)과 같이 교황청 측의 전면적인 양보로 끝나는 양상을 자주 보이게 된다. 세속 권력과의 타협은, 가끔 다른 세력의 이탈을 불러왔다. 그러한 이탈에는 마르틴 루터종교개혁이라는 이탈과 카를 5세의 숙모 아라곤의 캐서린헨리 8세의 이혼 허가를 해주지 않았던 것 때문에 일어난 잉글랜드 왕국의 이탈과 성공회의 창설이 있다.

또 세속 권력과의 관계에 대해 말하자면, 중세부터 근세 초기까지 교황직으로의 취임에 교회 내의 대립뿐만 아니라, 세속 권력의 의향이 짙게 반영된 일이 있었다는 것이 지적된다. 또 족벌주의라고 불리는 가족이나 친척의 중용도 중세 말기부터 근세 초기에 널리 행해졌다.

16세기 중반, 트리엔트 공의회로 대표되는 대응 종교 개혁은, 개신교에 대한 반격과 동시에 그러나 오랜 세월의 타락을 제거하기 위한 교회의 쇄신이기도 했다.

중세 후기부터 로마 가톨릭에서는, 교회에서의 최종적인 결정권이 교황에게 있는지(교황 우위설) 그렇지 않으면 공의회에 있는지(공의회 우위설) 논의가 되었다. 일단 공의회 우위설이 인정된 적도 있었지만, 종교개혁 이후의 정세 탓에 사실상 교황 우위설이 주류가 되어 갔다. 19세기 중반,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 우위설을 로마 가톨릭의 교의로서 정식으로 채택했다. 또한, 이때 교황 무류성도 교의로서 채택되었다. 교황 무류성은 오늘날 다른 기독교 교파가 로마 가톨릭과 일치하는 데 있어 최대의 난점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러한 근대 전기의 현저한 교황청의 보수적 경향은 근대적인 사상, 특히 자유주의 등을 향한 반동이라 할 수 있으며, 또 정치 세력으로서의 교황청의 퇴조화라고 생각할 수 있다.

[편집] 근대 이후

19세기에 교황령은 두 번에 걸쳐 소멸을 겪어보았다. 이것은 교황의 유럽 내 정치 세력으로서의 퇴조를 결정적으로 나타내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폴레옹 즉위식 때의 비오 7세
나폴레옹 즉위식 때의 비오 7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소멸당한 교황령은 빈 회의를 거쳐서 부활했다. 그러나 근대 국가가 생겨나기 시작하는 격동기였던 19세기 중반에 이탈리아 통일 운동에 의해 축소되어 1870년의 이탈리아 왕국의 로마 점령에 의해 완전히 소멸하였다. 이후, 교황들은 스스로 ‘바티칸의 죄수’라고 칭하며 이탈리아 정부와의 교섭을 거부했다. 그러나 교황 비오 11세 치세에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 사이에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어 라테란 조약에 의해 그 결실을 보았다.

1926년의 라테란 조약에 의해서 성립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 바티칸 시국은 교황청이 이탈리아로부터 독립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이며, 교황령이라고 하는 의미는 아니다.

세속 군주로서는 의례적인 권력을 세울 뿐인 교황은 여전히 기독교 세계의 최대 교파의 지도자로서 교회에만 머물지 않는 광범위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특히 1960년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역대 교황은 다른 기독교 종파나 다른 종교와의 대화 자세를 밝혀 그 동향이 주목되고 있다.

[편집] 교황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교리

교황직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마태 16,18-19: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요한 21,15-17: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루카 22,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

[편집] 다른 호칭들

교황직은 많은 직위를 지닌 자리다. 교황을 공식적으로 부를 때는 다음과 같다:

  • 로마의 주교 (Episcopus Romanus)
  • 그리스도의 대리자 (Vicarius Christi)
  • 사도들의 으뜸의 후계자 (Successor principis apostolorum)
  • 전체 교회의 최고 주교 (Caput universalis ecclesiae)
  • 보편 교회의 최고사제장 (Summus Pontifex vel Pontifex Maximus)
  • 서방 교회의 총대주교 (Patriarcha Occidentis)
  • 이탈리아 교회의 수석 주교 (Primatus Italiae)
  • 로마 관구의 관구장 대주교 (Archiepiscopus et metropolitanus provinciae ecclesiasticae Romanae)
  • 바티칸 시국의 국가원수 (Princeps sui iuris civitatis Vaticanae)
  • 하느님의 종들의 종 (Servus Servorum Dei)

로마 교구를 통치한 주교들은 처음에는 성 베드로의 대리자로 명명됐지만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중세 이후부터는 더 권위적인 명칭인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변경되었다. 이 명칭의 유래는 495년에 개최된 로마 시노드에서 젤라시오 1세에게 바쳐진 것이 시초이다. ‘교황’이라는 호칭은 5세기 중엽부터 사용했으며 11세기 동서교회 대분열 이후, 그레고리오 7세에 의해 오직 로마 주교에게만 국한되었다.

‘파파(Papa)’는 교황을 비공식적으로 부를 때 쓰는 명칭으로 아버지라는 뜻의 라틴어 ‘papas’에서 유래하였다. 일반적으로 교황에게는 ‘성하(聖下, Seine Heiligkeit 또는 Sanctitas)’와 ‘성스러운 아버지(Heiliger Vater 또는 Sanctissimus 또는 Beatissimus Pater)’라는 경칭으로 부른다.

또한, 라틴어로 최고대사제장이라는 뜻의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라고도 하는데, 이는 ‘다리’를 뜻하는 폰스(Pons)와 ‘만들다’는 뜻의 파키오(facio)와 ‘가장 으뜸인 자’라는 뜻의 막시무스를 합성한 말로 말하자면 교황은 하느님과 인간을 잇는 최고의 연결자 또는 대리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교황의 서명은 통상 ‘교황명 00, PP, ○대’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바오로 6세의 경우 ‘Paulus PP. VI’라고 서명한다. PP는 파파(Papa)의 약어이며, 여기에 폰티펙스 막시무스의 약칭인 ‘P.M.’ 혹은 ‘Pont.Max.’를 추가 기입하기도 한다. 회칙 등의 공식 문서에는 정식으로 ‘교황명, 가톨릭 교회의 주교(Episcopus Ecclesia Catholicae)’로 서명한다.

문두에는 ‘교황명, 하느님의 종들의 종인 주교(Episcopus Servus Servorum Dei)’라는 서명을 자주 쓴다. 이는 그레고리오 1세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관습이다.

[편집] 선출 및 장례

[편집] 교황의 선출

새 교황은 전임 교황의 선종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후 15일~20일 이내에 선출된다. 교황의 선출은 세속 선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될 뿐 아니라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세계 곳곳에 널리 알려진다.

라틴어로 ‘열쇠로 잠근다’는 뜻의 콘클라베(Conclave)라 불리는 교황 선거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스티나 경당에서 이루어지며 국적이나 출신 등에 관계없이 80살 이하 전 세계의 모든 추기경들이 투표에 참석한다. 외부와의 소통이 일제히 단절된 채 추기경들은 매일 2번의 비(非)공개 투표를 하며, 그 결과는 전통적으로 짚이나 종이를 태워 알리게 되어 있다. 짚은 검은 연기를 내고 종이는 하얀 연기를 내는데, 연기는 시스티나 경당 내부의 작은 굴뚝을 통해 경당 정면 오른편에 있는 박공 앞의 한 지점으로 뿜어져 나온다.

성당 밖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연기의 색깔로 새 교황의 선출 여부를 알게 된다. 검은 연기는 새 교황이 아직 뽑히지 않았다는 신호이고, 하얀 연기는 새 교황이 뽑혔다는 신호다.

이론상 교황 선출은 어디까지나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전 세계 추기경들이 로마에 도착해 모이는 순간 정치적 선거공작이 시작된다.

새 교황을 언제까지 뽑아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바티칸 역사상 가장 오래 걸렸던 교황 선거는 교황 클레멘스 4세의 후임을 뽑는 콘클라베로 1268년에 열러 2년 9개월에서 이틀이 더 걸린 1271년에야 끝났다.

새 교황이 확정되면 그는 “수용한다(Accepto).”는 답변으로 공식 확인하고, 수석 추기경이 회랑 가운데로 나와 군중에게 새 교황의 이름을 발표한다. 그러면 새 교황이 제단사들이 미리 준비한 임시 제의를 입고 군중 앞에 나타나 ‘로마 시와 전 세계에게’를 의미하는 라틴어 ‘우르비 엣 오르비(Urbi et Orbi)’라는 말로 첫 축복을 준다.

[편집] 이름

교황 선거에서 차기 교황으로 결정된 추기경은 교황직 수락 의사를 밝히면서 즉시 자신의 본명을 버리고 평소 존경하던 성인이나 전임 교황의 이름을 골라서 자신의 교황명(敎皇名)으로 삼아 공표해야 한다.

역대 교황명 가운데 가장 많이 선택된 것은 ‘요한’으로 지금까지 통틀어 23명의 교황이 이 이름을 선택하였다. 그만큼 가장 인기가 있으나 ‘요한’이라는 이름의 교황들이 가장 많이 시해당하거나 유폐되는 등 교회 역사상 가장 불행한 사건들이 이 이름과 관련이 깊어서 교황 요한 23세 이전에는 거의 7세기에 가깝도록 ‘요한’이라는 이름을 택한 교황이 없었다.

‘요한’ 다음으로 두 번째로 인기 있는 이름은 ‘그레고리오’와 ‘베네딕토’로 둘 다 총 16명이 있으며, ‘클레멘스’는 14명, ‘레오’ 및 ‘인노첸시오’는 13명, ‘비오’는 12명 등이다. ‘베드로’는 초대 교황인 베드로만을 위해 쓰도록 정해져 있다. 누구도 베드로에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교황들 중 처음으로 개명한 이는 교황 요한 2세로 이교도의 인 메르쿠리우스(Mercurius)라는 이름을 바꿨다.

[편집] 교황이 되면 달라지는 것

  • 자신의 성과 이름, 이전의 국적 및 시민권을 버려야 한다.
  • 일상생활에서 때로는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전부 규제를 받는다.
  • 일주일에 한 번씩 고해 신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
  • 교의상 가톨릭교회 전체를 통솔하는 절대적인 권력을 갖는다.
  • 인간이 하는 재판은 받지 않기에 법정에 소환되지 않을 권한을 갖는다.

[편집] 교황의 장례 절차

교황의 장례식은 엄격한 형식과 절차에 따라 진행된다.

먼저 교황의 시종관이 교황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난 다음 교황을 상징하는 어부의 반지를 교황의 손가락에서 빼내어 잘게 부순다.

그다음에는 교황의 시신을 시스티나 경당으로 옮기는데 추기경들과 바티칸의 주요 인사들이 긴 행렬을 이루어 시신을 호위한다. 시신이 경당에 모셔지면 하얀색 실크와 특별하게 짠 팔리움으로 된 수의를 입힌다. 시신의 손에는 장갑이 끼워지고 교황의 주교관이 가슴 위에 놓인다. 교황의 시신은 시스티나 경당의 거대한 프레스코화 ‘최후의 심판’ 아래서 꼬박 하룻밤을 보낸 다음, 다시 성 베드로 대성당 내 클레멘타인 경당으로 옮겨진다.

교황의 시신은 그곳에서 3일간 수십만 조문객들의 조문을 받는다. 이 전통은 과거 로마 제국의 장례 풍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장례 미사는 대성당 돔 아래에 있는 교황 제단에서 거행된다. 장례 미사가 끝나면 시신은 윤이 나게 잘 닦인 삼중 나무관 속에 안치된다. 그 후 교황의 업적을 기리는 송덕문이 라틴어로 읽히며, 그 송덕문은 청동으로 된 원통에 담겨 교황의 발치에 놓인다.

이때 금화와 은화, 동화 등 동전들을 가득 담은 붉은 벨벳 자루를 시신 옆에 놓아두는데, 그 개수는 교황의 재임 연수에 따라 달라진다. 마지막으로 시신의 얼굴을 비단 천으로 덮으면 바로 관을 봉한다. 봉해진 교황의 관은 대성당 제대의 왼쪽에 있는 ‘죽음의 문’을 통해 아래로 천천히 운구되어서 역대 교황들이 묻히는 대성당 지하 묘소 안의 미리 준비된 대리석관 안으로 옮겨지고 나서 거대한 석판으로 덮여 안치된다.

[편집] 교황의 상징들

교황의 문장
교황의 문장
  • 삼중관(Triregnum) : 교황이 머리에 쓰는 왕관으로서, 일반 주교관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으로 전통적으로 교황의 즉위 미사 때 사용되어 왔다. 삼중관은 교황의 통치권, 신품권, 교도권을 상징하며, 또한 유럽의 어떤 군주들보다도 교황이 더 위대하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처음에는 왕관 2개를 겹친 듯한 이중관 모양이었으나 1362년 교황 우르바노 5세 때부터 삼중관이 되었다. 1978년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는 세속적 권력의 상징을 담고 있다면서 삼중관을 쓰는 전통을 폐지함에 따라 오늘날에는 자취를 감추었다.
  • 바쿨루스(Baculus) : 교황이 예식 때 쓰는 지팡이로 목장(牧杖)이라고도 한다. 이는 목자가 양을 칠 때 사용하던 지팡이에서 유래하며 목자의 직무와 권위를 상징한다. 일반 주교의 지팡이는 윗부분이 원형으로 구부러져 있는 반면 교황의 지팡이는 윗부분이 십자가 모양이다. 교황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인이라는 뜻이다.
  • 팔리움(Pallium) : 양털로 만든 띠로 ‘잃었던 양의 비유’(루카 15,1~7)에서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오는 목자의 모습을 연상시키며, 교황의 명예와 자치권을 상징한다.
  • 어부의 반지(Pescatorio) : 교황이 손가락에 끼는 황금 반지인데, 이 반지는 예수의 수제자였던 성 베드로가 어부였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어부의 반지는 공문서를 봉인할 때 쓰고, 교황을 알현하는 사람은 무릎을 꿇은 채 어부의 반지에 입을 맞추는 인사를 한다. 어부의 반지는 교황이 선종하면 은망치로 부수어 관에 교황의 시신과 같이 넣는다. 이는 해당 교황의 통치가 종식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음 교황은 새로운 반지를 맞추어야 한다.
  • 하늘나라의 열쇠 : 성 베드로가 주저없이 예수에 대한 바른 신앙을 고백했을 때, 예수는 성 베드로에게 왕국의 문들을 열 하늘나라의 열쇠를 하사해 주었다(마태 16,13~19). 여기서 하늘나라의 열쇠는 지상의 권한을 상징하는 수위권을 상징한다. 그리고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이 그 권한을 계승하고 있다. 성 베드로가 열쇠를 잡고 있는 표현은 5세기 초부터 등장한다. 그러나 열쇠만을 분리해서 교황의 권위를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한 시점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이후이다.

교황에게는 교황을 상징하는 특별한 문장이 있다. 모든 교황들의 문장에는 삼중관을 포함되었지만, 베네딕토 16세의 문장에는 주교관으로 바꾸었다. 교황관 아래 방패의 배경에는 전통적으로 금열쇠와 은열쇠가 있는데, 이는 마태오 복음서 16장 18절~19절을 참고로 한 것으로, 지상과 천국에서 묶고 매는 교황의 능력을 상징한다. 따라서 교회 문장학에서 열쇠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교황으로서의 지위의 영적인 권위를 상징한다.

[편집] 교황의 역할

교황의 교회 내에서 역할을 로마 가톨릭 교회법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주님으로부터 사도들 중 첫째인 베드로에게 독특하게 수여되고 그의 후계자들에게 전달될 임무가 영속되는 로마 교회의 주교는 주교단의 으뜸이고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이 세상 보편 교회의 최고 목자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임무에 대하여 교회에서 최고의 완전하고 직접적이며 보편적인 직권을 가지며 이를 언제나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다.” (교회법 제331조; 교리서 881)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 교령을 승인, 재가 또는 정지시킬 수 있다.
  • 대사를 허락할 수 있다.
  • 시복이나 시성을 할 수 있다.
  • 주교를 임명하고 추기경을 지명할 수 있다.
  • 교구를 설정, 관리, 변경하거나 정지할 수 있다.
  • 교구장을 보좌할 수 있도록 보좌 주교를 선임할 수 있다.
  • 교황청립 학교를 설립하고 인준할 수 있다.
  • 전례서를 출간할 수 있다.
  • 교회 재단의 재산을 관리할 수 있다.
  • 교황청에 속한 선교 활동을 수립하고 관리할 수 있다.
  • 공의회를 소집, 주재하고 폐회할 수 있다.
  • 거룩한 날과 가톨릭 축일 등을 정할 수 있다.
  • 새로운 전례를 도입하고 낡은 전례를 폐지할 수 있다.
  • 믿을 교리(Dogma)를 공표할 수 있다.
  • 교회법을 새로 도입하거나 변경, 폐지할 수 있다.
  • 가톨릭 정통 교의를 이교와 이단으로부터 수호한다.
  • 환속을 원하는 수도자들의 서원과 맹세를 풀어 줄 수 있다.
  • 혼인 관계의 특별관면을 해줄 수 있다.
  • 법원의 역할을 한다.
  • 사법절차의 규칙을 세울 수 있다.
  • 문책이나 처벌조항을 만들 수 있다.
  • 청문회를 열 수 있다.
  • 로마 교구를 위해 판사들을 구성하거나 종교회의 판사들을 지명할 수 있다.

[편집] 역대 교황

이 부분의 본문은 역대 교황 목록입니다.

역대 교황 가운데 210명은 이탈리아 출신이었고 이 중 99명은 로마 출신이었다. 나머지 55명은 프랑스 출신 16명, 그리스 출신 12명, 독일 출신 8명, 시리아 출신 6명, 팔레스타인에스파냐아프리카 출신 각 3명 등이다. 영국, 포르투갈, 네덜란드, 폴란드가 각 1명이다.

[편집] 교황권에 대한 다른 기독교의 입장

로마 가톨릭를 제외한 기타 다른 기독교 교파들은 교황권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동방정교회에서는 로마 가톨릭의 주장처럼 예수가 성 베드로에게 사도의 우두머리로서의 권한을 내렸으며, 대대로 그 후계자(로마 주교=교황)에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전 기독교인에 대한 수위권을 갖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명예상일 뿐, 실제로 통치권적 수위권과 무류성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그들은 고대 이래 내려온 5개 사도좌가 모두 동등한 권한을 유지하고 있으며, 교황 역시 다섯 총대주교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개신교에서는 교황권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교황의 무류성 및 교황권에 기반한 모든 사상(예를 들자면 교황과 연합된 교도권과 일반 회중을 구분하는 것 등)을 부인한다. 교황권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그 근거를 베드로의 수위권에서 주로 찾고 있다. 이에 대해 개혁주의 쪽에서는 베드로가 사도들의 대표 역할을 하긴 했지만, 로마 가톨릭이 주장하는 것처럼 지상에서 예수를 대리하는 자로서의 성경적 권위를 갖고 있었다고 보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그들이 주로 내세우는 성경적 근거 몇 가지만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 바오로(바울)이야말로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기록한 사도 중의 사도로 활동했다.[1]
  •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바 교회를 상징하는 새 예루살렘의 열두 기초돌에 열두 사도의 이름이 적혀있다.[2]

이에 대해 로마 가톨릭에서는 교황이 지상 교회의 머리이기 때문에,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동방 정교회는 불완전한 교회이며, 교황의 존재 자체를 시인하지 않는 개신교는 교황과 연합 되지 않았기에 기독교회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이렇게 기독교 종파끼리 서로 다른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교황제도는 현재 교회일치운동의 걸림돌 가운데 하나로 지적되고 있다.

[편집] 주석

  1. 바오로(바울)가 베드로(게파)의 잘못을 책망한 기록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게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책망받을 일을 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면박을 주었습니다."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2:11; 공동번역)
  2.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주춧돌이 있었는데 그 주춧돌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요한묵시록 21장 14절; 공동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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