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바티칸 시국의 교황
Papa
Coat of arms Holy See.svg
교황 성좌의 문장
호칭 성하
관저 사도 궁전
임기 종신제
초대 성 베드로
성립 1세기
웹사이트 교황청 웹사이트

교황(敎皇, 라틴어: papa, 그리스어: πάπας)은 교황청 연감에 따르면 로마주교이자 로마 가톨릭교회[1]의 영적 지도자이며 바티칸 시국국가원수이다. 기독교 창시 이래 2천 년 동안 베드로 외 265명의 교황이 있었으며, 현재 교황은 제266대 프란치스코이다.

교황의 직위를 가리켜 교황직(敎皇職, papatia)이라고 부르며, 교황이 통치하는 세속적 영역은 ‘성좌’(Sancta Sedes) 또는 (성 베드로성 바오로가 순교한 로마 위에 세워진) ‘사도좌’로 불린다.

역사적으로 교황은 종교적·정치적·사회적 권리 및 의무를 누려 왔다. 교황은 단순히 종교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교황령(현재 바티칸 시국)을 다스리는 국가원수이다. 교황의 영토인 교황령이탈리아 반도 중부를 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으로서 독립성을 지녔지만, 1870년 이탈리아 왕국의 무력병합으로 소멸되었다가, 1929년 라테란 조약을 통해 이탈리아로부터 작게나마 다시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였다.

초기 교황들은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고 교리적 논쟁을 해결하는 데 몰두하다가 차츰 세속 문제에도 개입하여 수천 년간 서유럽에서 황제의 대관식(샤를마뉴는 교황을 통해 즉위한 최초의 황제였음)을 주관하였으며 세속 통치자들끼리의 각종 분쟁에 개입하였다. 8세기까지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었으며, 로마를 중심으로 교황이 실질적으로 다스렸던 지역은 피핀의 기증을 시발점으로 교황령의 기원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또한 로마 교황이 서유럽의 다른 군주들보다 정치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중세 시대에 세속 군주들과 권력 다툼을 벌여왔던 교황들은 가톨릭 개혁 이후로 점차 세속 권력이 약해지자 본연의 임무인 종교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수세기가 넘도록 교황의 종교적 권한에 대한 주장은 1세기 이후 더 명확해진 가운데 신앙이나 도덕에 관하여 엄중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교황무류성 선언으로 최고조에 달했다.

역사[편집]

초세기[편집]

예수로부터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는 성 베드로

옛날부터 로마는 역사적으로 초기 기독교사도이자 제1대 교황이었던 성 베드로가 순교한 땅이자 그의 묻힌 장소로서 하나의 성지로 중요시됐다. 일찍부터 이곳에는 교회가 세워졌으며, 로마 교회 신자들의 지도자인 로마의 감독, 즉 교황이 일정한 권위를 지닌 존재로 자리매김하였다. 특히 신약성서마태오 복음서 16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 시몬에게 “너는 베드로(Πετρο)이다. 나는 이 반석(πετρα)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마태 16:18)라고 한 말이, 성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교황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에 따라 강조되었다.

초세기의 교황들은 기독교의 기틀을 다지고 발전시키는 데 온 힘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초대 교회 때에 일어난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가 교황들에게까지 미쳐 베드로를 시작으로 고르넬리오, 루치오 1세, 식스토 2세 등 많은 교황이 유배되거나 처형됐다. 이러한 박해는 312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공인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점차 교세가 커지던 기독교테오도시우스 1세 치세에 이르러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로마 제국의 행정단위인 속주의 총독제도를 본받아 로마, 콘스탄티노폴,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의 다섯 교구가 담당지역 밖에 있는 교구들에 대해서도 재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기독교 교회 조직은 나중에 5대 총대주교좌로 불리며 발전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수도를 옮긴 다음부터 교회행정의 중심도 제국의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에 따라 5대 총대주교좌 사이에 서열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확장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영향력도 증대하면서 점차 교회 안에서 교황 다음으로 두 번째 선두를 차지하게 되었다.

레오 대교황은 역사상 베드로좌에 등극한 최초의 실세교황으로 평가받은 이로써 교황을 현세 교회의 통괄적 최고 사목자로 안착시키는 데 큰 힘을 쏟았다.

중세기[편집]

6세기 말엽, 그레고리오 대교황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일어난 혼란을 수습하고 서방 교회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 그는 활발한 선교 활동을 통해 게르만족앵글로색슨족을 개종시켜 서유럽 각지에 성당을 세우고, 로마와 교황에 대한 동로마 황제의 압력을 물리쳐 서서히 독립적인 지위를 획득하여 갔다. 특히 전 중세기 동안 사제 양성의 기초가 된 《사목 규정》을 저술하고 전례를 개혁했으며 미사 전문을 오늘날의 형식으로 만든 업적 등으로 유명하다.

7~10세기 교황들은 세속 정권의 비호와 간섭을 받으면서 수위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10~11세기에는 정권의 동요와 경제 불황 등으로 사회혼란을 겪었으며, 교황권이 약해지면서 성직자들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성직 서임권을 놓고 왕권과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880~1046년까지는 이렇게 ‘암흑시대’라고 불리는 교회 역사가 이어진다.

또 서방 교회의 독립적인 색채가 강해지면서 동방 교회와의 거리감도 심화하였다. 이 문제는 8세기 성상 파괴운동 이래 표면화되었으며, 9세기에는 필리오쿠에 문제와 그에 따른 포티우스의 분리 등에서 만성적인 불화가 잇달아 일어났다. 1054년에는 해묵은 수위권의 시비로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가 서로 파문하기에 이르렀다.[2] 동서방 교회 대분열이라고 불리는 기독교 세계의 최대 분열 사건으로 결국 교회는 동서로 단절됐다. 이후 12~13세기 교황들은 공의회를 여러 번 열어 동서방 교회의 재일치를 시도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이유로는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해 점거한 사건과 피렌체 공의회 이후 로마가 약속했던 군사적 지원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공략당한 사건, 또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러시아 정교회가 동서방 교회 간 화해에 반대하고 나선 것 등을 들 수 있다.

동방 교회와의 분열 이후 교황의 영향력은 당연히 서방 교회 내부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서방 교회 안에서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강력한 종교적 권위를 확립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중세 초기 교황은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같은 문서로 세속 군주들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왕권으로부터 교권을 해방하고 가톨릭교회의 영성적 권위를 다짐으로써 이러한 상황을 종결시켰다. 그는 클뤼니 수도원의 도움을 받아 교회 각층의 개혁(그레고리오 개혁)을 단행했고 교회가 교황을 통해 쇄신할 수 있음을 드러냈다.

중세부터 근대에 걸쳐 교황들은 단순한 종교적 권위자일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반도 안에 있는 마르케, 움브리아, 라치오 지방으로 이루어진 광활한 영토의 통치자이기도 했다. 이탈리아 반도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이 영토를 ‘교황령’이라고 부른다.

특히 이 시기의 교황들은 우르바노 2세클레르몽 공의회를 열어 십자군 원정을 결의한 일을 발단으로 종교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또 교황 등 고위 성직자나 왕족의 가족 또는 친척을 등용하는 족벌주의가 난립하고 교황직을 세속 군주들이 좌지우지해 권능이 훼손되거나 교황직이 격하되기도 했다. 세속 군주들과의 사이에서는 성직 서임권 투쟁과 같은 종교 정책의 대립과 교황령이라는 나라의 주인으로서 교황과 세속 군주들 간에 정치적 마찰이 있었다. 세속 권력과의 대립은 중세 말기부터 아비뇽 유수와 같이 교황 측의 전면적인 양보로 끝나는 양상을 자주 보이게 된다. 세속 권력과의 타협은 가끔 다른 세력으로의 이탈을 불러왔다. 그러한 이탈의 예로 마르틴 루터 등이 제창한 종교개혁이라는 이탈과 카를 5세 황제의 숙모 아라곤의 캐서린헨리 8세의 혼인 무효 허가를 해주지 않은 일로 일어난 잉글랜드 왕국의 가톨릭 세력권 이탈과 성공회의 등장을 들 수 있다.

족벌주의라고 불리는 가족이나 친척의 중용도 중세 말엽에서 근세 초기에 널리 행해졌다. 이러한 혼란한 상황을 반영하듯 14~15세기 교황들 가운데 시성된 교황은 한 명도 없었다.

근세기[편집]

종교 개혁 사건 이후 교황권의 힘은 약해졌으나 1545년 바오로 3세트리엔트 공의회로 대표되는 가톨릭 개혁을 통해 개신교에 반격을 가함과 동시에 오랫동안 이루어졌던 폐단을 씻어냄으로써 교리를 체계화하고 교회생활의 모든 분야를 쇄신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비오 5세, 그레고리오 13세, 식스토 5세 등은 교회 개혁과 쇄신에 힘을 기울여 교회를 부흥하는데 힘썼다.

나폴레옹 즉위식 때의 비오 7세

그러나 17세기 이후 서유럽 열강들의 압박으로 교황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었으며, 19세기에는 교황령이 두 차례에 걸쳐 소멸을 겪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한 번 소멸당한 교황령은 빈 회의를 거쳐서 부활하였다. 그러나 근대 국가가 생겨나기 시작한 격동기였던 19세기 중반에 이탈리아 통일 운동에 의해 영토가 줄어들다가 결국 1870년에 이탈리아 왕국이 로마를 점령함으로써 천 년 동안 유지돼온 교황령은 완전히 소멸하였다. 세속 권력을 잃은 교황들은 이후 스스로 ‘바티칸의 죄수’를 자처하며 이탈리아 당국과의 모든 교섭을 거부했다.[3]

한편, 중세 후기부터 로마 가톨릭교회 내부에서는 교회의 최종적인 결정권이 교황에게 있는지(교황 우위설), 그렇지 않으면 공의회에 있는지(공의회 우위설)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공의회 우위설이 인정된 적도 있었지만, 종교개혁 이후의 혼란한 정세 탓에 사실상 교황 우위설이 주류로 자리매김하였다. 마침내 19세기 중반, 비오 9세가 소집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우위설을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로 확립했다. 특히, 성좌에서 발표한 교황의 교리적 선언은 오류가 없다는 교황무류성이 채택되었다. 이러한 근대 전기의 현저한 교황청의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경향은 근대적인 사상, 특히 자유주의 등을 향한 반동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정치세력으로서의 교황청이 약화되는 반증으로 볼 수 있다.

현대[편집]

근대 이후 교황들은 고고한 권위를 누리는 군주로서의 모습보다는 목자로서의 모습을 의연히 지키며, 대중에게 친숙한 인물로 자리매김하였다. 특히 20세기 교황들은 단순히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고 초국가적 입장에서 국제문제를 비롯한 각종 윤리와 사회문제를 지도해왔으며 세계평화에도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레오 13세민주주의를 승인하고 노동문제 해결에 힘썼으며 비오 10세는 전례 운동을 촉진, 베네딕토 15세는 교회법을 개혁했다.

비오 11세공산주의를 단죄하고 사회문제 해결책을 제시하는 한편 세계 선교사업을 크게 촉진하였다. 1926년에는 이탈리아 정부와 화해하고 라테란 조약을 맺어 바티칸 시국을 선언함으로써 교황청의 독립성을 달성했다. 이어 비오 12세1950년 성모승천 교리를 선포하였다.

현대교회의 새로운 미래를 향한 길을 열어놓은 역사적 교황으로는 요한 23세가 꼽힌다. 그는 “착하신 교황 요한”이라는 별칭에서도 드러나듯 모든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받은 교황이었다. 최초로 로마에서 시노드를 열어 사목과 신앙생활에 새로운 자극을 제공하려고 노력했고, 교회법을 새로 편찬했다. 특히 교회쇄신과 세상을 향해 열린 교회를 선언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었다. 뒤이어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으며 교리와 교회활동 지침과 규범들을 명확히 하고 성체성사에 관한 교리를 설명했다. 또 세계 각국의 분쟁해결을 위해서도 큰 힘을 쏟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동유럽의 공산주의 붕괴 등 세계평화와 동서교회 일치, 종교 간 대화에 큰 역할을 한 “평화의 사도”로 일컬어진다. 사회정의와 윤리를 다지는 교회 가르침을 다수 발표했고 특히 대희년을 기점으로 지난날 교회가 저지른 잘못을 사과하는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업적을 남겼다. 또 국외순방을 가장 많이 실현했으며 가장 많은 성인을 시성한 교황으로 남았다.[4]

교황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교리[편집]

교황직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마태 16,18-19: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요한 21,15-17: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루카 22,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

가톨릭 변증론자들이 교황 제도를 옹호할 때 가장 많이 인용하는 성경 구절은 마태오 복음서 16장 18-19절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이 성경 구절이 예수가 나중에 베드로(반석을 의미)로 개명한 요한의 아들 시몬을 기반으로 삼아 자신의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요컨대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떠받치는 반석이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자신의 지상 교회의 우두머리로 베드로를 확립하였고, 그 후계자를 세워 소명을 계승하도록 하였으며, 이리하여 교황 제도가 생겨난 것이다.

성경에서 새 이름을 받는 것은 새로운 지위나 사명을 뜻한다.[5] 그래서 시몬은 베드로가 된 것이다.[6]

‘베드로’라는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가 말한 아람어 ‘케파’를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케파’는 ‘반석’을 뜻한다.

성경에는 반석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반석은 험한 암벽으로 둘러싸인 천연 요새지를 말한다. 문자적인 뜻으로 쓰이기도 했지만[7], 대개는 힘, 확고부동, 안전하고 견고한 장소를 상징하는 말로 쓰였다.[8] 그래서 반석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는 신을 상징하는 용어로도 많이 사용되었다.[9] 신약 시대에는 구약 시대에 물이 없어 목말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느님이 반석에서 물을 솟게 한 사건을 예로 들며 영원한 생명의 물을 주는 예수를 반석에 비유하였다.[10] 이런 근거에서 예수는 시몬에게 “너는 베드로(반석)이다. 나는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예수 자신이 바위였기 때문에 바위로서의 모퉁이 돌의 특성을 시몬에게 부여할 수 있었다.

‘하늘나라의 열쇠’라는 구절은 바티칸 시국의 국장과 같이 종종 교황의 상징물에서 볼 수 있는 상징적 열쇠의 근거가 된다. 이 하늘나라의 열쇠는 지상의 권한을 상징하는 수위권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열쇠는 열고 닫는 권한, 즉 모든 권한을 상징한다.[11] 이렇게 교회의 전권을 받은 베드로에게 예수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며 구체적으로 그것을 실천에 옮기라고 거듭 요청하였다.[12] 그리고 베드로를 위해 특별히 기도하였다.[13]

이 밖에도 초기 기독교의 교부들, 예컨대 성 아우구스티노는 베드로를 ‘제1의 사도’라고 했으며, 에우세비오 같은 학자들도 베드로를 ‘사도의 수령’ 또는 ‘사도직의 원수’라고 표현했다.[14]

베드로에게 위임된 직책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이어져 오늘에 이른다. 이리하여 베드로란 이름은 고유명사인 동시에 보통명사가 되어 버렸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69년 6월 10일 제네바의 세계 교회 협의회 본부를 방문했을 때 자신을 “나는 바오로라고 불리며 이름은 베드로입니다.”라고 소개하였다.[15]

다른 호칭들[편집]

교황직은 많은 직위를 지닌 자리다. 교황을 공식적으로 부를 때는 다음과 같다:

  • 로마의 주교 (Episcopus Romanus)
  • 그리스도의 대리자 (Vicarius Christi)
  • 사도들의 으뜸의 후계자 (Successor principis apostolorum)
  • 전체 교회의 최고 주교 (Caput universalis ecclesiae)
  • 보편 교회의 최고 사제장 (Summus Pontifex vel Pontifex Maximus)
  • 이탈리아 교회의 수석 주교 (Primatus Italiae)
  • 로마 관구의 관구장 대주교 (Archiepiscopus et metropolitanus provinciae ecclesiasticae Romanae)
  • 바티칸 시국의 국가원수 (Princeps sui iuris civitatis Vaticanae)
  • 하느님의 종들의 종 (Servus Servorum Dei)

로마 교구를 통치한 주교들은 처음에는 성 베드로의 대리자로 명명됐지만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중세 이후부터는 더 권위적인 명칭인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변경되었다. 이 명칭의 유래는 495년에 개최된 로마 시노드에서 젤라시오 1세에게 바쳐진 것이 시초이다. ‘교황’이라는 호칭은 5세기 중엽부터 사용했으며 11세기 동서방 교회 대분열 이후, 그레고리오 7세에 의해 오직 로마 주교에게만 국한되었다.

‘파파(Papa)’는 교황을 비공식적으로 부를 때 쓰는 명칭으로 아버지라는 뜻의 라틴어 ‘papas’에서 유래하였다. 일반적으로 교황에게는 ‘성하(聖下, Seine Heiligkeit 또는 Sanctitas)’와 ‘성스러운 아버지(Heiliger Vater 또는 Sanctissimus 또는 Beatissimus Pater)’라는 경칭으로 부른다.

또한, 라틴어로 최고 사제장이라는 뜻의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라고도 하는데, 이는 ‘다리’를 뜻하는 폰스(Pons)와 ‘만들다’는 뜻의 파키오(facio)와 ‘가장 으뜸인 자’라는 뜻의 막시무스(Maximus)를 합성한 말로 말하자면 교황은 하느님과 사람을 잇는 최고의 연결자 또는 대리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교황의 서명은 통상 ‘교황의 이름, PP, ○세’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바오로 6세의 경우 ‘Paulus PP. VI’라고 서명한다. PP는 파파(Papa)의 약어이며, 여기에 폰티펙스 막시무스의 약칭인 ‘P.M.’ 혹은 ‘Pont.Max.’를 추가 기입하기도 한다. 회칙 등의 공식 문서에는 정식으로 ‘교황의 이름, 가톨릭교회의 주교(Episcopus Ecclesia Catholicae)’로 서명한다.

문두에는 ‘교황의 이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인 주교(Episcopus Servus Servorum Dei)’라는 서명을 자주 쓴다. 이는 그레고리오 1세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관습이다.

또한, ‘서방 총대주교(Patriarcha Occidentis)’라는 명칭도 소유하고 있었으나 2008년부터 교황청 연감에서 제외되었다. 이는 동서방 교회의 일치를 위한 교황청의 의지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선출과 장례[편집]

교황의 선출[편집]

새 교황은 전임 교황의 선종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후 15일~20일 이내에 선출된다. 교황의 선출은 세속 선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될 뿐 아니라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세계 곳곳에 널리 알려진다.

라틴어로 ‘열쇠로 잠근다.’는 뜻의 콘클라베라 불리는 교황 선거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스티나 경당에서 이루어지며 국적이나 출신 등에 관계없이 80살 이하 전 세계의 모든 추기경들이 투표에 참석한다. 외부와의 소통이 일제히 단절된 채 추기경들은 매일 두 번의 비(非)공개 투표를 하며, 그 결과는 전통적으로 짚이나 종이를 태워 알리게 되어 있다. 짚은 검은 연기를 내고 종이는 하얀 연기를 내는데, 연기는 시스티나 경당 내부의 작은 굴뚝을 통해 경당 정면 오른편에 있는 박공 앞의 한 지점으로 뿜어져 나온다.

경당 밖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연기의 색깔로 새 교황의 선출 여부를 알게 된다. 검은 연기는 새 교황이 아직 뽑히지 않았다는 신호이고, 하얀 연기는 새 교황이 뽑혔다는 신호다.

새 교황을 언제까지 뽑아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바티칸 역사상 가장 오래 걸렸던 교황 선거는 교황 클레멘스 4세의 후임을 뽑는 콘클라베로 1268년에 열려 2년 9개월에서 이틀이 더 걸린 1271년에야 끝났다.

새 교황이 확정되면 그는 “수용한다(Accepto).”는 답변으로 공식 확인하고, 수석 추기경이 회랑 가운데로 나와 군중에게 “하베무스 파팜(라틴어: Habemus Papam))”이라고 말하며 새 교황의 이름을 발표한다. 그러면 새 교황이 제단사들이 미리 준비한 임시 제의를 입고 군중 앞에 나타나 ‘로마 시와 전 세계에게’를 의미하는 라틴어 ‘우르비 에트 오르비’라는 말로 첫 축복을 준다.[16]

만일 새로 선출된 교황이 주교품을 받지 않은 사람일 경우, 추기경단의 수석 추기경은 선출된 교황 당선자에게 주교품을 서품하며 당선자는 주교품을 받은 때부터 로마 주교가 되는 동시에 교황이 된다.[17] 교황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국적을 가져도 상관없다. 역대 교황 가운데 210명은 이탈리아 출신이었고 이 중 99명은 로마 출신이었다. 나머지 56명은 프랑스 출신 16명, 그리스 출신 12명, 독일 출신 8명, 시리아 출신 6명, 팔레스타인스페인, 아프리카 출신 각 3명 등이다. 잉글랜드, 포르투갈, 네덜란드, 폴란드, 아르헨티나가 각 1명이다.

이름[편집]

교황 선거에서 차기 교황으로 선출된 당선자는 교황직 수락 의사를 밝히면서 즉시 자신의 본명을 버리고 평소 존경하던 성인이나 전임 교황의 이름을 골라서 자신의 교황명(敎皇名)으로 삼아 공표해야 한다. 새 교황의 이름은 수석 부제 추기경이 곧바로 성 베드로 대성전 발코니에서 선출 사실과 함께 공포한다.

역대 교황명 가운데 가장 많이 선택된 것은 ‘요한’으로 지금까지 통틀어 23명의 교황이 이 이름을 선택하였다. 그만큼 가장 인기가 있으나 ‘요한’이라는 이름의 교황들이 가장 많이 시해당하거나 유폐되는 등 교회 역사상 가장 불행한 사건들이 이 이름과 관련이 깊어서 교황 요한 23세 이전에는 거의 7세기에 가깝도록 ‘요한’이라는 이름을 택한 교황이 없었다.

‘요한’ 다음으로 두 번째로 인기 있는 이름은 ‘그레고리오’와 ‘베네딕토’로 둘 다 총 16명이 있으며, ‘클레멘스’는 14명, ‘레오’ 및 ‘인노첸시오’는 13명, ‘비오’는 12명 등이다. 다만 ‘베드로’는 초대 교황인 베드로만을 위해 쓰도록 정해져 있어 베드로를 교황명으로 쓴 사례는 없다. 이는 베드로를 향한 예수의 명명(마태 16,18)을 존중하는 차원에서라고 한다.

교황들 가운데 처음으로 개명한 이는 교황 요한 2세로, 본래의 이름인 메르쿠리우스가 이교도의 신을 딴 이 이름이기 때문에 교황으로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해 '요한 2세'로 이름을 바꿨다. 반면 원 세례명을 그대로 유지한 교황은 16세기의 교황 하드리아노 6세가 유일하다.[18]

교황이 되면 달라지는 것[편집]

  • 자신의 이름, 이전의 국적 및 시민권을 버려야 한다.
  • 일상생활에서 때로는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전부 규제를 받는다.
  • 일주일에 한 번씩 고해 사제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 교황의 고해성사를 담당하는 사제는 예수회 사제이다. 고해 사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정해진 시간에 바티칸을 방문하여 교황이 고백하는 죄를 듣고 사해 준다.
  • 교의상 로마 가톨릭교회 전체를 통솔하는 절대적인 권력을 갖는다. 교회 안 모든 법령은 교황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교황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 선례를 따를 수도 있고, 무시할 수도 있다. 전통을 폐지하고 교회법을 제정하거나 개정할 수 있으며, 교서를 발표할 수 있고, 협의를 거치지 않고도 교회 안 규정을 바꿀 수 있다. 어떤 문제들에 관해서는 추기경단의 자문과 충고를 받도록 되어 있지만, 모든 일에 있어 교황 자신이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조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 인간이 하는 재판은 받지 않기에 법정에 소환되지 않을 권한을 갖는다.[19]

교황의 장례 절차[편집]

교황의 장례식은 엄격한 형식과 절차에 따라 진행된다.

먼저 교황의 시종관이 교황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확인[20]하고 난 다음 교황을 상징하는 어부의 반지(교황의 공식인장)를 교황의 손가락에서 빼내어 잘게 부순다.

그다음에는 교황의 시신을 시스티나 경당으로 옮기는데 추기경들과 바티칸의 주요 인사들이 긴 행렬을 이루어 시신을 호위한다. 시신이 경당에 모셔지면 하얀색 실크와 특별하게 짠 팔리움으로 된 수의를 입힌다. 시신의 손에는 장갑이 끼워지고 교황의 주교관이 가슴 위에 놓인다. 교황의 시신은 시스티나 경당의 거대한 프레스코화 ‘최후의 심판’ 아래서 꼬박 하룻밤을 보낸 다음, 다시 성 베드로 대성전 안 클레멘타인 경당으로 옮겨진다.

교황의 시신은 그곳에서 3일간 수십만 조문객들의 조문을 받는다. 이 전통은 과거 로마 제국의 장례 풍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장례 미사는 대성전 돔 아래에 있는 중앙 제대에서 거행된다. 장례 미사가 끝나면 시신은 윤이 나게 잘 닦인 삼중 나무관 속에 안치된다. 그 후 교황의 업적을 기리는 송덕문이 라틴어로 읽히며, 그 송덕문은 청동으로 된 원통에 담겨 교황의 발치에 놓인다.

이때 금화와 은화, 동화 등 동전들을 가득 담은 붉은 벨벳 자루를 시신 옆에 놓아두는데, 그 개수는 교황의 재임 연수에 따라 달라진다. 마지막으로 시신의 얼굴을 비단 천으로 덮으면 바로 관을 봉한다. 봉해진 교황의 관은 대성전 제대의 왼쪽에 있는 ‘죽음의 문’을 통해 아래로 천천히 운구 되어서 역대 교황이 묻히는 대성전 지하 묘소 안에 미리 준비한 대리석관 안으로 옮겨지고 나서 거대한 석판으로 덮여 안치된다.[21]

교황의 상징들[편집]

교황의 문장
  • 삼중관(Triregnum) : 교황이 머리에 쓰는 관으로 일반 주교관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으로 전통적으로 교황의 즉위 미사 때 사용되어 왔다. 삼중관은 교황의 통치권, 신품권, 교도권을 상징하며, 또한 유럽의 어떤 군주들보다도 교황이 더 위대하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처음에는 왕관 두 개를 겹친 듯한 이중관 모양이었으나 1362년 교황 우르바노 5세 때부터 삼중관이 되었다. 1978년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는 세속적 권력의 상징을 담고 있다면서 삼중관을 쓰는 전통을 폐지함에 따라 오늘날에는 자취를 감추었다.
  • 바쿨루스(Baculus) : 교황이 예식 때 쓰는 지팡이로 목장(牧杖)이라고도 한다. 이는 목자가 양을 칠 때 사용하던 지팡이에서 유래하며 목자의 직무와 권위를 상징한다. 일반 주교의 지팡이는 윗부분이 원형으로 구부러져 있는 반면 교황의 지팡이는 윗부분이 십자가 모양이다. 교황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인이라는 뜻이다.
  • 팔리움(Pallium) : 양털로 만든 띠로 ‘잃었던 양의 비유’(루카 15,1~7)에서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오는 목자의 모습을 연상시키며, 교황의 명예와 자치권을 상징한다.
  • 어부의 반지(Pescatorio) : 교황이 손가락에 끼는 황금 반지인데, 이 반지는 예수의 수제자였던 성 베드로가 어부였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어부의 반지는 공문서를 봉인할 때 쓰고, 교황을 알현하는 사람은 무릎을 꿇은 채 어부의 반지에 입을 맞추는 인사를 한다. 어부의 반지는 교황이 선종하면 은망치로 부수어 관에 교황의 시신과 같이 넣는다. 이는 해당 교황의 통치가 종식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음 교황은 새로운 반지를 맞추어야 한다.
  • 하늘나라의 열쇠 : 성 베드로가 주저 없이 예수에 대한 바른 신앙을 고백했을 때, 예수는 성 베드로에게 왕국의 문들을 열 하늘나라의 열쇠를 하사해 주었다(마태 16,13~19). 여기서 하늘나라의 열쇠는 지상의 권한을 상징하는 수위권을 상징한다. 그리고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이 그 권한을 계승하고 있다. 성 베드로가 열쇠를 잡고 있는 표현은 5세기 초부터 등장한다. 그러나 열쇠만을 분리해서 교황의 권위를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한 시점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이후이다.

교황에게는 교황을 상징하는 특별한 문장이 있다. 모든 교황들의 문장에는 삼중관을 포함되었지만, 베네딕토 16세의 문장에는 주교관으로 바꾸었다. 교황관 아래 방패의 배경에는 전통적으로 금열쇠와 은열쇠가 있는데, 이는 마태오 복음서 16장 18절~19절을 참고로 한 것으로, 지상과 천국에서 묶고 매는 교황의 능력을 상징한다. 따라서 교회 문장학에서 열쇠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교황으로서의 지위의 영적인 권위를 상징한다.

교황의 역할[편집]

교황의 교회 내에서 역할을 교회법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주님으로부터 사도들 중 첫째인 베드로에게 독특하게 수여되고 그의 후계자들에게 전달될 임무가 영속되는 로마 교회의 주교는 주교단의 으뜸이고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이 세상 보편 교회의 최고 목자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임무에 대하여 교회에서 최고의 완전하고 직접적이며 보편적인 직권을 가지며 이를 언제나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다.” (교회법 제331조; 교리서 881)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 교령을 승인, 재가 또는 정지시킬 수 있다.
  • 대사를 허락할 수 있다.
  • 시복이나 시성을 할 수 있다.
  • 주교를 임명하고 추기경을 지명할 수 있다.
  • 교구를 설정, 관리, 변경하거나 정지할 수 있다.
  • 교구장을 보좌할 수 있도록 보좌 주교를 선임할 수 있다.
  • 교황청립 학교를 설립하고 인준할 수 있다.
  • 전례서를 출간할 수 있다.
  • 교회 재단의 재산을 관리할 수 있다.
  • 교황청에 속한 선교 활동을 수립하고 관리할 수 있다.
  • 공의회를 소집, 주재하고 폐회할 수 있다.
  • 거룩한 날과 가톨릭 축일 등을 정할 수 있다.
  • 새로운 전례를 도입하고 낡은 전례를 폐지할 수 있다.
  • 믿을 교리를 공표할 수 있다.
  • 교회법을 새로 도입하거나 변경, 폐지할 수 있다.
  • 가톨릭 정통 교의를 이교와 이단으로부터 수호한다.
  • 환속을 원하는 수도자들의 서원과 맹세를 풀어줄 수 있다.
  • 혼인관계의 특별관면을 해줄 수 있다.
  • 법원의 역할을 한다.
  • 사법절차의 규칙을 세울 수 있다.
  • 문책이나 처벌조항을 만들 수 있다.
  • 청문회를 열 수 있다.
  • 로마 교구를 위해 판사들을 구성하거나 종교회의 판사들을 지명할 수 있다.[22]

교황권에 대한 다른 기독교 교파의 입장[편집]

로마 가톨릭교회를 제외한 다른 기독교 종파들은 교황권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장처럼 예수가 성 베드로에게 사도의 우두머리로서의 권한을 내렸으며, 대대로 그 후계자(로마 주교=교황)에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에 대한 수위권을 갖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명예상일 뿐, 실질적인 전제적 수위권과 무류성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그들은 고대 이래 내려온 5대 사도좌가 모두 동등한 권한을 유지하고 있으며, 교황 역시 다섯 총대주교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개신교성공회에서는 기본적으로 교황권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교황의 무류성 및 교황권에 기반을 둔 대부분의 사상을 부인한다. 교황권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그 근거를 베드로의 수위권에서 주로 찾고 있으나 개신교와 성공회에서는 베드로가 사도들의 대표 역할을 하긴 했지만,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지상에서 예수를 대리하는 권위를 갖고 있었다고 보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견해이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수가 베드로에게 허락한 베드로의 수위권이 아닌,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근거한 교회라고 이해한다.

이에 대해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교황이 지상 교회의 머리이기 때문에,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는 동방 정교회는 불완전한 교회이며, 교황권 자체를 부인하는 개신교는 교황과 전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정식 교회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렇게 기독교 종파끼리 교황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교황제도는 현재 에큐메니컬 운동의 커다란 숙제 가운데 하나이다.

교파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교황권에 대한 입장이 다른 경우가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관영 종교단체인 중국 천주교 애국회는 교황이 아닌 중국 공산당을 따르고 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카톨릭교도연맹도 비슷한 상황이다.

명칭 문제[편집]

지금 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교황 명칭 문제가 있다. 강우일 주교와 문규현 신부가 '교황'이라는 표현 대신에 '교종'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교황'이 전제군주를 연상시킨다는 이유에서다.[23]

호인수 신부도 "나도 교종이 좋다. 올여름에 오실 분이 교황이 아닌 교종이기를 바란다." 고 말했다.[24]

그러나 이에 대해서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해방신학자인 김근수는 "이미지 개선보다 정직함이 우선이라는 원칙에 비추어 교종보다 교황이라는 호칭이 좀 더 정직하고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며, "호칭(名)을 먼저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내용(實)부터 바꾸자는 뜻이다. 내용을 바꾸지 않고 이름만 바꾼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라고 주장했다.[25]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로마 가톨릭교회와 온전한 친교를 나누는 동방 가톨릭교회 등도 포함된다.
  2. 다만 이 사건은 두교회 사이의 공식 파문은 아니라는 것이 양측의 일반적인 견해다. 교황 사절 훔베르토는 레오 9세가 선종한 다음 총대주교를 파문하였기 때문에 파문의 효력이 없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노드에서 파문한 대상도 교황이 아니라 교황의 사절단이었다.
  3. 이에 대해서는 1820년대부터 교황이 이탈리아의 통일에 도움을 줘야 하는 시점에서 소극적으로 나옴으로써 결국 이탈리아의 통일을 더 늦어지게 만들었다는 지적이 많다.
  4. 주정아. "역사 속 교황들", 《가톨릭신문》, 2005년 4월 25일 작성. 2008년 11월 6일 확인.
  5. 창세 17,5
  6. 박도식, 《하나인 교회 천주교와 개신교》, 가톨릭출판사, 60쪽
  7. 탈출 17,6; 33,21; 민수 20,8
  8. 비전성경사전
  9. 신명 32,4; 1사무 2,2; 2사무 22,32; 시편 17,3; 18,2
  10. 1코린 10,4
  11. 이사 22,22; 묵시 1,18
  12. 요한 21,15-17
  13. 루카 22,31-32
  14. 박도식, 《하나인 교회 천주교와 개신교》, 가톨릭출판사, 63쪽
  15. 주님의 뜻대로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와 교황'
  16. 니노 로 벨로, 《백과사전에도 없는 바티칸 이야기》, 생활성서사. 118-119쪽
  17. 참고로 교회법에서는 주교품 서품 대상자는 35세 이상으로 사제품을 수품받은 후 5년 이상인 남자로 규정하고 있다
  18. 상징성 큰' 새 교황 이름, 어떻게 정해질까, <연합뉴스>
  19. 니노 로 벨로, 《백과사전에도 없는 바티칸 이야기》, 생활성서사,87쪽
  20. 작은 망지로 교황의 머리를 세 번 두드린 후 교황의 본명을 세 번 부른다. 이에 답을 하지 않으면 사망으로 간주하는데 이는 하나의 예식이다.
  21. 니노 로 벨로, 《백과사전에도 없는 바티칸 이야기》, 생활성서사, 128쪽
  22. 니노 로 벨로, 《백과사전에도 없는 바티칸 이야기》, 생활성서사, 서울시 강북구 미아6동 670-28 행전빌딩 4층. 88쪽
  23. 한국 주교회의 의장은 교황을 왜 '교종'이라 부를까
  24. 삶의 창 강우일 주교와 교종
  25. 교황이냐, 교종이냐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