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바오로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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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바오로 3세(라틴어: Paulus PP. III, 이탈리아어: Papa Paolo III)는 제220대 로마 교황(재위: 1534년 10월 13일 - 1549년 11월 10일)이다. 본명은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이탈리아어: Alessandro Farnese)이다.
[편집] 생애
1468년 2월 29일, 이탈리아 라티움 카니노 출생으로 명문 집안인 파르네세 가문 출신이다. 또한 그의 어머니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를 배출한 가에타니 가문의 자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로마와 피렌체에서 인문학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을 익혔으며 특히 메디치 가문과 연관을 맺으며 공부를 함으로써 훗날 교황 레오 10세가 되는 조반니 데 메디치와 친분을 맺는 등 활발한 시절을 보냈다. 그의 누이인 줄리아 파르네세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정부(情婦)였다.
젊은 시절 세속적인 사교계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던 그는 한 무명(無名)의 귀족 여인을 정부로 삼아 슬하에 피에르 루이지, 파올로(Paolo), 라누치오(Ranuccio)의 세 아들과 코스탄차(Costanza)라는 딸 하나 등 모두 네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1513년 정부와의 관계를 청산하여 사생활을 정리하고 1519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부터 사제로 서품된 후 종교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가문의 연줄을 통해 일찍부터 교황청 재산 관리자를 거쳐 여러 주교직을 역임한 뒤에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알렉산데르 6세, 비오 3세, 율리오 2세, 레오 10세, 하드리아노 6세, 클레멘스 7세 등 여섯 명의 교황을 모시면서 추기경단 의장으로도 활약하였던 알레산드로는 1534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선종하자 콘클라베에서 경험과 재치를 인정받아 만장일치로 교황직에 올랐다.
바오로 3세는 개인적으로는 대표적인 르네상스기(期)의 교황이었지만, 로마 가톨릭의 내면적 개혁에 공헌이 큰 교황이었다. 그의 업적은 대체로 교회 개혁과 르네상스 진흥 등 크게 두 가지 분야에서 두드러지고 있다는 평가다.
교회 개혁 문제는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맞물려진다. 중세 말기에 들어서면서 교회 내 폐해가 컸고 실제로 여러 부분에서 폐해가 많았기 때문에 교회 개혁이 무엇보다 가장 시급히 요구되는 상황에서 교황이 당면한 최대 화두는 개혁으로 모아지지 않을 수 없었다. 바오로 3세의 개혁 작업은 바로 그러한 면에서 시대의 요청을 받아들인 결과라 할 수 있다.
추기경단 개혁을 시작으로 교회 쇄신의 고삐를 죄었던 바오로 3세는 교회의 개혁과 쇄신에 앞장설 수 있다고 판단한 인물들을 대거 추기경으로 임명하고 개혁위원회도 이들 구성원들로부터 개혁안을 작성하게 하였다. 이 안건들은 나중에 트리엔트 공의회의 의안으로 채택되었다. 이와 함께 바오로 3세는 수도회 쇄신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주교의 상주의무를 강화시켰다.
바오로 3세는 자기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첫째 아들 피에르 루이지를 교회군 총사령관 겸 카스트로 공작에 임명하였으며, 피에르 루이지의 첫째 아들 알레산드로는 추기경으로, 둘째 아들인 오타비오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에스파냐 국왕이기도 한 카를 5세의 딸과 혼인시켰다.
종교 개혁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관대한 태도를 보여 종교 개혁 세력과 로마 가톨릭 개혁 세력의 협조를 강조하였으며 덕분에 교황령은 광신의 파도를 피할 수 있었지만, 날이 갈수록 심해져만 가는 개신교의 강경일변도 때문에 결국은 점차 종교 개혁 세력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1538년 잉글랜드의 왕 헨리 8세가 자신을 ‘잉글랜드 교회의 우두머리’라고 선언한 《수장령》에 대해서는 파문 조치를 내려 프로테스탄티즘의 확산을 적극 배격하였다. 그리고 1542년 로마에 이단심문소를 설치하여 이단 심문을 실시, 독일의 개신교도 제후들을 토벌하기 위한 십자군을 파견함으로써 개신교 신자, 유대인, 이슬람교도들이 박해를 받았다.
1540년 예수회의 설립을 승인하여 이후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일대에 로마 가톨릭을 포교할 수 있는 길을 열었는데, 그가 승인한 예수회는 그리스도교 역사 최초로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또한 교회 개혁을 이루는 동시에 개신교의 공격에 정면으로 대응하기 위해 1545년부터 1563년까지 18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 북부의 트리엔트에서 세리판도(G. Seriando), 소토(Dominicus de Soto), 라이네스(D. Lainez), 살메론(A Salmeron) 등 당대의 저명한 신학자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그리스도교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라 일컬어지는 이 공의회는 ‘개신교의 종교 개혁에 대해 교회의 교도직으로 응답한 최고의 대답’이었다는 말처럼 종교 개혁파가 제기한 문제를 과감하게 수렴, 로마 가톨릭의 신앙과 교리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수립함으로써 당시 혼란스러웠던 교회를 바로잡아 체계화 하고 교회 생활의 모든 분야를 쇄신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공의회를 통해 신앙 규범으로서의 성서의 역할, 정경, 의화, 성사, 원죄교의 등이 최종 확정됐고 개혁 규범 등도 선포됐다.
공의회를 소집한 바오로 3세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후세에 ‘개혁 교황’이란 칭호와 함께 로마 가톨릭 개혁의 첫 번째 교황 또는 처음으로 교회 개혁을 진지하게 시도한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더불어 종교가라기보다는 인문주의에 심취한 귀족에 가까웠던 바오로 3세는 사치스런 자신의 취향에 따라 예술과 학문, 사냥을 애호하였으며, 미켈란젤로를 ‘하느님이 보내 주신 사람’이라고까지 격찬하며 그를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공사 총감독으로 채용하여 ‘최후의 심판’ 등을 그리게 하였으며, 그 외 다른 예술가들의 재능도 충분히 발휘하게 하였다. 또한 유능한 학자들을 대거 로마 대학교에 초빙하고, 산탄젤로 성을 프레스코화 장식으로 꾸미고, 바티칸 도서관을 충실(充實)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르네상스 최후의 교황으로 불리며 르네상스 시대의 문예부흥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교황으로 눈부신 업적을 쌓게 된다.
1549년 11월 10일, 82살의 나이로 선종하였는데, 죽는 그 순간까지 그의 정신은 매우 맑았다고 전해진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로마 가톨릭은 점점 개신교에 강경한 자세를 취하게 되고, 결국 교회는 결정적인 분열을 맞고 만다. 실제로 로마 가톨릭은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개신교를 단죄했었다.
| 전 임 클레멘스 7세 |
제220대 교황 1534년 10월 13일 - 1549년 11월 10일 |
후 임 율리오 3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