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알렉산데르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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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데르 6세
Pope Alexander Vi.jpg
본명 로드리고 란조르 보르자 이 보르자
임기 시작 1492년 8월 11일
임기 종료 1503년 8월 18일
전임 인노첸시오 8세
후임 비오 3세
탄생 1431년 1월 1일
Royal Banner of Aragón.svg 아라곤 연합 왕국 발렌시아 하티바[1]
선종 1503년 8월 18일 (72세)
Flag of the Papal States.gif 교황령 로마

교황 알렉산데르 6세(라틴어: Alexander PP. VI, 이탈리아어: Papa Alessandro VI)는 제214대 교황(재위: 1492년 8월 11일 - 1503년 8월 18일)이다. 본명은 로드리고 란조르 보르자 이 보르자(스페인어: Roderic Llançol-Borja i Borja)이다.

르네상스 시대 교황들 가운데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교황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전통적으로 호색과 족벌주의, 탐욕 등의 문제로 역사상 최악의 교황으로 손꼽히고 있지만, 이러한 세간의 악평은 대부분 생전에 그의 정적들이었던 이탈리아의 고위 성직자들과 영주들한테서 유래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세간의 악평과는 반대로, 알렉산데르 6세의 후임자들인 교황 식스토 5세교황 우르바노 8세는 그를 성 베드로 이래 뛰어난 지력을 갖춘 교황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하였다.[2] 그는 여타 다른 많은 르네상스 시대 교황들 못지않게 영적 지도자보다는 외교관이자 정치가, 행정관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갖춘 것으로 전해진다.[3]

출생과 가문[편집]

로드리고 보르자는 1431년 1월 1일 오늘날 스페인에 해당하는 아라곤 연합 왕국 발렌시아 인근의 하티바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호프레 란조르 이 에스크리바(1437년 3월 24일 삼낭)이며, 모친은 이사벨 데 보르자 이 카바닐루(1468년 10월 19일 사망)이다. 1455년 로드리고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서 보르자 가문에 입적되었으며, 뒤이어 외가 쪽 숙부인 알폰소 데 보르자가 교황 갈리스토 3세로 선출되어 즉위하였다.[4][5]

정부와 가족 관계[편집]

알렉산데르 6세는 자신의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여 여러 여인과의 사이에서 많은 자녀를 두었다. 그의 정부 가운데 가장 관계가 오래 지속된 여인은 1442년에 태어난 반노차 데이 카타네이였다. 그녀는 알렉산데르 6세를 만나기 전에 이미 세 번 혼인한 유부녀였다. 두 사람은 1470년에 처음으로 만나 애정 어린 관계가 되었으며, 슬하에 후안 보르자(1474년 출생), 체사레 보르자(1476년 출생), 루크레치아 보르자(1480년 출생), 호프레 보르자(1481년 또는 1482년 출생) 등 총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이들은 알렉산데르 6세의 자녀로 공공연하게 인정받았다. 알렉산데르 6세의 또 다른 자녀로 알려진 지롤라마와 이사벨라, 페드로 루이스 데 보르자의 경우에는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1469년 알렉산데르 6세는 비토리아라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베르나르도라는 아들을 두었다. 베르나르도는 알렉산데르 6세의 다른 자녀들과는 달리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추기경이었던 로드리고 보르자는 교황이 되기를 열망했었기 때문에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최대한 감추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베르나르도는 다른 형제 자매보다 아버지의 관심을 가장 적게 받았다. 결국 나이를 먹으면서 아버지에게 서운한 감정이 커져가던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로드리고 보르자의 곁을 떠나버렸다. 어쨌든 알렉산데르 6세는 네 명의 자녀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많은 자녀를 두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단정치 못한 품행 문제 때문에 그는 교황 비오 2세에게 많은 질책을 받기도 하였다.

교황에 선출되기 전에 반노차에 대한 알렉산데르 6세의 열정은 다소 식었으며, 이후 반노차는 은퇴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알렉산데르 6세의 사랑은 줄리아 파르네세가 대신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알렉산데르 6세는 반노차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여전히 간직하였는데, 이는 향후 그의 인생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교황으로 선출된 후에 알렉산데르 6세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아낌 없이 후원함으로써 온갖 특혜와 영예를 안겨주었으며, 그의 자녀들 모두 지상 최고의 권력을 가진 아버지의 후원 덕분에 높은 직택에 앉거나 유력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한편 줄리아 파르네세는 알렉산데르 6세의 정부가 된 후부터 루크레치아 보르자와 같이 생활하였으며, 1492년에는 알렉산데르 6세와의 사이에서 딸 라우라를 낳았다.

알렉산데르 6세는 포르투갈의 주앙 4세의 왕비 루이자 데 구스만의 조상으로서 사실상 남서부 지역에 있는 유럽 왕실들의 선조에 해당한다.

교육과 교황청의 등용[편집]

로드리고 보르자는 볼로냐 대학에서 교회법을 전공하였는데, 단순한 법학 박사가 아니라 ‘가장 뛰어나고 분별력이 있는 법학자’라는 극찬을 받고 졸업하였다.[6] 그의 외숙부가 교황 갈리스토 3세로 즉위하자, 그는 즉시 부제로 서품받고 이어서 1456년 25세의 나이에 산 니콜라 인 카르체레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다음해에 그는 갈리스토 3세에 의해 교황청 상서원장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1468년 로드리고 보르자는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1471년에는 주교 서품을 받음과 동시에 알비노의 주교급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그는 교황청에서 근무하는 동안 갈리스토 3세, 비오 2세, 바오로 2세, 식스토 4세, 인노첸시오 8세 등 총 다섯 명의 교황을 보필하였다. 이 시기에 로드리고 보르자는 상당한 수준의 사무 경험을 쌓은 것은 물론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으며, 유력자들과 골고루 인맥을 쌓아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그때 당시는 물론이고 장차 그의 야심을 이루는 데 매우 유용하게 작용하는 요소들이었다.

발렌시아 대교구장[편집]

발렌시아 대교구장 관저 밖에 있는 석판.

로드리고 보르자는 자신의 외숙부이자 발렌시아 교구장이었던 알폰소 데 보르자가 교황 갈리스토로 3세로 즉위하게 되면서 그의 직분이었던 발렌시아 교구장직을 물려받게 되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선종하기 16일 전에 그는 교황에게 발렌시아 교구를 관구 및 대교구로 승격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발렌시아 교구가 관구 및 대교구로 승격되면서, 로드리고 보르자는 초대 발렌시아 대교구장이자 발렌시아 관구장이 되었다. 그리고 로드리고 보르자는 자신이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 즉위하자 자신의 사생아인 체사레 보르자를 후임 발렌시아 대교구장에 임명하였다. 발렌시아 대교구의 제3대 대교구장은 후안 데 보르자 란조르 데 로마니이며, 제4대 대교구장은 페드로 루이스 데 보르자인데, 두 사람 모두 알렉산데르 6세의 종손에 해당한다.

발렌시아 대교구장 관저의 한쪽 구석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힌 석판이 걸려 있다.

알렉산데르 6세
1492년 7월 9일 교황 인노첸시오 8세는 보르자 추기경과 가톨릭 왕들의 요청에 따라 발렌시아 교구를 관구로 승격하였다. 그리하여 보르자의 로드리고는 초대 발렌시아 대교구장이 되었다.
1492년 - 1503년

교황 선출[편집]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문장

1492년 7월 25일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선종하면서 소집된 콘클라베에서 후임 교황으로 밀라노파의 지지를 받는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 프랑스파의 지지를 받는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 마지막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거느리고 있던 로드리고 보르자 추기경 등 세 명의 유력 후보가 내세워졌다. 그리고 1492년 8월 11일 보르자 추기경은 다수의 표를 얻어 교황으로 선출되어 알렉산데르 6세로 명명되었다. 그의 교황 대관식은 같은 해 8월 26일에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당시 콘클라베에서 보르자 추기경이 스포르차 추기경을 비롯해 많은 추기경을 막대한 돈으로 매수해 교황에 선출되었다는 소문이 있지만(특히 스포르차 추기경은 네 마리의 노새가 수레를 끌 정도로 많은 은을 뇌물로 받았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입증된 바가 없다. 따라서 그가 교황직을 돈으로 샀다는 세간의 비난은 근거가 없다고 밖에 볼 수 없다.[7] 당시 교황 선출이 뇌물수수의 결과라는 의혹을 제기하는 측에서는 그에 대한 근거로 당시 콘클라베에 참여한 추기경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가 로드리고 보르자의 교황 선출에 대해 “이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짐승 가운데 가장 탐욕스러운 늑대의 손아귀에 놓여 있다. 만약 우리가 늑대로부터 달아나지 않는다면, 필시 잡아먹힐 것이다.”[8]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메디치 추기경의 말을 잘못 인용한 말이다. 실제로 그가 했던 말은 “도망쳐라. 우리는 세계의 손바닥 안에 있다.”[9]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 메디치 추기경의 나이를 생각해봤을 때, 아무리 그가 조숙했더라도 16세에 불과했던 그가 세간에 알려진 것과 같은 의견을 표명했을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이다.[10]

알렉산데르 6세는 재임 초반에는 엄격한 법의 집행과 질서 있는 통치를 철저히 시행함으로써 실적이 많았던 전임 교황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 것 같았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는 전임 교황들과 마찬가지로 족벌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당시 피사 대학교의 학생이며 나이가 불과 17세에 불과했던 자신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를 대주교로 서임함과 동시에 자신이 맡았던 발렌시아 대교구장 자리를 물려주었으며, 또 다른 아들인 후안 보르자는 보르자 가문 대대로 물려받는 자리인 스페인의 간디아 공작직을 승계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후안 보르자와 또 다른 아들 호프레 보르자를 위해서 교황령나폴리 왕국의 일부 영토를 떼어주어 그곳의 영주로 다스리게끔 만들었다. 후안 보르자에게 할양된 봉토는 체르베테리앙귈라라였는데, 이 봉토들은 본래 강력한 오르시니 가문의 수장인 비르지니오 오르시니가 근래에 취득한 봉토들이었다. 이러한 알렉산데르 6세의 정책에 대해 반감을 가진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는 알렉산데르 6세의 정적인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과 손을 잡았다. 1493년 4월 23일 알렉산데르 6세가 나폴리 왕국에 맞설 동맹을 구성하자, 이에 맞서 델라 로베레 추기경은 테베레 강 입구에 있는 자신의 오스티아 교구령의 방어를 강화하여 전쟁을 준비하였다.

페르디난도 1세는 피렌체, 밀라노,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었다. 그는 스페인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당시 스페인은 근래에 발견된 신대륙에 대한 소유권을 놓고 포르투갈과 갈등을 빚어 교황에게 중재를 요청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교황의 비위를 거스르는 일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1493년 5월 4일 알렉산데르 7세는 칙서 《Inter Caetera》를 반포하여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소유할 신대륙의 경계선을 나누었다. 그 내용은 아조레스 군도와 케이프베르데 군도를 기준으로 서방 100리그(약 482.7km)상에 남북으로 가상의 경계선을 그어 동쪽으로는 포르투갈의 영역으로, 서쪽으로는 스페인의 영역으로 분할하라는 것이었다. 스페인은 1494년 7월 2일에, 포르투갈은 1494년 9월 5일에 각각 교황의 칙서를 비준하여 양국 간에 토르데실랴스 조약을 체결하였다.

프랑스의 침공[편집]

1494년 이탈리아

알렉산데르 6세는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여러 나라와 동맹 관계를 맺었다. 당시 밀라노 공국을 사실상 통치하였던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프랑스의 도움이 필요했었다. 그리하여 그는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와 동맹을 맺었으며, 알렉산데르 6세 역시 샤를 8세와의 동맹을 필요로 하였다.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1세가 자신의 손녀 이사벨라의 남편이자 밀라노의 합법적인 통치자인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 공작을 지원하기 위해 루도비코 스포르차를 위협하자, 알렉산데르 6세는 나폴리 정복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샤를 8세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항상 자기 가문의 규모를 확대할 기회를 엿보던 알렉산데르 6세는 스페인 대사의 중재를 통해 1493년 7월 나폴리 왕국에 대한 적대 정책을 철회하고, 자신의 아들 호프레를 페르디난도 1세의 손녀인 산차 다라고나 공주와 혼인시킴으로써 양국 간의 평화를 이룩하었다. 알렉산데르 6세는 추기경단에 대한 지배력을 한층 강화하기 위해 12명의 신임 추기경을 서임하는 대대적인 인사 조치를 단행함으로써 큰 추문을 불러 일으켰다. 추기경으로 서임된 인사들 가운데는 그의 아들 체사레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당시 체사레의 나이는 불과 18세에 불과했다. 알렉산데르 6세의 정부줄리아 파르네세의 오빠인 알레산드로 파르네세(훗날의 교황 바오로 3세) 또한 새로이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1494년 1월 25일 페르디난도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알폰소 2세가 나폴리의 다음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자 프랑스 국왕 샤를 8세가 알폰소 2세의 왕위 계승에 반대하면서 자신이야말로 나폴리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샤를 8세의 나폴리 왕위 요구로 그동안 잠잠하던 국제 정세가 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나폴리 왕위를 두고 또다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샤를 8세는 표면상으로는 나폴리 왕국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오스만 제국에 맞서기 위한 십자군이라고 주장하면서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참배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으며, 알렉산데르 6세는 이를 재가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공이 현실화되자 불안해진 알렉산데르 6세는 즉시 알폰소 2세를 나폴리의 정식 국왕으로 인정하고, 자기 아들들의 영지와 알폰소의 영지를 맞교환함으로써 동맹을 맺었다(1494년 7월).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자 이를 막기 위한 군사적 대응이 뒤따랐다. 프랑스군 함대가 제노바를 공격하자, 나폴리군은 즉시 로마냐를 통과해 밀라노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양측의 군사 원정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그해 9월 8일 샤를 8세는 알프스를 넘어 루도비코 스포르차와 합류하였다. 교황령은 크게 동요하였으며, 강력한 귀족 가문 가운데 하나인 콜론나 가문이 프랑스군의 이름으로 오스티아를 점령하였다. 샤를 8세와 그의 군대는 빠른 속도로 남하하여 피렌체에서 며칠 머문 후에 1494년 11월 로마를 향해 진군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알렉산데르 6세는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은 물론 심지어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2세한테까지 도움을 요청하였다. 또한 그는 즉시 군사들을 징집하고 로마를 즉시 방어 태세에 돌입하도록 지시하였지만, 그의 상황은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오르시니 가문이 자신들의 성에 프랑스 병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면서, 결국 정치적으로 고립된 알렉산데르 6세는 샤를 8세와 합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해 12월 31일 샤를 8세는 자신의 군대와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을 포함한 프랑스파 추기경들을 대동하고 로마에 무혈 입성하였다. 알렉산데르 6세는 샤를 8세가 자신을 성직매매 등의 혐의로 고발하여 즉시 자신을 교황직에서 폐위시키고 새 교황을 지명할 것이라는 생각에 두려워하였다. 하지만 알렉산데르 6세는 샤를 8세의 측근이자 생말로 교구장이었던 기욤 브리소네를 추기경에 서임함으로써 샤를 8세의 마음을 돌리는데 성공하였다. 알렉산데르 6세는 또한 인질로 잡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왕자 술탄 젬을 샤를 8세에게 신병을 인도하고, 자신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를 교황 사절로 임명하여 프랑스군의 나폴리 원정에 동행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1월 28일 샤를 8세는 젬 왕자와 체사레 보르자를 데리고 나폴리로 떠났으나, 두 사람은 스폴레토에서 말도 없이 감쪽같이 도망가버렸다. 나폴리군의 저항은 손쉽게 격파되었으며, 알폰소 2세는 왕위를 자신의 아들 페르디난도 2세에게 물려주고 도주하였다. 하지만 페르디난도 2세 역시 왕위를 버리고 도주하였으며, 덕분에 나폴리 왕국은 예상 외로 손쉽게 정복되었다.

프랑스의 퇴각[편집]

이내 모든 유럽 열강이 샤를 8세의 힘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그에 대해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495년 3월 31일 알렉산데르 6세는 신성 로마 제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루도비코 스포르차, 스페인의 페르난도 2세 등과 더불어 신성 동맹을 결성하였다. 대외적으로 이 동맹을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되었다고 홍보하였지만, 실제로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결성된 것이었다. 샤를 8세는 5월 12일에 스스로 나폴리 왕으로서의 대관식을 치루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북쪽으로 서둘러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포르노보에서 신성 동맹군과 맞닥뜨려 치열한 전투 끝에 포위망을 간신히 뚫고 11월에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 직후에 페르디난도 2세는 스페인의 도움을 받아 다시 나폴리의 국왕으로 복위하였다.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원정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났지만, 소위 ‘균형 정책’이 얼마나 어리석은 정책이었는지 여실히 드러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균형 정책’이라는 것은 이탈리아를 구성하는 여러 나라 가운데 한 나라가 월등히 강해져서 다른 나라들을 병합하지 못하게 막는다는 이탈리아 각국의정책이다. 하지만 샤를 8세가 이탈리아에서 일으킨 전쟁 덕분에 이러한 균형 정책은 거대한 외세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미 강력한 민족 국가로 통일한 프랑스나 스페인에 비해 이탈리아는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외세의 공격을 받으면 매우 취약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샤를 8세의 침입을 받은 이후 알렉산데르 6세는 다른 모든 정복 군주를 본받아 영토를 확장하여 중앙집권적인 정치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먼저 그는 프랑스군을 패퇴시킨 추세를 이용해 반항적인 귀족 집안인 오르시니 가문의 힘을 꺾어 버림으로써 교황령의 통치자로서의 실질적인 힘을 갖고자 하였다.

오르시니 가문의 당주이자 이탈리아 콘도티에로였으며 교황의 가신이었던 브리지니오 오르시니는 스페인에서 생포되어 나폴리의 감옥에 갇혀 생을 마감하였으며, 그의 재산은 모두 교황에게 몰수되었다. 오르시니 가문의 나머지 일족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들도 14927년 1월 소리아노넬치미노 전투에서 우르비노 공작 구이도발도 다 몬테펠트로와 간디아 공작 후안 보르자가 이끈 교황군에게 패배하였다. 베네치아의 중재로 양측간의 평화 조약에 체결되었는데, 오르시니 가문은 알렉산데르 6세에게 몰수당한 영지를 되찾기 위해 50,000 두카트를 지불해야만 했다. 알렉산데르 6세 역시 전투 도중 포로로 붙잡힌 우르비노 공작 구이도발도의 석방을 위해 그의 몸값을 지불했다. 이후로도 오르시니 가문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으며, 알렉산데르 6세는 오직 3천 명에 불과한 스페인 병사들 밖에 의지할 데가 없었다. 그의 유일한 성과는 오스티아를 정복하고 콜론나와 사벨리 등 친프랑스파 추기경들을 굴복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보르지아 가문의 악명이 널리 전해지게 되는 최초의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그해 6월 14일 간디아 공작이자 베네벤토 공작인 후안 보르자가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는데, 다음날 테베레 강에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아들의 죽음에 큰 슬픔에 잠긴 알렉산데르 7세는 스스로 산탄젤로 성에 들어가 칩거하였다. 그는 부패한 교회의 기강을 잡고 도덕적으로 개혁시키는 것을 자신의 유일한 국정 목표로 선언했지만,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한편 후안 보르자가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범인이 누구인가를 놓고 여러 사람을 용의선상에 놓고 오랫동안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수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암살범을 찾기 위한 수사는 아무런 해명 없이 갑자기 중단되었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체사레 보르자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지만, 그가 자신의 형제를 암살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었다. 후안 보르자와 가장 최근에 군사적 충돌을 하였던 오르시니 가문 역시 주요 용의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후안 보르자는 이 밖에도 적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이가 용의선상에 올랐다.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도 주요 용의자로 지목되었는데, 그 이유는 후안 보르자가 살해당하기 며칠 전에 그와 심한 말다툼을 했기 때문이었다.[11] 후안 보르자가 살해당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밝혀진 바가 없지만, 그가 생전에 저지른 간통과 같은 것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있다.

사보나롤라[편집]

외세의 위험이 가시자 이번에는 이탈리아 내부에서 문제가 일어났다. 도미니코회 탁발 수사이자 강력한 언변을 가진 선동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교황이 저지른 타락과 부패 문제를 공개적으로 고발하며 열렬하게 비난하고 나섰으며, 이러한 교황에 맞서 공의회를 소집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또한 당시 피렌체 공화국을 통치한 메디치 가문에 대해서도 시민들의 복지는 뒷전이고 정부 금고만 채우기에 혈안이 되었다고 비난했다. 그의 설교는 빠른 속도로 사람들 사이에서 호응을 얻어 곧 피렌체 전역에 영향력을 미쳤다. 1494년 프랑스군이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했을 때, 사보나롤라는 프랑스군을 부패한 로마를 정결하게 하고 자신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 온 ‘하느님의 칼’이라 부르며 환영했다. 얼마 후 샤를 8세의 침공에 맞서기 위해 알렉산데르 6세가 반(反)프랑스 동맹 결성에 피렌체의 참여를 촉구했을 때 사보나롤라는 이를 반대했다. 처음에는 이를 무시하였던 알렉산데르 6세도 차츰 이를 위협적으로 느끼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알렉산데르 6세에 대한 사보나롤라의 적개심은 개인적 감정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수사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가령 사보나롤라는 후안 보르자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알렉산데르 6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신을 써서 보내며 애도를 표하기도 하였다. “교황 성하, 우리에게 평화와 위로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유일하고 참된 것은 믿음 뿐입니다. … 믿음만이 고독하신 성하께 위로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12] 하지만 사보나롤라는 그의 지나친 훈계와 강압적인 생활방식 요구로 진절머리가 난 피렌체 시민들에게 버림을 받아, 결국 1498년 5월 23일 피렌체 정부로부터 사형을 구형받았다.[13]

가문의 확대[편집]

당시 로마에서는 스페인 사람들을 멸시하는 풍조가 있었는데, 스페인 출신인 보르자 가문 역시 다른 이탈리아 귀족 가문들로부터 곧잘 무시와 천대를 받았다. 따라서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귀족 가문들은 나날이 권력이 강해지는 보르자 가문에 대해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14]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였던 알렉산데르 6세는 언제 있을지 모를 이들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정략 결혼 정책을 통해 자신의 가문을 더욱 확장함으로써 동맹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가문의 지위를 향상시킬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1497년 그는 자신의 딸 루크레치아 보르자와 조반니 스포르차의 혼인을 무효화하였다. 조반니 스포르차가 자신의 아내 루크레치아가 그녀의 아버지 알렉산데르 6세 및 체사레 보르자와 근친상간 행위를 했다는 근거 없는 모함을 하자, 조반니 스포르차가 자신의 성불구를 숨기고 혼인했기 때문에 정당한 혼인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맞대응한 것이다.[15] 그리고 체사레 보르자와 페르디난도 2세의 뒤를 이어 나폴리의 국왕으로 즉위한 페데리코의 딸 사이의 혼담을 성사되지 못하자, 그 대신 페데리코 국왕에게 알폰소 2세의 적장자인 비셸리에 공작을 루크레치아 보르자와 혼인시키는 일에 동의하라고 위협하였다.

한편 새로 프랑스의 국왕으로 즉위한 루이 12세잔 드 프랑스 왕비와의 혼인 무효 신청을 알렉산데르 6세에게 탄원하였는데, 알렉산데르 6세는 이를 허락하는 칙서와 함께 추기경에서 평신도로 환속한 자신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를 사절로 파견하였다. 칙서에 따르면, 알렉산데르 6세는 체사레 보르자를 발랑스(체사레 보르자의 별명이 발렌티노였기 때문에 발렌티노의 프랑스식 명칭인 발랑스가 그의 영지로 결정되었다고 전해짐) 공작의 작위를 부여하고, 교황령인 로마냐의 영주들을 복속시키는 일을 물질적으로 원조하고, 나바라 공주와 혼인시킨다는 조건 하에 루이 12세의 혼인 무효 신청을 허락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알렉산데르 6세는 옛 왕인 샤를 8세 때보다는 루이 12세가 자신의 가문에 보다 우호적이기를 희망하였다. 그는 스페인과 스포르차 가문의 항의를 물리치고, 1499년에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베네치아 공화국도 여기에 동참하였다. 그 해 가을, 루이 12세는 밀라노에서 루도비코 스포르차를 내쫓았다.

알렉산데르 6세는 1500년을 성년으로 선포하여 전국의 수많은 순례자들을 로마로 불러들여 막대한 헌금을 챙겨 교황청의 금고를 넘치도록 해웠다. 또 성년 기념을 위해 성 베드로 대성전에 성문(聖門, Porta Santa)을 설치하게 하였다. 이 문은 희년 첫날에 열고 마지막 날에 닫도록 했는데, 이 관습은 오늘날까지도 지켜지고 있다.

1503년 8월 11일 알렉산데르 6세는 체사레와 함께 열병으로 앓아누워 교황 당선 기념 미사에 불참했다. 주치의들의 처방에도 불구하고 1주일도 채 되지 않아 그는 선종하였다. 그 날은 날씨가 매우 후텁지근해 시신이 금방 부패했다. 시신을 시스티나 성당에 안치해둔 동안 얼굴이 진한 자줏빛으로 변하고 군데군데 검푸른 점이 나타났으며, 벌려진 입술은 부풀어올라 흉하게 일그러졌다. 시신은 심하게 부풀어올라 관에 다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래서 결국 관리들이 시신을 낡은 카펫으로 둘둘 말아 관 위에 걸친 다음, 쑤셔넣어야만 했다.

주석[편집]

  1. "Pope Alexander VI". Catholic Encyclopedia. New York: Robert Appleton Company. 1913.
  2. Mallett, M. The Borgias (1969) Granada edition. 1981. p. 9.
  3. Mallett passim.
  4. Catherine B. Avery, 1972, The New Century Italian Renaissance Encyclopedia, Appleton-Century-Crofts, ISBN 0-13-612051-2 ISBN 9780136120513 p. 189. [1]
  5. http://www.nndb.com/people/159/000092880/
  6. Monsignor Peter de Roo (1924), Material for a History of Pope Alexander VI, His Relatives and His Time, (5 vols.), Bruges, Desclée, De Brouwer, volume 2, p. 29. [2] [3] volumes 1–5
  7. Peter de Rossa, Vicars of Christ, p. 144.
  8. James Reston, Dogs of God, New York, Anchor Books, 2005, p. 287.
  9. Mallett ibid. p128
  10. Studies in Church History, 1906, Reuben Parsons, New York and Cincinnati, F. Pustet & Co., Volume 3, p. 210, n. 1. [4]
  11. Mallett ibid. pp162-6
  12. de la Bedoyere, M. The Meddlesome Friar. 1957 p. 24
  13. de la Bedoyere, ibid. passim.
  14. J.B. 다시, What you don't know about the Borgia Pope: Alexander VI (1492-1503). Quote: "We need now to digress a little to explain why the Pope should bestow his favours so generously on his own relatives. Let us take a look first at the political situation in Spain and in Italy. For centuries, Spain had been almost completely overridden by the Moors. The Spaniards had been trying to take back their country from the Moors for almost 800 years. By the middle of the 15th century, this reconquest was almost complete, but Spain was still a hodgepodge of competing principalities and, because of its constant state of warfare, still a very backward country. In Italy, on the other hand, the Renaissance, which had hardly begun in Spain, had reached its high point and the Italians in general did not look kindly on a citizen of this backward country being elevated to the highest post in the Church. Remember, too, that the Pope at the time, besides his spiritual powers, was a sovereign political power with large areas of the peninsula, nominally, at least, under his control. (see map) However, politically Italy was in a worse state than Spain. In the south, Naples was a fief of the Pope, but its ruler, King Ferrante, refused to acknowledge the Pope's authority. In the north of the peninsula, many small principalities vied for dominance and were often at war with one another, changing alliances as rapidly as opportunity invited. In the Papal States themselves, noble families, such as the Orsini and the Colonna, acted as petty tyrants in the cities and areas which they controlled, grinding down the people and constantly seeking to achieve their independence from their sovereign, the Pope. These Roman families even sought to control the Papacy itself. It was probably only because they could not agree on an Italian successor to Nicholas V that the elderly Callistus had been elected; one who, in all probability, would not live long. (Remember that, in our own times, John XXIII was supposed to have been elected for the same reason). Callistus III was acknowledged by all as religious and austere, though severely criticized for his largesse to his family. But he was surrounded by enemies both within the Church and among the rulers of Europe. When elected, he did what all leaders do, he surrounded himself with people whom he believed he could trust. A Spaniard in Italy, he was hard pressed to find such trustworthiness except from members of his own family; hence his patronage of them, though it is not to be denied that it was probably also for personal reasons."
  15. 존 줄리어스 노리치, 《전제군주》(Absolute Monarchs), 272페이지 인용: "As for her reputation, there is absolutely no evidence for the rumors of incest with one or more of her brothers -- or indeed with her father -- apart from that given by her first husband, Giovanni Sforza, during the divorce proceedings, during which several other baseless accusations were leveled in both directions."
전 임
인노첸시오 8세
제214대 교황
1492년 8월 11일 - 1503년 8월 18일
후 임
비오 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