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비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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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2세
Pintoricchio 012.jpg
본명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
임기 시작 1458년 8월 19일
임기 종료 1464년 8월 15일
전임 갈리스토 3세
후임 바오로 2세
탄생 1405년 10월 18일
Bandera de Siena.png 시에나 공화국 코르시냐노
선종 1464년 8월 15일 (58세)
Flag of the Papal States (pre 1808).svg 교황령 안코나

교황 비오 2세(라틴어: Pius PP. II, 이탈리아어: Papa Pio II)는 제210대 교황(재위: 1458년 8월 19일 ~ 1464년 8월 15일)이다. 본명은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이탈리아어: Enea Silvio Piccolomini)이다.

교황 선출 이전[편집]

에네아 피콜로미니는 1405년 10월 18일 군인이었던 실비오 피콜로미니와 그의 아내 비토리아 포르테구에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 그를 포함해 총 18자녀가 있었으나, 대부분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다.[1] 코르시냐노에서 자란 그는 18세가 되자 유학을 떠났다.

시에나 대학교에서 공부한 후에 그는 한동안 교사로 근무하다가 페르모의 교구장이었던 도메니코 카프라니카 주교의 비서로 채용되었으며, 바젤 공의회에서 그를 보좌하였다. 카프라니카 주교는 새로 선출된 교황 에우제니오 4세에게 항의의 표시로 추기경 서임을 거부하다가,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새로이 선출되면서 추기경 서임을 받아들였다. 제노바의 항구에서 출발해 험난한 항해를 견디며 바젤에 도착한 그는 카프라니카 추기경을 따라 알프스를 횡단하였으나, 적은 보수 때문에 결별하고 다른 주인들을 찾아 나섰다.

1435년 에네아 피콜로미니는 에우제니오 4세의 공의회 특사인 니콜로 알베르가티 추기경으로부터 비밀 임무를 받고 스코틀랜드로 파견되었다. 그가 알베르가티 추기경으로 지시받은 임무는 실로 다양하였다. 그는 스코틀랜드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도 방문하였는데, 양 국가에서 많은 위험천만한 일을 겪은 다음 이에 대한 보고서를 남겼다. 스코틀랜드에서의 여정은 매우 거칠고 험난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피콜로미니는 선착장에서 가장 가까운 성모 순례지가 있는 곳까지 걸어서 가기로 마음 먹었다. 가장 가까운 순례지는 화이트커크에서 10마일 떨어진 던바였다. 눈보라를 뚫고 가는 동안 에네아는 다리 통증으로 고생하였다. 뉴캐슬에 당도해서야 그는 비로소 문명화된 세계로 돌아왔다고 생각하며 안도하였다. 반면에 그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최북단은 황폐하고 썰렁하고 겨울에는 햇빛이 전혀 들지 않는 곳이라고 표현하였다.[2] 스코틀랜드에 있던 시절에 에네아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지만, 아이는 얼마 안 있어 사망하였다.[1]

아직 평신도였던 시절의 에네아는 교황과 공의회 간의 싸움에서 공의회의 편에 섰으며, 결국 여러 사안에 있어 바젤 공의회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대립 교황 펠릭스 5세가 되는 사보이 공작 아마데우스를 지지하였으며, 그의 대관식에도 참석하였다. 대립 교황 펠릭스 5세의 지시로 스트라스부르로 간 에네아는 그곳에서 브르타뉴 여성인 엘리자베스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으나, 14주 만에 사망하여 떠나보냈다.[1] 이후 에네아는 에 있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궁정에 들어갔다. 1442년 그는 황제로부터 계관 시인으로 임명되었으며, 황제의 고문관인 카스퍼 슐리크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에네아가 집필한 장관의 연애 이야기를 다룬 《두 연인의 이야기》(Historia de duobus amantibus)가 그가 시에나에 있을 당시 있었던 연애 시절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교황 갈리스토 3세에 의해 추기경에 서임된 에네아 피콜로미니

이 때까지만 해도 에네아는 도덕적으로 별로 엄격하지 않았으며, 정치적으로도 일관되게 너그럽고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을 가진 자유주의자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차 도덕적인 인물로 변화해갔고, 정치적으로도 제국과 로마 사이에 평화적인 관계를 정착시키는데 노력하게 되었다. 1445년 에네아는 황제로부터 표면상으로는 새 공의회를 소집하기 위해 교황을 설득하러 간다는 임무를 띠고 로마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교황을 돕겠다는 약속을 한 그는 교회의 징계를 면제받아 독일로 귀국하였다. 그리하여 에네아는 자신의 뛰어난 외교력을 발휘하여 로마와 독일 선제후들 사이의 불화를 원만하게 해결하였다. 1447년 그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선종하기 직전에 독일 제후들이 제안한 타협을 받아들여 화해가 이루어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결과, 바젤 공의회와 대립 교황은 누구의 지원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에네아는 사제 서품을 받아 성직자의 길로 들어섰으며, 에우제니오 4세의 후임자인 교황 니콜라오 5세는 1447년에 그를 트리에스테의 주교로 서임하였다. 에네아는 나중에 시에나의 교구장 주교가 되었다.

1450년 에네아는 프리드리히 3세 황제와 포르투갈의 엘레오노라 공주 사이의 혼담을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의 대사 자격으로 포르투갈로 파견되었다. 1451년 에네아는 후스파의 지도자 이르지 포데브라디와 교섭하기 위해 보헤미아로 파견되었다. 1452년 에네아는 프리드리히 3세와 같이 로마로 가서, 교황이 집전하는 프리드리히 3세와 엘레오노라 공주의 혼인 미사에 참례하였다. 또한, 교황이 프리드리히 3세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공식 인정하고 그의 대관식을 집전한 자리에도 참석하였다. 1455년 8월 에네아는 신성 로마 제국의 대사 자격으로 로마로 가서 새로 선출된 교황 갈리스토 3세를 알현하고, 독일이 새로운 교황에게도 변함 없이 순명을 바칠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그는 프리드리히 3세 황제와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라디슬라우스 5세 국왕으로부터 추기경 후보로 추천받았으나, 갈리스토 3세가 자신의 조카를 먼저 추기경에 서임하기 위해 뒤로 밀려나면서, 추기경이 되겠다는 그의 목적은 곧바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의 추기경 서임은 다음해 12월에 가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에네아는 또한 임시로 바르미아 주교를 겸직하기도 하였다.

교황 선출[편집]

교황 비오 2세의 문장

1458년 8월 6일 갈리스토 3세가 선종한 후, 새 교황을 선출하기 위하여 콘클라베가 소집되었다. 에네아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 프랑스 루앙의 교구장이자 많은 재산을 가진 기욤 데스투트빌이 비록 프랑스 사람인 데다가 종잡을 수가 없는 성격을 가졌지만, 당시 분위기에는 새 교황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거의 확실시 되었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로마 교황의 선출회의》(Conclavi de' Pontifici Romani)에서는, 저자인 에네아 본인이 어떻게 데스투트빌의 야망을 좌절시켰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을 보면, 에네아는 설사 추기경단이 매우 높은 도덕적 기준을 통해 선정한 몇몇 후보까지 포함한다 할지라도, 자질이나 능력 면에서 교황관을 머리에 받아 쓸 자격이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고 믿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에네아는 어떤 지위이든간에, 자신이 해야 할 소명에 마땅히 응답하며 거기에 충실히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자신의 장점이며, 따라서 능력을 인정받고 개성도 있는 자신이 차기 교황으로 선출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추기경들 사이에서 몇 차례 모의가 이루어지면서 에네아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위해 필요한 충분한 지지자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2차 투표에서 결국 만장일치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교황 대관식은 1458년 9월 3일에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영국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마이클 드 라 베도예르는 “새 교황이 선출되면서 바티칸에 진보적이고 이교적인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왜냐하면 새 교황은 당시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도 기독교인이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방탕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내면으로부터 자꾸 올라오는 성욕을 억제하는데 힘겨워하였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쇄신을 단행하였으며, 십자군 원정에 큰 열의를 보였고, 공의회의 권위가 교황의 권위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이단이라고 가르침으로써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라고 평하였다.[3]

교황으로서의 정치 활동[편집]

비오 2세가 재위기간 중에 가장 열성적으로 추진한 일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십자군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비오 2세는 먼저 당시 나폴리 왕국의 왕위를 주장한 아라곤 왕국페르난도 2세와 동맹을 맺고,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맞서기 위한 공동 대책을 논의하기 위하여 만토바에서 모든 기독교 국가 군주들의 대표자들이 모일 것을 제안하였다. 1459년 9월 26일 그는 오스만 제국군과 싸울 새로운 십자군 원정 소집을 요청하였으며, 1460년 1월 14일 3년 동안 성전을 지속하기로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비오 2세는 회담 장소까지 몸소 행차하였는데, 당시 그가 이끈 긴 행렬은 마치 승전한 군대의 행전과 같았다고 전해진다. 1459년 소집된 만토바 공의회는 당초 목적이었던 십자군 원정 계획이 호응을 얻는데 실패하면서, 최소한 기독교 세계의 무력함이 전적으로 교황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다. 이에 비오 2세는 다른 기독교 국가 군주들과는 달리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시작한 가시 공작 블라드에 대해서는 깊은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4]

비오 2세는 만토바에서 다시 로마로 돌아가던 도중에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시에나에 들러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만토바에서 회의 의장이었던 루도비코 3세 곤차가도 그와 함께하였다. 비오 2세는 고향에서 즐거운 전원 생활을 보내고 있었지만, 로마로부터 티부르치오 디 마소가 소동을 일으켰으니 서둘러 돌아올 것을 요청받았다. 교황령에서 잠시동안이나마 반항적인 영주들과 약탈을 일삼던 콘도티에로들 때문에 혼란이 일어난 동안 아라곤 왕가앙주 왕가가 나폴리 왕국의 왕권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었다. 두 왕가의 전쟁은 최종적으로 비오 2세와 동맹을 맺은 아라곤의 페르난도의 승리로 끝이 났다. 비오 2세는 리미니의 영주이자 콘도티에로인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와의 전쟁으로 재위기간 대부분을 보냈다. 비오 2세는 또한 폴란드튜튼 기사단 간에 13년 전쟁(1454 - 1466)이 발발하자 양측의 화해를 위하여 중재에 나섰으나, 소용이 없자 폴란드와 프로이센 양국을 모두 단죄하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또한, 비오 2세는 브레사노네의 주교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의 파문과 체포 문제와 관련해서 보헤미아 국왕 게오르그 폰 포디브라트오스트리아 대공 지기스문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관여하였다.

1461년 7월 비오 2세는 시에나의 가타리나성녀시성하였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프랑스의 새 왕으로 등극한 루이 11세를 설득하여 프랑스 내에서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은 부르주 국본조칙을 철폐하도록 하는데 성공하였다.

비오 2세는 족벌주의와 부패를 제거하려고 노력하였고 로마의 옛 성문이 파손되지 않도록 않게 하였다.

그가 재위 중 가장 열정적으로 추진한 일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십자군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그가 서유럽 군주들에게 십자군 원정 동참을 외치게 된 이유는 전 세계를 기독교의 이름 아래 통일시키겠다는 비전 때문이었다. 비오 2세는 1458년 10월에 십자군 모집을 처음 요청했지만 호응을 얻는 데 실패했다. 우선 프랑스가 십자군 원정을 거절했다. 그 배경에는 나폴리 왕위 쟁탈전이 있었는데, 교황이 프랑스의 앙주 왕가를 제치고 에스파냐아라곤 왕가를 지지하자, 이에 앙심을 품은 프랑스가 십자군 원정에 대한 어떠한 지원도 거절했던 것이다. 그 직후 프랑스는 나폴리 왕위를 강제로라도 차지하기 위해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서 에스파냐와 맞붙었다. 십자군 원정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기는 신성로마제국도 마찬가지였다. 신성로마제국은 처음에는 3년간 군대를 파견하겠다고 마지못해 약속했지만, 이러한 미온적인 약속조차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시들해졌다. 결국 1460년 무렵, 십자군 모집 계획은 완전히 무산되고 말았다.

이듬해인 1461년, 새로 프랑스 왕이 된 루이 11세가 교황 비오 2세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물론 교황이 마음을 돌리고 나폴리 왕위 문제에서 프랑스 편을 들어주기를 바라는 기대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교황이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자 루이 11세는 당시 프랑스의 대(對)교황청 정책으로 굳어가던 태도, 다시 말해 프랑스 교회에 대한 교황청의 개입을 반대한다는 태도로 다시 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의 사이도 당시 독일 일대에 일어났던 여러 분쟁 때문에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당대의 저명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쿠자의 니콜라우스가 주도한 독일 교회 개혁에 교황청이 이의를 제기한 것, 보헤미아 왕국의 점령지인 헝가리에서 종교상의 문제로 교황과 보헤미아 왕이 정면 충돌한 일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교회 개혁과 기독교 아래 유럽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에 관한 비오 2세의 웅대한 구상에 비교할 때 이러한 문제는 사소해 보이기만 했다.

결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십자군 모집을 추진하던 비오 2세는 1460년 또는 1461년에 이 문제에 완전히 새로운 접근법을 시도했다. 즉 동로마 제국을 함락한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메드 2세에게 서한을 보내, 이슬람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받아들여 동방의 기독교 황제가 되라고 설득한 것이다. 이 서한은 생색을 내거나 허세를 부리지 않고, 오히려 이성적인 사람끼리 나누는 논리적 설득에 가까웠다. 메메드 2세에게 실제로 전해졌을지는 모르지만, 그 서한은 유럽 전역을 돌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말하자면 전 세계를 하나의 믿음 아래 평화적으로 통일하려는 비오 2세의 비전을 널리 알리고, 전쟁보다 훨씬 이상적인 설득의 힘은 무한하다는 점을 시사함으로써 유럽인들을 크게 감화시켰다.

이렇듯 평화적인 세계 통일을 꿈꾸었으면서도, 비오 2세는 술탄으로부터 아무런 답신이 오지 않자 다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력에 의지하게 되었다. 1463년 다시 한번 십자군 모집을 유럽 각국에 호소한 뒤 1464년 6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의식을 거행한 다음 십자군 집결지인 안코나를 향해 배를 타고 출발했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크게 실망한 그는 곧 열병에 걸렸고 그로부터 2달 뒤, 오스만 제국이 장악하고 있는 동방을 향해 응시한 채 안코나에서 선종하였다.

주석[편집]

  1. Nigel Cawthorne, Sex Lives of the Popes, 1996, 151 page.
  2. Mémoires, p. 53.
  3. Michael de la Bedoyere, The Meddlesome Friar and the Wayward Pope, p. 59-60
  4. Dracula: Prince of many faces – His life and his times p. 129
전 임
갈리스토 3세
제210대 교황
1458년 8월 19일 ~ 1464년 8월 15일
후 임
바오로 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