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니콜라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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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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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
임기 시작 1277년 11월 25일
임기 종료 1280년 8월 22일
전임 요한 21세
후임 마르티노 4세
탄생 1210년/1220년
이탈리아 로마
선종 1280년 8월 22일
이탈리아 비테르보

교황 니콜라오 3세(라틴어: Nicholaus PP. III, 이탈리아어: Papa Niccolò III)는 제188대 교황(재위: 1277년 11월 25일 - 1280년 8월 22일)이다. 본명은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이탈리아어: Giovanni Gaetano Orsini)이다.

1210년과 1220년 사이 로마에서 태어났다. 로마의 유력한 집안인 오르시니 가문 출신이나 1244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 의해 추기경에 임명되기 전까지의 경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추기경으로서 교황의 정책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전임 교황 요한 21세의 선종 후 6개월간 교황좌가 공석이었을 때 교황으로 선출된 후 교회 내부와 교황령의 행정을 쇄신하였다.

교황은 로마 시의 통제권을 회복하고 외국 통치자들을 제거하며 교황권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1278년 7월 18일 칙서를 발표하여 로마 정부를 외국 원로원들에게 위임하는 것을 금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앙주 가문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조치였다. 또한 교황은 교황청 상서원의 절차에 관련된 가장 중요한 행정 기구를 쇄신하고 유능한 추기경들을 새로 임명하여 추기경단의 질을 높여 나갔다.

동방 정교회와의 관계는 개선되지 못하였다. 십자군 원정도 실패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가난 문제로 프란체스코회가 둘로 갈라진 것을 1279년 8월 14일 칙서 《Exiit qui seminat》로 조정하였다. 또한 교황은 1280년 5월 시칠리아 문제에 개입하여 교황청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고 앙주 왕가합스부르크 왕가의 주장을 만족시키는 협상을 이루었다. 그러나 교황의 선종 후 그 협상은 깨지고 만다. 교황은 원나라의 칸이 사신을 보내어 이집트를 반대하여 도움을 청하자 이를 좋은 기회로 여겨 원나라에 사절과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또한 영구적인 교황 거처를 바티칸으로 정하고 궁전과 정원을 확장시켰다. 잉글랜드에서는 캔터베리 대주교 R.킬워드비와 후임자이자 잉글랜드 교회의 수좌 대주교가 된 페캄 대주교가 교황과 협조하여 교회의 규율을 엄하게 하고 교회의 권익을 보호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족벌주의에 지나치게 사로잡혔다. 단테가 자신의 작품 《신곡》에서 이를 언급할 정도였다.

전 임
요한 21세
제188대 교황
1277년 11월 25일 - 1280년 8월 22일
후 임
마르티노 4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