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율리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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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오 2세
Pope Julius II.jpg
본명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임기 시작 1503년 10월 31일
임기 종료 1513년 2월 21일
전임 비오 3세
후임 레오 10세
탄생 1443년 12월 5일
Flag of Genoa.svg 제노바 공화국 알비솔라
선종 1513년 2월 21일 (69세)
Flag of the Papal States.gif 교황령 로마

교황 율리오 2세(라틴어: Iulius PP. II, 이탈리아어: Papa Giulio II)는 제216대 교황(재위: 1503년 10월 31일 - 1513년 2월 21일)이다. 본명은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이탈리아어: Giuliano della Rovere)이다. ‘무서운 교황’[1] 또는 ‘전사 교황’[2]이라는 별명이 있으며, 재위기간 동안 활발한 대외 정책과 더불어 성 베드로 대성전의 신축 등 야심적인 대규모 건축 공사를 추진하였으며,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화를 그릴 것을 지시하는 등 예술에 대한 애호가로도 유명하다.

초기 생애[편집]

율리오 2세가 태어난 날짜에 대해서는 서로 상반되는 자료가 많다. 일부 자료에서는 그가 태어난 년도를 1453년 후반이라고 밝히고 있다.[3] 율리오 2세, 즉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는 교황 식스토 4세(프란체스코 델라 로베레)[4]의 조카인 라파엘로 델라 로베레[5]가 그리스 혈통인 아내 테오도라 마네롤라[5][6][7][8][9][10]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줄리아노는 삼촌인 교황을 보조하는 복사로 봉사하였다. 그는 자신의 삼촌 프란체스코 델라 로베레가 소속된 프란치스코회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당시 수도회 총장이었던 삼촌으로부터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다. 나중에 프란체스코는 줄리아노의 과학 공부를 위해 특별히 그를 라 페루즈에 있는 수도원에 보냈다. 하지만 줄리아노는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지 않고 교구 사제가 되었다. 1471년 프랑스 카르팡트라교구장 주교로 서임되었으나, 삼촌 프란체스코가 교황 식스토 4세로 선출되면서 그의 교구장 임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추기경[편집]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왼쪽)과 그의 삼촌이자 후원자였던 교황 식스토 4세(오른쪽)

교황 식스토 4세는 교황좌에 착좌하자마자 자신의 조카인 줄리아노를 추기경에 서임함과 동시에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명의본당으로 하사하였다. 교황인 삼촌을 배경 삼아 줄리아노는 교회 안에 매우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으며, 1472년에는 로잔, 1476년에는 쿠탕스, 그리고 아비뇽의 대교구장에 임명되는 등 여덟 개 이상의 교구장직을 두루 겸임하면서 많은 성직록을 받았다.

1480년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는 부르군트 세습에 관해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일어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교황 특사의 자격으로 프랑스로 파견되어 4년간 체류하였다. 식스토 4세가 선종하고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재임한 동안에도 그의 권력은 줄어들기는 커녕 오히려 강화되어 갔으며, 곧 추기경단 내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인노첸시오 8세가 교황으로 선출되는 데 그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1483년경에는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에게 사생아인 딸 펠리체 델라 로베레가 태어났다.

1492년 인노첸시오 8세가 선종한 후 후임 교황 자리를 놓고 당시 추기경단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또 한 명의 인물인 로드리고 보르자 추기경과 당연히 적수가 되어 대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콘클라베에서 최종적으로 다수의 표를 획득한 인물은 로드리고 보르자 추기경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이다. 이에 질투와 분노에 휩싸인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은 알렉산데르 6세가 콘클라베 당시 거액의 뇌물로 아스카니오 스포르차를 비롯한 많은 추기경들의 표를 사들였다고 주장하면서 그를 성직매매 혐의로 고발하여 그의 선출이 무효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후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은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로마 근교의 오스티아로 피신했다가, 몇 달 후에 다시 프랑스 파리로 피신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프랑스의 국왕 샤를 8세를 만나 나폴리 왕국을 정복하라고 부추겼다.

결국 나폴리 왕국의 왕위 계승권을 노린 샤를 8세가 몸소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하자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는 그를 수행하여 알렉산데르 6세의 저항을 무마시키고 로마에 입성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알렉산데르 6세의 폐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공의회를 조속히 소집해야 한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알렉산데르 6세는 샤를 8세의 신하인 기욤 브리소네를 추기경에 서임하여 샤를 8세의 환심을 사, 델라 로베레 추기경의 계획을 무마시켜 버렸다.

그 후 1483년에 델라 로베레 추기경은 일단 알렉산데르 6세와 형식상 화해를 하였지만, 보르자 가문 타도의 야망은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1503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선종하고, 그의 사생아 체사레 보르자 역시 같은 시기에 병상에 누워있었다. 후임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콘클라베가 소집되었으며, 델라 로베레 추기경은 시에나의 피콜로미니 추기경을 지지하여, 그를 1503년 10월 8일 교황 비오 3세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비오 3세는 재위한 지 26일 만에 선종하였다.

교황 선출[편집]

비오 3세의 선종 이후 소집된 콘클라베에서 델라 로베레 추기경은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되기 위해 당시 건강이 나빠 쇠약해진 체사레 보르자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등 보르자 가문에 대한 교황청의 지원 정책을 계속 이어가겠다고 약속하여 자신을 유력한 교황 후보로 지지하게끔 만들었다. 하지만 델라 로베레 추기경은 보르자와 한 약속을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실제로도 그는 보르자와의 약속을 전혀 지키지 않았다.[11] 결국 뇌물[12]과 계약[13][14]이라는 두 가지 방법을 총동원하여 추기경들로부터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표를 얻은 그는 교황직에 당선되는데 성공하였다. 델라 로베레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는 데 채 몇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며, 그가 얻지 못한 표는 딱 두 표였다. 한 표는 자기 자신의 표였고, 나머지 한 표는 그의 라이벌이자 프랑스 왕실의 지지를 받은 조르주 당부아즈 추기경의 표였다.[15]

교황[편집]

새 교황으로 선출된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은 교황으로서 자신의 새 이름을 4세기 전의 전임자인 교황 율리오 1세의 이름을 계승하여 율리오 2세로 명명되었다. 율리오 2세는 재위 초기부터 교황청을 둘러싼 복잡한 권력 관계나 강대국들의 영향력을 일소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우선 그가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교황령을 거의 자기 것으로 하고 있는 보르자 가문의 영향력을 지워 없애는 것이었다. 실제로 율리오 2세는 교황 선출 당일에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나는 보르자(교황 알렉산데르 6세를 가리킴)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거룩한 교회를 더럽혔으며, 악마의 도움을 받아 교황권을 탈취하였다. 앞으로 누구든지 보르자에 대해 두 번 다시 언급하거나 생각하는 것을 금지하며, 이를 어길 시에는 파문하겠다. 보르자의 이름과 그에 대한 기억은 영원히 잊혀져야 할 것이다. 그가 교황으로 재임했었다는 사실 자체가 잊혀지도록 모든 문서와 기념비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보르자 일족을 그린 모든 그림 역시 검은색으로 덧칠해 지워버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보르자 일족의 모든 무덤 뚜껑을 열어 그들의 시신을 당장 스페인으로 돌려보내야 한다.”[16] 실제로 교황궁 내에 있는 보르자 아파트는 율리오 2세 재임기부터 19세기까지 봉인된 상태로 있었다.[16]

율리오 2세는 교황으로서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당시 로마에서 세력이 강했던 두 귀족 가문인 오르시니 가문콜론나 가문을 화해시켰으며, 그들의 이익을 위한 법령을 포고하여 우호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로마의 나머지 귀족들도 자신에게 복종하게끔 만들었다.

그 결과 로마와 로마 인근 지역의 안전을 확실히 하기 위해 그는 알렉산데르 6세 사후 베네치아 공화국이 점령한 파엔차, 리미니, 그리고 기타 소도시와 요새들을 탈환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이에 베네치아 공화국이 강력하게 항의하며 저항하자, 율리오 2세는 프랑스신성 로마 제국과 더불어 군사 동맹을 맺고 그들의 힘을 빌려 베네치아 공화국에 맞섰다. 이는 외세의 힘을 빌려 이탈리아의 독립성을 약화시키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당면책으로서는 최상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 동맹도 결국 실제적인 영향력은 별로 없었으며, 로마냐 지방으로부터 얼마 안 떨어진 거리까지 베네치아군이 물러가게 만드는 데 그쳤다. 1506년 율리오 2세는 갑옷으로 무장하고 직접 선봉에 서서 군대를 이끌고 페루자볼로냐를 점령하였다.

1503년 12월 율리오 2세는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헨리 8세아라곤의 캐서린 공주와 혼인하는 것을 특별히 허락해 주었다. 캐서린 공주는 본래 헨리 8세의 형이었던 아서 튜더와 혼인하였지만, 곧바로 아서가 사망하여 미망인이 되었다. 참고로 캐서린 공주는 아서 왕자와 혼인한 후에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총 6개월 동안 처녀로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20년 후,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사랑에 빠져 그녀와 혼인하기 위해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화하려고 시도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이를 거절하자, 헨리 8세는 가톨릭교회를 배척하고 영국 성공회를 창설하였다.

1506년 율리오 2세는 스위스 근위대를 창설하였다. 이후 스위스 근위대는 교황을 최측근에서 지키는 유일한 군사력으로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로마가 기독교 세계의 수도로서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르네상스 계획의 일환으로 율리오 2세는 스스로 라틴-기독교 제국을 이끌어가는 교황으로서 자신의 위엄을 마치 황제와 같이 드높여 만인에게 드러내 보이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 예로, 1507년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때 율리오 2세의 행렬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져오고 있다. “율리오 2세가 로마에 입성하였다. … 그에게서 로마 제국의 영광과 위엄을 계승한 제2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모습과 더불어 로마의 보편 교회를 다스리는 교황으로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17] 자신과 동명이인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모범으로 삼았던 율리오 2세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야만인들을 몰아내자는 기치 아래 몸소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수행하였으나,[18] 그의 웅대했던 꿈은 끝내 실현되지 못하였다.

신성 동맹[편집]

1508년 율리오 2세는 프랑스루이 13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 아라곤페르난도 2세캉브레 동맹을 결성하였다. 캉브레 동맹 전쟁 또는 신성 동맹 전쟁 기간 동안 이 동맹은 베네치아 공화국에 맞서 싸웠다. 당시 이들이 베네치아 공화국에 맞서 동맹을 결성하게 된 배경에는 율리오 2세가 베네치아가 점유하고 있는 로마냐 지역을, 막시밀리안 1세 황제가 프리울리베네토를, 루이 13세가 크레모나를, 페르난도 2세가 풀리아 주를 손에 넣기를 원하였기 때문이다. 캉브레 동맹과 베네치아 공화국 간의 전쟁을 통상 이탈리아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1509년 봄에 율리오 2세는 베네치아 공화국 전역에 성무 정지 조치를 내렸다.[19] 신성 동맹 전쟁과 이탈리아 전쟁 기간 내내 동맹은 수시로 바뀌었다. 가령 1510년 베네치아와 프랑스는 서로 적대 관계였다가 1513년에는 동맹을 맺었다.

캉브레 동맹의 효과로 율리오 2세는 당초 계획했던 목표를 훨씬 뛰어넘는 성과를 얻었다. 1509년 5월 14일 아냐델로 전투에서의 패배로 베네치아는 사실상 이탈리아 내에서의 주권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프랑스 국왕은 물론 신성 로마 제국 황제도 당초 교황의 목적을 달성하는 수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것을 원하였다. 이에 율리오 2세는 지금까지 자신의 동맹자였던 프랑스 국왕이 이탈리아에 대해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경계하여 베네치아 공화국과 손을 잡고 협정을 맺어 프랑스에 적대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510년 초에 베네치아 공화국은 공손하게 율리오 2세에게 용서를 구해 사죄를 받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는 율리오 2세로부터 성무 정지 조치를 받게 되었다. 프랑스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을 서로 이간질 시키려고 한 율리오 2세의 책략은 실패로 끝났다. 한편 루이 13세는 1510년 9월 프랑스 투르에서 시노드 소집을 요청하여 반격에 나섰다. 프랑스 주교단은 교황에게의 순명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막시밀리안 1세의 협조를 얻어 율리오 2세를 조속히 폐위시키기로 결의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1511년 11월 피사에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그러자 율리오 2세는 페르난도 2세 및 베네치아 공화국과 함께 1511년 신성 동맹을 창설하여 프랑스에 대항하였다. 얼마 후, 헨리 8세와 막시밀리안 1세도 대(對)프랑스 동맹인 신성 동맹에 가담하였다.

여기에 더해, 율리오 2세는 피사 공의회에 맞서 1512년 로마에서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공의회에서 그는 본래 교황 선출 당시 즉시 공의회를 소집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적군의 이탈리아 침공으로 부득이하게 소집이 지연되다가 뒤늦게 소집했다고 밝혔다.

죽음[편집]

그러다 마침내 1512년에 율리오 2세는 프랑스군을 알프스 산맥 북부로 완전히 쫓아버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역시 프랑스 이외의 강대국이 이탈리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결과로 연결되었다. 율리오 2세는 로마를 포함한 교황령의 정치적 안정과 독립을 획득함으로써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이탈리아 반도의 독립과 통일의 꿈은 끝내 이루지 못한 채, 1513년 2월에 병에 걸려 몸져누운 뒤 선종하였다.

많은 사람이 흔히 저지르는 오류가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 안에 있는 이른바 미켈란젤로가 만든 교황 율리오 2세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석조물에 실제로 율리오 2세의 시신이 안치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 이 무덤을 만들었을 당시 초창기에는 새로 신축될 성 베드로 대성전 안에 놓기 위해 계획되었지만, 1545년까지 완성하지 못한 데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크게 규모도 축소되었다. 결국 율리오 2세의 시신은 미켈란젤로가 만든 무덤 안에 매장되지 못하고, 성 베드로 대성전 안에 그대로 매장되었다.

율리오 2세의 유해는 1527년 로마 약탈 당시 그의 삼촌인 식스토 4세의 유해와 더불어 훼손되었다. 오늘날 율리오 2세와 식스토 4세의 유해는 성 베드로 대성전 안에 있는 교황 클레멘스 10세 기념비 앞에 있는 바닥에 나란히 안장되어 있다. 안장되어 있는 장소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소박한 묘비만이 있다.

영향과 평가[편집]

라파엘로의 작업을 지켜보는 율리오 2세

예술 후원[편집]

율리오 2세는 활발한 전쟁 활동과 더불어 정치가스러운 인상을 주지만, 예술과 문학에 대한 후원 활동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재임 시기는 전성기 르네상스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로마 시를 아름답게 꾸며 그 가치를 높이는 일에 앞장섰다. 1506년 율리오 2세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신축을 지시하여 머릿돌을 놓았다. 특히 그는 브라만테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는 절친한 사이면서 그들의 후원자였다. 율리오 2세의 후원을 받아 그들은 바티칸의 여러 가지 굵직한 예술 계획들에 참여하였다. 특히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화를 비롯하여 미켈란젤로가 만든 위대한 작품들 가운데는 율리오 2세의 지시로 만들어진 것이 적지 않다. 미켈란젤로가 율리오 2세의 동상을 제작하면서 손에 성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자, 성경 대신 칼을 잡고 있는 모습으로 바꾸라고 명령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져오고 있다.

수염[편집]

율리오 2세는 보통 라파엘로가 그린 초상화에서처럼 턱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정작 율리오 2세 본인은 1511년 6월 27일부터 1512년 3월까지 볼로냐를 교황령으로 탈환하려는 전투 중에 사망한 병사들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표시로 잠시 수염을 기른 것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13세기 교회법으로 금지한 이래, 고대의 전통대로 수염을 기른 최초의 교황으로 기록되었다. 율리오 2세는 사망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자신의 턱수염을 면도하였으며, 뒤이어 교황직에 선출된 그의 후임자들은 모두 깔끔하게 면도하였다. 하지만 교황 클레멘스 7세는 1527년 로마 약탈를 겪고 사망자들과 피해를 입은 시민들을 애도하기 위한 표시로 다시 수염을 길렀다. 그 때부터 1700년 교황 인노첸시오 12세가 선종할 때까지 모든 교황이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가족 관계[편집]

율리오 2세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에 이미 사생아를 두고 있었다. 그의 외동딸로 알려진 인물은 펠리체 델라 로베레이며, 1483년에 태어났다. 폼페오 리타는 펠리체의 두 딸인 줄리아와 클라리체가 사실은 율리오 2세의 딸들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제시하였다.[20] 펠리체의 모친은 루크레치아 노르마니이며, 옛 로마 귀족 가문의 딸이었다. 펠리체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율리오 2세는 루크레치아와 베르나르디노 데 쿠피스의 혼인을 주선하였다. 베르나르디노는 율리오 2세의 사촌인 지롤라로 바소 델라 로베레 추기경의 저택을 설계한 마에스트로였다.[21]

주석[편집]

  1. Blech, Benjamin, Doliner, Roy. (2008). 《The Sistene Secrets》. New York, NY: HarperCollins Publishers, 106쪽. ISBN 978-0-06-146904-6
  2. Jokinen, Anniina (15 Mar 2003). Pope Julius II. 《Luminarium》. 2013년 10월 7일에 확인.
  3. Cheney, David M.. Pope Julius II (Giuliano della Rovere). Catholic-Hierarchy. 2013년 10월 7일에 확인.
  4. Kühner, Hans. (2013). “Julius II”. Encyclopædia Britannica.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2013년 10월 7일에 읽어봄. “Giuliano was the son of the impoverished Rafaello della Rovere, Pope Sixtus IV’s only brother.”
  5. Ott, Michael. (1910). “Pope Julius II”. The Catholic Encyclopedia 8권. New York: Robert Appleton Company. 2013년 10월 7일에 읽어봄. “Born on 5 December 1443, at Albissola near Savona; crowned on 28 November 1503; died at Rome, in the night of 20–21 February 1513. He was born of a probably noble but impoverished family, his father being Raffaelo della Rovere and his mother Theodora Manerola, a lady of Greek extraction. He followed his uncle Francesco della Rovere into the Franciscan Order, and was educated under his tutelage at Perugia.”
  6. Taylor, Robert Emmett (1980). 《No royal road: Luca Pacioli and his times》. Ayer Publishing, 105쪽. ISBN 0-405-13549-1 “Giuliano was born on 5 December 1443, at Albizzola, near Savona, the son of Raffaelo, a brother of Sixtus rv, and of Theodora Manerola, a lady of Greek extraction.”
  7. Cronin, Vincent (1969). 《The flowering of the Renaissance》. Dutton, 33쪽 “his father, Raffaello della Rovere, being a brother of Sixtus IV, his mother, Teodora Manerola, of Greek origin.”
  8. Roterodamus, Erasmus (1986). 《Collected works of Erasmus》. University of Toronto Press, 496쪽. ISBN 0-8020-5602-4 “His (Julius II) mother was a Greek named Theodora Manerola”
  9. Symonds, John Addington (1925). 《The life of Michelangelo Buonarroti: based on studies in the archives of the Buonarroti family at Florence》. Macmillan, 383쪽 “TEODORA, dr. of Giovanni Manirolo, of Greek origin”
  10. Fusero, Clemente (1965). 《Giulio II》. Dall'Oglio, 53쪽 “Giulio Il virtuoso Raffaello della Rovere ha sposato una donna di origine greca: Teodora di Giovanni Manirola.”
  11. Cesare Borgia. 《Encyclopedia.com》. Encyclopedia of World Biography (2004). 2013년 10월 7일에 확인.
  12. Greeley, Andrew M. (2005). 《The Making of the Pope 2005》. New York: Little, Brown, 22쪽. ISBN 978-0-316-32560-8
  13. Ullmann, Walter (1972). 〈Julius and the Schismatic Cardinals〉, Baker, Derek: 《Schism, Heresy and Religious Protest: Papers Read at the Tenth Summer Meeting and the Eleventh Winter Meeting of the Ecclesiastical History Society》. Cambridge, England: Ecclesiastical History Society b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77–178쪽. ISBN 978-0-521-08486-4
  14. Hughes, Philip (1979). 〈Chapter V: 'Facilis Descensus ...' 1471–1517: A Papacy of Princes〉, 《History of the Church: Volume 3: The Revolt Against the Church: Aquinas to Luther》, revised, London: Sheed & Ward, 415쪽. ISBN 978-0-7220-7983-6
  15. Adams, John P. (2012년 12월 16일). SEDE VACANTE 1503, II. Csun.edu. 2013년 10월 7일에 확인.
  16. Cawthorne, Nigel (1996). 《Sex Lives of the Popes》. Prion, 219쪽. ISBN 9781853755460
  17. Stinger, Charles M. The Renaissance in Rome (Indiana University Press, 1985).
  18. Adams, Robert M., "Introduction," The Prince Niccolo Machiavelli (Norton, 1992), 72, n3.
  19. Cavendish, Richard (2009년). Venice Excommunicated. 《History Today》 59 (4).
  20. Litta, "Famiglie Celebri Italiane" (Celebrated Italian Families), 1833
  21. A definitive life of Felice della Rovere is in Caroline P. Murphy's The Pope’s Daughter: The Extraordinary Life of Felice della Rovere.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2005.
전 임
비오 3세
제216대 교황
1503년 10월 31일 - 1513년 2월 21일
후 임
레오 1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