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바오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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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바오로 1세(라틴어: Ioannes Paulus PP. I, 이탈리아어: Papa Giovanni Paolo I)는 제263대 로마 교황(재위: 1978년 8월 26일 - 1978년 9월 28일)이다. 원래 이름은 알비노 루치아니(이탈리아어: Albino Luciani)이다. 역대 교황 가운데 두 번째로 재위기간이 짧았으며, 지금까지의 교황 가운데 마지막 이탈리아 출신 교황이다. 요한 바오로 1세는 20세기에 태어난 첫 번째 교황이기도 하다.
목차 |
[편집] 일대기
[편집] 초기 삶
알비노 루치아니는 1912년 10월 17일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 주의 벨루노에 있는 포르노디카날레(지금의 카날레다고르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벽돌공 조반니 루치아니(1872? - 1952)와 보르톨라 탄콘(1879? - 1948)의 아들이다. 알비노에게는 페데리코(1915 - 1916)와 에도아르도(1917 - 2008)라는 두 남동생과 안토니아(1920 - )라는 여동생이 있었다.
[편집] 부르심
루치아니는 1923년에 펠트레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여, 그곳의 교사들로부터 ‘대단히 기운이 넘치는 학생’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나중에는 벨루노의 대신학교에 갔다. 벨루노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예수회에 입회하려고 했으나, 대신학교 교장 조수에 카타로시 주교가 반대하였다. 1935년 7월 7일에 사제 서품을 받은 루치아니는 1937년 벨루노 대신학교의 교수 겸 부학장이 되기 전에 그의 고향인 포르노데카날레의 보좌 사제로서 재직하였다. 그가 가르쳤던 과목은 교리 신학과 도덕 신학, 교회법, 성미술 등이었다.
1941년, 그는 로마에서 1년간 머무르던 중에 그레고리오 교황청립 대학교로부터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박사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신학교 측에서는 그가 계속 학교에 나와 학생들을 가르치길 원했다. 1941년 3월 27일 교황 비오 12세가 직접 나서고 나서야 상황이 해결되었다. 루치아니의 논문(안토니오 로스미니에 따른 인간 영혼의 기원)은 로스미니의 신학을 강하게 공격하였으며, ‘대우등’으로서 박사학위를 획득하였다.
1947년, 그는 벨루노의 주교 지롤라모 보르티논에 의해 총대리로 임명되었다. 2년 후인 1949년, 그는 교구 상서국의 차장이 되었다. 1958년 12월 15일, 루치아니는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비토리오베네토의 주교로 승품되었다. 뒤이어 12월 27일에 그는 교황 요한 23세와 공동 서품 주교들인 보르티논과 조아키노로부터 주교 축성을 받았다. 주교가 된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모든 회기에 참석하였다. 1969년 12월 15일에 그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베네치아 총대주교로 지명되었으며, 1970년 2월 3일 대교구를 손에 넣었다. 바오로 6세는 1973년 3월 5일에 열린 추기경회의에서 루치아니를 산 마르코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으로 서임하였다. 가톨릭 신자들은 루치아니의 겸손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대표적인 사례로, 하루는 바오로 6세가 자신의 교황 전용 영대를 벗어 루치아니 총대주교의 어깨에 걸쳐주어 그를 난처하게 만든 적도 있었다.
[편집] 교황
루치아니는 1978년 콘클라베의 네 번째 투표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자신의 교황 이름으로 교회 역사상 최초로 이중 이름인 ‘요한 바오로’를 선택하였다. 그는 선임 교황들의 이름 두 개를 모두 선택함으로써 요한 23세의 선함과 바오로 6세의 엄격함을 모방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또한, 그는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자신의 이름 뒤에 ‘1세’를 붙였다. 이탈리아에서는 그를 “Il Papa del Sorriso” (미소 교황)과 “Il Sorriso di Dio” (하느님의 미소) 등의 애칭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그 이름대로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의 진보적인 의지를 이어받아 급변하는 현대 세계에 교회를 적응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자 하였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수시로 밝혔다.
우선 그는 6시간에 이르던 화려하고 장엄했던 교황 즉위식을 간단한 미사로 대체시켰다. 또한 교황 스스로 자신을 '짐(朕)'이라고 부르던 관례를 깨고 '저'라고 지칭하게 하였으며, 세속적 상징인 삼층관을 거부하고 성직자의 상징인 주교관을 고집하였다.
그러나 즉위 후 불과 33일 되는 날 밤, 잠을 자던 중 갑작스럽게 선종하였다.
그의 정식 사인은 심근 경색에 의한 심장 발작이나, 음모론자들은 요한 바오로 1세가 프리메이슨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바티칸 측에서 요한 바오로 1세의 시신에 아무런 부검도 하기 않았기 때문에 의혹은 증폭되었다.
| 전 임 바오로 6세 |
제263대 교황 1978년 8월 26일 - 1978년 9월 28일 |
후 임 요한 바오로 2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