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홀라 호메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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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홀라 호메이니

사이이드 루홀라 호메이니(1900년 9월 22일 ~ 1989년 6월 3일, 페르시아어: آیت‌الله روح‌الله خمینی)는 이란시아파 이슬람 이맘[1]이자 이란의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를 몰아낸 1979년이란 이슬람 혁명정치 지도자 겸 종교 지도자이다.

호메이니는 많은 시아파 무슬림들에게 영적 지도자로 인정받았으며 샤를 축출한 후 1989년 6월 3일, 향년 89세로 사망할 때까지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갖고 이란을 통치했다. 이란에서 그는 아야톨라 대신 공식적으로 이맘으로 호칭되며 그의 지지자들 또한 이 관례에 집착한다.

호메이니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중 하나로 1979년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에 오르기도 하였다.

가계[편집]

호메이니는 1900년 9월 22일 이란의 호메인에서 루홀라 모사비(페르시아어: روح‌الله موسوی)란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수백년 전 종교 교육을 감독하기 위해 시아파 무슬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인도루스크노우 지방으로 이주했던 페르시아인이었는데, 19세기 중반 그의 할아버지가 시아파 성지 나자프로 순례를 다녀오던 중 이란에 정착하였다. 그의 가운데 이름 "헨디"는 인도인이란 뜻인데, 그의 적들은 때때로 이 사실을 걸고 넘어지곤 했다.

망명 생활[편집]

호메이니는 1950년대 후반 아야톨라 칭호를 받았으며, 1960년대 초에는 이란 내 시아파 종교 공동체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1963년, 팔라비가 토지 개혁으로 사원 토지를 축소하고 여성 해방 조치(이는 1936년부터 시작)를 취하자, 그는 팔레비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반대 시위를 조직했다가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듬 해인 1964년에 석방된 호메이니는 다시 미국을 비난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터키로 또다시 강제 추방된다(더군다나 팔라비 왕조는 친미파였다).

1965년에는 이라크로 옮겨갈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 1978년 이라크를 떠나도록 압력을 받을 때까지 그는 이라크의 시아파 성지 나자프에 머물렀다. 이라크에서 쫓겨나자 그는 프랑스 파리 교외의 노플르샤토로 갔다.

알렉상드르 드 마렝슈(당시 프랑스 비밀 정보부 부장)에 따르면, 프랑스는 샤(이란 황제에 대한 호칭)에게 그들이 "폐하를 위협하려는 호메이니를 죽이게 해 주십시오."라며 호메이니 암살을 제안했으나, 샤는 이 계획이 그를 순교자로 만들 수 있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 하나 때문에 혁명으로 샤가 오히려 물러나 버리고 만다)

저명한 혁명 철학자 알리 샤리아티의 암살 후, 호메이니는 샤 정권에 맞선 가장 영향력있는 지도자 중 하나로 떠올랐으며, 샤의 지배에 대항하는 영적 지도자로 받아들여졌다.

망명생활 중 호메이니는 벨레야테 파키(이슬람 법학자의 후견권)이란 책을 저술했다. 이 책은 이슬람 사회의 모든 법은 이슬람법에 기초해야만 하고, 모든 법과 활동은 이슬람 율법의 이맘 기관(수호자)에 의해 감독되어야 하며, 이슬람 국가들은 공화국이어야 하며 왕조가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그의 사상을 기술하고 있다.

호메이니는 이슬람 공화국의 지도자는 성직자 집단에 의해 선택된 파키(이슬람 법학자)여야만 한다고 믿었다. 이 파키는 절대권력을 가져야만 하며, 같은 성직자 집단에 의해서만 권력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다. 대중은 파키를 선출하지 못하지만,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헌법에 따라 이란 국민들은 매 8년마다 이란 파키 회의라고 불리는 일단의 성직자들을 선출하며, 이들이 파키를 선출한다. 이란의 지도자는 일반적으로 "최고 지도자"라고 불린다.

이 책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궁극적인 정치적 구조에 대한 통찰력을 제시하였다. 호메이니는 샤의 전제왕조를 성직자들이 지배하는 종교 체제로 대체했다.

이란으로의 귀환[편집]

1979년 1월 16일 샤가 혁명으로 퇴위하자, 2주 후인 1979년 2월 1일 15년의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이란으로 돌아왔다.

서방 매체들은 6백만 혁명세력이 그를 환영한 것으로 추산한다. 2월 11일 호메이니는 메흐디 바자르간을 총리로 한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1979년 3월 30일3월 31일, 임시 정부는 16세 이상의 모든 이란 국민에게 새 정부형태로서 이슬람 공화국의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98% 이상이 왕정을 이슬람 공화국으로 교체하는 데 찬성하였다. 새로 작성된 헌법 초안을 승인하기 위한 선거들이 뒤이어 치러졌다.

헌법은 최고지도자와 함께, 매 4년마다 선출되는 대통령을 규정하고 있으나, 수호 위원회에 의해 간접적으로 승인된 후보들만 취임할 수 있다. 호메이니 자신은 "혁명 지도자"로서 종신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1980년 2월 4일 아볼하산 바니사드르가 이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인질 사건[편집]

1979년 11월 4일, 호메이니의 열렬한 추종자들로 구성된 일단의 학생들이 테헤란미국 대사관을 급습하여 63명의 미국인을 인질로 잡았다. 추가로 세명의 인질이 이란 외무부에서 잡혔다.

63명의 인질 중 13명이 2주 안에, 그리고 1980년 7월에 한 명이 추가로 석방되었다. 나머지 남자 50명과 여자 2명은 444일간 억류되어 있었는데, 이를 가리켜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라고 부른다.

미국 대사관 점거자들은 그들의 행동을 통치기간중의 부정부패 행위 재판을 위해 를 넘기라는 요구를 미국이 거절한 데 대한 대응이라고 정당화했다. 호메이니 지지자들은 대사관을 스파이 소굴이라고 이름붙이고, 대사관에서 찾아낸 50권 분량의 비밀문서를 공개출판하였다.

1980년 2월 23일, 호메이니는 이란의 마즐리스가 미대사관 인질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는 한편, 재판을 위해 샤를 이란측에 넘기라고 미국에게 재차 요구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인질구출을 위한 특수작전을 강행했지만, 이 시도는 현지 상황에 대한 정보부족과 어설픈 사전준비, 급조된 지휘체계 등으로 실행전부터 삐걱거리다가 타바스(tabas)사막의 혹독한 기상상황에 헬리콥터가 추락하면서 잔해만 남긴체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이 사건의 충격으로 미군은 특수전 부대에 대대적인 구조개편을 실시하였다.)

이란인들은 이것을 거의 기적으로 받아들였다. 많은 논평자들이 이 실패를 지미 카터가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하게 된 주요 원인으로 지적했다. 10월의 충격 참조

이란-이라크 전쟁[편집]

노년의 루홀라 호메이니

1979년 당시 이란이슬람 혁명이 일어났을 때 이라크에서는 사담 후세인 바트당 정권이 집권 중이었다. 이슬람혁명으로 이란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미국과 서방세계는 후세인 정권을 지원하여, 이란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미국과 서방세계의 지원하에 이란과 이라크 사이에 국경분쟁이 1980년 9월에 이르러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사담 후세인은 영토를 넓히려는 욕심 때문에 우리를 침공하였으며 특히 유전이 많은 쿠제스탄을 점령하려 하였다."라고 지금도 이란은 이렇게 주장한다.

더군다나 이란미국과의 국교를 공식적으로 단절한 바가 있어서 미국은 오히려 이라크를 지원한다. 하지만 이란의 군사력도 만만치 않았다.

이때 호메이니의 인기와 권력은 더 이상 필적(匹敵)을 할 수 없게 되었고 더군다나 호메이니 역시 나이가 늙었다. 사실상 이란의 패배로 돌아갔다.

호메이니 치하의 삶[편집]

이슬람교 율법 강화를 주장한 호메이니는 남녀 관계 없이 이슬람교 율법을 준수하라고 명령했다. 이로 인해 언론과 출판의 자유는 크게 제한되었고, 왕당파와 일부 세력들은 호메이니로 인해 다른 나라로 떠나 버리고 말았다.

이 법률을 샤리아라고 부르는데 이로 인한 모순은 더욱 심각해졌다. 더군다나 해외의 회사들도 진출이 제한되기까지 하였고 호메이니식 통치는 결국 개인 숭배가 되고 말았다. 더구나 1991년에 독립한 투르크메니스탄대통령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마저 개인 숭배를 지지하게 된다.

종교적인 규칙에 반대하는 자는 이맘이든 아니든 상관 없이 무조건 가혹한 징벌에 처해졌고, 이로 인해 전 세계의 인권 단체들은 호메이니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호메이니 역시 비난자들에 대해 강력한 고문사형마저 실시할 정도였다.

저작[편집]

주석[편집]

  1. 이슬람교에는 성직자가 없으며 대신 이맘이라는 설교자가 있다.

참고 자료[편집]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