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럴드 맥밀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해럴드 맥밀런
Maurice Harold Macmillan
해럴드 맥밀런(1957년)
해럴드 맥밀런(1957년)
영국 영국제46대 총리
임기 1957년 1월 10일~1963년 10월 18일
전임: 앤서니 이든(제45대)
후임: 앨릭 더글러스흄(제47대)

출생일 1894년 2월 10일(1894-02-10)
출생지 잉글랜드 런던 첼시
사망일 1986년 12월 29일 (92세)
사망지 잉글랜드 이스트서식스 주 윌든
정당 보수당
학력 옥스퍼드 대학교 베일리얼 칼리지
종교 성공회
배우자 도로시 맥밀런

해럴드 맥밀런 백작(Harold Macmillan, 1st Earl of Stockton, OM, 1894년 2월 10일~1986년 12월 29일)은 영국정치가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 보수당 내각의 국방장관·외무장관·재정장관을 역임하였고, 1957년부터 1963년까지 총리를 지냈다.

인물과 경력[편집]

초기 이력[편집]

해럴드 맥밀런은 1894년에 대대로 출판사를 경영한 가문에서 태어났고, 이튼 칼리지옥스퍼드 대학교 베일리얼 칼리지를 졸업하였다.

맥밀런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육군 대위로서 참전하였는데, 솜 전투에서 근거리에서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이 상처는 평생 그의 몸에 남았고, 이 때문에 그에겐 몸을 조금 비스듬히 하고 걷는 버릇이 있었다. 가끔 고통을 호소하기도 했다.[1]

1924년 보수당 소속으로 하원의원이 되어 정계에 진입하였다. 제2차 처칠 내각에서 주택장관으로 입각해 좋은 평을 받았고, 1954년에는 국방장관에 취임하였다.

이든 내각에서 맥밀런은 외무장관에 임명되었지만, 수개월 만에 물러나고 재정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일로 인해 차기 총리로서의 자질은 낮다고 평가받게 되었지만, 수에즈 위기의 주무부처인 외무부의 장관으로서 졌어야 할지도 몰랐던 정치적 책임은 면할 수 있었다.

총리 시절[편집]

1957년, 수에즈 위기 당시에 영국군을 출병시킨 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아 앤서니 이든 총리가 사임하였다. 후임 총리를 놓고 맥밀런과 외무장관 버틀러(Rab Butler)가 경쟁했는데, 버틀러는 원로 의원들의 평판이 나빴던 것과 수에즈 위기 책임론이 함께 작용해 경쟁에서 밀려 맥밀런이 총리에 올랐다.

맥밀런은 총리에 오른 뒤 외교면에서 영국의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맹을 꾀하였다. 그러나 샤를 드 골이 이를 거부하여 실현되지 않았고, 결국 1960년유럽 자유 무역 연합(EFTA) 을 발족시켰다. 수에즈 위기로 차가워진 미국과의 관계 수복에도 힘을 쏟았고, 이에서는 성과를 얻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맥밀런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북서아프리카지역 변리공사(Minister Resident in Northwest Africa)를 지낸 적이 있어, 유럽 전선의 최고 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와는 친한 관계였다고 한다.[2] 또한 연령차가 많이 나는 존 F. 케네디 대통령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960년 아프리카를 방문했을 때에는 아프리카의 영국령 식민지의 독립을 재촉하는 것과 동시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아파르트헤이트를 비판하였다.

내정면에선 시장 경제계획 경제를 혼합한 혼합 경제를 지향해 영국 국내의 경제위기를 극복하려고 하였으며, 1959년 총선거에서 보수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1963년 프러퓨모 사건의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였고, 맥밀런 출판사(Macmillan Publishers) 사장이 되었다.

1986년 12월 29일, 이스트서식스 주 윌든(Wealden) 구 첼우드 게이트(Chelwood Gate) 마을 근교의 별장에서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서훈[편집]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구로이와 도오루 《영국 현대 정치의 궤적》 1998년 54~55쪽
  2. 구로이와 도오루 《영국 현대 정치의 궤적》 1998년 57쪽

바깥 고리[편집]

전 대
앤서니 이든
영국의 총리
1957년 - 1963년
후 대
앨릭 더글러스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