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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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솜 전투 포격전의 여파로 파괴된 지상. 힌덴부르크 선을 넘는 마크 V 전차.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기뢰에 맞아 침몰한 HMS 일레시스티블. 솜 전투 도중 방독면을 착용한 영국군 비커스 기관총 병사. 자그스타펠 11의 전투기인 알바트로스 D.III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솜 전투 포격전의 여파로 파괴된 지상. 힌덴부르크 선을 넘는 마크 V 전차.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기뢰에 맞아 침몰한 HMS 일레시스티블. 솜 전투 도중 방독면을 착용한 영국군 비커스 기관총 병사. 자그스타펠 11의 전투기인 알바트로스 D.III
날짜 1914년 7월 28일 ~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휴전
장소 유럽, 아프리카, 중동, 태평양 제도, 중국, 남아메리카, 북아메리카 해안
결과 연합국의 승리
교전국
연합국 (협상국)

프랑스 프랑스 제3공화국
대영 제국 대영 제국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1914~1917)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1915~1918)
미국 미국 (1917~1918)[주해 9]
일본 제국 일본 제국
세르비아 왕국 세르비아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
루마니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1916~1918)
벨기에 벨기에
그리스 왕국 그리스 왕국 (1917~1918)
포르투갈 (1916~1918)
...기타 연합국

동맹국

독일 제국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불가리아 왕국(1915~1918)


공동 교전국
다르푸르 술탄국 (1914~1916)
데르비시 국
자발 샴마르 토후국
...기타 동맹국

지휘관
연합국 지휘관

프랑스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레몽 푸앵카레
프랑스 페르디낭 포슈
대영 제국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대영 제국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대영 제국 더글러스 헤이그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2세
러시아 제국 니콜라우스 니콜레비치
러시아 제국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이탈리아 왕국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이탈리아 왕국 비토리오 오를란도
이탈리아 왕국 루이지 카도르나
미국 우드로 윌슨
미국 존 조지프 퍼싱
루마니아 왕국 페르디난드 1세
루마니아 왕국 콘스탄틴 프레잔
일본 제국 다이쇼 천황
세르비아 왕국 페타르 1세
세르비아 왕국 라도미르 푸트니크
...기타 지휘관

동맹국 지휘관

독일 제국 빌헬름 2세
독일 제국 파울 폰 힌덴부르크
독일 제국 에리히 루덴도르프
독일 제국 에리히 폰 팔켄하인
독일 제국 헬무트 폰 몰트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란츠 요제프 1세 (1914~1916)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카를 1세 (1916~1918)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란츠 폰 회첸도르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아르츠 폰 스트라우센부르크
오스만 제국 엔베르 파샤
오스만 제국 리만 폰 샨데르
오스만 제국 탈라트 파샤
오스만 제국 아흐메드 제말
오스만 제국 무스타파 케말
불가리아 페르디난드 1세
불가리아 니콜라 제코프
...기타 동맹국 지휘관

병력
[1]

러시아 제국 12,000,000명
대영 제국 8,841,541명[2][3]
프랑스 8,660,000명[4]
이탈리아 왕국 5,615,140명
미국 4,743,826명
루마니아 왕국 1,234,000명
일본 제국 800,000명
세르비아 왕국 707,343명
벨기에 380,000명
그리스 왕국 250,000명
총 합: 42,959,850명

[1]

독일 제국 13,250,000명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7,800,000명
오스만 제국 2,998,321명
불가리아 1,200,000명
총 합: 25,248,321명

피해 규모
병사 사망자:
5,525,000명
병사 부상자:
12,831,500명
병사 실종자:
4,121,000명
총 합:
22,477,500명
...기타 자세한 목록
병사 사망자:
4,386,000명
병사 부상자:
8,388,000명
병사 실종자:
3,629,000명
총 합:
16,403,000명
...기타 자세한 목록

제1차 세계 대전 (World War I, WWI 또는 WW1)은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일어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 대전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기 전 까지는 단순히 세계 대전(World War) 또는 대전(Great war)라고 불렸다.[5][6][7] 미국에서는 처음에 유럽 전쟁(European War)라고 불렸다.[8]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전투원 900만명 이상이 사망했다. 기술 및 산업의 고도화와 전술적 교착 상태로 인해 사상자 비율이 악화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사망자가 가장 많았던 전쟁 중 하나이며, 참전국의 수많은 혁명들 등을 포함한 주요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9]

이 전쟁은 전 세계의 경제를 두 개의 대치되는 거대한 동맹들의 강대국으로 끌어당겼다.[10] 하나는 대영제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삼국 협상을 기반으로 한 연합국이며, 다른 하나는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있는 동맹국이다.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함께 삼국 동맹에 가입되어 있었지만 동맹국에 참여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가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침공했다.[11] 이러한 동맹은 재조직되었고 더 많은 국가가 전쟁에 참여하도록 압력을 가하며 확장되었다.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미국이 연합국에 가입했으며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이 동맹국에 가담했다. 궁극적으로 6천만명의 유럽인을 포함한 7천만명의 군인이 전쟁에 가담하면서 역사적으로 가장 큰 전쟁 중 하나에 동원되었다.[12][13]

이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신제국주의때문이었지만, 즉각적인 원인으로는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왕위 후계작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유고슬라비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한 사건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게 최후 통첩을 내리면서 7월 위기가 시작되었고,[14][15] 이전에 수십년에 걸쳐 형성된 국제적 동맹이 연결되었다. 수주 이내에 강대국끼리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이 분쟁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침공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16][17] 러시아가 동원령을 내리면서 독일군은 중립국인 룩셈부르크벨기에를 침공하면서 프랑스로 진격했고, 이로 인해 영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했다. 파리 앞에서 독일군의 진격이 멈춘 이후, 서부 전선은 1917년까지 참호전과 같은 소모전 양상으로 굳어지게 된다. 한편, 동부 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로 진격하는데는 성공했지만 동프로이센 침공은 독일군의 반격으로 실패하게 된다. 1914년 11월에는 오스만 제국이 참전하면서 전역이 코카서스, 메소포타미아, 시나이 반도 등으로 확대되게 된다. 이탈리아와 불가리아는 1915년 참전했고, 루마니아 왕국은 1916년 참전했으며, 미국은 1917년 참전했다.

러시아 정부가 1917년 3월 붕괴된 이후 동부 전선이 해소되었으며 이후 10월 혁명으로 인해 동맹국이 러시아의 영토를 획득했다. 1918년 11월 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휴전에 합의했다. 1918년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의 공세 이후, 연합군은 일련의 공세를 방어한 이후 독일군의 참호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독일 11월 혁명 이후, 독일이 1918년 11월 11일 휴전에 합의하면서 연합국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 등 4개 주요 제국이 해체되게 되었다. 앞의 2개 제국은 승계국가가 탄생했지만 많은 영토를 잃었으며, 후자의 2개 제국은 완전히 해체하게 되었다. 유럽 및 서남아시아의 지도는 새로운 독립 국가가 생기면서 새롭게 그려지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끔찍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국제 연맹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목표는 유럽의 민족주의의 부활과 독일에서 파시즘의 장악으로 인해 상황이 악화되며 실패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하게 되었다.

명칭[편집]

1914년 10월 캐나다의 잡지 맥클린스에서는 "어떤 전쟁은 스스로 이름을 붙인다. 그것이 대전(Great War)이다"라고 말했다.[18] 1914년 말 뉴욕에서 발행한 전쟁의 기원 및 초기 역사에 관한 책의 제목은 "세계 대전"(World War)라는 이름으로 붙여졌다.[19] 전간기 기간 동안, 영미권에서는 이 전쟁을 세계 대전(World war) 또는 대전(Great war)라고 불렀다.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용어는 1914년 9월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헤켈이 "'유럽 전쟁'의 두려움에 관한 과정이나 성격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단어의 전체적 의미에서 이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시작되었다.[20]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말은 장교이자 저널리스트인 찰스 아 코르트 레핑턴(Charles à Court Repington)이 지은 1920년대 역사책의 제목이기도 했다.[21]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말이 보편화되었으며 캐나다와 영국에서는 First World War이라는 용어를, 미국에서는 World War I이라는 용어로 사용한다.

배경[편집]

정치 및 군사적 동맹[편집]

19세기, 유럽의 강대국들은 유럽 전역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며, 그 결과 1900년에는 복잡한 정치, 군사적 동맹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었다.[11] 이들은 1815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간의 신성 동맹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1873년 10월에는 독일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사이 삼제 동맹(Dreikaiserbund)을 체결했다. 이 동맹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 간에 발칸반도에 대한 정책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1879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삼제 동맹에 탈퇴하여 2국 동맹을 따로 만들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발칸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약화되면서 발칸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반대로 증가하게 되었다.[11] 이 2국 동맹은 1882년 이탈리아 왕국이 가입하면서 삼국 동맹으로 변화했다.[22]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군사 동맹 지도. 협상국은 초록색으로 나타냈으며, 동맹국은 갈색으로 나타냈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 러시아 두 나라간의 두개 전선 전쟁을 피하기 위해 독일과 러시아간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독일의 황제 지위에 오르면서 비스마르크는 퇴위를 강요당했고 그의 동맹 시스템은 점차 해체되었다. 예를 들어, 빌헬름 2세는 1890년 러시아와의 재보험 조약 갱신을 거부했다. 2년 후, 3제 동맹을 막기 위하여 프랑스-러시아 동맹이 체결되었다. 1904년,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영국-프랑스 협정(Entente Cordiale)을 맺었으며 1907년에는 영국이 영국-러시아 우호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공식적으로 영국-프랑스-러시아 동맹으로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프랑스나 러시아가 분쟁을 겪을 경우 영국이 참가하게 된다는 항목이 있었으며, 이러한 양자 연동 협정을 삼국 협상으로 알려졌다.[11]

군비 경쟁[편집]

1871년 보불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하여 독일이 통일한 이후, 산업 및 경제력이 급상승하게 되었다. 1890년대 중반부터 빌헬름 2세는 중요한 경제 자원을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가 지휘하는 독일 제국해군에 투자하여 영국 해군과 해군 군비 경쟁을 하게 되었다.[23] 그 결과, 각 국가들은 주력함을 더욱 많이 건조하기 위해 노력했다. 1906년 HMS 드레드노트의 건조 이후 대영제국은 독일 제국과의 경쟁에서 주요한 위치를 선점하게 되었다.[23] 영국과 독일 사이의 군비 경쟁은 모든 유럽 주요국이 유럽 전역의 분쟁에 필요한 장비와 무기를 생산하는 데 산업 기반을 기울이면서 유럽 전역으로 경쟁이 확장되었다.[24] 1908년부터 1913년까지 유럽 국가의 군비 지출은 50% 상승했다.[25]

1908년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병합을 선포하는 포스터를 읽는 사라예보 시민.

발칸 반도의 분쟁[편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과거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1878년 이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한 이후 1908년부터 1909년까지 보스니아 위기가 찾아오게 되었다. 이는 세르비아 왕국 및 그 국가의 후원자인 범슬라브주의 동방 정교회러시아 제국을 화나게 했다.[26] 이 지역에서 러시아의 행보는 이미 "유럽의 화약고"로 널리 알려진 발칸반도의 균형을 붕괴시켜 평화 협정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26] 1912년부터 1913년까지 발칸 동맹과 오스만 제국 사이의 전쟁인 제1차 발칸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 결과 체결된 런던 조약에서 알바니아는 독립했으며, 불가리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그리스는 영토를 확대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감소했다. 1913년 6월 16일, 불가리아가 세르비아 및 그리스를 침공하면서 발발한 33일간의 제2차 발칸 전쟁에서는 불가리아가 패배하여 세르비아와 그리스에게 마케도니아 대부분을, 루마니아에게 남 도르부자를 빼앗기게 되었으며 발칸반도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27]

서막[편집]

이 사진은 일반적으로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체포의 사진이라고 간주하고 있지만, 일부[28][29]에서는 방관자였던 페르디난드 베흐를 찍은 사진이라고 주장한다.

사라예보 사건[편집]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세르비아의 검은 손이 지원하는 청년 보스니아 민족주의 단체의 암살단 6명 쳬베코 포포비치(Cvjetko Popović),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 무함마드 메메드바시치(Muhamed Mehmedbašić), 네델코 카브리노비치(Nedeljko Čabrinović), 트리프코 그라베츠(Trifko Grabež), 바소 쿠브릴로비치(Vaso Čubrilović)는 대공의 차량 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 서 있었다. 카브리노비치가 차에 수류탄을 던졌지만 차를 놓쳤다. 근처의 군중 몇몇이 부상을 입었고,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차는 계속 움직일 수 있었다. 다른 암살단은 차가 빠르게 지나쳐 암살할 수 없었다. 약 한시간 후,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 병원을 방문하고 돌아올 때 길을 잘못 들려 우연히 프린치프가 서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프린치프는 권총을 발사해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아내 호엔베르크 여공작 조피가 사망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내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무관심한 듯 가벼운 반응을 보였다. 역사학자 즈비네크 제만(Zbyněk Zeman)은 나중에 "이 사건은 거의 어떠한 인상도 주지 못했다. 일요일과 월요일(6월 28일~29일)에 빈의 군중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음악을 듣고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라고 전했다.[30][31]

1914년 6월 29일 사라예보 반세르비아 폭동의 여파로 거리에 모여든 군중.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폭력 사태의 확대[편집]

그러나, 사라예보 내에서는 오스트리아 정부가[32][33] 세르비아 주민들에 대한 폭력을 하도록 부추겼고, 그 결과 사라예보의 크로아티아인보스니아인이 세르비아인 두명을 죽이고 세르비아인 소유의 건물을 불태우는 사라예보 반세르비아 폭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포그롬의 특성을 갖추었다. 작가 이보 안드리치는 "사라예보에서 증오의 열풍이 불었다"라면서 이런 폭력 사건에 대해 말했다.[34] 세르비아 민족에 대한 폭력 행위는 사라예보에서 뿐 아니라 현대의 크로아티아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영토에 위치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도시에서 일어났다.[35]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유명한 세르비아인 5,500명을 수감하고 송환했으며, 그 중 700명에서 2,200명이 감옥에서 사망했다고 통계내렸다. 세르비아인 460명은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36][37][38] 이슬람교가 지배적이었던 지역에서는 슈츠크롭스(Schutzkorps)라는 민병대 집단이 형성되어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핍박을 시작했다.[39]

7월 위기[편집]

사라예보 암살 사건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프랑스 제국, 대영제국 간 1달 간의 외교 기동으로 이끌어졌다. 세르비아의 관리(특히 검은 손 조직의 임원들)이 이 사건과 관련되었다고 판단하고 보스니아 내에서 세르비아의 영향으 줄이기 위해[40]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게 의도적으로 전쟁을 자극할 10가지 요구 사항으로 구성된 7월 최후통첩을 보냈다.[41] 세르비아는 10가지 요구사항 중 8가지만 수락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14년 7월 28일 전쟁을 선포했다. 군사역사가인 헤우 스트라첸은 "세르비아의 초기 모호한 응답에 관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행동에 차이를 주었을 것인지 아닌지는 의심해야 한다.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은 그리 인기있는 성격은 아니였으며 제국은 그의 죽음에 그렇게 애도를 표지는 않았다"라고 말했다.[4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발칸 반도의 영향력을 넓히는 것을 내키지 않고 세르비아 왕국의 오랜 지원국이었던 러시아 제국은 7월 29일 부분 동원령을 명령했다.[22] 7월 30일 러시아 제국이 총동원령을 내리자, 같은 날 독일 제국은 동원령을 발동했다.[43] 독일은 베를린의 대사를 통해 러시아에게 12시간 내에 동원령을 해제하지 않으면 전쟁 상황이 올 것이라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43] 러시아는 동원령을 해제하는 것에 협상하자는 응답을 보냈다. 그러나, 독일 제국은 협상을 거부하고 1914년 8월 1일 러시아에게 선전포고했다.[43]

독일의 전쟁계획인 슐리펜 계획은 러시아가 동부에서 진군하기 전에 프랑스의 빠르고 대규모의 침공을 통해 서부를 미리 제압한다는 전략이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동원령 선포와 동시에 독일 제국은 프랑스에게 중립을 유지하라는 요구를 보냈다. 프랑스 내각은 즉시 군사 동원령을 내리라는 군의 압박에 저항하여 사건을 막기 위해 프랑스 국경에서 10km 밖으로 군대를 철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독일 제국은 8월 2일 룩셈부르크를 침공했으며, 8월 3일에는 프랑스가 독일 제국에게 선전포고했다.[43] 8월 4일, 벨기에가 자국의 영토를 통해 프랑스를 침공하려는 것에 대해 거부하자 독일 제국은 벨기에게도 선전포고했다.[43][44][45] 영국은 벨기에의 중립 상태를 유지하라는 최후통첩을 독일 제국이 무시하자, 1914년 8월 4일 독일 제국에게 선전포고했다.[46]

전쟁의 진행 과정[편집]

개전[편집]

동맹국 사이의 혼란[편집]

동맹국의 전략은 잘못된 의사 소통으로 혼란을 빚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르비아 침공에 도움을 주기로 약속했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해석에 따라 달랐다. 이전의 군사 전개 훈련 계획은 1914년 초 개정되었지만, 개정 이후의 훈련 계획은 진행된 적이 없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휘관들은 독일이 러시아와 전투하면서 북부 전선을 지원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47] 그러나, 독일은 프랑스를 침공하는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러시아군의 대부분을 막을 것이라 구상하고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혼란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이 세르비아 전선과 러시아 전선으로 병력이 나누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1914년 9월 9일 셉템베르프로그라암(Septemberprogramm)에서는 독일의 수상 테오발드 폰 베트만홀웨그(Theobald von Bethmann-Hollweg)가 독일의 전쟁 목적 및 승리할 경우 연합국에게 요구할 사항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계획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문서는 공식적으로 채택하지 않았다.

세르비아 전역[편집]

1915년, "올르흐"에서 세르비아군의 브레리오트 XI.

오스트리아가 침공하면서 8월 1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과 세르비아군 간에 체르 전투콜루바라 전투가 발발했다. 이후 2주일 동안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은 대량의 인명 손실로 그치면서 전쟁 기간 동안 첫 번째 연합군의 주요 승리로 기록되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신속한 승리에 대한 희망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전선에 대한 방어를 약화시키고 대신 세르비아 전선에 상당한 병력을 유지시켰다.[48]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르비아 침공 실패는 지난 세기 동안 우월한 적을 상대로 승리한 전쟁 중 하나로 꼽힌다.[49]

이 전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어린 군인이 참전한 전역이다. 츠부스니카에 태어난 몸칠로 가브리치는 1914년 8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게 그의 부모, 할머니, 형제 7명이 죽임을 당하고 난 이후 8살에 세르비아 육군 제6 포병 사단에 입대했다.[50][51][52] 10살때 그는 상병으로 승진했으며,[51][52] 11살에는 하사 대리 병장이 되었다.[52]

서부 전선[편집]

칼을 찬 채로 돌격하는 프랑스 보병

자세한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의 표를 참고하세요.

동부 전선[편집]

자세한 전투에 대해서는 아래의 표를 참고하세요.

동부 전선은 서부전선의 반대였다

오스만 제국의 참전[편집]

전쟁 초부터 오스만 제국에서는 누구의 편에 참전을 해야 할지에 대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삼두 정치에서 국방부 장관인 엔베르 파샤와 내무부 장관인 탈랏 파샤는 친독주의자였지만, 무스타파 케말 파샤는 중립을 유지하고자 했다. 1914년 8월 2일 오스만 제국군은 사실상 독일군 사절단의 지휘하에 놓이게 되는 독-터 연합 협정이 체결되고, 군동원령이 선포된다. 그러나 이때 오스만 제국 정부가 중립을 선포한다.

8월 10일 지중해에서 영국 함대의 추격을 피해 온 독일 군함 <헤벤(Heben)>과 <브레슬라우(Breslau)>가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들어온다. 이 함선들의 출현으로 오스만 제국군 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 해군마저 독일의 지휘아래 놓이게 된다. 9월 9일 오스만 제국 정부는 모든 국가들에게 외국인 거류 협정(외국 시민들의 치외 법권)을 폐지하기로 결정했음을 알렸다. 이것은 모든 국가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 수상을 포함한 대다수의 오스만 제국 정부 구성원들은 전쟁에 반대 입장을 밝힌다. 이때 엔베르 파샤는 독일의 지시와 함께 남은 정부 구성원들의 동의 없이 전쟁을 시작한다. 오스만 제국은 모든 연합국들에게 지하드(성전)을 선포한다.

1914년 10월 29일과 10월 30일 오스만 제국 해군은 독일의 수숀 제독의 지휘 아래 세바스토폴, 오데사, 페오도시야노보로시스크를 포격한다. 1914년 11월 2일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11월 5일과 11월 6일 영국과 프랑스가 그 뒤를 이어 전쟁을 선포한다. 오스만 제국의 참전은 러시아와 연합국 사이의 흑해와 지중해로 통하는 해상 연결망을 끊었다.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간의 카프카스 전선이 생겨난다. 1914년 12월부터 1915년 1월의 사리카미스 전투에서 러시아의 카프카즈 군대가 오스만 제국의 카르스로의 진입을 저지시키고 난 후, 오스만 제국군을 괴멸시키고 반격하게 된다.

이탈리아의 참전[편집]

전쟁 초부터 이탈리아는 중립국이었다. 1914년 8월 3일 이탈리아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독일황제 빌헬름 2세에게 이탈리아가 참전을 해야만 하는 것에 관한 삼국 동맹의 조건에 참전 명분이 적합하지 않음을 알린다. 이날 이탈리아 정부는 중립을 선포한다.

오랫동안 이탈리아와 연합국 사이의 교섭이 진행된다. 마침내 1915년 4월 26일 런던에서 이탈리아는 한달 간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한다는 협정을 체결한다. 《 피에 대한 대가 》로서 이탈리아는 영토를 약속 받게 된다. 영국은 이탈리아에게 5억 파운드의 돈을 빌려준다. 이때 독일은 오스트리아로부터 이탈리아가 중립을 유지한다면 이탈리아인들이 사는 영토를 이탈리아에게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게 된다. 독일 대사 뷜로프는 이 약속에 대해 이탈리아 중립 지지자들 대표인 지오리티에게 알리게 된다.

이탈리아 의회 대의원들의 508명 중 320명이 지오리티를 지지했다. 사란드라 수상은 사표를 제출한다. 그러나 이때 전쟁 지지자들이 사회주의자 베니토 무솔리니(나중에 참전)와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를 앞세워 의회와 중립 지지자들에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한다. 이탈리아 왕은 사란드라의 사표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지오리티는 로마로 떠나야만 했다. 5월 23일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한다.

미국의 참전[편집]

미국은 전쟁 중 영국과 독일 간에서 중립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계속적으로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공격에 대해서 방관하지 않겠다.”라는 의사를 표명했고, 독일은 이에 대해 이러한 공격을 중단할 것임을 몇 차례 약정했다.

그러나 1917년 1월 16일, 독일의 외무 장관이었던 아서 치머만이 멕시코 주재 독일 제국 대사 펠릭스 폰 에카르트에게 보냈던 암호 전문 치머만 전보에서 “멕시코가 미국을 공격할 경우, 멕시코가 1848년에 미국에 빼앗긴 모든 영토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라는 내용 때문에 미국은 참전 쪽으로 기울어졌다. 얼마 후 독일이 유보트를 이용해 영국 배를 공격하였는데 그안에 탔던 많은 미국인들이 죽었다. 따라서, 윌슨 대통령은 의회에 독일에 선전 포고할 것을 1917년 4월 6일에 제의했다.

이는 미국 영토에 대한 독일의 공격에 한한다는 내용으로 하원 결의안 373:50, 상원 82:6으로 승인되었다. 12월 6일에는 오스트리아에도 선전 포고를 하여, 그 범위가 이탈리아 전선까지 확대되었다.

종전[편집]

1917년,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이래, 연합국은 반격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동맹국의 군대가 차례대로 투항했다. 불가리아가, 그 다음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 순으로 항복했다. 오스트리아가 항복한 같은 날, 독일의 (Kiel) 군항에서는 해군 수병에 의한 폭동이 일어났다. 파급 효과는 엄청났는데, 곧바로 독일 각지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여 군경과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황제는 제위를 포기하고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독일은 군주제를 포기하고 공화정으로 전환하였으며, 1918년 11월 11일 연합국과 휴전을 맺었다. 이렇게 해서 약 9백만이 전사한 이 전쟁은 끝이 났다.

결과[편집]

동맹국이 연합국에게 전쟁에 지면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 오스만 제국은 세브르 조약, 오스트리아는 생제르맹 조약, 헝가리트리아농 조약, 불가리아는 뇌이 조약을 맺으면서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고, 많은 영토와 인구를 잃었다. 이로 인해 발칸 반도와 중동 지방에서 많은 독립국들이 생겨났다.

독일의 경우 해외 식민지를 모두 포기하였으나, 본토 손실은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넘겨주고 폴란드 지역을 독립시킨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장기간 전쟁수행으로 인하여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실직자가 속출하였다. 더욱이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과다한 배상금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원인이 되었다.

전쟁 이후의 세계[편집]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는 민주주의가 발전했다. 일본은 오세아니아의 군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말미암아 반성보다 지독한 가난과 배상금에 대한 것에 시달렸으며 오스만 튀르크도 세브르 조약을 맺음으로써 영토가 크게 줄어들었다(1922년 해체, 1923년 터키 공화국 수립).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도 각각 생제르맹 조약, 트리아농 조약을 맺음으로써 영토가 크게 줄어들었다. 불가리아는 뇌이 조약으로 도브루자를 루마니아에 떼어주었다.

이탈리아는 승전국이었으나 연합국에게 영토를 보장받기는커녕 냉대를 받았다. 결국 1922년베니토 무솔리니에 의한 파시스트 정권이 수립된다.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중국은 연합국임에도 불구하고 산둥 반도에 대한 이권을 돌려받지 못하였다. 우드로 윌슨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중앙유럽의 많은 국가는 독립하였으며, 독립을 조건으로 영국을 도왔던 인도는 그 약속이 무산되자 지속적인 투쟁 운동을 시작했다.

한편,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민족 자결주의를 제창하였으며, 전쟁의 방지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국제 연맹을 설립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로써 국제 연맹이 설립되었으나, 정작 미국은 의회의 반대로 가입에 실패하였다. 결국 다시 고립의 길을 걸었다.

연표[편집]

1차 대전의 결과와 의의, 그리고 그 영향[편집]

참호 건너기에 실패한 탱크
  1.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을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선언하여 국제 정치가 이념화, 도덕화하기 시작했다. 이상적 집단 안전 보장 정책인 국제 연맹을 통해 법률적, 도덕적 세계 여론에 부응하여 평화를 구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2. 이 때부터 총력전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특히 벨기에 왕국, 러시아 제국과 독일 제국은 식량 부족이 심각했다.
  3. 전쟁 기간동안 맥심 기관총(영국), 독가스(독일), 탱크(영국), 전투기(영국, 프랑스, 독일), 유보트(독일), 곡사포(오스트리아)등의 신무기가 생겨났다.
  4. 독일 국민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일방적 평화의 강요나 다름없는 베르사유 조약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 조약은 아돌프 히틀러 집권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으며, 바이마르 공화국이 외부로부터 강요된 체제라고 하여 민주 정부에 대한 애정과 의지를 갖지 못하게 하여 공화국의 생명력을 위태롭게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5. 이탈리아의 좌절감과 배신감은 파시즘의 발전과 베니토 무솔리니의 집권을 가능케 하였다.
  6. 미국은 초강대국의 지위에 올랐으나, 자신이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 연맹 참여를 거부하고 다시 고립주의에 빠짐으로써 강대국으로서 국제 역할에 괴리를 가져왔다. 결국 경제 공황이 생겨난다.
  7. 많은 새로운 국가들이 탄생하여 다른 국가도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민족자결주의민족주의가 상승하여 20세기 정치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인도, 조선등에서 독립 운동 활발}.
  8. 일본은 영·일 동맹을 근거로 연합군 측에 가담하여 1차 대전기간 동안 여러이득을 보았고, 경제 호황기를 누림으로써 대체로 만족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영일 동맹을 이유로 연합국측에 가담하여 참전했다. 그 진의는 동아시아 지역에 있어서의 일본의 지위를 더 높이고 국제적인 발언권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53][54] 1914년 8월 일본은 독일선전포고한 후, 일본 육군은 중국에 있던 독일의 조차지 산둥 반도자오저우 만(칭다오 포함)을, 일본 해군은 태평양의 독일령 남양군도를 점령하고,[55][56] 이 지역에서의 이권을 할양받는 것을 영국프랑스가 승인하는 조건으로 지중해에 소규모 함대만을 파견하는 등 독일과의 직접적인 전투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57] 산둥 반도를 점령하고 나서, 일본은 중국에 대해 만주와 산동반도 등에 대한 일본의 이권을 반영구화하고, 남만주내몽골 일부를 일본에 조차하는 것을 요지로 하는 등 21가지 특혜조건을 요구(1915년 1월)하였고, 중국은 이를 수용(5월)할 수 밖에 없었다. (→21개조 요구) 이와 같이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5·4 운동(1919년)과 같은 격렬한 배일(排日) 여론에 밀려 실패하였다.[58] 한편, 러시아 혁명(1917년)에 뒤이어 일어난 러시아 내전(1917~22년)에서 일본은 러시아 백군을 도와 7만 2천여명의 병력을 시베리아에 파견하였으나 패배하였다.[59][60](→일본의 역사)
  9. 중국은 1917년에 연합국으로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산둥 반도를 차지한 것에 불만을 품었고, 사인도 하지 않고 국제 회의장에서 철수한다. 이것은 5․4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10. 국제 정치는 이제 유럽에만 힘을 기울일 수 없게 되었다. 전 세계가 국제 정치의 무대가 되었으며, 국제 정치가 좁은 유럽에서 벗어나 전 세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1. 전 세계 국민의 감시 속에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전 세계 지도자들이 가지게 되었다. 특히, 도덕적으로 국제 평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12. 여성의 사회적 참여가 늘어났고, 민주주의가 발달하였으며, 사회구성원간의 평등에 대한 관심과 요구가 높아지게 되었다.
  13. 국제 정치에도 변화가 크게 나타나 독일, 러시아 등의 전제 국가들이 무너지거나 해체되었고, 유럽 국가들의 절반에 가까운 국가에서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 러시아의 전쟁 이후 결과[편집]

독일 제국 (독일 제국 → 바이마르 공화국)[편집]

  • 독일 - 소련(신생국) -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한 국가 : 폴란드(신생국)
  • 독일 제국 붕괴 → 바이마르 공화국(막대한 배상금 지불, 영토 분할(독일의 일부 영토 : 폴란드(신생국)와 리투아니아(신생국), 프랑스에 병합, 바이마르 공화국이 존재 하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또 다른 바이마르 공화국이 존재함, 독일의 식민지 였던 곳은 영⋅프⋅일⋅벨이 가짐(아프리카 : 르완다, 부룬디(벨기에 위임 통치령), 탄자니아(영국 위임통치령), 카메룬, 토고(영⋅프 연합국이 분할 점령 : 영⋅프 위임통치령), 산둥반도, 오세아니아 주에 있는 독일령 이었던 곳 포함(일본 위임통치령)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오스트리아 제1 공화국, 헝가리 왕국)[편집]

  • 폴란드(신생국), 이탈리아에 일부 영토 할양.
  • 크로아티아, 체코슬로바키아,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슬로베니아 독립.
  •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가 합친 후 또 다른 나라 건국 : 유고슬라비아 왕국 탄생.
  • 헝가리 : 루마니아에 일부 영토 할양.
  • 오스트리아 :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으로 탄생

러시아 제국(러시아 제국 → 소련)[편집]

  •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폴란드 독립
  • 루마니아에 일부 영토 할양
  • 핀란드 독립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 → 터키 공화국)[편집]

  • 그리스에 일부 영토 할양
  • 키프로스, 팔레스타인, 요르단, 이라크 (영국 위임 통치령)
  • 시리아, 레바논 (프랑스 위임 통치령)
  • 오스만 제국 일부 영토 네지드 술탄국헤자즈 왕국(現 사우디아라비아)에 할양
  • 세브르조약 체결, 오스만제국의 영토가 좁아짐

사상자[편집]

독일, 러시아, 프랑스 순으로 희생자를 많이 냈다. 반대로 일본은 희생자를 가장 적게 냈다.

  • 독일 : 170만 명 전사
  • 러시아 : 170만 명 전사, 665만 명 부상
  • 프랑스 : 140만 명 전사
  • 영국 : 90만 명 전사
  • 일본 : 300명 전사, 900명 부상, 3명 실종 (총 1,203명 희생)

기술[편집]

이 전쟁으로 인해 과학 기술이 발전했다. 그러나 독가스와 같은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무기들도 개발되어 나왔다. 최초의 독가스는 독일군이 사용하였으며, 연합군도 같은 무기로 대응했다. 독가스에 대한 유일한 대응책은 양측 모두 방독면 외에는 없었다. 독가스가 사용된 것은 마른 전투 이래 기관총, 철조망, 참호선으로 고착화된 전선을 뚫기 위해서였다. 탱크도 참호선을 뚫기 위해 개발되었으며, 대포도 점점 대구경화되었다. 장거리 사격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열차포(독일의 크루프 열차가 유명하다)도 등장하였다.

기술의 개선은 전방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생리대를 들 수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여성의 사회 진출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러한 여성을 위해 생리대가 개발되었다.

명언[편집]

만일 불타는 꿈속에서
그가 실려가는 마차 뒤를 따라 걸을 수 있다면
……
독가스 찬 폐 속에서 쿨렁쿨렁 쏟아져 나오는 피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
친구여 영광의 이야기를 졸라대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진심으로 거짓말을 하지는 못할 테지
그 오래된 거짓말 말일세
"조국을 위해 몸바치는 것은 고귀한 영예라고."

—윌프레드 오언, 《고귀한 영예》, 인류이야기 현대편 1 에서 재인용[61]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벌어진 전쟁의 참상은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독일의 화가 오토 딕스(독일어: Otto Dix, 1891년 ~ 1969년)는 참호전의 참상을 그린 〈전쟁〉(1929년 작)에서 참호 속에 흩어진 사지와 흙더미에 거꾸로 박힌 시체, 피범벅이 된 진흙탕을 묘사하였다. 하필이면 왜 저렇게 끔찍하게 묘사하였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딕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바로 저랬다. 나는 보았다."[62]

한편 영국의 시인 윌프레드 오언(영어: Wilfred Owen, 1893년-1918년)은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반전시 《고귀한 영예》를 발표하였다.

모병 포스터[편집]

미국[편집]

미국의 가장 유명한 모병 포스터 “샘 아저씨는 네가 육군에 지원하기를 원한다.” (1917년 작)

미국의 역대 신병 모집 포스터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미국을 상징하는 캐릭터인 엉클 샘이 그려진 포스터가 있다. 아래 글귀에는 “샘 아저씨는 네가 육군에 지원하기를 원한다.”라고 쓰여져 있다. 미국 해군에서도 육군 못지않게 모병 포스터를 많이 발행했다.

영국[편집]

영국의 모병 포스터 “누가 빠졌습니까? 당신입니까?”

영국도 미국 못지않게 신병모집 포스터를 만들었다. 영국은 독일보다 인구가 부족하여 미성년자들까지 징집한 적이 있었다(주로 공부할 의지가 없는 남학생들이 해당되었다). 실제로 유틀란트 해전(1916년 덴마크 근처의 유틀란트 만에서 영국 해군독일 해군 사이에서 벌어졌던 전투)에 참전한 어떤 수병의 나이는 만15세였다고 한다.

  • BE READY? JOIN NOW! : 준비가 되었습니까? 지금 참여하십시오!
  • TAKE UP THE SWORD OF JUSTICE : 정의의 칼을 잡으십시오.
  • WHO'S ABSENT? IS IT YOU? : 누가 빠졌습니까? 당신입니까?
  • THERE'S ROOM FOR YOU ENLIST TO-DAY : 당신이 오늘 지원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 WOMEN OF BRITAIN SAY - “GO!” : 영국의 여성들은 말합니다. “가세요!”
  • DADDY, WHAT DID YOU DO IN THE GREAT WAR? : 아버지, 아버지는 1차 대전 때 무엇을 하셨나요?

미디어[편집]

연합군이 독일의 방어선을 향해 폭격하는 모습
프랑스와 영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시대 전차
"The Makin's of the U.S.A."
해리 폰 틸저와 피어레스 4중주단이 연주. 1918년 3월 컬럼비아 레코드의 빈센트 브라이언이 녹음.
"We're All Going Calling on the Kaiser"
아서 필즈와 피어레스 4중주단이 연주. 1918년 5월 에디슨 레코드의 제임스 A. 브레넌이 녹음.

더 보기[편집]

주석[편집]

내용주
  1. 미국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조약 비준에 동의하지 않았다.
  2. 불가리아는 1915년 10월 14일에 동맹국에 합류했다.
  3. 미국은 1917년 12월 7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선전포고했다.
  4.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승계국가 중 하나로 고려되었다.
  5. 미국은 1917년 4월 6일 독일에게 선전포고했다.
  6. 헝가리 왕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승계국가 중 하나로 고려되었다.
  7. 오스만 제국은 1914년 8월 2일 독일과의 비밀 동맹을 채결했다. 1914년 10월 29일에 동맹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8. 세브르 조약이 연합국과 오스만 제국 간 전쟁을 끝낸 조약이었지만, 오스만 제국은 이 조약을 인정하지 않았다. 터키 독립 전쟁 이후 오스만 제국의 승계국가인 터키와 연합국 간 로잔 조약에 합의했다.
  9. 미국은 불가리아 왕국과 오스만 제국에게 선전포고하지 않았다.
출처주
  1. Tucker & Roberts (2005), p. 273
  2. British Army statistics of the Great War. 1914-1918.net. 13 December 2011에 확인.
  3. 대영 제국과 식민지를 합한 수치이다.
  4. 프랑스 본토와 식민지를 합한 수치이다.
  5. Hargrove, Julia (2010). 《Tomb of the Unknowns》. Lorenz Educational Press, 5쪽. ISBN 978-0-7877-8592-5. 18 July 2013에 확인.
  6. Karen Zeinert (2001). 《Those Extraordinary Women of World War 1》. Twenty-First Century Books, 14쪽. ISBN 978-0-7613-1913-9
  7. Eugene L. Rasor (2000). 《Winston S. Churchill: 1874–1965 ; a Comprehensive Historiography and Annotated Bibliography》. Greenwood Publishing Group, 64쪽. ISBN 978-0-313-305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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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Willmott (2003), pp.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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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European powers maintain focus despite killings in Sarajevo — History.com This Day in History — 6/30/1914. History.com. 26 December 2013에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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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Daniela Gioseffi (1993). 《On Prejudice: A Global Perspective》. Anchor Books, 246쪽. ISBN 978-0-385-46938-8. 2 September 2013에 확인. “... Andric describes the "Sarajevo frenzy of hate" that erupted among Muslims, Roman Catholics, and Orthodox believers following the assassination on June 28, 1914, of Archduke Franz Ferdinand in Sarajev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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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John R. Schindler (2007). 《Unholy Terror: Bosnia, Al-Qa'ida, and the Rise of Global Jihad》. Zenith Imprint, 29쪽. ISBN 978-1-61673-964-5
  38. Velikonja (2003), p. 141
  39. Herbert Kröll (28 February 2008). 《Austrian-Greek encounters over the centuries: history, diplomacy, politics, arts, economics》. Studienverlag, 55쪽. ISBN 978-3-7065-4526-6. 1 September 2013에 확인. “... arrested and interned some 5.500 prominent Serbs and sentenced to death some 460 persons, a new Schutzkorps, an auxiliary militia, widened the anti-Serb repression.”
  40. Stevenson (1996), p. 12
  41. Willmott (2003), p. 27
  42. Strachan (2003), p. 68
  43. Crowe, David (2001). 《The Essentials of European History: 1914 to 1935, World War I and Europe in Crisis》. Research & Education Assoc., 4–5쪽. ISBN 978-0-7386-7106-2
  44. Dell, Pamela (2013). 《A World War I Timeline (Smithsonian War Timelines Series)》. Capstone, 10–12쪽. ISBN 978-1-4765-4159-4
  45. Willmott (2003), p. 29
  46. Daily Mirror Headlines: The Declaration of War, Published 4 August 1914. BBC. 9 February 2010에 확인.
  47. Strachan (2003), pp. 292–296, 343–354
  48. Tucker & Roberts (2005), p. 172
  49. John R. Schindler (1 April 2002). Disaster on the Drina: The Austro-Hungarian Army in Serbia, 1914. Wih.sagepub.com. 2013년 3월 13일에 확인.
  50. Momčilo Gavrić - najmlađi vojnik Prvog svetskog rata ("Večernje novosti", 31 August 2013)
  51. (1980) 《Auntie Mabel's war: an account of her part in the hostilities of 1914–18》. Allen Lane, 112쪽
  52. (2004) 《Srpski biografski rečnik, vol II》. Budućnost, 601쪽
  53. (2004) 〈제1차 세계대전과 일본〉,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영·일 동맹(英日同盟)을 이유로 연합국측에 가담하여 참전했는데 그 진의는 극동지역에 있어서의 권익 확대와 국제적인 발언권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54.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246쪽. ISBN 89-86142-81-3 “일본은 일영동맹에 근거하여 연합군측에 가담하고 이해 8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1). ... 1) 참전의 목적은 가토 타카아키(加藤高明) 외상의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일영동맹의 약속과 독일의 근거지를 아시아로부터 일소하여 일본의 지위를 높힌다는 전략이었다.”
  55. (2004) 〈제1차 세계대전과 일본〉,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일본은 즉각 중국 산둥성(山東省)의 독일 이권을 차지하고 독일령 남양군도(南洋群島)를 점령했다.”
  56.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246쪽. ISBN 89-86142-81-3 “육군은 독일의 아시아 근거지인 중국의 산동반도의 교주만(膠州灣)을, 해군은 태평양의 독일령 남양군도를 점령하였다.”
  57.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246쪽. ISBN 89-86142-81-3 “그러나 영국이 요청한 일본군의 유럽파병은 이루이지지 않았고, 1917년에 대독일전에서 승리한 후에 일본이 점령한 독일령 남양군도와 산동반도에서의 독일의 이권을 일본으로의 이양을 영불 양국이 승인하는 조건으로 소함대를 지중해 방면에 파견했을 뿐이었다.”
  58.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246~247쪽. ISBN 89-86142-81-3 “더욱이 세계대전으로 유럽열강이 아시아에 눈을 돌릴 여력이 없는 것을 본 일본은 1915년 중국의 원세개(袁世凱) 정권에게 중국에서의 권익확대를 위한 21개조의 요구를 제출하였다. 중국측은 이를 쉽게 용인하지 않았지만 일본은 최후통첩을 보내 강력하게 요구하여 대부분을 승인시켰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격한 배일운동이 일어났으며3) 열강도 일본의 이러한 행동에 의심을 갖게 되었다. ... 3) 특히 파리강화회담이 열리던 1919년에 5․4운동이라 불리는 격렬한 배일운동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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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247쪽. ISBN 89-86142-81-3 “일본은 미국․영국과의 약속한 72,000명이 넘는 병력을 파견하여 전비 10억엔, 사망자 3,500명, 부상자 2만 명 이상의 대가를 치렀지만 혁명세력의 저항에 당초의 목적은 실현하지 못하였다.”
  61. 임영태, 인류이야기 현대편 1, 아이필드, 2007, 112쪽
  62. 진중권, 춤추는 죽음 2, 세종서적, 2005, ISBN 89-8407-138-8, 276쪽

참고 문헌[편집]

참고 문헌 목록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서지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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