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 전선 (제1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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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전선
(제1차 세계 대전의 일부)
1914년 당시의 동부 전선 지도
1914년 당시의 동부 전선 지도
날짜 1914년 ~ 1918년
장소 동유럽 지역과 러시아 일부 지역
결과 동맹국의 승리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
교전국
독일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불가리아
러시아 러시아
루마니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왕국 세르비아 왕국
Flag of Russian SFSR (1918-1937).svg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영국 영국 (1914-1918)
지휘관
독일 파울 폰 힌덴부르크
독일 에리히 루덴도르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불가리아 니콜라 제코프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러시아 니콜라이 대공
루마니아 콘스탄틴 프레잔

Flag of Russian SFSR (1918-1937).svg 레온 트로츠키



제1차 세계 대전의 동부 전선은 유럽 동부에서 일어나 동맹국의 승리로 끝났다.

동부 전선의 변천[편집]

독일군은 서부 전선에서는 결정적인 승리를 놓치고 말았지만 동부 전선에서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프랑스-러시아 조약에 따르면, 니콜라스 2세러시아군은 동원령을 내린 지 16일 이내에 독일군을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최초의 러시아군 부대가 국경을 넘어 동부 프로이센로 들어온 것은 동원 후 불과 8일 만인 8월 7일이었다.

러시아군은 두 갈래로 공격해 왔다. 파벨 칼로비치 레넨캄프 장군 휘하의 1개 군은 안게라프 강 동쪽으로 프로이센 국경을 넘었고, 알렉산드 바실리예비치 삼소노프 장군 휘하의 러시아군은 훨씬 남쪽에서 월경했다. 러시아군은 철저하게 요새화된 동(東) 프로이센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 남방에서 거대한 가위처럼 독일군을 협공할 계획이었다.

겁 많은 독일군 사령관 막스 폰 프리트비츠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더라면 러시아군의 이 대담한 계획은 성공을 거두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쾨니히스베르크로 후퇴하거나 비스튤라 강 이동의 모든 영토를 아예 포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몰트케와 프리트비츠의 유능한 작전 장교 막스 호프만 중령은 견해가 달랐다. 8월 20일 몰트케는 프리트비츠를 해임하고, 벨기에의 요새 공략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을 급파, 동부 전선의 참모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그의 사령관으로 예비역에서 현역으로 복귀한 명성 높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 장군이 임명되었다. 두 사람이 새로운 임지에 부임한 것은 8월 23일이었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보유한 병력 전부를 남쪽에 있는 삼소노프군(軍)의 공격에 집중적으로 투입한다는 호프만의 작전계획을 채택했다. 레넨캄프의 군대가 동북방에서 내려오기 전에 남쪽의 러시아군을 섬멸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남쪽에 있는 독일군이 재편성을 하고 있던 결정적인 3일간 레넨캄프의 군대는 꼼짝 않고 있었다. 나중에 에리히 루덴도프프 장군은 “우리한테 싸움을 걸기만 했더라면 우리는 지고 말았을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훈련이나 화력이나 전술 면에서 독일군의 상대가 되지 못한 삼소노프의 러시아 군대는 타넨베르크 근처에서 측면을 포위되어 참패했다. 10만 명 가까운 러시아군이 포로가 되고, 삼소노프는 자결했다.

1주일 뒤 서부 전선으로부터 막 도착한 증원 부대로 보강된 독일군은 레넨캄프를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마수리아 호 전투에서 수만 명을 더 포로로 잡았다. 이리하여 9월 중순쯤에는 동부 프로이센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은 사라졌다.

한편 남쪽에서 러시아군은 갖춘 장비가 그들 자신보다 별반 나을 게 없는 적수를 만났다. 즉,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대였던 것이다. 참모총장 콘라트 장군 휘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그 동맹국인 독일이 갖추고 있는 능률적인 철도망과 고도로 훈련된 포병이 없었다. 8월 하순 러시아 국경을 넘은 콘라트군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키예프바르샤바를 잇는 철도를 향하여 진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군의 예리한 반격에 밀려 남쪽 국경 밖으로 쫓겨난 그들은 갈리시아 깊숙이 들어왔다.

9월과 10월에 독일군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협동 작전은 펴 남부 폴란드와 갈리시아에서 광역에 걸친 반격을 시도했다. 그때는 러시아도 이미 동원을 마쳐 총병력 130만에 이르는 7개 군으로 두터운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격렬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그 방어선은 대체로 유지되었으나 자재 손실, 부족한 실탄의 소모, 그리고 전투 경험이 있는 장교들의 전사(戰死)로 입은 타격은 러시아군이 독일군보다 더 컸다.

그리고 발칸 반도의 전쟁도 계속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이끌고 세르비아 정복에 나선 포티오렉 장군은 장비가 빈약하고 규모가 작은 세르비아의 보잘것없는 군대쯤은 2주일 내에 지도상에 지울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라도미도르 푸트닉 장군 휘하의 세르비아 군대는 그리 쉽게 항복하려 들지 않았다. 포티오렉군은 두 번 세르비아에 쳐들어갔지만 두 번 다 세르비아군의 기습에 걸려 패퇴하고 말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세르비아를 응징하겠다고 나선 지 4개월 만인 12월 중순쯤에 푸트닉 장군 휘하의 세르비아군은 영토 내에서 적을 완전히 몰아냈다.

참고 서적[편집]

  • 내용은 리더스 다이제스트 사에서 발행한 《20세기 대사건들 - 제1차 세계 대전》 본문을 인용, 참고했다.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