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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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디어 랭의 사진 작품, 1936년 3월 캘리포니아 니포모에서 7살 된 딸을 데리고 배급권을 기다리는 32세 여성 모습.

대공황(大恐慌, 영어: Great Depression)은 1928년에 일부 국가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경제공황이 1929년 10월 24일, 뉴욕 주식시장 대폭락, 즉 검은 목요일 탓에 촉발되어 전 세계로 확대된 경제공황을 뜻한다.[1]

이 탓에 여러 기업 도산하고 대량 실업디플레이션이 야기됐었다. 개별 국가 경제가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고 자본 유동도 자유로웠으므로 공황은 전 세계에 걸친 규모로 단시간에 확대됐는데 시장을 통제할 규제는 당시 아직 발전되어 있지 못하여 피해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자본주의는 대공황 탓에 1920년대 황금기 종언을 고하였다.

개요[편집]

1929년 10월, 미국 뉴욕 주식시장 붕괴는 세계경제가 얼마나 허약한지 현로했다. 전 세계 상품가는 1926년 이래 계속 떨어진 탓에 오스트레일리아라틴아메리카와 같은 수출하는 여러 국가의 유럽산과 미국산 제품을 대상으로 한 구매력이 감소했다. 미국에서는 임금 감소와 소비 위축으로 구내 시장이 타격받았다. 국제 금융제일차세계대전 부담에서 전혀 회복되지 못한 일변 제1차 세계 대전은 특히 유럽 이외 지역에서 급격한 생산성 증가를 초래했으나 그것을 지탱할 수요 증대는 없었다. 그 절충안으로 고정 환율제자유 태환제(금 태환제도)가 도입되었으나 이 제도는 세계무역을 복구하기에는 안정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대공황에 뒤이은 유동성 쟁탈전 속에서 자금은 거꾸로 유럽에서 미국으로 흘러들어갔고 그렇지 않아도 깨지기 직전이던 유럽 경제는 박살이 났다. 국가 대부분에서 노동력 중 1/4이 실업 상태였다. 가격과 임금이 폭락하고 산업 생산은, 독일은 1929년 53% 수준까지 떨어졌고, 세계무역은 1929년의 35%로 침몰했다.

불황은 정치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쳐 극단 세력이 확산되고 자유민주주의 위신이 떨어지는 중대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1930년대에 전체주의로 기울지 않은 여러 나라는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까지 대량 실업과 불황에 시달렸다. 전쟁은 인력과 군수품 수요를 늘리고 기술 진보를 촉진시키는 효과를 초래해 새로운 경제 시대가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여러 국가가 어려워졌다

공황 발생 이전 경제 상황[편집]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1920년 대전 후 공황을 거쳐 빠르게 세계 중심 자유주의국으로 대두했고 전장이었던 서구 여러 나라보다 제국주의 국가로서 생산력과 자본력 격차를 보이면서 1922년에는 상승 국면으로 들어갔다. 그것을 밑받침한 것은, 주로 미국 전시 이득에 따른 과잉 자본을 서유럽과 중남미로 한 수출과 국내 성장 산업 내구(도소비율 1%)소비재(자동차·가전제품 등) 및 건축에 한 투자이고 저렴한 구입신용(소비자 신용)도 이에 유용했는데 그 1920년대에는 일관해서 5% 이상 실업률이 있는 구조스러운 실업도 분명히 있었으며, 농업·면방직·피혁·석탄·조선 등 불황 산업도 유지해서 성장과 정체가 병존하는 형태에서 호황인 일변 제1차 세계대전 뒤로는 세계 제일 농업국이 되었으나 유럽 농업 회복과 함께 세계상으로 생산 과잉이 표면화하였고 1920년대를 통하여 세계 농업은 만성 불황을 나타내였으며, 증권시장 투기꾼 탓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그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당시 월가에 사는 은행 재벌들이 돈을 벌자는 식 투기(헤지 펀드)로 인해 증권시장의 붕괴로 기업들의 신뢰 하락과, 기업들의 실적 악화로 인해 실업자가 생기고 그로 인해 소비심리 악화 소비 감소등의 악순환으로 대공황이 일어났고 나라들은 이로 인해 은행재벌들에게 돈을 빌릴 수밖에 없는 형국이 되어버린 꼴이 되었고, 이윽고 일어난 '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소비가 증가함에 따라 대공황도 끝이 났다.

채권국으로서의 미국의 과잉한 민간 달러 자금의 대외 유출은 주로 서유럽 특히 독일로 흘러 들었고, 독일의 부흥자본에 기여했는데, 그 취득된 달러 환어음이 독일의 배상지불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것을 취득한 영국·프랑스는 미국에게 전시 채무를 반환한다는 환류순환(還流循環)이 이루어짐으로써 1920년대의 호경기가 유지되었다.

또 하나는, 중남미·캐나다에 투하된 미국 민간 자본이 영국에 빨려 들어가, 미국에 대한 영국의 무역 적자 지불에 충당하게 되는 연쇄상황이 되었다. 이리하여 1920년대의 경기 상승과 재건금본위제(再建金本位制)가 만들어졌다. 그것들은 모든 면에서 1929년부터 시작된 대공황 및 1930년대의 만성불황의 기초 조건을 만들었다.

공황의 발생[편집]

1920년대의 미국의 이 경기 상승을 지탱한 과잉자본은 경기의 진행과 함께 유휴 과잉자본의 주식투자·토지투기(플로리다가 가장 성행했음)로 되었고, 1920년대 말에는 그 정점에 이르렀는데, 이미 과도신용과 과도투기가 누적되고, 자동차·건축, 기타 내구재에 과잉이 초래되고 있었다. 이리하여 먼저의 미증유의 주식시세 대폭락을 계기로 심각한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1930년 12월 11일 뉴욕의 유력한 은행인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은행이 파산해 50만 명이 예금을 찾을 수 없게 되었고, 1931년 한해 동안 2,300개의 은행이 문을 닫았으며, 1930년~1933년까지 매주 평균 6만 4000명의 실업자가 쏟아져 1933년에는 1,600만 명에 이르렀다.

특히 경기의 규정적 요인인 건축·철강·자동차의 감퇴는 뚜렷했고, 체화(滯貨)의 격증, 생산의 축소, 기업도산의 속출, 실업자의 증대, 그들 하강 요인의 누적적 상호파급으로 인하여 경제활동의 마비를 일으켰다.

건축 활동의 축소가 훨씬 냉엄한 사태로 전개된 까닭은, 그 내용기간(耐用期間)이 매우 길어졌기 때문인데, 1930년대 전반까지도 계속되더니, 드디어 그것이 이 대공황이 장기화하게 되는 커다란 요인을 만들게 되었다.

확산[편집]

금융 공황은 오스트리아 최대의 은행인 크레디탄슈탈트 은행을 1931년 5월에 파산으로 몰아넣었으며, 이 여파는 독일, 영국으로도 파급되다가, 1931년 9월에는 영국, 1933년 3월에는 미국이 금본위제도에서 이탈한다는, 자본주의의 근간을 흔들어놓는 본위 화폐 붕괴에까지 이르렀다. 이 포괄적인 대공황은 33년 여름에는 바닥을 드러내 보이면서 불황으로 옮겨가고야 말았다.

대공황 이후의 경제[편집]

결국 대공황은 1929년부터 1933년까지 장기 정체를 나타냈으며, 호황으로의 회복을 보이지 못하다가, 그 뒤의 만성적 불황에서 볼 수 있었듯이 그때까지 전례도 없었던 <자본주의의 자동회복력 상실을 나타내, 순조로운 성장력을 보여주는 사회주의와 대비되었다. 미국에서는 이의 극복을 위하여 국가에 의한 유효 수요의 창출, 완전 고용, 금본위제 정지(停止)에 대신할 관리통화제도를 주창한 “케인즈 정책”이 주창되었다.

미국은 이 케인즈 정책을 일부 도입한 뉴딜 정책을 취했으나, 세계의 대세는 영국의 스털링 특혜제도 성립을 기회로, 세계무역의 블록화[2]와 그것에 대항하는 파시즘화·국가독점자본주의화를 탄생시켰으며, 따라서 제2차 세계 대전을 준비하는 경향을 만들어냈다.

원인 분석[편집]

대공황에 대한 원인 분석은 케인즈학파와 통화주의자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있었다. 존 케인즈는 대공황의 원인이 유효 수요의 부족으로 보고 정부가 직접 개입하여 수요를 창출하면 위기가 해결될 것이라고 보았다. 한편 통화주의자인 밀턴 프리드먼안나 슈왈츠는 "케인즈의 주장처럼 수요의 붕괴에 따라 촉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포에 질린 예금자들이 예금을 갑작스럽게 인출하자 은행들이 도산하면서 은행잔고와 준비금이 동이 난 직접적인 결과"라며 통화공급의 붕괴를 대공황의 원인으로 보았다.[3]

세계에 끼친 영향[편집]

대공황은 발생지인 미국 뿐만 아니라 미국과 경제 협력을 맺거나 수출, 수입을 하고 있던 세계 여러 나라에 큰 영향을 끼쳤다.

  •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 후 그나마 일으켜 세운 경제마저 무너져 큰 혼란을 겪게 되었고 16 ~ 30세 연령층의 남자 중 절반이 실업자였고 1932년까지 600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했다. 그러한 상황에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출범하게 된다.
  • 영국 잉글랜드 북동부 재로에서는 조선소가 폐쇄되어 일자리를 잃은 200명의 남성들이 시위를 일으키기도 했으며 1931년 9월 파운드화의 금태환을 중지해 금본위제도를 폐지했다.
  • 브라질에서는 당시 전 세계 커피의 3/4을 생산 및 수출해 부를 축적한 '커피 경제'가 큰 타격을 입어 잦은 쿠데타와 독재 등 많은 정치적 혼란을 겪게 된다.
  • 소련은 대공황으로 그리 큰 타격을 입진 않았고, 1928년에 발표한 스탈린의 5개년 계획으로 곤란을 겪던 자본주의 국가들 보다 높은 성장을 이루었으나, 1933년에는 식량 부족 사태가 일어났다.
  • 일본 역시 도쿄 증권 거래소가 폭락하고 629개에 달하는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면서 전쟁 물자를 만들기 위한 이 부족하자, 철광석이 풍부한 만주를 침공하였다.
  • 중부 유럽에서는 오랜 지주 구실을 하던 오스트리아크레디탄슈탈트 은행이 1931년 5월 파산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경제가 엄청난 파탄에 빠졌다.
  •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1929년 10% 미만이던 실업률이 1932년에는 30% 이상으로 급증했다. 소설 가시나무새들에서는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일용직 노동자로 전락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 대공황은 세계자본주의 역사에 중대한 사건이었고 자유방임형 시장경제의 위험성을 알렸다. 그 후 세계 각국은 케인즈 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국가가 계획경제를 통해 경제 거시적 환경을 적절히 조성하고 시장경제에 적절히 개입하여 거시적 정책을 통해 경기과열과 불황시마다 적절한 정책을 취하는 것이 유효하고 효과적이라는 경제이론이 설득력을 높였다. 이는 순수 자본주의에 대한 차별성을 갖기에 수정자본주의 또는 혼합자본주의라고도 한다. 서구 자본주의가 대공황을 겪을 때 소련에서는 계획경제를 통해 급속히 공업화에 성공한 영향도 있어서 일정정도의 계획 경제를 자본주의에 도입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이론은 더 매력적인 이론으로 보이기도 했다.

주석[편집]

  1. 1929년 증권시장붕괴: 10여 년간 계속되어 서구 여러 공업국에 큰 영향을 미쳤던 대공황을 촉발시킨 미국 경제상 재해. 1929년 중반과 후반 미국 증권시장은 급속히 팽창했으나 9월과 10월초 증권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고 증권시장 붕괴는 10월 24일 실질상 처음으로 나타났다. 검은 목요일이라고 알려진 이날 하루 거래량은 1,289만4,650주에 달했다. 가격 폭락은 그 다음 주에도 이어져 검은 화요일에는 1,600만 주가 거래되어 증권시장은 완벽히 붕괴되었다. 증권시장 붕괴 원인은 투기 만연, 본질상 부채를 창출할 수밖에 없는 지주회사투자신탁회사가 한 확신과 청산이 불가능한 대규모 은행 대부 증가 등이었다.
  2. 블록 경제(Bloc economy): 몇 개의 국민경제를 하나의 지역(블록)으로 통합해 타지역에 봉쇄적인 무역정책을 취하는 경제권. 블록 경제라는 용어는 1929년의 대공황 이후 경제위기와 국가간 시장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1932년 오타와에서 열린 영제국 경제회의에서 영국과 그 속령 간에 특혜관세가 설치되면서부터 등장했다. 당시 공황의 여파와 국제금본위제의 붕괴는 세계 여러 나라를 통화권별로 분열시켜 파운드 블록, 달러 블록, 마르크 블록, 프랑 블록, 원 블록 등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각각 열강을 중심으로 경제권을 형성하면서 세계 경제의 분단을 지향하고, 차별관세·구상무역·수입통제·외환관리 등의 정책으로 역내의 자원과 시장에 대한 배타적 지배를 강화했다. 또한 블록 내에서는 국가간 요소이동을 자유화함으로써 지배국의 자본 수출이나 기업 진출을 촉진시키는 반면, 식민지나 속령의 공업발전을 억제함으로써 국제분업체제를 구축하고 경제적 지배·예속 관계를 고정시켰다.
  3. 누리엘 루비니, 스티븐 미흠 (2010). 허익준 옮김: 《위기 경제학》. 청림출판, 84-87쪽. ISBN 978-89-352-0836-4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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