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튜어트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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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 (John Stuart Mill, 1806년 5월 20일~1873년 5월 8일)은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이다. 국회의원으로 현실 정치에 참여하였고, 자유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고전적인 공리주의 즉 그의 대부이자 멘토인 벤담에 의해 개척된 도덕 이론의 지지자이었으나 후에 독일 낭만주의를 수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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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존 스튜어트 밀은 영국 런던의 펜톤빌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코틀랜드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제임스 밀의 장남이었다. 존 스튜어트는 그의 아버지에게 교육 받았고, 제러미 벤담과 프란시스 플레이스(Francis Place)에게 조언을 받았다. 그는 극단적으로 정확하며, 가혹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교육을 받았고, 그의 형제들보다는 같은 또래 아이들의 위험으로부터 신중하게 보호받았다. 벤담을 지지하고 관념 연합설에 찬성했던, 그의 아버지는 천재적인 지식인을 창조하는 것인 자신의 명백한 목표이었으며, 그 것은 자신과 벤담이 사망한 후에도 공리주의가 계속 주장되고 이행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밀은 두드러지게 조숙한 아이였다. 세살에 그는 그리스어 알파벳과 그들의 영어에 상응하는 그리스어 단어의 긴 목록들을 배웠다. 여덟살에 그는 이솝우화와 크세노폰이 쓴 "페르시아왕 소(小)키루스(Cyrus the Younger)의 소아시아 원정기"를 읽었고, 헤로도토스와 루시앙과 친분이 있던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와 소크라테스의 모든 저서들, 플라톤의 여섯 대화편 등등의 책을 탐독했다. 또한 그는 엄청난 양의 잉글랜드 역사를 읽었고, 산수를 배웠다.
여덟 살에서 열세 살에 이르는 동안 밀이 공부한 것에 대한 당대의 기록이, 그의 생애에서 바인의 스케치로 출판되었다. 그 것은 그의 자서전을 암시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것만으로도 분량만으로는 자서전이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는 양이었다. 여덟살에 그는 라틴어와 유클리드(기하학), 그리고 대수학을 배우기 시작했고, 가족 내에서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임명되었다. 그의 주된 독서는 아직 역사 영역에 그쳤지만, 그는 당시 대학과 학교에서 널리 읽히던 라틴과 그리스의 모든 작가들의 작품을 거쳐갔다. 그는 라틴어 또는 그리스어로 작문하는 것을 배우지 못하였으나, 그는 결코 정확한 학자가 아니었다.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읽는 것이었고, 열살에 그는 플라톤과 데모스테네스를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인도 역사책을 1818년에 출간했다. 그에 뒤이어 즉각적으로, 열두살에 밀은 스콜라 철학의 논리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적인 논문을 원래 언어인 헬라어로 읽기 시작했다. 그 다음 해에 그는 정치 경제학을 소개받았고, 그의 아버지와 함께, 생산의 요소를 바라보는 고전 경제학적 관점에서 궁극적으로 경쟁했던 아담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르도를 공부하였다.
그러나 집중적인 학습은 밀의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스물 한살에 그는 신경쇠약에 걸리고 말았다. 그의 자서전 제5장에 설명된 바에 따르면, 그 것은 어린 시절에 발달하기 마련인 여러 감정들을 억누르고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리면서 몸과 마음 모두에서 엄청난 끈기를 발휘해야 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런 우울증은 마침내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는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에서 위안을 찾을 수 있었다. 그의 마음이 다시 단장되었을 때, 밀은 "구름이 서서히 걷혀나가는 것"을 깨달았다.
밀은 옥스퍼드 대학이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을 거절했다. 왜냐하면 그는 "하얀 악마"로 부터 영국 국교도의 지위를 얻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1] 대신에 그는 그의 아버지를 따라 영국 동인도회사에서 1858년까지 근무하였다. 1865년에서 1868년 사이에 그는 성 앤드류 대학에서 교구목사로 섬겼고, 취임 설교에서 문화의 가치에 대해 언급하였다.
1865-68년 같은 기간동안에 그는, 웨스터민스터 시의 유권자를 대표하여 국회의원이 되었다.[2]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밀은 아일랜드의 부담을 덜어주자고 주장했고, 국회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자고 주장한 첫번째 사람이 되었다. 밀은 여성 인권에 대한 강한 지지자이었고,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농장에 관한 법과 비례 대표제 등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개혁을 주장하는 인물이었다. 1869년 그는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자고 주장했다. 내각의 배려로, 밀은 국회와 선거권에 대한 다양한 개혁을 요청했다. 특히 비례대표제와 일인일표제, 그리고 선건권의 확대 등이 그 내용이었다. 그는 버트런드 러셀의 대부이었다.
1851년에 밀은 해리엇 테일러와 가까운 친구가 된지 이십일년만에 결혼하였다. 테일러는 그들이 만났을 때 이미 결혼한 유부녀이었고, 따라서 두 사람의 관계는 가까웠지만 그녀의 첫 남편이 죽기 전까지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테일러는 영리한 여성으로, 밀에게 친구로서나 아내로서 그의 사상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밀이 테일러와 친분을 쌓으면서, 밀은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자유에 대한 생각을 수정하여 최종적으로 정리하는 데에 그녀가 영향을 주었다고, 그녀가 죽은 이후에 출간된 책에서 짧게 언급하였다. 그녀는 여성의 종속에 대해 간접적으로 문제의식을 드러냈다고 한다. 테일러는 밀과 결혼한 지 겨우 칠년이 지난 1858년에 심각한 폐 출혈로 사망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아비뇽에서 1873년에 사망하였고, 그의 아내 곁에 묻혔다.
[편집] 업적
[편집] 자유론
밀의 자유론은 고전적인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책 중 하나로, 자유의 개념에 대해 쓴 가장 중요한 전문서적 중 하나이다.
[편집] 주석
- ↑ Capaldi, Nicholas. John Stuart Mill: A Biography. p.33, Cambridge, 2004, ISBN 0-521-62024-4.
- ↑ Ibid. p.321-322
[편집] 바깥 고리
- 서지문 교수의 스튜어트 밀 자서전 소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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