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예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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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vrilo Princip captured in Sarajevo 1914.jpg

사라예보 사건은 현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암살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편집] 사건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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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6월 28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 조피가 젊은 보스니아라는 민족주의 조직에 속한 18세의 청년이자 대학생이었던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된 사건이다. 프린치프는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으로 전 남슬라브인들의 통일, 구체적으로는 보스니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로부터 독립하여 독립국인 세르비아와 합칠 것을 원하였다(남슬라브 운동). 그리고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군사연습을 보기 위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 프린치프와 네디엘코 카브리노비치 및 4명의 혁명가 학생들이 음모를 준비했다.

황태자 부부가 탄 차는 일차적으로 카브리노비치가 던진 폭탄을 맞아 테러를 당했으나, 혈기왕성한 황태자는 폭탄을 주워 테러범에게 도로 던져 위기를 면했다. 밤이 되어 차를 타고 가던 중 황태자는 아까 자신의 경솔한 행동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쳤을 것이라며 걱정하였고, 폭발 사고로 부상당한 관리를 방문하기 위해 병원으로 차를 몰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운전사는 길을 잃었고, 이 틈을 타서 저격범 프린치프가 차 앞으로 뛰어들어 총을 쏴 먼저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암살하고 다시 총을 쏴 부인 조피를 암살했다. 그때 프린치프는 조피가 아니라 보스니아군 사령관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장군을 겨냥했다고 한다.

[편집] 사건의 영향

세르비아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남슬라브 운동을 은근히 부추기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사건을 구실로 세르비아와 전쟁을 결심했다. 세르비아와 전쟁을 하기 위해서 동맹국 독일의 협조를 요청했고, 여기서 외교사 최대 실수로 평가되는 “백지 수표”를 빌헬름 2세가 약속한다. 오스트리아를 무조건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 1878년에 체결된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에 따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래 이 동맹은 독일이 주도하고 오스트리아가 따르는 구조였음에도, 1908년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합병 때부터 오스트리아가 주도하고 독일이 따라가는 것으로 전도되어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일찍이 이것은 전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며 경고한 바 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독일이 건네준 백지 수표를 믿고 7월 23일 세르비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낸다. 답변 시한은 48시간이었다.

  1. 모든 반(反)오스트리아 단체를 해산할 것.
  2. 암살에 관련된 모든 자를 처벌할 것.
  3. 반(反)오스트리아 단체에 관련된 모든 관리를 파면할 것.
  4. 여기에 관련된 당사자를 조사하는 데 오스트리아 관리가 세르비아로 들어가 도울 것을 허용할 것.

이 조항들을 내민 오스트리아의 속셈은 세르비아가 최후통첩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 최후통첩이 노린 것이 무엇이었냐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논쟁이 많다. 각 조항들이 세르비아의 주권과 자존심을 짓밟는 항목들이어서 전쟁을 의도했다고 하나, 그렇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오스트리아가 보낸 최후통첩에는 최후통첩을 거부했을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르비아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관은 이 최후통첩을 "시한이 정해진 요청문"으로 분류해서 세르비아 정부에 전달했다.[1]

생길지도 모를 파국을 피하고 싶었던 세르비아 정부는 1, 2, 3항까지는 굴욕을 참고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4항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 조건이었고, 결국 세르비아는 이 최후통첩을 거부한다.

오스트리아는 바라던 바를 이루었기 때문에 7월 28일,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고, 러시아7월 29일 총동원령을 내렸다. 독일의 빌헬름 2세러시아프랑스에 동시에 최후통첩을 발했다. 러시아에 대한 최후통첩은 “총동원령을 해제하라. 안 그러면, 전쟁 상태로 간주한다. 12시간 내 답변하라.”였는데, 러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프랑스에는 “만일 독일이 러시아와 전쟁 상태로 들어가면 프랑스는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18시간 내 답변하라.”라고 발했다. 프랑스는 프랑스의 국가 이익에 따라 행동한다고 답변했다.

8월 1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후 각국은 서로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전쟁은 7월 28일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편집] 주석

  1. 프레더릭 모턴 [2009년 10월 26일]. 《석양 녘의 왈츠 - 제국의 붕괴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Thunder at Twilight: Vienna 1913/1914)》. 주영사, 399쪽. ISBN 978-89-95921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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