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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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 1721년-1917년
소비에트 러시아 1917-1922년
소련 1922-1991년
1917-1927;(러시아 혁명 · 러시아 내전)
1927-1953 · 1953-1985 · 1985-1991
러시아 연방 1991년-

러시아 혁명(-革命)은 1917년 2월(러시아 구력)과 10월 (러시아 구력)에 러시아에서 발발하여 세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공산주의 공화국이 수립된 혁명이다.

목차

[편집] 혁명이전의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은 철저한 전제 군주전제로 주도하에 근대화 개혁을 점진적으로 나아가, 그 결과 19세기 후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전제정치가 그대로 유지되었기때문에 근본적인 개혁안은 철저히 배제되었고,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자유주의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사회 민주당을 결성하여 사회 개혁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 제국은 격동하는 시대에 황제 니콜라이 2세는 근본적인 개혁의 소리에 대해서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제국이 변화가 되는것을 두려워했었기 때문이였다.

1905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를 피의 일요일이라 부른다.) 이사건으로 러시아 제국에 대해 불만을 품는 사람들이 늘게 되었고, 온갖 파업이 끊이지않았다. 이에 러시아 제국정부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두마'라 불리는 의회를 설치하는등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생활은 여전히 나아지지않았다.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국민들의 불만은 진전되지않다가 1907년즈음 가서야 겨우 진전되어갔었다. 한때 러시아에는 연평균 7%의 산업 성장화를 보이면서 위세를 떨치기도 했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 황제에 대한 불만세력이 여전하다고 여긴 니콜라이 2세는 이러한 국내의 불만을 진정시키기 위해 많은 병력을 파병하도록 선전했다. 처음에 민중들은 애국심에 불타서 1차 세계대전에 많은 지지를하였고, 무려 1천 500만명이나 전선에 나가 지원 했었다. 하지만, 지휘관들의 무능함으로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자멸적인 대패를 초래했을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군에 지원한것 때문에 러시아의 노동력은 급격히 저하되어,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국내의 불안은 고조되어갔고, 이때부터 러시아 제국의 제정체제에 한계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럼에 따라 각지에서 파업과 시위가 끊이지 않게 발생하고, 니콜라이 2세 황제는 1915년부터 직접 전투지휘에 나서며 국정은 황후에 맡기고, 황후를 등에 업은 라스푸틴을 중심으로 국정도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편집] 2월 혁명

이 부분의 본문은 2월 혁명 (러시아)입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장기화 됨에 따라 러시아 제국 국민들의 생활이 더욱어려워졌다. 그러던때에 1917년 2월말, 세계 여성의 날을 계기로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여성들이 을 요구한 시위로부터 시작한 소요가 노동자의 합세로 인하여 대규모로 발전하였다. 제정 러시아의 군대는 시민을 향하여 발포하였는데, 이후 발포를 거부한 일부 사병들의 혁명 참여로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로 단결하였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이 혁명으로 폐위되었고, 제정체제가 붕괴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것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판단하고 정권을 장악하지 않았다. 이렇게 됨으로써, 부르주아와 사회주의자들의 연합 정권인 케렌스키임시정부가 탄생하였다. 이때 2월은 러시아 달력에 근거한 것이며, 그레고리력으로 하면 3월 혁명이 된다.

[편집] 10월 혁명

이 부분의 본문은 10월 혁명입니다.

이 시기에 온건사회주의자들로 주축이된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임시정부는 전쟁을 끝내길 바라는 민중들의 열망을 무시한채,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동시에 경제파탄을 겪자, 민중들의 지지기반을 잃어갔었다. 9월로 들어서자 페트로그라드 시내에서는 볼셰비키가 전국적인 지지를 얻게 되고, 볼셰비키 세력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1917년 11월 7일(러시아 구력 10월 25일) 오전 10시, 볼셰비키 군사혁명위원회(위원장 트로츠키)가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1000여명의 적위대를 이끌고 급습함으로써 케렌스키 임시정부 타도에 성공하고,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됐음을 선언했다. 이 혁명은 볼셰비키 혁명이라고 부르는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혁명이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망명지 스위스에서 급거 귀국한 지 6개월여 만의 일이었다.

같은 해 일어난 2월 혁명 이후 러시아는 지주·부르주아들의 임시 정부와 노동자·병사들의 소비에트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때 망명지 스위스로부터 독일 제국이 제공한 봉인 열차편으로 귀국한 레닌은 “자본주의의 타도 없이 종전은 불가능하다.” 등 10개 항에 걸친 4월 테제(April Theses)를 발표했다. 이것이 곧 볼셰비키의 방침이 되어 “임시 정부 타도!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임시 정부에 대항했다.

레닌의 강력한 요청으로 볼셰비키 당내에서는 봉기의 방침이 결정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의장 트로츠키의 지도하에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어 구체적인 계획이 진행됐다. 11월 6일 새벽 2시, 임시 정부 수상 케렌스키볼셰비키 신문 인쇄소를 봉쇄하자 트로츠키는 전 부대에 무장봉기를 명령했다. 노동자를 주축으로 하는 적위대가 전화국, 정부 청사 등 주요 거점을 무혈 점거했다. 제2회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린 오전 11시까지는 임시 정부의 거점인 동궁(冬宮)을 제외한 도시 전체가 볼셰비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1월 7일 새벽 2시, 드디어 동궁이 함락됐다는 소식이 소비에트 대회장에 알려지자 대회장은 환호의 도가니로 변했다. 오전 6시, 해가 떠오르는 가운데 레닌이 기초한 대회 선언이 낭독됐다. 이후 러시아는 황제를 지지하는 백군과 혁명을 지지하는 적군 사이의 내전과 이에 위기를 느껴 서구 열강과 일본이 군대를 보낸 사건인 시베리아 전쟁을 거쳐 1922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소비에트 연방으로 변모했다.

[편집] 러시아 내전

이 부분의 본문은 러시아 내전입니다.

10월 혁명 이후의 내전은 기본적으로 황제를 지지하는 백군과 혁명을 지지하는 적군 사이의 내전을 말한다. 이는 표면적인 것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내전은 레닌 주도의 혁명 세력 및 혁명을 지지하는 러시아 국민들과 백군과 백군을 후원하는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전쟁이다.[1]

내전 초기의 혁명 국가는 완성되지 못했으며, 혁명 러시아의 국가 체제나 군대 체계는 매우 엉성한 상태였다. 반면에 백군은 제정 시대의 장교들의 통솔력과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후원받은 강력한 무기로 인해 상대적으로 내전 초기에 적군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다. 특히, 콜차크,데니킨,유데노프가 지휘하는 백군은 볼셰비키 정권을 심각하게 위협했었다. 하지만, 백군에는 구체제로 구성된 지주출신들이나 장군들이였으며, 이들에게 뚜렷한 제도나 정책이 없었다. 백군의 목표는 단순히 볼셰비키 정권을 무너뜨리고 구체제로 회복하는거뿐이였다. 그렇기에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백군을 후원하는 세력들 뒤에는 지주들이나 자본가출신들이란점등을 잘알고있었다. 따라서, 농민들이나 노동자들은 백군에 등을 돌려 볼셰비키 정권에 지지했다. 그렇게 됨으로서, 러시아 공산당의 끈질긴 저항과 러시아 인민들의 지지로 인해 1922년부터는 백군 세력이 혁명 러시아로부터 완전히 밀려나가게되어 패망했으며, 백군으로 참전한 군인들은 해외에 망명하거나 총살되었다.

이와 더불어 러시아 내전은 이후 혁명 러시아의 미래에 여러 가지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첫째로, 공산주의 혁명을 지지했던 많은 노동자 계급이 전쟁 속에서 죽거나 다쳤다. 이는 이후 혁명 러시아의 본래 목적과 이상향이 변질되는데 큰 영향을 준다.[2] 둘째로, 혁명 러시아에 제정 형태의 군사 제도, 사회 제도가 도입된다. 처음에 이것은 내전기의 일시적인 정책으로 시작하였으나, 내전이 끝난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며, 내전기에 들어온 제정 시대의 군인, 관료 계층이 이후 스탈린의 반혁명 시도를 돕게 된다. 셋째로, 내전과 무관하게 적군에 반대했던 무정부주의적 농민, 병사 집단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데, 이는 내전 이후 공산당에 반대할 대항 세력의 몰락을 뜻했다. 끝으로, 내전으로 인한 극심한 사회 혼란과 경제력 파괴는 이후 혁명 세력으로 하여금 신경제 정책(네프(NEP)), 즉 일정 부분 자본주의 도입을 허용하게 된다. 이 요소도 이후 스탈린의 반혁명(反革命) 시도에 일조하는 요인이 된다.[3]

[편집] 《동물 농장》

조지 오웰이 쓴 《동물 농장》은 이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 시대를 비유해 썼는데, 여성들이 빵을 요구한 것을 존스(니콜라이 2세)가 동물들에게 음식을 주지 않은 것이고, 니콜라이 2세가 쫓겨난 것은 존스가 장원 농장에서 쫓겨난 것을 비유한 것이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이후 반(反)공산주의 국가들이 연합하여 러시아를 침공한 러시아 내전은 인간들이 동물 농장의 몇몇 동물을 포섭하여 쳐들어 온 것으로 비유되었다. 일반적으로 나폴레옹은 스탈린, 스노볼은 트로츠키를 비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편집] 주석

  1.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 2장 '세계혁명', 까치글방.
  2. 알렉스 캘리니코스, 《마르크스의 사상》 8-1 '현존 사회주의', 북막스, 2002.
  3. 리처드 오버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지식의 풍경,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