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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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전쟁
아우스터리츠 전투
아우스터리츠 전투
날짜 1803년 - 1815년
장소 유럽, 대서양, 인도양, 북아메리카, 리오 데 라 플라타
결과 연합국의 승리, 빈 회의(나폴레옹 전쟁),
겐트 조약(1812년의 전쟁)
교전국
연합국:

영국 잉글랜드 연합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a]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b]
바티칸 시국 바티칸 시국
스위스 스위스
프로이센 프로이센 왕국[a]
스페인 스페인 [c]
포르투갈 포르투갈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
사르데냐 왕국 사르데냐 왕국
양시칠리아 왕국 양시칠리아 왕국[d]
스웨덴 스웨덴[e]
알제리 알제리
이란 카자르 왕조
하노버 하노버 선제후국
네덜란드 네덜란드 연합 왕국(1815)
오스트리아 제국 티롤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 몬테네그로 공국
토스카나 대공국 토스카나 대공국
헤센 대공국 나사우
바이에른 왕국 바이에른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몰타 기사단 몰타 기사단
프랑스 왕국 프랑스 왕당파
Flagge Herzogtum Braunschweig.svg 브라운슈바이크

프랑스와 동맹국:

프랑스 프랑스 제국
네덜란드 홀란트(1806-10) [f]
이탈리아 왕국 (나폴레옹) 이탈리아 왕국
토스카나 대공국 에트루리아 왕국 [g]
나폴리 왕국 나폴리 왕국 [h]
폴란드 바르샤바 공국 [i]
프로이센 라인 동맹 [j]:

바이에른 왕국 바이에른 왕국
작센 왕국 작센 왕국
틀:나라자료 베스트팔렌
뷔르템베르크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이란 카자르 왕조 (1812-1813)
덴마크 덴마크-노르웨이 [k]
Flag of Norway (1814–1821).svg 노르웨이(1814)[l]


Flag of the Maratha Empire.svg 마라타 동맹
미국 미국 (1812-15)

지휘관
Flag of the Habsburg Monarchy.svg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

Flag of the Habsburg Monarchy.svg 카를 대공
Flag of the Habsburg Monarchy.svg 슈바르첸베르크 공작
Flag of the Habsburg Monarchy.svg 요한 대공
영국 웰링턴 공작
영국 허레이쇼 넬슨
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
러시아 미하일 쿠투조프
러시아 미하일 바클라이 드 톨리
러시아 레온티 레온티예비치 베니히센
Flag of the Kingdom of Prussia (1803-1892).svg 게프하르트 폰 블뤼허
Flag of the Kingdom of Prussia (1803-1892).svg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Flag of the Kingdom of Prussia (1803-1892).svg 호엔로에 공
Flag of Spain (1785-1873 and 1875-1931).svg 프란시스코 카스타뇨스
Flag of Spain (1785-1873 and 1875-1931).svg 미겔 데 알라바
Flag of the Kingdom of the Two Sicilies (1816).svg 시칠리아의 페르디난도 4세
오스만 제국 셀림 3세
오스만 제국 무스타파 4세
오스만 제국 마흐메트 2세
스웨덴 스웨덴의 구스타브 4세 아돌프
스웨덴 칼 요한 대공[m]
Prinsenvlag.svg 오라녜 공작 빌럼
Prinsenvlag.svg 프레데릭 공작
Pavillon royal de France.svg 루이 18세

프랑스 나폴레옹 1세

프랑스 조제프 보나파르트
프랑스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
프랑스 루이 니콜라 다부
프랑스 란 원수
프랑스 앙드레 마세나
프랑스 미셸 네
프랑스 니콜라 장드듀 술트
프랑스 장 밥티스트 베시에르
프랑스 나폴레옹 치하의 26명의 프랑스군 원수들
프랑스 빌뇌브 제독
Flag of the Napoleonic Kingdom of Italy.svg 외젠 드 보아르네
Flag of the Kingdom of Naples (1811).svg 조아키노 1세
Flag of the Duchy of Warsaw.svg 포니아토프스키 공작
Flag of Bavaria (lozengy).svg 막시밀리안 1세
State flag of Saxony before 1815.svg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Flag of the Kingdom of Westphalia.svg 제롬 보나파르트
Flagge Königreich Württemberg.svg 프리드리히 1세
네덜란드 루이 보나파르트

피해 규모
사상자 3,350,000명~ 6,500,000명. 사상자 3,350,000명~ 6,500,000명.
  • (a).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양쪽은 잠시동안 프랑스의 동맹이 되어 1812년 프랑스의 러시아 침공 때 군사력을 제공했다.
  • (b). 러시아는 1807년 틸지트 조약에 의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1810년 동맹은 깨지게 되었고, 1812년 프랑스의 침공을 당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러시아는 스웨덴(1808-1809)과 오스만 제국(1806-1812), 명목상 영국(1807-1812)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 (c). 스페인은 프랑스의 동맹이었으나, 1808년까지 프랑스의 비밀스런 침공을 받아 반도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 (d). 양 시칠리아는 개인의 연합으로 살아남았고, 나폴리는 1806년 캄포-테네세 전투 때까지 프랑스 예속공화국으로 있었다.
  • (e). 명목상 스웨덴은 연합 왕국의 전쟁반대를 선언했으나 뒤이어 러시아와 핀란드 전쟁(1808-1809)을 벌여 패배했다.
  • (f). 1810년 홀란트 왕국은 프랑스 제국에 합병되었다. 네덜란드 군대는 1815년 백일천하 때 나폴레옹을 상대로 싸웠다.
  • (g). 1807년 에트투리아 왕국은 프랑스 제국에 합병되었다.
  • (h). 나폴리 왕국은 1814년 잠시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었다. 프랑스와 다시 동맹을 맺은 나폴리 왕국은 1815년 오스트리아와 나폴리탄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 (i). 나폴레옹은 바르샤바 공국을 세우고, 1807년 작센 왕국을 지배했다. 폴란드 군대는 프랑스 군대에 미리 이전부터 근무하고 있었다.
  • (j). 프랑스의 동맹인 16개의 독일 국가(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를 포함한)의 연합체인 라인 연방은 1806년 7월 아우스터리츠 전투(1805년 12월)이후에 설립되었다. 뒤이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1806년 10월) 이후 여러 기타 독일 국가는 반 프랑스 동맹의 편에 서서 싸웠고, 그중에는 연방에 참가했으며, 프랑스의 동맹이던 작센과 베스트팔렌도 포함되어 있었다. 작센은 라이프치히 전투 기간인 1813년에 편을 바꿨고, 뒤를 이어 많은 기타 맴버 국가들 또한 재빨리 소속을 바꿔 프랑스에 전쟁을 선언했다.
  • (k). 덴마크-노르웨이는 코펜하겐 전투 때까지 중립으로 남아 있었다.
  • (l). 뒤이어 연합했던 덴마크에서 독립을 선언한 노르웨이을 스웨덴은 1814년 여름기간 짧은 전역을 통해 패배시키고, 잠시 점령하였다.
  • (m). 프랑스 제국의 사령관이었던 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트 원수이다(1804-1810).

기타=

나폴레옹 전쟁의 참전국.

나폴레옹 전쟁(프랑스어: Guerres napoléoniennes, The Napoleonic Wars)은 1803년부터 1815년까지 변화한 유럽의 동맹과 대립한 연합을 상대로 나폴레옹프랑스 제국이 벌인 일련의 분쟁을 포함한 전쟁을 말한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때처럼 전쟁의 불꽃이 연속으로 일어났으며, 혁명적으로 변한 유럽의 군대와 활용방법은 전례가 없는 스케일이 되어 대부분 현대의 국민개병제도가 적용되어 쓰이게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은 프랑스 혁명 후 혼란기에 시작되었다. 나폴레옹의 야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804년 유럽 군주국들이 영국을 중심으로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맺으면서부터였다. 그 동맹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 전쟁이 시작되었다.[1] 프랑스의 힘이 빠르게 커져 프랑스 군을 이끈 나폴레옹은 한 때 유럽의 대부분을 정복했으나 프랑스는 반도 전쟁(1802~12)과 러시아 침공(1812~13)에서 비참한 패배를 겪고 급속히 쇠락하게 되었다. 이어서 프랑스는 워털루 전투(1815)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했다. 제2차 파리 조약(1815년 11월 20일)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종결되고, 나폴레옹은 실각했다. 나폴레옹 제국은 최후의 군사적 패배를 경험한 결과 프랑스의 부르봉 군주제의 부활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전쟁은 또한 신성로마제국의 해체를 불러왔다. 동시에 프랑스의 점령으로 스페인이 약화되면서 스페인이 지배하던 식민지였던 라틴 아메리카에서 민족주의자들의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용어와 정의[편집]

프랑스 혁명 전쟁(1792~1802)부터 유럽에서는 부분적으로 전쟁상태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이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을 통틀어 "대프랑스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독일에서는 "대프랑스 동맹전쟁"이라고 하고, 1813년 이후 독일 해방을 위한 전투를 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대프랑스 동맹 전쟁 이래 100년 이상 계속된 영국과 프랑스간의 대립관계를 제2차 백년전쟁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사이를 구분 짓는 정설은 없다. 대체적으로는 프랑스 혁명 전쟁(1792~1802)이 끝나는 동시에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아미앵 조약(1802)의 파기(1803년 5월 18일)를 경계로 보는 견해가 많으나 1796년 3월 나폴레옹에 의한 제1차 이탈리아 원정 개시를 경계로 보는 측과 보나파르트가 프랑스에서 권력을 잡은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1799년 11월 9일)를 경계로 보는 견해, 보나파르트가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때(1804년 12월 2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나폴레옹 전쟁은 유럽 대륙과 세계 각지의 식민지도 전장이 되었다. 이 때문에 7년 전쟁(1756~63)에 이어, 유럽 중심의 역사상 두 번째 세계대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1914년에 발발하여 1919년에 종전된 제1차 세계 대전, 1939년에 발발하여 1945년에 종전된 제2차 세계 대전과도 비슷한 점이 많다.

배경[편집]

프랑스 혁명으로 탄생한 프랑스 공화국 정부와 공화제에 반대하는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 · 영국 · 러시아 · 프랑스 왕당파 등 사이에서 프랑스 혁명 전쟁이 벌어졌다. 프랑스 혁명 전쟁은 오스트리아프랑스 혁명에 대한 간섭을 계기로 프랑스 혁명 정부(지롱드파 내각)가 오스트리아에게 선전 포고(1792년 4월 20일 )를 함으로써 시작되어, 프랑스 북부와 동부 · 네덜란드 · 벨기에 · 북부 이탈리아 · 이집트 · 일부 식민지 등이 주요 전쟁터가 되었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의 공격은 1792년 9월 20일 발미에서 중단되지만(→발미 전투), 1793년 혁명의 좌경화(루이 16세의 처형)와 혁명군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현, 벨기에) 침투에 따라 1793년에는 영국 ·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 · 스페인 등을 중심으로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국내의 반란과 함께 프랑스는 위기에 빠졌다. 하지만 프랑스는 혁명의 열기에 의해 초래된 국가적인 전쟁에 참가, 국가 총동원 체제의 정비와 사단 편성의 도입을 비롯한 군사 혁신을 단행함으로써 반격을 가하였고 모든 정치적 · 경제적 · 군사적 역량을 동원하여 일련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2]

1796년 제1차 이탈리아 원정에서 프랑스 총재정부는 라인 방면에 2개 군, 북이탈리아 방면에 1개 군을 배치해 오스트리아를 포위 공략하는 작전을 시도했다. 1796년 10월 17일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체결한 캄포포르미오 조약에 의해 일단, 오스트리아가 전쟁에서 탈퇴했고, 이로써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은 붕괴되었다. 1798년,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오스트리아가 다시 참전하자 프랑스는 다시 열세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아래, 이집트 원정에서 귀환한 나폴레옹이 최고 권력을 장악했다. 보나파르트의 반격으로 오스트리아는 1801년뤼네빌 조약으로 다시 강화하였고, 홀로 전쟁을 수행하던 영국1802년 3월 25일 아미앵 조약에 응했다. 이것으로 프랑스 혁명 전쟁은 끝이 나게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혁명 정부의 국제적 승인과 대폭적인 영토 확장을 이루었다.

이후 평화는 1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에 의해 유럽시장에서 영국제품의 판매금지와 조약위반행위 등으로 인해 다시 영국과 프랑스간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1803년 5월 16일 영국은 아미앵 조약을 파기하고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전쟁의 목적은 프랑스의 구체제 회복에서 나폴레옹의 타도로 변하게 되었다. 또한 3월 21일 나폴레옹에 대한 쿠데타 계획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 프랑스 왕족 앙갱 공이 처형당한 일이 벌어져 유럽 여러 나라의 비난을 받으면서 프랑스와의 전쟁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1804년 5월 28일 나폴레옹은 제정을 선포했다. 12월 2일 대관식을 거행하고,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

진행 과정[편집]

제3차 대프랑스 동맹[편집]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 상륙을 계획하고, 도버해협에 인접한 브르타뉴에 18만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이에 대해 영국은 오스트리아 제국 · 러시아 제국 등을 끌어들여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전투는 라이베리히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 7만이 바이에른에 침공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은 8월 하순에 브르타뉴를 출발해 9월 25일부터 10월 20일까지 벌어진 《울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포위하여 항복시켰다. 나폴레옹은 비엔나에 입성하였으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쿠투조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군 잔존부대와 합류하여 결전을 도발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즉위 1주년이었던 12월 2일, 러시아 제국 · 오스트리아 제국과 맞붙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우세한 적에 대해 - 후에 예술이라고 평가받은 - 지휘와 배치를 발휘하여 완승을 거두었다.

한편 해전은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다. 피에르 빌뇌브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넬슨이 이끄는 영국함대에게 포착되어 10월 21일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괴멸 당했다. 다만 이 해전은 곧바로 대륙에 있던 나폴레옹의 패권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12월 26일 오스트리아는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체결하고 프랑스에게 굴복했다. 다음해 나폴레옹은 형 조제프를 나폴리 왕, 동생 루이를 네덜란드 왕에 즉위시키고, 7월에는 독일의 서남쪽 여러 연합체를 합쳐 친 나폴레옹의 라인 동맹을 만들었다. 신성 로마 제국프란츠 2세는 퇴위하고, 전후로써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를 칭하게 되었다.

제4차 대프랑스 동맹[편집]

프로이센은 중립적 입장을 지키고 있었으나, 라인 동맹의 성립으로 인해 나폴레옹의 패권이 중부 독일에까지 미치게 되자, 1806년 7월 영국, 러시아, 스웨덴 등과 더불어 제4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10월 9일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나 10월 14일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예나에서 프랑스군 주력이 프로이센군 후위부대를 격파하고, 아우어슈타트에서 프로이센군 주력이 2배의 병력을 갖추고, 다부 군단에게 공격을 가했으나 격퇴 당했다. 프랑스군은 추격에 나섰고, 10월 27일 베를린에 입성하였다.

11월 21일 나폴레옹은 베를린에서 대륙봉쇄령(《베를린 칙령》)을 발표했다. 이것은 산업 혁명이 발흥하고 있던 영국과 유럽대륙 여러 나라와의 교역을 금지시켜,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오히려 교역 상대를 잃어버린 유럽 여러 나라측이 경제에 큰 타격을 입는 결과를 낳았다. 프랑스군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를 추적하여 동프로이센으로 향했다.

프랑스군과 프로이센을 구원하러 온 러시아군 사이에 아일라우 전투(1807년 2월 7일~8일)가 벌어졌다. 눈바람속의 전투는 양군 모두 적지 않은 사상자가 속출했고, 결판은 나지 않았다. 그 후 프랑스군은 체제를 정비하고, 6월 14일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포착하여 격멸시켰다.

그 결과, 프랑스 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에(7월 7일) 및 프랑스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 간에(7월 9일) 각각 틸지트 조약이 체결되었다. 폴란드 분할(1772, 1793, 1795)로 인해 독립을 상실한 폴란드는 프랑스의 도움으로 옛 영토의 일부를 되찾아 바르샤바 공국(1807~15)으로 되살아났다. 러시아는 대륙봉쇄령에 참가했다. 프로이센은 엘베 강 서쪽의 영토를 잃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프로이센의 옛 영지는 베스트팔렌 왕국이 설치(1805)되고,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 보나파르트가 왕위에 올랐다. 한편 굴욕적인 패배를 겪은 프로이센은 철학자 피히테가 〈독일국민에게 고한다〉라는 강연을 시작하고, 또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아우구스트 나이트하르트 폰 그나이제나우에 의해 군제개혁이 실시되었다.

1807년 10월 나폴레옹과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르푸르트에서 회담을 갖고, 스웨덴을 대륙봉쇄령에 참가시키기 위해 러시아가 압력을 가하는 일을 맡는 것을 재확인시켰다. 이것으로 인해 제2차 러시아-스웨덴 전쟁(1808년~1809년)이 발발하였고, 여기서 패배한 스웨덴은 파리 조약(1810)을 맺어 핀란드를 러시아에게 할양할 것과 더불어 대륙봉쇄령에 참가했다. 그 후 스웨덴 국왕 칼 13세는 나폴레옹 휘하의 베르나도트를 양자로 맞이하였다. 그가 곧 스웨덴의 왕위를 계승(1818)한 칼 14세 요한이다. 나폴레옹은 북유럽에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베르나도트는 훗날 배신하고, 스웨덴을 대프랑스 동맹에 참가하게 하였다.

진흙탕 싸움 (반도 전쟁)[편집]

스페인은 프랑스와 동맹하여 트라팔가르 해전(1805) 및 포르투갈 침공(1807)에도 함께 싸웠으나, 국내에서는 국왕 카를로스 4세와 그의 아들 페르난도 7세가 대립하였다.

1808년 나폴레옹은 두 사람을 유폐시키고, 대신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 - 그는 이미 나폴레옹에 의해 1806년부터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국왕에 임명된 상태였다 - 를 왕위에 올렸다. 이에 반발한 민중은 5월 2일 마드리드에서 봉기했다. 이 반란은 삽시간에 스페인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영국은 웰즐리(후에 웰링턴 공작)의 부대를 파견하였다. 11월 나폴레옹은 직접 20만 대군을 이끌고 스페인을 침공해 1809년 1월까지 영국군을 몰아낸 후, 전후 처리를 술트 원수에게 맡기고 귀환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스페인 측은 게릴라전과 영국의 지원을 받으며 완강한 저항을 계속했다. 이 반도(半島) 전쟁은 진흙탕 전쟁으로 변하고, 프랑스는 대군을 몰아넣었으나 최종적으로 패배했다.

제5차 대프랑스 동맹[편집]

나폴레옹이 스페인에서 고전하는 것을 목격한 오스트리아는 영국과 제5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1809년 4월) 1809년 4월 9일 카를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친(親)프랑스인 바이에른 왕국에 침공을 개시했다. 이에 대해 나폴레옹은 신속히 대응하여 에크뮐 전투(1809년 4월 21~22일)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나폴레옹은 5월 13일 비엔나로 입성했다. 오스트리아군 주력은 도나우 강 북쪽으로 후퇴했다.

프랑스군은 비엔나 근교에서 도나우 강을 도하하려 했으나, 오스트리아군의 방해로 인해 가교가 여기저기 파괴되어, 절반쯤 건너갈 때 공격을 받았다. 이 아스페른-에슬링 전투(5월 20~21일)는 나폴레옹 자신의 지휘에 의한 최초의 패배였다. 그 후 프랑스군은 바그람 전투(7월 5~6일)에서 오스트리아군에 승리했다. 10월 14일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쇤브룬 조약을 체결하고, 영토할양과 거액의 배상금을 얻어냈다.

1810년 나폴레옹은 황후 조제핀과 후사를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별하고, 4월 2일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재혼했다. 1811년 3월 20일 왕자 나폴레옹 2세가 탄생하여 로마 왕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점차 프랑스에 예속되어 오던 교황령은 프랑스에 완전히 병합되어(1808) 로마 교황 비오 7세는 유폐되었다. 이것으로 나폴레옹의 패권은 네덜란드 · 함부르크 · 로마 등을 병합하여 프랑스 제국의 기타, 지배하의 이탈리아 왕국, 형 조제프가 왕위로 있던 스페인, 동생 제롬이 왕위에 있던 베스트팔렌 왕국, 의동생 뮈라가 왕위에 있던 나폴리 왕국, 종속적인 동맹국 스위스 · 라인동맹 · 바르샤바 공국, 그리고 대등동맹국의 덴마크 왕국에 미쳐, 나폴레옹 절정기라고 평하게 되었다.

러시아 원정과 몰락[편집]

워털루 전투

나폴레옹은 영국을 철저하게 굴복시키기 위하여 1806년 대륙봉쇄령을 내려 유럽 국가로 하여금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일제히 금지시켰다. 그러나 영국과의 무역에 의해 경제를 유지하던 러시아는 이 명령으로 생존권에 영향을 받자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만다.(1810)

이것은 1812년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공격하게 될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퇴각하면서 러시아군은 도시와 곡식에 불을 질러, 프랑스군이 손대지 못하게 하고 깊숙이 달아났다. 식량은 얻지 못하였으나 러시아군과 싸우지 않은 프랑스군은 예상대로 쉽사리 모스크바를 점령하였다. 그는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만 하면 러시아가 항복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으나 러시아는 항전할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러시아에서 겨울을 지낼 준비를 하지 않았던 프랑스군은 결국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순간을 기다린 러시아군은 철수하는 프랑스군의 뒤를 쫓아 공격하여 궤멸시켰다.

프랑스의 대패를 목격한 유럽 각국은 일제히 반 나폴레옹의 기치를 내걸었다. 처음으로 움직인 것이 프로이센이었으며, 주변 나라들에게 호소하여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1813년 2월)하였다. 이 동맹에는 베르나도트스웨덴도 참가하였다.(1813년 8월) 러시아 원정으로 수십만의 군사를 잃은 나폴레옹은 강제적으로 청년들을 징집하였다. 1813년 봄, 변변찮은 군대로도 나폴레옹은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러시아 · 스웨덴 등 동맹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휴전을 하였다. 메테르니히와의 평화교섭이 불발된 후, 라이프치히 전투(1813년 10월 16~19일)에서는 동맹군에게 포위공격 당하여 대패한 후, 프랑스로 도망갔다. 이는 나폴레옹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1814년에 정세는 한층 더 악화되어 프랑스 북동쪽에서는 슈바르트베르크와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의 연합군 25만이, 북서쪽에서는 베르나도트 장군의 16만이, 남쪽에서는 웰즈 리 장군의 10만 대군이 프랑스 국경으로 진격하여 대포위망을 구축하였다. 이에 반해 나폴레옹은 불과 7만의 군세로 절망적인 싸움을 할 수 밖에 없었다. 3월 31일에는 제국의 수도 파리가 함락된다. 나폴레옹은 종전을 목적으로 퇴위를 하겠다고 했지만, 배신한 마르몽 원수 등에 의해 무조건 퇴위를 강요당하여, 결국 1814년 4월 16일 퐁텐블로 조약을 체결한 뒤 지중해의 작은 섬인 엘바 섬으로 추방되었다. 이 일련의 전쟁을 ‘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그 동안 숨죽이고 있던 프랑스와 스페인, 이탈리아 곳곳에서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왕정이 다시 복구되었다. 이들은 혁명 이전으로 되돌아가려고 하였다.

나폴레옹은 로마왕이었던 자신의 아들 나폴레옹을 후계자로 하고 싶었지만, 동맹국 측으로부터 인정되지 못하였다. 또 베르나도트 역시 프랑스의 새 왕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결국 주위의 반발을 사 포기하였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최종적으로 부르봉 왕가가 후계자로 선택되었다.

결과[편집]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빈 회의가 열려 전후 유럽을 어떻게 재편해야 할지를 각국 정상들이 의논을 하였지만,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 때문에 회의는 좀처럼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게다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한 루이 18세의 시대착오적인 통치에 대해 민중은 점차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1815년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돌아오고 나서 복위하는 데 성공한다. 나폴레옹은 자유주의적인 새로운 헌법을 발표하여 자신에게 비판적인 세력과의 타협을 시도했다. 그리고 연합국에게도 강화를 제안했지만 거부당하여 결국 또다시 전쟁을 하게 되었다. 초반에는 승세를 거두었으나 워털루 전투(1815년 6월 18일)에서 영국과 프로이센 등의 연합 공격으로 완패하여 백일천하는 끝났다. 나폴레옹은 다시 퇴위되어 미국으로의 망명도 시도했지만 항구 봉쇄로 단념하였고, 최종적으로 영국 군함에 투항하였다. 영국 정부는 아서 웰즐리 장군의 제안을 받아들여 나폴레옹을 남대서양의 한가운데에 있는 세인트헬레나에 유폐시켰다.

주요 원정 및 전투[편집]

영향[편집]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은 다시 복고주의, 정통주의를 원리로 한 빈 체제가 성립되었다. 하지만 혁명정신은 유럽 각지와 라틴 아메리카 등 일부 식민지에까지 퍼져, 프랑스 혁명사상이 심기었다. 구체제의 부활 후에도 나폴레옹 법전을 기초로 한 여러 법전은 각국에 남게 되었다. 또한 민족주의가 널리 퍼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민족주의는 유럽 역사를 크게 바꿔 이후 100년간 유럽 여러 나라는 봉건영주의 영토를 단위로 하던 영역에서 국민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한편 나폴레옹이 의도하던 유럽 통일국가 구상은 와해되었다. 통일에 대한 기운이 다시 높아진 것은 제2차 세계 대전이후였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실각하자 프랑스 혁명 이전의 앙시앵 레짐(구체제)이 부활하였다. 국내에서는 왕당파와 보나파르트 간의 심각한 대립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반동적인 정치체제는 계속되지 않고 7월 혁명에서 타도 당했다. 또한 프랑스 영역은 루이 14세 이래 계속된 영토확장 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후에 나폴레옹 3세가 획득한 사보아니스를 제외한 현재의 프랑스 본국 영토가 결정되었다.

영국은 남아프리카 식민지를 포함한 다수의 해외 영토를 획득했다. 거기에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덴마크 등의 해군을 격파하여 영국 해군이 세계의 바다를 아우르는 제해권을 획득해 패권국으로써의 지위를 부동의 것으로 만들었다. 또한 대륙 봉쇄령에 대항해 해상봉쇄를 감행해 프랑스와의 경제전쟁에서 승리하고 식민지 무역에도 지배력을 강화하게 되어 영국의 산업이 부흥하게 되었다.

독일은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은 뒤부터 민족주의가 높아져, 독일 연방이 결성되어 독일 통일 운동이 시작되었다. 프로이센 왕국이 라인란트를 시작으로 많은 영토를 획득하면서 대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도 나폴레옹의 공격을 견디고 전후 북이탈리아를 획득하여 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으나 서서히 프로이센과의 대립이 깊어져 갔다.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 동안 강력한 육군을 이탈리아와 프랑스에까지 파견하고, 전후 신성 동맹을 제창하며 자유주의운동을 봉쇄하여 유럽 구체제의 중심으로서 국제적인 지위를 높였다. 그러나 농노제의 특색이 남은 국내경제는 서구 여러 나라에 비하여 뒤쳐졌다. 러시아가 뒤떨어진 것이 명백해진 것은 이후 크림 전쟁에서 증명되었다.

군사 부문[편집]

나폴레옹 전쟁 이전에는 유럽은 절대주의 왕국을 중심으로 용병을 고용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을 거친 프랑스군은 혁명의 성과로 공화국을 방어해야 한다는 의식에 타올라 일반 국민을 중심으로 한 국민군으로 바꾸게 되었다. 프랑스는 18세기 말부터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나라였기 때문에 징병제도 실시에서 유리하였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의 과정에서 독일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도 국가주의 운동이 높아지면서 전쟁 말기 각국도 국민군의 성격이 강해진다.

국민군으로 이루어진 군대의 규모는 계속 확대되었다. 이전 7년 전쟁에서는 20만 명을 넘는 군대를 보유한 나라는 거의 없었다. 한편 프랑스 혁명전쟁 중 최대일 때 프랑스 군인 수는 150만 명에 달했고, 나폴레옹 전쟁 기간 중 프랑스에서 동원된 병력만 300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이러한 동원 제도를 정비한 것은 라자르 카르노였다.

거기에 산업혁명 초기 단계에 있었기에 병기의 대량생산이 거대한 군대의 무장을 가능하게 했다. 전쟁 기간 중 영국은 최대의 무기 생산국이 되어 동맹국에 무기 제공을 실시하였다. 프랑스는 제2위의 무기 생산국이었다. 국민군의 병사들은 강한 애국심을 갖고 있고, 단결력도 있었다. 그들의 도망률은 낮았기에 산병전술에 따른 병사 자율적 판단에 의존한 전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거대화된 군대는 사단이라 불리는 1만 명 정도의 독립 행동이 가능한 작전 단위의 편성이 도입되어, 대부대의 유연한 운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런 군제 개혁도 프랑스는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빨랐다.

군사 기술[편집]

보병의 주력 병기는 플린트록식 전장총이었다. 라이플도 사용되었지만, 당시 장전시간이 길고 탄환을 생산하는 공업기술도 낮았기 때문에 일반적이지 않았다. 보병부대는 정밀하게 겨냥하지 않고, 적을 향해 탄막 사격을 가했다. 포병은 그때까지 보병의 엄호만을 맡았기에 기동성이 낮은 부대였으나, 프랑스군은 기동성을 높여 독립된 부대로 편성하였다. 나폴레옹은 포탄의 사이즈를 표준화하여 포병 부대 간의 융통성을 쉽게 하였다.

병참은 아직 철도가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각국의 군은 현지 조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군은 인구밀도가 높은 중부 유럽에서 손쉽게 조달하여 높은 기동성을 발휘하였으나, 인구가 희박한 러시아나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동력이 둔화되었다. 원거리 사이의 통신에는 수신호 통신이 도입되고, 전쟁 기간 내내 사용되었다. 열기구를 이용한 공중정찰이 1794년 6월 26일 블류스 전투에서 처음으로 실용화되었다.

나폴레옹의 전술[편집]

나폴레옹은 교묘한 전략적 기동에 의해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것이 특기였다. “최고의 군대는 싸우는 부대보다는 빨리 걷는 부대이다.”라고 말한 나폴레옹의 말처럼 “황제는 우리들의 다리로 승리를 얻었다.”라는 대륙군 병사들의 말처럼 이 사상이 나타났다. 카스틸리오네 전투에서 분산해서 진격하여 2배의 병력을 가진 오스트리아군의 기선을 제압한 기동을 하여 각개격파 했다. 울름 전투에서는 적 주력의 측면에서 배후로 크게 기동하여 오스트리아군 주력을 포위해 항복으로 몰아넣었다. 전투에서는 나폴레옹은 아군 일부를 적 주력의 공격을 상대하고, 그 사이 주력을 이끌고 적의 약점을 파고드는 작전을 특기로 삼았다. 아우스터리츠 전투프리틀란트 전투가 그 성공의 예라고 말할 수 있다.

참고 및 참조 문헌[편집]

  • 역사군상시리즈 제48권 《나폴레옹:전쟁편》 학연사. ISBN 4-05-601362-4

관련 항목[편집]

주석[편집]

  1. 윤선자,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사(2006, 초판) 296쪽 ISBN 978-89-368-0352-0 "나폴레옹의 야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804년 유럽 군주국들이 영국을 중심으로 제3차 대 프랑스 동맹을 맺으면서부터였다. 그 동맹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 전쟁이 시작되었다."
  2. 조르주 뒤비 (2006). 《지도로 보는 세계사》, 채인택 옮김, 생각의 나무, 75쪽. ISBN 89-8498-618-6 “오스트리아-프로이센의 공격은 1792년9월20일 발미에서 중단되지만, 1793년 혁명의 좌경화(루이 16세의 처형)와 혁명군의 벨기에 침투에 따라 대불동맹이 결성된다. 사방의 공격과 방데에서의 반혁명운동, 혁명주체세력 내부의 분쟁을 거치며 출현한 새로운 공화국은 1793년 여름부터 공포정치를 단행하고 모든 정치적 · 경제적 · 군사적 역량을 동원하여 일련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