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이라크 침공
| 2003년 이라크 침공 | |||
바그다드 폭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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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짜 | 2003년 3월 20일 ~ 2003년 5월 1일(공식적으로는 2011년 12월 1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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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소 | 중동의 이라크 | ||
| 결과 | 연합군의 승리. 그러나 2011년 12월 15일 공식 종전을 선언하기 전까지 이라크 각지에서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시아파와 수니파의 테러가 끊이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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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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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이라크 침공(영어: 2003 invasion of Iraq, 아랍어: الغزو الأمريكي للعراق)은 2003년 3월 20일 미군과 영국군이 합동으로 이라크를 침공한 사건으로, 이로 인해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였다.
2003년 4월 9일에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를 함락하게 되었고 같은 해 5월 1일에 끝났다.(공식적으로는 미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2011년 12월 15일 이라크 전쟁이 끝났다고 공식 선언하였다.)
목차 |
침공의 근거 [편집]
- 이라크는 과거 대량 살상 무기의 보유를 밝힌바 있고, 여전히 그 무기를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서 세계의 안보 환경을 위협하고 있다.
- 독재자 사담 후세인은 국내에서 쿠르드인을 탄압하는 등 많은 압정을 실시하고 있다.
- 거듭되는 유엔 사찰의 방해 때문에, 대량 살상 무기의 폐기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 거듭되는 사찰 방해 때문에, 걸프 전쟁의 정전 결의인 유엔 안보리 결의 687이 찢어지고 있다.
- 유엔 안보리 결의 1154와 "앞으로의 어떠한 안보리 결의 위반도, 이라크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결과를 부른다."고 하는, 걸프 전쟁 정전 협정(위의 687) 파기 조건의 결의, 즉 마지막 경고 결의가 진행 중이었다.
대체로 위와 같은 까닭으로 이라크를 중동의 위협이라고 단정하고, 이라크의 무장 해제를 목적으로 한 무력행사라고 주장하여, 이라크를 침공했다. 프랑스, 덴마크, 독일, 뉴질랜드, 러시아, 스페인 등은 전쟁을 시작한다면 1441 이외로 새로운 안보리 결의를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미국과 영국 및 동맹국은 그러한 필요가 없음을 밝히고 위의 까닭에만 기초를 두어 전쟁을 단행했다.
또, 미국과 영국 측이 승전을 선포한 뒤의 2004년 10월, 미국이 파견한 조사단이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마지막 보고를 제출하였다. 전쟁을 시작한 근거가 된 대량 살상 무기의 정보의 신빙성도 희박한 것이었던 것이 밝혀져 이 전쟁의 정당성이 크게 흔들리는 결과를 낳았다.
여러 나라의 반응 [편집]
- 대한민국은 3월 21일, 600 명 이내의 건설 공병 지원단과 100명 이내의 의료 지원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 뒤 의회의 반대로, 여당이 분열되는 등으로 인해 파견 실현이 불투명했다. 4월 2일 국회 연설로, 노무현 대통령은 다시 파병의 승인을 의회에 요청했다.
-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전 수상은 정부 성명으로 미국의 무력 행사를 지지했다.
-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수상은 기자 회견에서 "미국의 무력행사를 이해하며 지지한다"고 표명했다.
- 오스트레일리아는 공군의 전투 공격기, 해군의 프리게이트, 특수부대를 파견했다.
- 필리핀은 지지했다. 중국, 러시아, 유럽 연합, 아랍 연맹은 비난했다.
- 이스라엘은 이라크로부터의 미사일 공격에 대해 즉시 보복하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국내에서는 비상사태 체제에 들어가, 생물, 화학 병기를 준비했다.
- 이라크 정부는 이 싸움을 성전(jihad)이라고 했다.
- 국제 연합의 코피 아난 전 사무총장은 강한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 미국 국내에서는 비상 용품, 권총, 라이플, 산탄총의 매상이 급증했다. 또 미국 공군은 이라크에 F-117 나이트호크를 파견시켰다.
침공 결과 [편집]
징병제로 100여만 명이 넘는 이라크군은 수적 우세임에도 불구하고 미군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했으며 패배 이유중에서는 이라크병사들의 군기는 엉망인 것이 큰 이유였다. 2006년 결국 후세인의 두 아들인 우다이 후세인과 쿠사이 후세인이 열화우라늄탄에 맞아 숨을 거두고[2] 이후 후세인은 미군의 체포로 인하여 종전되었다. 미군은 후세인 독재세력의 지지기반을 와해시킴으로써 그동안 유지되던 이라크 내 치안이 와해되었으며 이로 인해 보복살해 등 종파분쟁이 발생하고 치안부재로 인한 무장세력의 형성과 이들의 저항으로 미군 수천 명이 전사하는 결과를 낳았다. 뒤늦게 부족한 지상군을 증원하고 이라크 경찰과 군을 재건하여 미군 전사자 수가 크게 줄고 안정을 되찾아 갔으나 미군이 철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7년이 지난 2010년 8월 20일. 모든 전투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 2011년 12월 15일 미국에서 공식으로 종전을 선언하였으며 같은해 12월 18일 미군은 이라크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더 보기 [편집]
주석 [편집]
- ↑ '2011년 철수국과 2003년 철수국'의 문단은 위키백과 영어판을 참조하였다.
- ↑ Udai and Qusay Post Morte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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